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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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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민에게 복음을: 콜롬비아 - 날마다 이어지는 사랑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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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3-23 ㅣ No.190

[만민에게 복음을 - 콜롬비아] 날마다 이어지는 사랑의 기적


나는 남미의 콜롬비아에서 13년째 살고 있다. 예전에는 이 나라가 멀고 먼 나라이고, 다른 5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남한의 10배나 되는 나라라고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 사는 지금 모두들 이곳에 사는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늘 따라오는 공통된 질문 하나가 있다. “왜, 하필이면 그곳에?”라는 물음이다.

지난번 남미 선교사들 모임에서도 신부님들이 합창으로 콜롬비아를 대변해 주셨다. 이유는 ‘마약과 게릴라’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맞는 말이며, 날마다 뉴스에서 빠지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다.

우리 수녀원이 있는 타블라사 동네에도 35명 정도의 10-15세 청소년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산 위에서 총기실습을 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마약 파는 걸 도와주며 생계를 유지하고, 때때로 마을에 내려와 털어가곤 한다.

아무리 뉴스가 많아도 기쁜 소식이 드문 이 세상에 예수님은 ‘구원의 뉴스’, 복음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다. 어두움 속에 빛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가지고 강생하신 그분을 따르고자 나섰으니 이 어두움의 나라 콜롬비아에 오게 된 것은 오히려 경제적으로 따진다면 더 큰 투자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콜롬비아는 오히려 가난한 나와 우리를 구원하고, 이 세상의 기쁜 소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었으니 사랑의 빚은 평생을 다해도 갚을 길이 없을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들이 사람의 인연으로 이어지듯 나 역시 이곳을 선교지로 정하기까지는 많은 만남이 있었다. 그 첫 번째 이유가 헤르망 주교님이다.

우리가 일하는 칼다스 교구는 메데진 대교구에서 1988년 분리 탄생한 작은 교구이다. 그때 초대교구장으로 헤르망 가르시아 이사사 주교님(1936-2006년)이 임명되셨는데, 우리는 오묘하신 주님의 섭리로 그분의 착좌 다음해인 1989년에 처음 만났고, 10년 뒤인 1998년 교구설정 10주년 기념미사 때 교구민들 앞에 소개되었다.

헤르망 주교님은 참 특별한 분이셨다. 편안한 교구청을 두고 병원 바로 앞에 작고 불편한 아파트에서 혼자 사셨는데 거동이 힘든 환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24시간 봉사 대기를 하려는 이유에서였다. 손수 식사를 준비하고 운전까지 하셨는데 아파트 문은 늘 열려있었다.


가난한 이들을 맡기고 떠나신 헤르망 주교님

주교님은 콜롬비아 주교회의에서 교리를 담당하셨는데 바쁜 일정 속에서도 교리서를 끊임없이 저술하셨고, 타고난 언변으로 가장 밑바닥 사람부터 대통령까지 감동시키시곤 하셨다. 언젠가는 교황님이 계시는 로마에 불려가 강의를 하기도 하셨다.

주교님은 벨기에에서 학위를 받으셨지만 거실에는 달랑 ‘영세증명서’ 하나만 액자에 넣어 걸어두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 엄청난 타이틀보다 더 위대한 일이 있겠냐면서 자랑스럽게 보여주시곤 하셨다.

그러니 우리처럼 빈손으로, 마음 하나만 가지고 도착한 수녀회를 두 손 들고 맞이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주교님은 “교회조차 가난을 살기 힘든 이 시대에 그토록 가난한 수녀회가 되었으니 부디 더 가지지 말고 세상에 증언하라.”고 당부하셨던 것이다.

말 그대로 주교님과 우리는 조화를 이루며 5년을 꿈결같이 지냈다. 하지만 사랑을 시기한 세상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헤르망 주교님은 주교회의 평화위원장으로 일하시면서 언제나 게릴라와 용병부대, 그리고 군부를 화해시키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가끔 조용히 헬리콥터를 타고 먼 산에 다녀오곤 하셨는데, 주교님의 사랑은 게릴라들조차도 움직이게 하셨다. 급기야 주교님은 게릴라들의 소굴이라 할 수 있는 아파르타도 교구장으로 임명되시고 말았다.

