2024년 5월 17일 (금)
(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순교자 영성을 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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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4-09-24 ㅣ No.366

[레지오 영성] ‘순교자 영성’을 살려면



‘얼굴만 봐도 짜증나는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할 때도 있고, 특히나 잘난 척하는 직장 상사를 볼 때면 속이 터지고, 마음속에서 욱하는 것이 올라오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가기 싫은 자리에 가서 앉아있어야 하고,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며 마음에서는 피눈물이 나는데도, 싫은 표정을 짓지 못하고, 웃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고개를 숙이기 싫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고, 함께하기 싫은 자리에서 억지로 술도 먹고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마음에서는 다 싫다고 말하고 싶어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딸린 식구가 있어서, 그리고 돈을 벌어야 해서 이 모든 것을 참아 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 신앙인이기에 ‘기쁘게, 웃으면서, 타인에게 늘 친절하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살아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 자신을 되돌아보면 신앙생활은 버겁고 힘에 부칩니다. 때로는 열심하지 않은 내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성당에 갈 때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 ‘어떻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성당 문밖을 나가면 세상 안에 허덕이면서 살아갑니다.

2014년 초입부터 한국에 교황님이 방문한다고, 시복식이 있다고 합니다. 사실 신자들을 만나면 대부분은 누가 시복을 받는지 그 이름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아니, 신자들뿐만 아니라, 성직자와 수도자들조차 시복을 받는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 순교자들의 삶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저는 예전엔 막연하게 순교자라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 특히나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정도로 신앙에 열심한 사람’만을 생각했었습니다. 도저히 나 같은 범인(凡人)은 다다를 수 없는 ‘하늘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순교자들은 왠지 머리 뒤에는 후광이 번뜩이고,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머나먼 곳에 있으며,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고통과 번민 속에서도 항상 주님에게로 향해서 삶을 오롯이 살아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태보 베드로의 회심

이런 생각 때문인지는 몰라도 ‘순교자의 영성을 살라’고, 또는 ‘신앙의 선조들처럼 살아가라’는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해지면서 ‘과연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난 아마도 못 살 거야! 순교자들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렇게 살아가라면, 아마도 나는 그렇게 살기 전에 내 복장이 터져서 죽을 거야!’란 생각을 가졌습니다. 신태보 베드로라는 인물을 알기 전에는 말이죠!

신태보 베드로는 1784년 한국에 천주교가 전래되고, 1790년경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신태보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서 “나는 5년 전부터 교우였으나 별로 열심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요즘에 말하는 ‘나이롱 신자’, ‘고무줄 신자’와 비슷한 신앙생활을 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듣고는 신부도 만나고 성사도 보고 ‘하늘의 빵, 천상음식’이라는 성체도 모시고 싶었습니다. 너무나 궁금했거든요! 하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그를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795년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들어오고, 불과 6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한영익이라는 새 영세자가 주문모 신부를 조정에 팔아먹고,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했던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신자들은 그리 열심하지도 않은 신태보 베드로를 주문모 신부님에게 소개해 줄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신태보 베드로가 자기와 친한 어떤 신자 집에서 같이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신자에게 신부를 보고 싶다고 조르고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자 그 신자가 신태보에게 작은 버선 한 켤레를 내밀면서 신으라고 했습니다. 신태보가 보기에는 어린이조차도 신을 수 없을 것 같이 작은 버선이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장난도 심하구먼, 왜 어른에게 어린이 버선을 신으라는 거야!”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천주교는 아주 공평한 것이어서 거기에는 어른도 아이도, 양반도 상놈도 없네! 아주 부드럽고 탄력이 있어서 큰 발이나 작은 발에도 다 맞는 이 버선과도 비슷한 것일세! 자네가 신부를 보고 싶다고 하지만, 신앙에 열심히만 하면 신부를 만나게 될 걸세!”

친구가 신태보 앞에 내밀었던 것은 서양에서 온 양말이었습니다. 마음대로 늘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신태보 베드로는 스스로가 부끄러웠습니다. 차갑지도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반성이 되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양반입네하면서, 상놈신자들을 멀리하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신자의 의무는 소홀히 하던 자신의 모습, 신앙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또한 타인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해서 신부를 찾던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늘 새로운 신앙생활

이후 신태보 베드로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님이 자수하여 순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각지에 퍼져있는 신자들을 위해, 스스로 행상노릇을 하면서 여기저기 떠돌면서 살았고, 그 와중에도 ‘성직자 청원 운동’을 위한 경비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1836년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그 자신 평생의 꿈인 신부를 만나 고백성사와 성체성사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1827년 정해박해 때 붙잡혀 12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70세 되던 1839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신태보는 정작 세상에서는 신부님을 만나지 못했지만, 지금 천국에서는 아마도 원 없이 만나고 계실 겁니다. ‘나이롱 신자’, ‘고무줄 신자’였던 신태보가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완전히 돌아간 것 같지만, 사실 그의 삶을 보면 그는 어렵고 힘들 때면 ‘신앙에 대한 회의’도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싶은 유혹’에도 빠지기도 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유혹에 빠질 수도, 때로는 신앙에 대해 회의를 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우리나라의 순교자들 역시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삶에 힘겨워하면서 신앙생활이 약해질 때도 있었고, 신앙생활을 떠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회개하는 마음’, ‘다시 하느님께 돌아가는 마음’을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늘 새로운 마음으로 신앙을 새롭게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어쩌면 옛날의 신앙인, 순교자들과 다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들과는 다르게 우리는 복잡한 세상에서 예전과는 다른 유혹들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순교자 영성’을 살자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4년 8월호, 이
찬우 다두(신부, 대구대교구 역사박물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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