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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28: 수도원의 쇠퇴와 개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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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0 ㅣ No.182

[새로 보는 교회사 28] 수도원의 쇠퇴와 개혁기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 교회는 외적으로 커다란 위기에 처해 있었다. 흑사병과 전쟁 그리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와 교회의 대분열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달에 알아본 이런 현상은 쉽게 눈에 들어오는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역사를 분석해 간다면 사회혼란 속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사상과 사회풍조의 변화로 이에 따라 의식과 경제체제도 바뀐다고 할 수 있다.

 

사상의 변화는 13세기부터 발달한 대학들이 주도하고 이전까지 학문세계를 주도한 스콜라 학문과 상치되는 학문들이 유행하였다. 하지만 수도생활과는 먼 거리의 간접원인이므로 여기서는 사회풍조와 경제체제의 변화를 좀더 거론하기로 하겠다.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발을 했다. 고전 고대(그리스 · 로마)의 문학과 예술을 다시 살리는 활동에서 출발하여, 모든 학문과 사회구조 정치체제의 변화를 겪는 14세기에서 16세기에 걸친 모든 운동을 지칭한다. 이 운동의 사상을 인간을 강조하는 인문주의라고 하고 이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인문주의자(휴머니스트)라고 한다. 이들은 고전을 연구하고 비판정신을 가진 당시의 지성인들로서 부호들이나 왕가 특히 교황들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르네상스기의 풍조는 이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현세의 삶을 추구하고 향락을 찾는 것이다. 그러기에 돈과 권력을 탐하는 현실적인 삶을 선호했다. 동시에 중세의 공동체 정신은 희박해지고 개인주의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르네상스기의 교황들은 이런 풍조를 즐기고 문예를 후원함으로써 고전을 모으고 도서관을 설립하는 일도 하였을 뿐 아니라. 도시를 미화하는 데 많은 돈을 허비했다. 유럽의 아름다운 관광지의 많은 분수와 대성당들이 바로 이때에 지어진 것이다.

 

이렇듯 사회풍조가 사람을 중시하고 사치를 즐기고 향락을 추구하게 될 때는 자연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경제혼란

 

사회풍조가 부를 추구하고 축적하는 방향으로 바뀌면서 교회 사람들도 이런 풍조에 깊게 물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니, 지위는 더 많은 수업을 올릴 수 있는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상업이 발달하고 수공업이 발달하면서 도시는 전체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차츰 화폐경제가 이탈리아에서부터 전유럽에 확산이 되면서 교회는 경제적인 혼란을 겪는다. 교회의 모든 재산은 토지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본당이나 수도원이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농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공산품의 가격은 상승하는 반면에 농산품의 가격은 제자리 걸음이거나 상대적으로 값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특히 수도원들은 이러한 경제혼란의 와중에서 물방앗간이나 곡창이 파괴되고 수도원 소속 농기들마저 사라져버리는 바람에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따라서 수도자들은 영적이고 지적인 생활에 관심을 쏟기 이전에 재산관리와 수도원 유지에 힘을 쏟아야 했다.

 

그러나 수도원의 경제를 어렵게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수도원이 봉건제와 아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부동산이 많은 수도원 원장직에 귀족의 아들을 임명하도록 하였고, 성소가 있어서 원장이 된 것이 아닌 이들은 가난 서원을 지키지 않았다. 자연히 가난한 삶을 살지 않았고 봉쇄구역도 지키지 않았다. 수도원의 수입은 이들 원장들이 나누어가졌고 다른 직무자들도 수입을 챙기게 되니 자연히 영적 생활은 뒷전이고 물질적인 생활을 추구하게 되었다.

 

 

명의원장 제도

 

