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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보는 교회사33-36: 가톨릭 교회의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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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3 ㅣ No.187

[새로 보는 교회사 33] 가톨릭 교회의 개혁 (1)

 

 

16세기까지 유럽은 단일사회였다. 이와 같이 단일사회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제도와 상업적 유통과 학문의 교류뿐만 아니라 신앙이 일치하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윤리와 관습 그리고 축제 따위가 같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회의 가르침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 유럽은 분열된다. 국경은 더욱 강화되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순전히 종교적인 이유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표면상으로 신앙의 불일치가 전쟁의 원인이었다.

 

종교의 차이가 불화의 원인처럼 보이는 현상은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북아일랜드를 지배하는 영국 국교도와 원주민인 가톨릭계 아일랜드 사람들 사이의 투쟁도 이러한 관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서로를 자기의 신앙으로 끌어들이려고 투쟁하는 것은 아니다. 그 원인은 오랜 역사적 관계에서 비롯한다. 영국이 아일랜드를 점령하고 합병하여 아직까지 일부를 지배하면서도 서로 동화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톨릭과 영국 국교라는 신앙의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북아일랜드의 독립과 북아일랜드를 포기할 수 없는 영국의 경제 요인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현상은 유럽을 크게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건이 생긴 원인은 무엇인가? 1500년 동안 믿어온 진리가 잘못된 탓일까 아니면 프로테스탄트에서 말하는 대로 가톨릭 교회의 구원방법이 틀렸기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면 교회의 제도 자체가 틀렸고 사제의 독신이 문제였던가? 가톨릭 교회가 그동안 잘못된 전통을 형성한 까닭인가?

 

이 모든 게 이유라고 한다면 지금은 가톨릭 교회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 이후에 유럽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들보다 몇 배 더 교세가 확장되었다. 사제의 독신제를 부정하고 수도생활을 부정한 뒤에 더 많은 수도회가 새로이 창설되었고 수도자가 몇 배로 늘어난 것을 보면 가톨릭 교회의 근본제도나 가르침, 생활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원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 교회는 다만 사람들의 단체로서 시대의 요구에 적절히 변화하고 잘못된 관행을 제때에 바로 잡아야 하는데, 그 시기가 늦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가 부를 축적하고 사회를 지배하고 살면서 가난과 겸손을 몸소 사신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교회의 쇄신운동이 좀더 빨리 일어나 안일하게 귀족적인 삶을 누리던 교회의 지도자들이 좀더 빨리 그리스도 제자로서 충실했더라면 16세기의 종교개혁이라는 커다란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초대교회를 지나 중세를 거치면서 이단이 없었거나 분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교회가 분열을 막아낼 대처능력이 있거나 정치상황이 이를 막아주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학문발전과 경제성장으로 삶의 질이 향상되었다. 또한 개인주의적 경향과 속세적인 삶이 일반화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국가 위주의 국민 정신이 생겨난 시점에서 가톨릭 교회는 이러한 변화에 대처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기치를 든 마르틴 루터를 평가하면서 어떤 학자는, 그는 사람들을 걱정하고 구원을 위해 무척 힘을 썼지만 좀 성급했던 영성주의자라는 말을 한다. 다시 말하면 좀더 나아가 교회쇄신을 위해 노력하고 그래서 교회가 쇄신되도록 할 수 있지 않았느냐 하는 바람의 표현인 것이다.

 

어찌 되었든 루터의 등장과 신앙의 분열 그리고 유럽의 분열은 가톨릭 교회가 전반에 걸쳐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천년 이상 사회를 지배하고 살면서 타습에 젖은 교회는 쇄신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해낸 것이 바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이다.

 

13세기 초에 네 차례의 라테라노 공의회를 통해서 교회가 교회의 자유를 확립하고 중세적인 교회를 완성했다면, 3세기 뒤에 다시 변화된 상황에 해답을 주는 공의회가 열렸으니 바로 트리엔트 공의회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두 가지 문제 즉 이론적인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교회의 제도와 생활에 관한 확실한 지침을 마련하였다. 성서만으로 신앙의 원천을 삼고 신앙만 가지면 구원된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구원관에 대해서, 성서와 함께 그리스도께로부터 유래한 거룩한 전통 역시 신앙의 원천이며 신앙과 함께 인간의 의지 표현인 공로가 필요하다고 선언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방법으로 7성사를 확인했다. 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의 주장을 반박한 것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진리를 다시 선언한 것이다.

 

다음엔 바로 가톨릭 교회의 폐단을 일소하는 개혁작업이 따랐다. 성직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 교육을 강화시켰으며, 이와 함께 주교들을 본래 직무로 환원시키는 회칙들과 신자생활을 위한 지침들을 마련하였고 전례도 규정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공의회를 소집하는 데만 10년이나 걸렸고 회의도 두 번이나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18년에 걸쳐 열린 가장 긴 공의회로 안팎으로 어려움이 컸던 공의회다. 동시에 어떤 공의회보다도 교회의 제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토의범위가 가장 넓었고 또 깊은 토의를 거친 뒤에 결정을 내렸다. 그 영향력이 가장 오래간 공의회였으니,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년)까지 교회를 유지시킨 지침들이 이때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공의회가 갈라져 나간 형제들을 가톨릭으로 복귀시키지는 못했으나 적절한 시기에 열려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 가톨릭 나라가 종교개혁의 여파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제 교회에는 확실한 지침을 마련하였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교리를 확립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개혁이 오히려 가톨릭 교회를 새롭게 태어나게 했고 더욱 확고하게 했으며 모든 문제에 적극적이게 했다고 한다.