나는 “교구장도 바뀌나요?” 하며 억울해했지만, 주교님은 당신이 10년 동안 꿈꿔오며 기초만 놓은 행려자 센터 ‘새삶 센터(Volver a vivir)’를 우리에게 넘겨주시고 총총히 떠나가셨다.

아파르타도 교구에 도착하시던 날을 주교님은 이렇게 표현하셨다. “짐을 가득 채운 어마어마한 컨테이너를 나 혼자 운전하라고 내미는 것 같아.” 그것이 너무 힘드셨던 것일까. 그래도 같은 나라에 있으니 가끔 통화를 하면서 위로를 받았는데 어느 날 주교님은 “나 암에 걸렸대.” 하셨다. 그리고 투병 2년 만에 주교님은 그토록 원하던 하느님 나라에 가셔서 쉬시게 되었다.

주교회의에서는 주교님을 “우리의 양심 헤르망”이라 불렀고, 심지어 게릴라들도 눈물을 흘리며 탄식을 했다니 주교님 소식이 콜롬비아 전 언론매체를 통해 소개되고, 정부에서 개인 비행기를 보내 모셔 간 것이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거리의 사람들의 쉼터, 새삶 센터

살아생전 그토록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셨던 주교님은 세상의 그늘에서 잊힌 거리의 사람들에게 쉼터를 마련해 주는 꿈을 늘 갖고 계셨다. 그 꿈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이탈리아 주교회의와 주위 도자기 회사의 도움으로 공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주교님은 행려자 몇몇을 불러 살게 하셨다.

하지만 주교님이 센터를 시작하셨을 때, 나는 부러 모른 체했다. 아무리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해도 아이들이 아닌 마약과 폭력에 찌든 행려자들과 산다는 것은 좀 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주교님이 손수 앞치마를 두르고 성탄 요리를 하고, 장작불을 지피며 그들과 함께해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외면했다. 어쩌다 센터 앞을 지나야 할 때면 다른 길을 선택해 서둘러 지나가곤 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교님의 꿈, 아니 하느님의 꿈은 우리가 이어받았다. 그리고 황량한 벌판에 서서 오직 주님의 자비만 믿으며 이 ‘사랑의 학교’에서 나는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폭탄소리와 폭죽소리도 구별하지 못하던 나는 내내 놀라고, 알뜰살뜰 모아 준비한 지붕이 뜯겨지고, 새로 끼운 창문이 사라질 때, 너무도 기가 막혔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뜻밖에도 두려움보다 용기가 솟아올랐다.

어느 날 벽에 바짝 붙은 검은 그림자의 도둑을 만났지만 나는 경찰에게 신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문을 열어주면서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게 당당하게 나가라고 조용히 일러주었다.

그동안 나도, 공동체도 많이 변하고 우리 센터 식구들도 많이 늘었다. 도둑의 소굴이었던 센터는 많은 봉사자들의 도움으로 아담한 가정으로 변해가고 있다.

일주일 내내 화덕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공동식당, 진료소, 이발관, 부녀자 학교, 어린이 교실, 그리고 샤워장, 빨래터, 옷가게, 레크리에이션 교실, 영화관에서 우리는 주인공들인 행려자들과 한솥밥을 먹고 있다.

철없는 내가 이곳에서 선교사가 되어가듯, 사기와 절도 경험이 있던 죠니가 낮에는 봉사자로, 밤에는 야간학교에서 공부하더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복무까지 마친 뒤 이제는 직업전선에 뛰어들고 있다.

길거리를 헤매다 가족에게 돌아간 오를란도가 감사의 편지를 보내오고, 3년째 마약을 끊고 사진사로 일하는 호세는 선물이라며 우리들의 사진을 찍어준다.

날마다 이어지는 이 사랑의 기적, 그것은 주님께서 정말 이 세상에 오셨으며, 우리 가운데 사신다는 확신이요, 세상은 아직도 희망할 수 있다는 표징이다.

* 류위숙 스콜라스티카 - 예수의선교수녀회 수녀. 1961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교육대학교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았다. 1986년 교직을 그만두고 남미로 갔다. 1998년 콜롬비아에서 수도공동체를 시작하여 1999년 교회인가를 받고 지금까지 행려자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2월호, 류위숙 스콜라스티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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