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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29-30: 15세기의 수도원 쇄신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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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0 ㅣ No.183

[새로 보는 교회사 29] 15세기의 수도원 쇄신을 위한 노력 (1)

 

 

마르틴 루터의 수도생활

 

마르틴 루터가 계기가 된 소위 종교개혁은 독일에서 시작되었고 당시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리스도교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도록 하였다. 루터는 수도자였다.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할 적에는 주변의 반대를 많이 받았다. 특히 루터가 법학을 공부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이렇게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간 수도원에서 루터는 행복하지 못했다. 수도생활을 통해 얻고자 하는 완덕을 추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수도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던 루터는 교회에 반기를 들게 되고 수도서원을 버리고 결혼생활을 택하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에 대해서는 아주 다양하게 설정해 볼 수 있는데. 정치 사회 교회의 상황이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선 다른 기회에 거론할 기회를 찾기로 하고 수도생활과 관련된 부분만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작은 부분 하나는, 바로 독신생활에 불만을 품은 사제들과 이미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수도자들한테 루터가 돌파구를 열어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루터만큼 구원이나 완덕 문제에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에서 루터의 추종자가 되었던 것이다.

 

수도서원과 독신문제가 논쟁이 된 것은 켐베르그(Kemberg) 성당 참사회장 때문이다. 루터의 추종자가 된 그는 이미 자신의 하녀와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교회당국에 고발된 상태였다. 이때 루터의 첫째가는 협조자인 멜랑크톤(Melanchton)이 켐베르그를 옹호하기 위해서 글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사람은 인간이 만든 제도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강조하고 “수도서원이나 독신의 의무를 파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루터는 처음에는 독신의 의무와 수도서원에 대해 이와는 다르게 생각을 했지만, 즉시 ‘복음적 자유’를 주장하였다. 로마서 14장 23절의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위는 모두 다 죄가 됩니다.”는 구절을 인용해서 루터 역시 “수도서원이나 독신의 의무 모두 다 파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주장을 바탕으로 루터를 추종하던 수도자들이 수도복을 벗고 결혼을 하고 다른 수도자들한테도 이에 따르기를 권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서 비텐베르그(Wittenberg)에서는 광신적인 재세례파들이 성당들을 부수고 수도원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루터의 수도서원에 관한 생각, 즉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며 서원은 무시할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수도자들이 양심의 가책을 덜 받게 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한번 서원을 하면 풀 수가 없어 서원한 상태에서 억지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개혁

 

14세기와 15세기의 부패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쇠퇴하지 않은 수도원은 거의 없었다. 어느 누구가 의도적으로 타락시켰다기보다 교회가 중세기 동안 누린 권력과 부가 교회와 사람들의 욕심을 부추기고 사회 분위기가 개인주의와 향락주의로 나아가게 만들면서 나타난 총체적인 타락현상이었다. 예를 들면 파라클레토(Paracleto)의 봉쇄수녀원 수녀들은 주의 승천 축일을 지내기 전날에는 그 지방의 본당신부들과 함께 동네 축제에 참가해서 일반사람들과 세속적인 춤을 추는 것이 관례였다고 하니 당시 분위기를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또 투르나이(Tournai) 어느 수도원의 아바스는 공개적으로 여자와 살면서 어릿광대와 악사들을 불러들이고 주사위 노름과 스포츠에 빠졌다고 그 지방 주교가 고발까지 한 것으로 봐서 당시에는 어느 정도 수도원 분위기가 세속적인 것이 통용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련 총체적인 혼란 속에서는 반대로 쇄신에 대한 강한 원의가 생긴다. 이러한 쇄신에 대한 의지는 처음에는 세상과 등져tj 복음정신대로 살려고 하는 것이었고, 다음에는 규칙을 준수하는 단체가 구성되기에 이른다. 이 단체는 수도원 쇄신을 위한 방법으로 다른 수도원을 쇄신시키려는 노력보다는 그들과 차별화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이들의 기본적인 행동원칙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되는데, 첫째는 수도회의 초창기 규칙을 엄격히 지키며 초창기로 되돌아가기이며, 다른 하나는 사막이나 사람들이 살지 않는 외딴 곳에서 주변의 영향력을 배제시키는 노력이었다. 이들은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기본으로 하여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난 정신을 강조하고 은둔생활을 선호하는 한편, 이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 완전한 중앙집중식 행정을 추구했다.