 

이제 교회에 남은 과제는 쇄신을 통한 교회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는 일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위에서 개혁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위에서 개혁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개혁은 불가능한 것이다. 다행히 공의회 이후 훌륭하고 의지가 있는 교황들이 계승을 하면서 교황청과 주교직의 개혁을 적절히 아루어냈다. 교회의 일반적인 관습들이 쇄신되면서 훌륭한 성인들이 많이 나오고 영성의 변화를 이루고 특히 새로운 수도회가 많이 창설되어 프로테스탄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세계 포교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제까지는 유럽의 교회와 수도회 상황을 일반적으로 말하였다. 물론 나라별로 특수한 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말하기에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상황이 전혀 다르니, 이탈리아는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 모습이 거의 살아있는 반면에 독일은 이전의 가톨릭 교회 모습이 크게 바뀐다. 동시에 한 나라 안에서 유그노라고 하는 칼빈주의자와 전쟁을 한 프랑스의 상황 역시 이탈리아와 같을 수는 없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를 쇄신하는 데는 그 누구보다도 역시 수도자들의 역할이 컸다. 그것을 세 방향으로 크게 나누면, 아빌라의 데레사를 중심으로 한 관상생활과 로욜라의 이냐시오를 중심으로 한 문화사회 방면의 활동과 수도 사제회가 이끈 사도적, 자선적인 활동으로 나눌 수 있다. [경향잡지, 1996년 9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34] 가톨릭 교회의 개혁 (2)

 

 

관상 수도생활의 변화와 완덕으로 나아가려는 신비사상의 발전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의 공이 아주 크다. 이들은 기존의 가르멜회를 쇄신하고 관상수도회의 수도생활을 더욱 깊이 있게 하였다.

 

 

가르멜회의 역사

 

가르멜회는 창설자가 없다. 수도회의 명칭은 엘리야 예언자가 살던 동굴이 있는 가르멜 산에서 유래하는데, 팔레스티나에 있는 이 산에 3~4세기경부터 사막의 은둔자들처럼 혼자서 동굴이나 초막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자가들끼리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12세기경부터 순례자들과 십자군에 의해 서로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한곳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경당을 지어 성모님께 봉헌하고는 엘리야 예언자의 모범을 따르기로 하였다. 이때 예루살렘의 총대주교가 간단한 회칙을 만들어주었고 공동체 생활을 위하여 원장을 선출하였다. 그들은 세상에서 떨어진 수도원에서 관상기도 생활로 침묵과 가난한 삶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에 정착되는 수도원들은 탁발수도회로 분류된다.

 

1226년 호노리오 교황이 처음으로 규칙을 인준해 주었고 뒤에 여러 교황들이 가르멜회의 완화된 규칙을 인정하였다. 따라서 이전처럼 한적한 곳에 있는 수도원에서 은수자적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었고, 탁발수도회처럼 사목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위하여 그들은 옥스포트, 파리, 볼로냐 등지에 학문을 연구하는 집을 지었다.

 

가르멜 수도회는 첫째 관상생활과 형제애를 추구하면서 설교와 사목도 하였다. 영성에서는 성모님과 엘리야의 정신을 추구하면서 이름도 ‘가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수도회’로 하고 성모님을 주보로 모셨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가르멜회도 쇠퇴기에 이르러서는 완화된 규칙을 선호하는 공동체와 좀더 엄격하게 살려는 공동체로 분리된다. 이때 바로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와 십자가의 요한 성인이 가르멜회를 신비적인 관상생활을 하는 수도회로 개혁한다.

 

 

신비신학의 발전

 

라틴계 나라 곧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들이 교회를 개혁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더욱이 스페인은 루터가 나타나기 전부터 교회개혁에 앞장서고 있었다. 특히 잘 조직되고 능동적인 살라만카 대학을 중심으로 훌륭한 학자들을 배출함으로써 루터파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물론 유명한 스페인의 종교재판소의 이단 색출도 한몫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스페인에서는 신비주의가 성행하였다. 감성적이고 체험적이며 직접적인 종교심은 흔히 이단으로 흐르기 쉽다. 종교의 피상적인 관점만 취하면서 자신들의 감정에 치우치고 마귀적인 요소가 겹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향으로 이단적인 신비주의를 추종하는 비밀단체(Alumbrados)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스페인 사람들의 종교적인 성향에서 유발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이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의 위험에 대항하고 기도생활을 구체화하기 위한 정통 신비주의가 발달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비적인 체험과 관상생활의 발전을 바로 예수의 대 데레사 성녀가 높은 경지로 이끌어올린다. 신비신학적인 저술은 주로 기도로 나타나고 종교재판소는 이런 기도가 미신적인지 이단적인지를 면밀히 검토하는 작업을 하였다.

