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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31-32: 중세 수도원의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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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3 ㅣ No.185

[새로 보는 교회사 31] 중세 수도원의 문화유산 (1)

 

 

이제까지 우리는 수도생활을 중심으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루터의 종교개혁 시대까지 이르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영향력을 감소시키고 가톨릭 국가의 신심을 재정립하고 독일쪽에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데 수도회의 역할은 아주 컸다. 중세에 이르러서는 기존의 수도회는 쇄신되고 새로운 수도회가 나타난다. 그러나 잠시 여기서 16세기로 넘어가기 전에 중세 때 수도원의 문화적인 역할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흔히 중세를 ‘유럽의 형성기’라고 한다. 로마 제국에 쳐들어온 야만인들은 정치적인 통일을 파괴한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인 유산도 완전히 파괴했다. 이런 야만인들에게 로마법의 정신과 문화를 보존하고 전수해 준 매체가 바로 가톨릭 교회였다. 교회 조직 가운데서도 수도회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중세 초기의 문화중심에서부터 학문의 발전까지도 바로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몫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수도원의 역할은 한때 교회의 역할을 부정하고자 했던 인문주의 학자들이나 계몽주의 학자들이 축소하려 했지만, 이제는 수도원 수도생활의 영역을 넘어서 문화적으로 크게 기여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수도원의 이러한 문화적인 역할은 수도원 자체의 성격에서도 기인하고 있다. 말하자면 수도원은 자신들의 형태를 유지하고 과거를 보존하고자 하였는데, 교부들의 가르침과 수도원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이 바로 문화적인 것에 기여하는 첫째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과거의 것을 유지하는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영성과 학문과 예술을 창조하려는 의지이다. 전통에 기초한 새로운 시도는 많은 분야에 문화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이렇게 해서 큰 수도원은 자체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며 아주 다양한 문화를 답습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전례적인 필요 때문이다. 영적인 양식을 얻기 위하여 성서연구와 교부들의 가르침의 연구에 전념하면서 야만인들로 인해 부수어진 전통을 찾고 창설자의 정신을 찾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문화적인 업무가 수도원의 중요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교부들의 작품연구에서 출발하여 대학자들의 작품연구로 넘어가고, 잃었던 과거 문학작품들도 찾게 되면서 수도원 도서관이 점점 더 장서를 늘리게 되고, 이 책들을 다시 늘리기 위해 필사실을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이 필사실이 필요했던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멀리 떠나는 형제들에게 전례를 위해서나 학문을 위해서나 영성을 위한 책들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문화적인 유산을 보존 발전시킨 일들을 짧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법학

 

다른 학문을 연구하기 전에 수도원에서 먼저 영적인 삶을 위한 연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서연구나 교부연구뿐 아니라 새로운 영성과 삶에 대한 가르침을 수용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노력을 하게 만든 분 가운데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분이 대(大)그레고리오이다. 그는 많은 서신을 썼을 뿐 아니라 수도생활을 위한 책을 저술하였으며, 이에 따라 복사(필사)를 많이 하여 여러 수도원에서 가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 뒤 중세를 거치면서 많은 수도원 창설자들이 생기고 이들의 영적 가르침이 바로 문장이나 언어의 발전을 가져오면서 문학의 발전에 기초를 놓는 것이다. 특히 탁발수도회는 출발할 때부터 자신들의 새로운 수도생활의 특이성을 그리스도의 삶과 연관시키는 연구로 많은 영적 문학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영적 문학적인 기여뿐만 아니라 수도원은 법적인 것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 이유는 수도원 조직이 법적 체제를 갖추는 일이 일반사회 앞에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베네딕토회의 수도 개념에는 법적인 요소가 크게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법학연구도 신학 못지않게 중요하였던 것이다. 수도원 도서관에는 신학 서적 다음으로 법학에 관계된 저서들을 모았고 이에 관한 연구도 함께 진행하였다. 과거에 어떤 법들이 적용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교회법의 적용을 알아야 했고 또 특히 영주들과 법적인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서 시민법도 알아야만 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로마법에 관한 저서들을 귀중하게 모았다. 이 법들은 봉건적인 사회에 규범을 정해가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게르만족의 법들과 로마법을 비교함으로써 나중에 르네상스의 법전 연구의 자료가 되었다.

 

중세에 가장 먼저 생긴 대학이라고 하는 볼로냐 대학은 법학으로 유명하였는데, 수도원이 수집하고 필사한 법전이 연구의 아주 귀중한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원의 법에 대한 관심은 시민법보다도 교회법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교회법에 관한 법전들을 모아 연구함으로써 어떤 문제가 있을 때 법적 대응을 할 수 있게 했다.