15세기에 수도원이 쇠퇴하는 또 다른 원인은 명의원장 제도였다. 이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수도생활의 쇄신에도 큰 장애가 되었다. 명의원장 제도는 그레고리오 개혁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세속 제후의 간섭과 지방 주교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유력한 교황청의 주교나 추기경을 명의원장으로 모신 제도였다. 다시 말해 수도원의 자유를 위한 방패막이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 제도가 이제는 경제적인 수입을 위한 제도로 바뀐 것이다. 특히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기고 난 후에 아주 많이 확산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수입이 없어진 추기경들이나 아비뇽의 교황청에서 일하는 고위직에 있는 이들이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서 명의원장 제도를 사용했던 것이다. 문제는 더 확산되어서 왕들도, 왕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는 영주들까지도 수도원의 수입을 다른 사람한테 보장받기 위해서 이 제도를 사용했다. 교회의 고위직에 있는 이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까지도 이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대분열 시기에는 교황들이 자기 편을 만들기 위해서 수도원의 수입을 보장해 주는 이 제도를 많이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이 제도는 수도원에 살지 않는 사람한테 수도원장 직책을 주는 것으로, 주로 주교나 추기경 등 고위 성직자들과 관계가 있었으나 차츰 평신자들한테로까지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이들은 원장 직책을 가지고 평생 동안 수도원의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수도생활에는 관심이 없는 이들이 필요한 수입만 챙기고 이에 따라 더 많은 재물을 요구하다 보니 수도원이 피폐해지는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수도원은 이들 명의원장이 임명한 책임자가 관리를 하였지만 수도원을 영적으로 이끌 만한 권위가 부족했다. 명의원장이 원래의 직책에서 물러나 수도원에서 살게 되는 경우 가끔 수도자들을 혹사시키기도 하였다.

 

15세기 말경에 와서는 평신자 명의원장들이 수도원 한편에 거주하기도 했다. 이들은 봉쇄구역이 무색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들의 거주지에서 파티를 열고 호화로운 삶을 살면서 그 수도원의 내적 생활이나 봉쇄생활은 자연히 느슨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서 베네딕토 12세(1334-1342년)는 칙서를 반포해서 수도원의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자신이 시토회 수도자 출신이었기 때문에 수도원을 가난 정신으로 쇄신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는 성공했으나 그 효과가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그것은 귀족이나 명의원장들이나 이미 고기맛을 본 수도자들이 육식을 금하는 것을 거부하게 된 것이다.

 

베네딕토 12세는 수도자들의 교육에 힘을 쓰면서 수도원의 재산관리를 위한 제도를 제안했다. 즉 여기저기 흩어져있는 수도원들을 지역으로 묶고 참사회를 통해서 중앙집권화하는 제도였다. 즉 3년마다 지역 참사회를 열고 여기서 모든 수도원의 재정을 감사하고, 또한 참사회에서 선정한 사람에게 순회감사를 맡도록 하는 것이었다.

 

베네딕토 12세 교황의 이 제안이 바로 효과를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개혁을 위한 노력의 한 방안으로 남아, 15세기 중엽에 이탈리아의 개혁 수도원들은 바로 수도원 연합체를 구성해서 명의주교를 없앨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파도바 지역의 수도원들이 연합을 구성하고 각 수도원의 장상들이 참석하는 참사회를 해마다 열고 원장들이 해마다 수도원을 돌아가면서 지휘할 뿐만 아니라, 수도자들도 수도원을 서로 바꾸어 살게 함으로써 명의주교의 한 수도원 지배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이 시기에 구체적으로 부패가 어느 정도였냐고 궁금해 한다. 윤리적으로는 어떠했으며 하는 따위로 말이다.

 

그러나 누가 수도원에 살면서 재산을 어떻게 모으고 여자 관계가 어떠했다 하는 식의 이야기는, 첫째 자료가 부족하고 구체화할 수 없는 문제이다. 다만 14세기 15세기의 경제적인 변화와 사회상황과 세상풍조가 바뀌면서 수도생활이 전반에 걸쳐 제자리에 있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수도원들이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면 동시에 또 다른 모든 상황과 함께 쇠퇴기를 겪고 혼란스러웠다는 것이다.

 

 

명문 수도원

 

독일지역은 명의원장 제도가 거의 없었던 반면에 다른 현상이 수도정신을 희석시켰다. 즉 명문가의 자녀들만 받아들이는 수도원이 생긴 것이다. 당시에 명문가들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은 수도자가 되기를 바랐고 이를 가문의 영광으로 알았다. 따라서 성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가문 때문에, 아니면 부모의 명에 따라서 수도생활을 하는 경우가 생겼다. 물론 이러한 경우에 진정한 성소를 바랄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올바른 수도생활을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특히 당시 여자 수도원은 숫적으로 남자 수도원보다 월등히 적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경우에 수녀들은 사회에서 가문으로나 재산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집 출신이었다. 성소가 있어 수도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가문을 빛내기 위한 수단으로 수도원에 들어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경향잡지, 1996년 4월호, 구본식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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