 

이러한 쇄신 노력은 전체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부분적으로 성공하여 쇄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쇄신을 향한 출발이 되었다. 먼저 말할 수 있는 수도회는 체르토시니(Certosini)들로 이들은 처음 창설 때부터 수도원을 사막이나 험한 지역을 선택함으로써 창설자 성 브르노의 정신에 충실할 수 있었고 중세 동안 내내 같은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14세기 중반부터는 파리, 쾰른이나 런던 같은 도시에 진출하여 이론적이거나 활동적이지는 않지만 그들이 사는 삶을 통하여 또 그들의 경험을 통하여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삭센의 루돌프는 스트라스부르그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리스도의 생애”라는 저서를 통해 신비적이고 관상적인 삶을 소개함으로써 이후 수도생활에 큰 업적을 남긴 로욜라 성인과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 다른 쇄신은 파도바의 유스티나 수도원에서 출발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2세가 유스티나 수도원에 파견한 루도비코 바르보(Ludovico Barbo, 1381-1443년)가 수도생활의 쇄신을 실현시켰다. 그는 개혁 수도원의 집단을 구성하고 명의원장 제도와 평생원장 제도를 없애는 한편, 자수도원의 자율을 박탈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총장과 아홉 명의 참사회가 가지도록 했다. 참사회는 삼 년을 임기로 하는 원장들과 수도원의 다른 장상들도 선출했다. 수도자들은 하나의 수도원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전체 집단에 소속되게 함으로써 한 수도원에서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 개혁이 성공하자 다른 지역으로도 파급되었다. 1504년에는 이와 같은 수도단체가 몬테카시노에도 생겼으며 독일 지역에서는 부르스펠드(Bursfeld)를 기점으로 여러 개혁집단이 생기고 스페인에서는 몽세라(Montserrat) 수도원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개혁의 방해점

 

모든 개혁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한 수도원의 개혁을 위해 교황청과 지방영주와 그 구성원의 노력이 함께 있어야 가능했다. 그러나 이런 유기적인 협조체제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개혁이 실패하는 경우들이 생겼다. 중세 초기에 교회를 쇄신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클뤼니(Cluny) 수도원이 그 좋은 예이다. 클뤼니 수도원은 백년전쟁의 여파로 쇠퇴했다. 수도자들은 줄었고 수도원에 살지 않는 아바스는 관리가 되지 않았다. 성당의 성작과 전례용구는 도둑맞거나 잃어버렸으며 성당도 허물어진 곳이 많았다. 수도자들의 수도생활도 이에 따라 자연히 허물어져 있었다.

 

바로 이 시기인 1456년에 보르봉 가문의 귀족인 요한이 아바스가 되었다. 그는 수도원을 개혁하기 위해서 1458년 훈령을 반포하여 클뤼니와 그 자수도원의 수도생활을 바꾸려고 하였다. 수도원의 악습을 없애기 위해서 금지조항들을 발표했는데, 먼저 수도원의 경제를 위해서 십일조의 중간 세금 징수를 금지시키고 수도원의 재산양도를 금지하는가 하면 수도원 수입의 유출을 막으려고 하였다. 또한 수도자들의 봉쇄구역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수도자는 수도원 식당 밖에서 식사를 금하고, 수도원 밖에서 자는 것도 금지하였다. 수도자 개인 하인 역시 두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런 개혁조치는 대단히 큰 반대에 부딪쳤다. 먼저 자수도원이 교황청에 모수도원인 클뤼니와 분리를 요구하였는데, 교황청은 개혁을 위한 강력한 후원을 해주지 못했다. 또 수도원 재산이나 수입이 명의원장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기 때문에 귀족들의 반대에도 부딪쳐 1470년 이후에는 개혁에 대한 노력이 멈추어버렸고 또 다른 개혁에 대한 의지는 16세기 초엽까지 기다려야 했다.

 

또 다른 하나의 시도는 브레사논(Bressanon) 지방에서 있었다. 1452년에 쿠사의 니콜로 주교가 자신의 교구를 개혁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였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수도회가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단호한 주교가 이 문제를 일으키는 두 군데 여자수도원에 파문을 내리자 지방영주이며 수도원 주인인 시그문드 공작이 주교의 개혁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공작은 지방의 성직자와 백성을 선동해서 주교를 반대하게 하였고, 주교를 비난하는 글을 쓰게 하면서 력을 휘둘렀다. 공작은 주교를 감옥에 가두고 지방 시노드를 요구하였다. 비오 2세 교황은 시그문드 공작을 파문하였지만 파문의 효과는 없었고 교황의 권위만 실추되었다. 결국 니콜로 주교는 교구를 떠나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이 밖에도 종교개혁을 위한 노력들이 많았는데, 1501년부터는 암브와세(Amboise) 추기경이 교황사절로 수도원 개혁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프랑스에서는 1484년에 투르(Tours)에서 개최된 국회인 삼부회에서 교회의 전반적인 쇄신의 필요성을 논의하였다.