 

중세의 중요한 법적인 문제는 바로 ‘서임권 투쟁 사건’이다 이때 교황 편에서 수도자들이 법적 대응을 하게 되었는데 루가의 안셀모가 쓴 ‘교회법전(Collectio Canonum)’이 아주 중요하였다. 폴리로네의 수도자였던 그는 13권으로 교회법을 정리함으로써, 그레고리오 7세가 주도하던 교회의 개혁과 서임권 투쟁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중세에 대학이 생기기 전에, 사회에서 법학에 대한 관심이 있기 전에 이미 수도원은 시민법이든 교회법이든 연구하는 장소였으며, 더욱더 문화적인 가치는 귀중한 로마법에 관한 자료들을 보존하고 확산시킴으로써 후대에 법학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법에 따른 사회 구성에 큰 몫을 했다는 것이다.

 

 

의학

 

약품이나 의료행위가 수도원에 널리 확산되었다. 이런 전통은 은수생활을 하면서 고행을 하는 사람들의 지혜에서 유래하고 있다. 베네딕토 성인은 수도생활을 위해 의약품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는데 이에 따라 수도자들이 약초를 재배하였다. 그의 규칙서 안에도 치료에 관한 규정이 있었다. 수도원에도 노인과 환자가 있으며 따라서 의학에 대한 발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중세에 발전적으로 연구하는 곳은 수도원이 유일한 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사료 편찬

 

역사는 사료(史料)에 따른 학문이다. 남겨진 사료가 없으면 당시의 상황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유럽 사회를 야만인들이 점령하여 지식층이 사라진 시점에서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수도원에 남아있는 사료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같은 작업을 하게 된 동기는 옛 수도자들의 덕행을 알기를 원하는 마음과 모든 수도원의 전통에 관한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망일지, 일지, 사건기술, 전기 등을 기술하면서 역사적 원천이 될 수 있는 자료들을 오늘날까지 보존해 왔으니, 수도자들이 이렇게 모든 종류로 무수히 만들고 보존하고 후대에 남긴 자료가 아니었다면 중세의 역사는 깜깜한 어둠 속에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

 

역사적 기술을 한 또 다른 동기는 수도성소의 종말론적인 요소이다. 인간 세상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보기를 원했고, 선과 악의 끊임없는 투쟁의 드라마를 인내를 가지고 기술해 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성스러운 사건만 기술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일들에 관한 것도 모두 기술하였는데, 바로 이것이 수도원의 역사나 교회사에 중요한 자료를 남겼다. 동시에 서민 대중들의 삶의 역사와 한 나라의 역사, 성인이나 권력자들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남기게 된 것이다.

 

8세기 말경부터 교황의 권위와 세속 권력의 관계정립이 문제가 된다. 주교들과 영주들 사이에도 권위문제가 항상 논쟁의 쟁점이 되었으니, 자료를 모으는 일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서 비록 수도자들이 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중세의 가장 중요한 법전집을 소개하자면, 바로 “가(假) 이시도로 법전집”이다. 이 법전집은 역사적으로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가짜 교회법전이라고 할 수 있다.

 

“가 이시도로 법전집”은 15세기 르네상스기에 로렌조 발라 등이 가짜라고 판명하기 전까지는 교황과 주교의 권위를 살려주는 결정적인 단서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황청에서 간여한 바가 없는 문서들이지만 선의로 믿었고 사용했다. 9세기 중엽에 만들어졌다고 보이는 이 가짜 교회법전은 익명의(아마도 여러 사람이 함께) 저자가 교회와 그리스도 신자들의 더욱 나은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흩어져 있는 법전들을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것이다. 비록 저자가 영주들의 교회간섭과 왕권투쟁, 교회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위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서 가운데 교황의 권위를 향상시킨 중요한 문서는 바로 콘스탄틴 황제의 ‘증여 증서’이다. 이 증서는 교황령이 형성되기 전부터 전설처럼 떠돌던 이야기를 문서로 위조했다. 즉 황제는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문둥병을 낫게 해준 실베스텔(314~335년) 교황에게 서방의 세 제국을 증여했다는 것이다. 즉 황제의 권위를 주고 로마와 이탈리아의 도시와 서방세계의 도시와 지방을 교황에게 넘기고 자신은 동방으로 옮긴다는 내용이다.