 

데레사 성녀의 “완덕의 길”이 나오기 전에도 이미 신비신학에 관한 많은 사람들의 저술이 있었다. 마드리드의 알퐁소(1485-1570년)나 오수나의 프란치스코(1492-1540년), 라레도의 베르나르디노(1482-1540년) 등이 침묵 속의 기도 등과 같은 신비적인 체험에 관한 저술을 하였다. 1535년에 저술한 베르나르디노 신부의 “시온산에 올라서”라는 책에 대한 데레사 성녀의 표현을 보면 그의 영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데레사 성녀는 “이 책을 읽고 나는 내 기도의 방향을 알 수 있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에서 나는 하느님과 영혼 일치의 방법을 볼 수 있었는데, 나는 그 일치를 내 안에서 느끼고 있었고 여러 번 표현한 적도 있었습니다.”(STORIA DELLA CHIESA, Vol. VIII. Ed., S.A.I.E.P. 266)라고 한다.

 

신비체험을 깊이 있게 하고 그것을 표현한 데레사 성녀 이전에 관상기도에 관한 연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들 가운데는 수도자와 사제들도 있었지만 살체도의 프란치스코같이 결혼한 사람들도 있었다.

 

 

신비주의 수도영성

 

스페인에서 데레사 성녀 이전에 더욱 심오한 영성으로 수도생활을 할 것을 요구하고 수도회를 개혁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알칸타라의 베드로는 자신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었을 뿐 아니라, 1560년경부터 데레사 성녀와 친분을 가지면서 가르멜회를 개혁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은 사람이다. 그는 프란치스코회 사람으로 스페인 왕과 교황 바오로 4세의 후원을 입어 프란치스코회를 옷에서부터, 공동체가 가난을 실천하는 데까지 더욱 영적인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러한 개혁은 스페인과 포르투갈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와 필리핀에까지 그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개혁의 바탕에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체험하는 영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육체와 물질에 대해서도 초자연적인 관점으로 살아가라는 요구가 담겨있다.

 

“기도와 묵상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그는 하느님의 뜻을 기쁘고 완전하게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일반 신자들이 영성의 깊이를 가지도록 설교하였다. 피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친교할 수 있는 영혼의 깊은 기도생활과 복음에 근거한 윤리생활을 요구한 것이다. 내적 생활의 강조는 데레사 성녀가 수없이 반복한 “수도복이 수도자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l’abito non fa il monaco)”라는 정신이었다.

 

도미니코회 출신으로는 그라나다의 루이지가 1554년에 일반 신자들을 대상으로 “기도에 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기도하는 방법을 여섯 단계로 나누고 있는데, ‘주제 준비’ ‘주제를 위한 독서’ ‘주제에 대한 묵상’ ‘감사의 기도’ ‘봉헌’ ‘청원’ 등이다. 여기서 그는 정신적인 기도는 다른 의무를 다 관면할 만한 것이라고 하여 종교재판소의 지적을 받고는 1559년에 수정하여 새로이 책을 출간하였다.

 

그의 관상기도 방법은 주제를 준비하고 주제를 위한 독서를 천천히 하면서 독서를 통해 묵상에 빠져들고 계속 주제에 머무르는 묵상기도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람의 지성과 의지와 기억이 한꺼번에 작용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 현존 앞에 머무르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수의 성녀 대 데레사

 

성녀는 1515년 3월 28일에 출생하여 1582년 10월 4일에 사망하였다. 데레사 성녀가 살아 있는 동안 온 스페인 사람들은 그녀를 알았다. 또 가르멜회의 개혁에 대해서 찬성하는 편과 반대하는 편이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유명세를 치르기도 하였지만, 데레사 성녀는 가장 스페인적이면서도 전세계적인 특성을 가진 성인이다. 프로테스탄트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본질을 찾아 들어감으로써 가톨릭 교회 일치에 큰 기여를 한 분이다.

 

성녀는 20세 되던 때에 강생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아빌라의 가르멜회는 부패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너무 많은 수도자가 1432년에 에우제니오 4세 교황이 인가한 완화된 규칙을 따랐기 때문에 공동체의 분위기가 느슨하였다. 봉쇄구역에도 외부사람들의 방문을 허용하는 등 가르멜회의 엄격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데레사 성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서적을 즐겨 읽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다. 훌륭한 신비주의 학자들의 영향으로 완덕을 향한 갈망이 생성되어 있던 성녀는 유명한 사람들의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수련”도 데레사 성녀에게 영향을 준 책 가운데 하나다. 성녀는 영성 서적을 탐독하면서 하느님 안에 머물 줄 알았고, 상상이나 감정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신비주의를 자신 안에 종합할 줄 알았다. 긍정적이고 확실한 사고를 가진 여성으로서 교리의 진리와 가톨릭 신심을 융합할 줄 알았다.

 

성녀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1537년과 1538년 사이의 겨울에 심한 열병에 걸려서 수도원이 아닌 시골에서 요양을 하였다. 요양하는 3년 동안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더욱 깊은 일치를 체험하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맡길 줄 알게 되었다. 병이 나은 뒤에는 그 체험을 살려서 영적 수련을 더한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며 대화를 즐겼다. 이렇게 1542년부터 1543년 사이에 느슨한 생활을 하던 데레사 성녀는 하느님과 세상 사이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강하게 체험하였고 겸손을 알게 되면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체험하게 되었다.