 

이렇게 끊임없이 이어진 수도원 개혁의 결과로 마르틴 루터는 쇄신된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수도생활에서 만족할 수 없었다. 때문에 수도원의 쇠퇴가 그의 생각을 바꾼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1996년 5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새로 보는 교회사 30] 15세기의 수도원 쇄신을 위한 노력 (2)

 

 

진정한 교회 쇄신운동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에 전개되었다. 마찬가지로 수도생활의 쇄신이나 수도자들의 영향력 있는 활동 역시 공의회 이후에 이루어진다. 이러한 쇄신이나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은 새롭게 창설된 수도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개혁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었던 수도회는 바로 이 새로운 수도회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존에 있던 수도회 역할이 적었다는 뜻은 아니다. 지난 호에서는 베네딕토회 규칙을 따르는 봉쇄수도회의 쇄신에 대한 노력을 알아보았고 이번에는 중세 말기에 가장 큰 영향력이 있었던 탁발수도회의 쇄신을 위한 노력을 알아보고자 한다.

 

 

쇄신에 방해되는 것


1) 수도회의 반목

 

탁발수도회 중에서 성 프란치스코회와 성 도미니코회는 거의 비슷한 시기에 창설되었다. 이 두 수도회는 대중들의 신앙을 바로잡고 교회가 세속주의를 탈피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창설자들의 정신과는 달리 후대의 제자들은 공동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서로 협조하고 화해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반목을 하면서 모든 문제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데, 너무 자주 반목 질시하는 일에 그들의 힘을 소진하는 일이 많았다. 15세기 말경에 피렌체의 한 병원의 벽에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이 형제로서 포옹을 나누는 장면을 그려놓을 정도로 화해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양편이 다 고집스럽게 화해하기를 거부하였다.

 

2) 재속사제와 수도사제의 알력

 

수도회 사이의 반목과 아울러 또 하나의 부정적인 요인은 재속사제들과 설교와 사목활동을 하는 탁발수도회 사제들 사이의 반목이었다. 이 분쟁은 대중설교를 하는 탁발수도회의 활동에서 비롯한다. 이 분쟁을 확대시킨 것은 프란치스코회인데, 프란치스코회가 두 개의 독립된 수도회로 분리되고 난 뒤에 서로 더 많은 특권을 가지려고 경쟁하면서, 1474년 교황 식스토 4세가 특별히 프란치스코회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격화되었던 것이다. 교황 식스토 4세는 “Mare Magnum”이라는 칙서를 통해 재속사제들의 권위를 훼손시키면서까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본당에서 설교를 하고 고해성사를 줄 수 있으며 자유롭게 장례를 거행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같은 편파적인 결정이 내려진 것은 교황 식스토 4세 자신이 프란치스코회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탁발수도자들은 본당에 나가 사목활동을 하면서 재속사제들과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면 그들은 교황이 내린 특권을 강조하면서 자신을 변호하는 한편 반대자들을 고발하는 등 그 파장이 컸다. 설교대에서 행한 다음의 설교를 통해 그들의 횡포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다. “프란치스코회의 설교 수도자들은 진정한 사제이며 사목자들입니다. 그리고 본당사제들보다 훨씬 환영받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본당사제들은 주교들에게서 사목 권한을 받지만 수도자들은 교황님에게 직접 받습니다. 그리고 또한 일반 평범한 본당사제들이 가지고 있지 못하는 많은 경우까지도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은 사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착한 여러분들에게 조언하고 또 권고하고 싶습니다. 즉 본당신부들에게 성사를 받는 데 아무것도 주지 마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고해성사를 억지로 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더 이상 설교 수도자들에게 성사를 받으러 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Storia della Chiesa. S.A.I.E. Vol. xv. p. 371).

 

결국 사목으로 인해 생기는 금전문제가 핵심인 것같이 보이는 이러한 반목은 당시의 경제사정과 무관하지 않았으니, 사회경제가 불안하던 그 시절에 하급 성직자들의 수는 많고 수입은 적음으로 인해서 수도자들이 본당사목을 하는 데 커다란 장애요소가 되었다. 수도자들이 일반 사목을 하는 데 또 다른 장애요소는 본당에서 정식으로 파문을 당하고 쫓겨난 사람들을 수도자들이 자신들의 교회에 받아들이는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지방 시노드에서 이런 점들을 단죄했지만 시정되지 않았다. 따라서 재속사제와 설교 수도자들 간에 화해를 시키기 위해서 여러 번 목소리를 높였지만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쇄신을 위한 노력

 

당시 환경의 영향을 받으면서 느슨해진 탁발수도회도 쇄신을 향한 목소리가 생기기 시작했으나, 의견 차이와 자칭 개혁을 한다면서 분리주의자가 나오는 것이 장애요소였다. 예를 들면 카프리올로(Capriolo)는 자신의 의사를 따르는 단체를 구성했지만 1480년 그가 죽은 뒤 사라졌다.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지방에서도 수도회와 분리된 새로운 단체를 구성하였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탁발수도회는 지역적으로 쇄신과 활성화를 위한 노력을 하였다. 프란치스코회는 여러 곳에서 개혁을 시작했으니. 15세기에 분리된 규칙을 더욱 엄격히 지키자는 ‘작은 형제들’ 모임은 루터 개혁 이전에 일어난 아주 중요한 개혁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럽의 북서부 지방에서는 아주 구체적인 활동을 찾아서 큰 활약을 했다. 즉 제3회를 조직하여 당시의 환자들에게 전적으로 봉사를 함으로써 국가에서 인정을 받기도 하였다.