 

이 가짜 문서를 누가 만들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다만 가짜이고 프랑스의 라임스 교구 지방에서 만들어졌을 거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적절한 시기에 나타나 중세의 세속 권력에서 교회 보호에 크게 기여했다. [경향잡지, 1996년 7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32] 중세 수도원의 문화유산 (2)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박물관이나 수도원이나 대성당을 찾아가 그곳에 전시해 놓은 유물을 구경하는 기회를 갖곤 한다. 전례에 쓰이던 성작이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을 보거나 제의가 금실로 짜여진 것을 볼 때 너무 화려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면서. 또 손으로 쓴 미사책, 성가집, 기도서에 그림으로 그려진 글자를 볼 수 있는데, 금으로 입힌 그림 글자들을 보면서 그것을 중세 수도자들이 하였다고 하면 요즘 바쁜 사람들은 시간도 많고 할 일이 없던 수도자들이 장난 많이 쳤구나 하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기도와 삶이었다. 기도하는 일에 쓰여지는 모든 것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수도자들에게 그토록 많은 인내가 필요한 작업을 하도록 한 것이다. 동시에 야만인들로 인해 부수어진 문화 예술적 유산이 바로 그들 수도자들의 노력으로 복원되고 지켜지고 발달한 것이다. 따라서 이번엔 수도원에서 운영한 필사실과 도서관, 문서고 등의 가치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필사실

 

필사실이 수도원에서 운영된 이유는 지난 달에 말한 바 있다. 필사실의 발전은 여러 방면의 문화 발전으로 이어졌다. 공간이 마련되어야 하고, 사본을 만드는 사람을 키워야 하는 여러 여건이 갖추어져야만 가능한 것이다. 필사실 일보다 농장의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 필사실은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 권의 사본을 만들기 위해 공간과 사람 이외에도 그에 따른 종이, 필기도구, 잉크 같은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필요에 따라 주변 문화도 함께 발전하는 것이다.

 

우선 종이는 로마 시대 때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중세까지 초칠판자가 쓰였는데, 나무로 아주 얇은 상자를 만든 다음 초를 부어서 그 위에 글자를 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쉽게 쓰고 지울 수 있는 것이어서 학교의 노트 대용으로 쓰거나 장사꾼들이 상업용으로 간단한 계약 같은 일에 쓰던 일회용이었다. 다음에는 고대 이집트에서 쓰던 파피루스가 11세기까지 많이 쓰였다. 파피루스는 나일강 같대 종류의 풀로 만들어진 종이로, 11세기 중엽 나일강의 가뭄으로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문서에 많이 쓰였다.

 

책의 사본으로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양피지라고 하는 동물 가죽 종이다. 파피루스를 대신할 종이로 기원전에 이미 쓰였지만 유럽에서는 4세기에 일반화하기 시작했고, 8세기부터 13세기까지는 양피지가 책이나 문서의 종이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양피지는 모든 종류의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졌다. 소가죽 따위도 사용되었지만 염소나 양의 가죽이 가장 만들기 쉬웠다. 그중에서 어린 양의 가죽으로 만든 것은 얇고 가벼운데다가 흰색이라 가장 고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양피지는 색깔에 따라 무게에 따라 면의 굴곡에 따라서 그 질이 결정되는데, 일반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준비를 했다. 책의 크기나 용도에 따라 양피지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직접 제작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문서는 한쪽 면만 사용하기 때문에 안면만 잘 준비하면 되었지만, 책의 사본은 양면을 다 사용하였으므로 가죽의 바깥면도 쓰기에 좋게 만들어야 했다. 구멍도 없고, 네모나고 잘 만들어진 양피지는 중요하게 쓰였고, 또 잉크도 금이나 은으로 만들어 썼다.

 

양피지는 만들기도 어렵고, 또 값이 많이 나가기 때문에 이전의 양피지를 재생하여 쓰기도 했다. 7세기와 8세기 사본 중에 많이 발견되는 재생 양피지는 이전의 잉크를 제거하기 위해 우유에 담가 가죽을 부풀린 다음에 문질러서 잉크를 빼고, 잘 펴서 말려 제 모양을 없앤 다음 다시 크기를 맞추어 사용했다. 이 재생 양피지를 수도자들이 많이 사용했다고 몇몇 사람들이 말을 한다. 재생 양피지가 되는 문서나 책은 일반적으로 아주 오래되었거나 완성되지 못한 것이거나 실패한 것을 사용하게 된다. 이때 수도자들이 세속의 문학 책을 경시하여 문학 양피지 서적을 재생하여 썼다고도 하는데, 물론 전례서나, 교회나 수도원에 필요한 책들을 많이 필사했지만 수도원 도서관에는 모든 종류의 서적을 비치하기도 했으므로 지나친 강조로 보인다.