 

1560년 관상기도를 깊이 체험할 즈음, 옆에 늘 있던 조카가 더욱 엄격하게 은둔의 삶과 관상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자는 제안을 하여 수도회 장상들에게 이 제안을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당시 프란치스코회를 개혁한 알칸타라의 베드로와 예수회원인 보르지아와 도미니코회의 루이지의 후원으로 1562년 8월 24일에 개혁된 가르멜 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이 첫 수도원을 요셉 성인에게 봉헌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 47세였고, 이후 열여섯 개의 수도원을 더 창설하였다. 이들 새로운 여자 가르멜회를 이전과 구분하여 ‘맨발의 가르멜회’라고 하였고 데레사 성녀와 뜻을 같이한 십자가의 요한 성인은 ‘맨발의 남자 가르멜회’를 창립하여 지도하였다.

 

성녀는 사망한 지 40년 뒤 로욜라의 이냐시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함께 1622년에 시성되었고 1970년 바오로 6세는 데레사 성녀를 ‘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데레사 성녀는 관상생활에 대한 깊이 있는 체험과 많은 저술활동을 통해서 수도자들이 추구해야 하는 이상과 걸어야 할 ‘완덕의 길’을 제시하였다. 루터가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의 두려움에서 구원의 길을 찾는 방법 때문에 교회에서 분리되었다고 한다면, 데레사 성녀는 인간의 의지와 신적 은총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완덕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었다. 따라서 수도자들이 노력해야 하는 방향이 설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녀는 완덕에 이르는 기도의 상태도 단계가 있다고 한다. 그 단계를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으로 비유하고 있다. “정원에 물을 주는 방법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힘든 일은 샘에서 물을 긷는 것이고, 좀더 쉬운 일은 양수기를 통해 배수관으로 물을 주는 것이고, 그 다음은 강이나 시냇물을 끌어들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이면서 땅을 흠뻑 적실 수 있고 자주 물을 줄 필요가 없으며 정원사가 할 일이 별로 없는 마지막 방법은 바로 충분히 내린 비입니다. 이 경우에 주님께서 우리를 적셔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수고도 느끼지 않습니다”(상게, pp. 282-283). [경향잡지, 1996년 10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35] 가톨릭 교회의 개혁 (3) 예수회의 이냐시오

 

 

교회의 쇄신이 필요한 시점에 다행스럽게도 활동적인 새로운 수도회들이 창설되었다. 모든 새로운 수도회가 교회개혁에 큰 몫을 하였지만 꼭 필요한 시기에 나타나 가장 중요한 몫을 담당한 수도회가 예수회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만한 수도영성과 수련방법과 활동정신으로 교육, 사목, 선교, 학문 등 모든 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반대로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또한 반대자들이 생기고 많은 분쟁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어떤 연유에서든 다른 수도회의 표적이 되기도 하였지만, 정치사회에서도 각국의 행정가들의 미움을 사서 큰 박해도 받은 수도회였다. 이러한 예수회의 역사를 알아보자.

 

 

로욜라의 이냐시오(Ignatius von Loyola, 1491-1556년)

 

이냐시오 성인은 바스크 지방의 귀족집안에서 태어났다. 열두 명의 형제 가운데 여덟 번째였던 성인은 기사가 되는 수업을 받고 아라곤의 재무담당관 집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된다. 당시 귀족의 자제들이 사는 평범한 삶이었다. 새롭게 주인으로 맞이 한 나바라의 공작은 그를 프랑스군과 싸우는 팜플로나(Pamplona) 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우게 했다. 1521년 5월 20일, 이 전투에서 그는 오른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고 고향으로 돌아와 치료를 받게 되었다. 긴 병상생활 속에서 그는 보라지네의 자콥이 쓴 “성인열전”과 루돌프의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책들을 여러 번 탐독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지금껏 알아왔던 세속적인 삶과 성인들의 모범적인 삶이 다르다는 것과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신비를 느꼈다. 그러나 결단은 쉽지 않았다. 성인들의 삶을 따르는 길과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 사이에서 갈등을 하던 그는 드디어 세상의 주인보다는 하느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로 결정하고 순례의 길을 떠난다.

 

 

순례의 길

 

1522년 3월 24일에 몬세라트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에 도착한 이냐시오는 자신의 첫 번째 영성지도자로 생각하는 사노네(Chanones)한테 총고백을 하고 성모상 앞에서 밤샘기도를 한다. 새벽에 기도를 마친 그는 자신의 장검과 단검을 제대 아래 두고 말[馬]은 수도원에 주고 거지옷으로 갈아입고 순례자의 지팡이를 짚고 3킬로미터쯤 떨어진 만레사(Manresa)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는 병원의 환자를 돌보면서 회개의 삶을 살았으며 자주 몬세라트에 가서 영적지도를 받고는 했다. 이때 사노네는 치스네로스(Cisneros)의 수련서를 주고 영성수련을 하게 했다.

 

그의 삶은 매우 엄격했다. 빵을 구걸하면서 단식생활을 하는 이냐시오는 회개와 보속과 기도로써 살았다. 차츰 그를 알아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의 동굴을 찾아 자신의 은둔처로 삼았다.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고 살았으므로 큰 병에 걸렸던 것이 이상하지 않다. 육체적인 큰 고통을 겪으면서 정신적으로는 모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육체적인 극기와 영적 성숙의 관계가 정립되어 뒷날 그가 세우는 예수회의 지침이 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의 작은 지침서 “영성수련”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번에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을 수련하면서 조금씩 적어나간 것이다.