 

 

스페인의 개혁

 

이런 혼란의 와중에서도 스페인 교회는 종교개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았다. 교회가 일치된 모습으로 살아 있었고 남미의 여러 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든 배경에는 스페인 왕들의 교회에 대한 열정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15세가 말 스페인 교회는 교회의 개혁을 시작하고 그 일이 지속됨으로 인해서 종교개혁 이후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을 배출하게 되는 것이다.

 

15세기 말에 개혁을 주도한 사람은 히메네스(Ximenes, 1436~1517년) 추기경이었다. 그는 재속사제로 출발해서 총대리 신부를 거쳐 50세에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했다. 56세 되던 해에 여왕 이사벨라의 고백사제가 되었고, 1495년에 중심 교구인 톨레도(Toledo) 교구의 교구장이 되었다. 1507년에 추기경에 선임이 되었고 두 번에 걸쳐서 카스틸리아 왕국을 섭정하였는데. 1504년 여왕이 죽었을 때 그리고 1516년 1월 페르디난도 왕이 죽었을 때였다. 그는 1495년 59세에 수도자로서 처음 공직에 나오면서 스페인의 교회개혁을 주도했고, 재속사제로서 총대리로서 단순한 수도자로서 가졌던 경험을 토대로 스페인 교회가 가야 하는 방향을 잡았던 것이다. 그의 영향은 교회뿐 아니라 학문적인 영역이나 영성적인 영역 등 아주 광범위하였다.

 

먼저 그의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알칼라(Alcala) 대학의 창설이었다. 대학 창설의 첫 목적은 수도사제와 재속사제들의 질적 향상이다. 추기경은 대학이 교회학문의 중심이 되게 하였으니, 프랑스의 대학이 세속적인 인문주의를 가르쳤다면 알칼라 대학은 교회 인문주의를 가르치게 하였다. 알칼라 대학의 모범을 따라서 스페인 전역에 많은 대학들이 창설되었다. 인문주의 학문이 고전에 심취하는 것이라고 하였을 때 알칼라 대학은 고전 중에서도 교부들을 연구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고전 라틴어뿐 아니라 그리스어와 아랍어, 시리아어 등도 공부함으로써 더욱 완벽한 교부들의 저서를 이해하려고 하였다.

 

당시에 유행한 인문주의는 이 대학에서는 성스런 학문연구의 도구가 되었다. 학자들이 인문주의자였지만 연구가 교회와 신앙에 필요한 것이기를 바랐다. 대학의 많은 업적 중에서 성서를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출판하게 한 것이다. 히메네스 추기경은 알칼라 대학에 독일인 기술자를 불러서 최고의 인쇄소를 차렸다. 이 인쇄소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힌 “그리스도의 생애”를 출판하였을 뿐만 아니라 16세기 중엽까지 종교개혁을 반박하는 저서들의 출판의 중심지가 되었다.

 

추기경의 노력은 재속사제와 수도생활의 개혁에도 이어졌다. 재속사제의 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왕에게 고위 성직자 선정에 직무와 의무에 합당한 자를 선택하도록 권하고, 1497년과 1498년의 두 번의 시노드를 통해 사목을 강조하고 사제직의 고귀함을 일깨우쳤다. 사제들은 자주 스스로 고해성사를 보고 미사를 봉헌하며 거주의무를 지키고 모든 주일에 강론을 하고 어린아이에게 교리교육을 시키고 성사대장을 제대로 관리하도록 하였다.

 

수도생활의 개혁은 베네딕토회, 아우구스티노회와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등에서 개혁을 주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커다란 성공을 보았다. 특히 프란치스코회나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등은 단순히 수도규칙 준수나 생활의 엄격성을 되찾는 일을 넘어서 사도적인 열성이 솟아나게 하였다. 이런 열성은 스페인 안의 이단자 집단을 개종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함으로써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이곳에 선교할 수 있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히메네스 추기경이 시작한 교회의 진정한 개혁운동은 스페인에서는 그의 사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수도생활의 대개혁가, 수도원 창설자, 영성 저술가, 대선교사, 대영성가가 16세기 스페인에서 탄생할 수 있었다. [경향잡지, 1996년 6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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