 

12세기 중엽에 유럽에 들어오고 14세기 이후에 일반화한 것은 중국의 종이였다. 8세기에 중국인들과 전쟁을 한 터키인들이 포로들한테 종이 만드는 법을 배운 뒤 전해졌다. 비단 종이와 식물로 만든 종이 두 종류였지만 터키인들은 적당한 물을 찾지 못해 식물로 만드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아랍인들을 통해서 배운 면과 비단실을 섞은 종이를 만들어 15세기부터는 유럽에서도 일반화하였다.

 

수도원들의 필사실들은 서로 서적을 빌려주고 사본을 만들고 기술적인 모든 일에서도 관계를 유지했다. 각 필사실의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대와 지방에 따른 특색을 지니게 되었다.

 

대문자의 필체와 소문자의 필체의 구분이 생기게 되었고, 자주 쓰이는 단어는 약자를 사용했다. 이 약자는 서로 약속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DS자 위에 줄을 그으면 Deus(하느님)가 되고 SPS위에 줄을 그으면 Spirtus(성령)가 된다.

 

글자를 줄여서 약자를 만드는가 하면 부호나 점으로 단어를 만들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S'=Sed(그러나)이다. 또한 모든 서적을 대문자로 쓸 수가 없어 소문자로 책을 만들 때는 그 당시에 쓰이는 형태와 언어로 쓰고 또 변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언어학에도 크게 기여했다.

 

수도원이나 대성당 필사실이 서적을 사본해 내고 지켜나간 시기는 7세기에서부터 12세기까지 5세기 동안이라고 할 수 있다. 12세기 이후에는 큰 대학들이 생겨나고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면서 왕궁이나 부호들이 서적을 베끼고 모으게 된다.

 

로마 시대의 사본 제작은 그 목적이 상업적이었다. 하지만 중세 초기로 넘어오면서 상업적인 가치가 없어졌을 때 필요와 관심을 가진 곳이 바로 수도원이었다. 공동체의 필요에 따른 일이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지방의 필요에 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8세기에서 9세기의 기도문에는 식당에서 드리는 기도, 잠잘 때 드리는 기도, 일할 때의 기도와 함께 필사실의 기도가 항상 같이 있었다. 모든 수도원 특히 베네딕토회 수도원에는 필사실이 있었고 큰 도서관을 가진 것을 큰 명예로 알았다.

 

모(母) 수도원이 새로운 자(子) 수도원을 세우게 되고, 또 먼 나라에까지 확산이 되면 동시에 필사실의 수도자들도 옮겨가고, 수도자들이 옮기면서 서적의 사본들도 따라서 옮겨지므로 문화적인 확산에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 바로 중세 수도원의 필사실이었다.

 

 

도서관

 

요즘 세상에도 책을 여기저기 돌리게 되면 훼손되고 분실되게 마련인데, 인쇄술이 발달되지 않아서 사본을 만들던 시대에 보관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그 책은 곧 사라지고 만다. 이런 점에서 수도원의 도서관은 그리스의 학문이나 로마의 전통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후대에 연구의 길을 여는 귀중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문자를 모르는 야만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그 귀중한 책들을 보관할 수 있었던 곳이 바로 수도원의 깊숙한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전례서나 영적 서적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한 책들도 보관하고 읽게 하는 장소였다. 수도원의 안전한 보관체계와 그 지방의 문화적인 역할 덕분에 귀족이나 부호, 심지어 왕들과 교황들까지도 가지고 있던 장서를 수도원에 기증하게 되어 많은 장서를 보유하게 된 것이다.

 

나는 중세기에 세워진 유명한 스위스의 아인지덴 수도원의 도서관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1000년 가까이 된 책들이 그토록 많이 있음에 놀란 적이 있다. 보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출도 아주 많이 했는데, 작성된 도서목록은 수도원의 다른 전례용구나 귀중품과 같이 그 수도원의 주요한 재산으로 다루었다.

 

도서관장은 흔히는 필사실의 책임을 동시에 맡았다. 하지만 도서를 보호하는 일은 수도자 모두의 책임이었다. 예를 들면 577년경에 롱고바르디족이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침입했을 때 수도자들이 가지고 간 것은 음식도 보물도 아닌 책들이었다.

 

 

문서고

 

도서관과 문서고의 역할은 다르다. 도서관의 것은 대출이 가능하지만 문서고의 것은 대출이 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문서고의 것은 그 수도원의 역사와 관계가 있고 사회와 다른 수도원 사이의 법적 관계의 것들이 많다.

 

문서가 필요한 부분은 많다. 수도서원에 관계되는 전례문서나 경제 관계나 법적 관계 문서 등이며, 동시에 잃어버리면 안되는 문서를 복사해 놓는 일도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교회 안에서는 문서고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잘 정리해서 보관하고 쉽게 찾아볼 수 있게 하는 정신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경향잡지, 1996년 8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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