 

이냐시오는 만레사에서도 이미 유명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이냐시오의 가르침을 받기 원했다. 1523년 2월 이냐시오는 만레사를 떠난다. 오로지 예수님의 생애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는 예수님이 사셨던 곳을 순례하기로 결심했다.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성지관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려다가 오히려 반대를 받고는 스페인으로 돌아와서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학업에 열중하기로 했다.

 

 

학문연구

 

그는 서른세 살에 처음으로 바르셀로나에 머물면서 꼬마들과 함께 초급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2년 뒤에 선생들의 조언으로 알칼라 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도 자신의 영성수련은 등한히 하지 않았다. 자연히 그의 주변에 젊은 학생들이 따르게 되었다. 당시 스페인은 이단적인 신비가들 때문에 시끄러웠는데 공부하는 늙은 학생이 강론도 하고 피정지도도 하게 되니 고발을 당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였다. 종교재판소에 잡혀가서 문초를 당하고 그의 “영성수련”도 심사를 받았다. 단죄는 받지 않았지만 설교를 한다든지 교리적인 것에 대해서 4년 동안 신학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풀려났다. 살라만카로 옮겨가서 학업을 계속하려 했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다시 종교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풀려난 이냐시오는 모든 학문의 중심지인 파리로 옮긴다.

 

1528년 2월 2일에 파리에 도착해서 이미 칼빈과 에라스무스가 교육을 받은 몽테귀 학원에 머물며 학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학업보다도 사는 것이 급했다. 구걸을 하며 지내다가 스페인령의 네덜란드 지방의 부자상인들에게 학비를 간청하러 갔다. 여기서 아주 열성적인 한 상인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 상인은, 이냐시오는 성인이며 수도회를 창설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를 도와주었다.

 

1529년 10월부터 바르바라 기숙사로 옮긴 뒤에 이냐시오는 자기보다 열다섯 살이나 적으면서 학교에서는 선배인 베드로 파브르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등과 한 방에서 지내게 되었다. 파브르와 하비에르는 이냐시오한테 철학을 가르쳐주고 성인은 그들에게 영성수련을 시켰다. 결과적으로 크게 변한 두 사람은 성인과 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런 활동이 다시 소문이 나면서 두 명의 대학 교수 앞에서 교리적으로 틀린 점이 없음을 증명해야 하는 사건도 있었다. 학업은 그 뒤로 순조롭게 진행이 되어 1533년에 철학을 끝내고 신학과에 입학하였을 때, 첫제자인 파브르는 1534년 7월 22일에 사제품을 받았다.

 

 

수도회 창설

 

베드로 파브르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외에도 야고보 라이네스, 알퐁소 살메론, 니콜라오 보바딜라와 포르투갈 사람 로드리게즈 아제네도가 이냐시오를 따르는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아들은 스페인의 선교열에 고무되어 성지로 가서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고자 하는 열의를 모았다. 따라서 이때에 파리에서는 교회에 반기를 드는 루터 추종자들이 말썽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이들은 그 일에 별 상관을 하지 않았다. 처음 생각대로 이방인에 대한 선교열로 가득할 뿐이었다.

 

첫서원은 몽마르트(Montmartre) 성당에서 1534년 8월 15일에 가졌다. 여기서 가난과 정결과 영혼구원을 위해 일생을 바치는데, 가능하다면 예루살렘에서 활동을 하되 교황이 바라는 곳에 가겠다고 서원했다. 이때는 기존 수도원의 장상에 대한 순명에는 서원하지 않았고 회의 창립도 아직 구체화하지 않았다.

 

이냐시오는 병이 깊어져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었다. 병든 이냐시오에게 고향의 공기가 필요하다는 의사들의 조언으로 그는 로욜라 성(城)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몸이 조금 낫자 그는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이탈리아의 볼로냐로 공부하러 떠났다. 그러나 병이 재발되어서 그는 베네치아에 가서 다른 동료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한편 파브르가 이냐시오 대신에 동료들과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당시 프랑스 왕과 독일 황제가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장을 피해 길을 독일 쪽으로 잡았다. 이들은 길을 가는 동안에 가톨릭 교회에 적대적인 사람들을 만났고 또 여러 위험을 겪으면서도 용감하게 그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어떤 지방에서는 가톨릭 신앙인들이 큰 위험 속에 있는 것을 보았으나 원래의 선교목적을 버리지는 않았다. 오십여 일의 여행 뒤에 1537년초에 베네치아에서 파브르 일행과 이냐시오는 만났다. 그들은 또다시 예루살렘으로 떠나려 했지만 1523년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냉담한 반응이 생각나서 공적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을 필요를 느끼게 된다. 그 사이 이냐시오는 1537년 6월 24일에 사제가 아니었던 동료들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미사에 대해서 경외심을 갖고 있던 이냐시오는 첫미사를 18개월 동안 준비했다. 이때부터 이들은 자신들을 ‘예수의 군대’라고 하기 시작했다. 즉 이 세상에서 누구도 상전으로 모시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군사로 사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냐시오는 라네즈와 파브르와 함께 1538년 성탄절 로마 성모설지전 대성당에서 첫미사를 올리고 각자의 임무에 들어갔다. 이냐시오는 영성수련을 시키고 다른 두 사람은 대학교수가 되었다. 자연히 그들의 임무가 청년교육이었다.

 

1538년 교황의 허가를 얻기로 하고 이냐시오는 동료들과 로마로 떠났다. 로마에 가기 전에는 당시 영향력 있는 추기경들이 그들을 반대할까 걱정을 했지만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오히려 추기경들이 그들 일행을 반갑게 맞아하고 교황알현을 주선해 주었다. 교황은 그들의 가난한 모습을 보고 그들을 수도자로 대우했고 사제품을 받을 수 있는 관면을 주었다. 그해 사순절에 모든 동료들을 로마에 불러모아 그들이 성당이나 병원이나 수도원 등에서 설교하고 성사를 줄 수 있는 허가를 얻어내었다. 이들이 활동하자마자 사람들은 이들 동료들에게 모여와서 많은 변화를 느끼고 돌아갔다. 따라서 처음부터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에 또한 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당시 로마는 종교개혁이라는 큰 진통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수도원의 인가를 주저하였다. 인가심사가 3개월이나 걸렸다. 예수회는 1540년 9월 27일에 지켜야 할 사항들과 함께 인가를 받았다. 수도회에 들어오거나 선교지역에 갈 때 그들은 항상 교황의 허가를 얻어야 하였다. 회원의 중요 임무는 하느님의 계명을 설교하고 아이들한테나 모든 사람들한테 교회의 기초적인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필요한 직무는 장상에게서 받을 것이며 장소를 옮기거나 직무를 바꾸기를 원하는 이는 먼저 장상에게 말하고 교황에게 보고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회는 처음부터 교황의 뜻대로 움직이는 수도회라는 것이다. 직무의 방향도 세 가지로 정해졌다. 첫째는 그들이 원하는 이방인들의 선교에 나서는 것이고 두 번째는 독일이나 북유럽, 영국 같은 교회에서 갈라져 나간 지역에 가서 그들과 투쟁하는 일이다. 세 번째는 신자들의 세계 즉 이탈리아나 스페인, 프랑스 등지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예수회가 종교개혁에 적절히 대처함으로써 갈라져 나간 지역을 많이 회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 때문에 처음부터 반루터, 반칼빈 운동이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실제로 예수회는 ‘하느님의 영광’이라는 대전제 외에는 특정 목적이 있지 않았다. 따라서 예수회는 유럽 안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인도나 중국 심지어는 초창기 동료들은 일본에까지 선교를 떠났다.

 

다음에는 그들의 성공과 좌절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겠다. [경향잡지, 1996년 11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36] 가톨릭 교회의 개혁 (4)

 

 

예수회의 발전

 

교황 바오로 3세는 1540년 9월에 예수회를 인가했다. 그러나 수도회 규칙은 1550년경에 마련되었는데, 이는 이냐시오 성인이 오랫동안 생각하고 기도한 끝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회는 기존의 수도회와는 다른 규칙을 적용했다. 먼저 특별한 수도복을 착용하지 않았고 공동 기도시간을 강조하지도 않았으며, 수도자들은 3대 서원 외에 제4의 서원으로 교황에게 절대순명을 하였다. 조직은 완전한 중앙집권식이었다. 총장은 종신직으로, 총장 선출은 죽은 전임 총장의 장례 때에 전체 회의에서 선출하였다. 예수회의 총장은 모든 관구장과 지역 장상을 임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회의 또 다른 특징은 학문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적어도 7년은 철학과 신학 공부를 해야 했고, 종선서원을 위해서는 10년을 예수회 공동체에서 지내야 했다. 이토록 학문연구에 열중한 이유는 회원들의 영적 완성만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모든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직으로 예수회는 거의 폭발적인 발전을 하였다. 회원수에서뿐만 아니라 지역적으로도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 크게 발전을 한 것이다. 1556년 창설자 이냐시오 성인이 사망할 때 이미 12개 관구에 백 개가 넘는 지부와 천 명의 회원을 둔 큰 수도회로 성장하였다.

 

예수회 회원들은 트리엔트 공의회를 비롯 모든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에 적극 대적함으로써 가톨릭 교회도 이제 더 이상 중세의 소극적인 교회가 아니라 활동적인 교회로 거듭나게 하였다. 1597년에 사망한 예수회의 카니시오 성인은 독일 교회를 쇄신하는데 큰 자취를 남겼다. 예수회 회원들은 사목활동뿐 아니라 이방인 선교에도 적극적이어서 브라질에서부터 일본에까지 지부를 두는 등 전세계에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예수회는 자선사업이나 교육사업, 교회 학문 발전에까지 최고의 권위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렇게 예수회는 회원들이, 군주를 가르치는 교육자로서 또한 고백사제로서 정치분야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가장 큰 수도회로 발전을 하였다. 1616년에는 37개 관구에 436개의 지부를 두었으며 회원은 1만 3천 112명이 되었다.

 

 

예수회를 반대하는 사람들

 

그러나 예수회를 처음부터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영향력이 커질수록 반대자들의 저항도 더욱 거세어졌다. 많은 문제에서 부딪치고 논쟁을 벌였지만 승리자는 항상 예수회였다. 이렇게 예수회를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중세부터 내려오는 전통의 모든 수도회가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회는 사회와 교회를 위해 군사적인 열정으로 활동하는 것을 중요시함으로써 이전의 관상생활을 경시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 이유로 예수회를 반대하는 경우가 많았으니, 베네딕토회의 영성이 예수회의 실천적인 영성으로 대체된 것같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활동에는 성과를 따지게 되고 대중의 개종을 원하면서 질보다는 양을 따지게 마련이었다.

 

예수회가 가톨릭 신심을 대중적이게 함으로써 수도생활을 해치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고, 한편으로는 윤리적으로 또 은총문제에서 너무 가벼운 방임주의자로 낙인찍히게 했다. 어쨌든 예수회는 18세기에 모든 나라에서 해체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어떤 이유로 예수회가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했을까 하는 문제는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자신들을 미워하는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고, 반대자들은 이성적이었다기보다는 감정적인 미움이나 질투로 대응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절대권력자들의 고백사제로 교육자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이제는 왕도 대중의 감정을 고려해야 하는 계몽주의 시대가 됨으로써 더 이상 자기방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인가? 어쨌든 계몽사상에 물든 군주 주변의 행정관들로 인해서 예수회는 해체되고 박해받고 죽기까지 하였다.

 

 

프랑스 교회와 갈등하는 예수회

 

17세기부터 프랑스 교회는 두 가지 경향으로 예수회와 대적했다. 하나는 프랑스 교회의 독자성을 고집하고 교황의 영향력을 배제하여 프랑스 교회의 자유를 부르짖는 갈리카니즘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극단적 윤리와 영성의 엄격성을 주장하는 얀세니즘이었다. 특히 얀세니즘은 지나친 회개와 엄격한 성사생활을 강조하여 사목적 배려를 하는 예수회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예를 들어 예수회는 잦은 영성체를 주장한 반면, 얀세니스타들은 영성체는 회개가 완전히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선물로 여겨 함부로 영성체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논쟁은 세기에 거쳐 일어났으며 당시의 학자이며 문필가인 파스칼(Pascal)이 대중적인 문체로 예수회를 공격하고 풍자함으로써 예수회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결과는 예수회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논쟁의 여파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이런 얀세니스타들이 의회의 갈리카니즘에 물든 사람들과 손을 잡자 예수회는 프랑스의 국왕 이외에는 누구한테서도 보호를 받지 못했다.

 

1715년에 루이 14세가 사망하자 상황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왕궁에서도 반(反)예수회 사람들이 늘어나 1750년경에는 예수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런 이유는 일반적으로 논할 수도 있겠지만 간략히 설명한다면 이렇다고 할 수 있다. 예수회는 프랑스에서 빠른 시기에 급격히 성장하였다. 또한 학문을 비롯하여 정치계 교육계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이것은 예수회를 자만심에 빠지게 하는 한편 동시에 주변의 미움과 질투를 받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어쨌든 예수회는 얀세니즘을 극복했지만 끈질긴 얀세니스타들의 공격으로 수도회 자체가 해체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중국에서 밀어난 전례논쟁

 

중국에서 일어난 전례논쟁 역시 예수회에 큰 타격을 입혔다. 예수회의 마테오 리치 신부는 중국에서 훌륭하게 선교를 하였다. 중국 황실에서도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고 유교를 그리스도교 선교의 바탕으로 삼아 조상숭배를 이단시하지 않았다. 상류층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가 전파되면서 선교가 성공적이라고 할 즈음에 울바노 8세 교황이 1633년부터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에도 중국선교를 허락하였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 도착한 두 회 선교사들이 예수회와 다른 방법으로 선교를 하려고 함으로써 중국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그러자 두 수도회는 로마에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고발하였고, 1645년 인노첸시오 10세는 적응주의를 금지하였다. 이때부터 전례논쟁은 수도회 사이에 점점 더 가열되었다. 이즈음 얀세니즘 경향이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당연히 모든 적응주의를 단죄하고 예수회와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교황에 따라서 그 판단을 달리하였다. 1656년 알렉산델 7세는 적응주의를 완화하였으나 1704년 클레멘스 11세는 다시 금지하였다. 1707년 클레멘스 11세 교황(1700~1721년)은 중국에 교황사절을 파견하였는데, 그는 중국의 조상전례는 미신적인 요소가 있다고 단죄하였다. 또다시 1715년에 교황은 교황칙서로 적응주의를 단죄하였으며 중국의 모든 선교사는 적응주의가 잘못이라는 서약을 하였다. 그뒤 예수회는 이 칙서를 바꾸려고 노력했지만, 1742년 베네딕토 14세가 다시 한번 모든 적응주의에 대해 근본적인 금지령을 반포함으로써 아시아의 선교는 박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제사에 대한 이러한 단죄는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까지 영향을 끼쳤으니, 우리 나라 첫 박해의 표면적인 이유는 제사를 거부한 데서 시작되었다. 예수회는 17세기에 중국말로 된 전례서를 만들고 교황의 인가를 받으려고 하였다. 만약 예수회의 선교방법이 받아들여졌더라면 동양에는 가톨릭 신앙이 넓게 퍼졌을지도 모른다. 동양에서 박해를 부른 제사에 대한 허용은 20세기에나 와셔야 이루어진다.

 

 

파라과이의 예수회 집단촌

 

‘파라과이의 집단촌’이라고는 하지만, 이 집단촌은 스페인이 점령한 지역에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이는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우르과이와 브라질 일부에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스페인이 이들 지역을 점령하고 식민지화하면서 원주민들을 혹사시키는가 하면 노예로 부리면서 심한 착취를 하던 1610년경에, 필럽 3세 스페인 국왕이 예수회에 원주민 선교를 맡겼다.

 

예수회는 이들 원주민과 같이 생활을 하면서 군인이나 식민지 관리가 들어오지 못하는 지역을 만들고 자유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 이 집단촌은 원주민위원회와 함께 예수회 신부들이 관리하였는데,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사는 그런 이상적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어떤 사람은 이곳을 예수회의 식민지라고도 한다. 당연히 이 공동체의 원주민과 다른 원주민의 생활은 큰 차이가 있게 된다.

 

그러던 중에 175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점령지역의 구역이 정해지면서 포르투갈 지역으로 넘어간 이 집단촌에 곧바로 포르투갈 군인이 들어가 직접 관리를 하게 되었다. 새로운 식민관리들이 이들 지역에서 금을 찾기 위해 원주민을 혹사시키자 원주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원주민들의 저항을 예수회 신부들이 시킨 것이라고 생각한 식민관리들은 예수회를 쫓아내고 도미니코회와 프란치스코회로 바꿔버렸다.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원주민들은 다시 비참하게 착취를 당하게 되었다. 때를 같이해 예수회는 스페인 점령지역에서도 추방되었다. 예수회가 남아메리카의 복음화에 큰 몫을 담당하였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예수회에 대한 나쁜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었다.

 

 

해체되는 예수회

 

얀세니스타들과 오랫동안 투쟁을 하고 전례문제로 여러 수도회와 벌인 긴 논쟁, 그리고 남아메리가의 집단촌으로 인한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와 빚은 불화 또한 일반적인 시기와 미움을 받던 중에 예수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과 남아메리카의 패배로 예수회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마르트니카 섬의 지부장 라바레테(Lavalette) 신부가 이 섬의 통상을 독점하였다. 같은 시기인 1755년에서 1763년에 프랑스와 영국은 해양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가 큰 손해를 입으면서 특히 마르세이유 선주들은 예수회를 파리 국회에 제소하였다. 의회는 예수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도록 결의하고 왕은 주저하다가 여론에 밀려 1764년 11월 프랑스와 프랑스령 식민지에서 예수회 추방을 명령하게 되었다. 몰수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는 나라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예수회의 교육기관 등에는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한편 포르투갈은 무능한 요셉 1세(1750-1777년)가 왕이 되었을 때 폼발(Pombal) 남작이 정권을 잡고 교회를 국가에 예속시키려 하였다. 이에 예수회가 저항을 하자 예수회원들을 고문하고 한 명을 화형시키는 일이 생겼다. 1759년에는 예수회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회원들은 교황령으로 쫓아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마찬가지로 왕의 권한으로 1767년에 예수회를 스페인과 모든 식민지에서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결정하였다. 5천 명 이상이 교황령으로 쫓겨났을 때 교황청에는 쫓겨난 예수회 회원들로 우글거리게 되었다.

 

예수회 문제는 당시 로마 교황청의 큰 골칫거리였다. 교황들은 예수회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네 번째 서원인 교황에 대한 순종을 지키지 않는다며 예수회를 해체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해체결정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후원을 받고 선출된 우유부단한 성격의 클레멘스 14세가 1773년 7월 12일에 ‘Dominus ac Redemptor’이란 칙서를 반포함으로써 확실해졌다. 많은 추기경들이 이에 반대했지만 예수회의 해체는 기정사실이 되었다.

 

 

예수회 해체가 가져온 결과

 

예수회를 추방한 나라들은 경제적으로는 이득을 얻었지만 교회는 크나큰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계몽주의나 반교회적인 분위기에 적절히 대처할 수 없었다는 것이 아주 큰 손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예수회 해체 결정 이후에 로마에서는 예수회 장상들을 감옥에 가두고 재판을 하였다. 총장은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유럽의 모든 나라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대단히 환영하고 받아들였지만, 가톨릭 국가가 아닌 두 나라가 이에 반대하였다. 프로이센의 대제 프리드리히 2세와 러시아의 가타리나 2세 여왕이었다. 이들은 예수회를 반대하는 칙서를 반포하지 못하도록 하고 그들이 계속해서 일을 하도록 하였다. 프로이센의 왕은 예수회원을 추방한 가톨릭 국가의 왕들이 후회할 것이고 예수회원을 청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이런 도움으로 폴란드에서 예수회원들은 자유롭게 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로 폴란드를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나눠 가졌을 때 전주민이 가톨릭인 이 지역에서 예수회원들을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예수회는 6백 개 이상의 지부가 폐쇄되고 2만 명 이상의 회원이 추방되었다. 그들이 운영하던 학교는 문을 닫았고, 선교지는 비는 결과가 찾아왔다. [경향잡지, 1996년 12월호, 구본식 안드레아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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