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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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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목] 가정과 여성: 성경 속 여성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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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6-04 ㅣ No.620

[경향 돋보기 - 가정과 여성] 성경 속 여성 들여다보기


“집이란 인기척에 따라서, 살고 있는 사람의 손길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참 좋은 집이 되었다가 참 이상한 집이 되었다가 그러는 것 같습니다. … 아무래도 집은 그 집에 사는 사람이랑 닮아지는 것 같습디다.” 몇 해 전 우리 사회에 엄마에 대한 신드롬을 일으켰던,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251-252쪽)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엄마의 시점에서 적고 있다.

집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엄마에 대한 어릴 적 추억이 아닐까. 엄마가 끓여주시던 구수한 내음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된장찌개며, 일일이 가시를 발라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 위에 올려주시던 흰 생선살이며, 집안 구석구석 먼지 하나 없게 쓸고 닦으시던 엄마의 모습. 엄마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엄마는 그렇게 처음부터 엄마였다. 엄마의 다른 모습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내 나이 중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엄마를 바라보게 되는 요즘, 난 엄마의 다른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엄마도 한 여성이었다는 것을. 여성으로서 엄마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보았을까?

이런 상상에 잠기다 보니, 생각의 꼬리가 성경에까지 미친다. 성경 속 여성의 모습은 어떠할까? 가정이란 울타리에서 자신들만의 존재감을 어떻게 드러냈을지 그들의 삶을 엿보고 싶었다. 아울러 가정이란 울타리를 벗어나 제 이름으로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던 여성들의 삶도 볼 수 있을 듯하다. 그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자.


사적 영역인 가정 안에서 여성의 역할

가정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바이트 아브’로, ‘아버지의 집’이란 뜻이다. 이 표현으로 보건대, 한 가정의 주인은 아버지임을 알 수 있다. 부계 중심의 가정에서 아버지는 자녀에 대한 부권(夫 權)을 가지며, 남편은 아내를 소유물로 여기고(탈출 20,17; 신명 5,21) 아내의 주인으로 여겨진다.

히브리 사회에서 아버지는 딸아이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부권을 갖는다. 열두 살이 넘어 혼인하게 되면, 딸아이에 대한 부권은 남편에게로 넘어간다.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과 이방인을 제외하면, 혈연으로 맺어진 대가족의 한 집안은 부모와 자녀 등 여러 세대가 조상들의 땅에서 함께 살았으며, 최고의 권위는 족장인 아버지에게 있었다.

부계 중심의 가정에서, 아내와 어머니라는 전통적 여성상으로서 여성은 가축 떼를 돌보고 밭에서 일도 하며 낟알을 갈아 가루를 내고, 빵을 굽고 빨래를 하며, 젖먹이에게 젖을 물리고 잠자리를 준비하며, 옷감을 짜고 남편의 얼굴과 손발을 씻어준다.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여성이 집 안에서 책임감 있게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이러한 상황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서만 집안일을 하며 생활해야 했던, 고대 그리스 여성에게도 해당된다. 당시 공공장소는 전통적으로 남성에게만 허용되었다. 남성은 시장과 법정을 자유로이 드나들며 공적 연회와 극장, 강연장에 공개적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기원후 1세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유다인 철학자 필론은,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영성은 사적 영역에서 활동하라고 권면하기까지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공공장소와 의회, 법정, 단체 활동이나 모임, 전쟁과 평화에 관한 대화나 이를 공개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이 모든 일은 남자들에게나 어울린다. 하지만 여자들은 집안살림을 돌보고 사회와 떨어져 사는 것이 좋다. … 따라서 여자는 집안일 외에 바깥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고독 또한 집 안에서 찾아야 하며, 성전에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방랑객처럼 거리를 나다녀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시 사회가 여성들의 역할을 집안에만 국한시켰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고 여성이 공적으로 활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특별한 경우에 여성이 공적으로 활약한 예가 있다. 아탈야는 아들 아하즈야가 죽자 유다를 통치하기도 했고(2열왕 11장), 여예언자 훌다는 사제와 서기관, 임금의 시종에게 조언을 하기도 한다(2열왕 22,14-20). 또한 유딧기와 에스테르기는 한 나라의 구원이 한 여인의 손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담고 있기도 하다.


하느님의 법을 전하는 어머니로서의 여성

가정이 사적 영역이라고 해서, 여성이 살림만 했던 곳은 아니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가정은 교육의 장이기도 했다. 가정에서는 부모 자식 간에(잠언 4,209), 형제들 간에(잠언 18,19) 가져야 할 태도며,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잠언 27-29) 교육적인 가르침이 전해졌다.

부모는 함께 자녀들 교육을 맡았는데, “내 아들아, 아버지의 교훈을 들어라. 어머니의 가르침을 저버리지 마라.”(잠언 1,8; 참조: 6,20)라는 대목이 이를 말해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야 할 책임이 어느 한쪽 부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부모에게 모두 있다는 점이다.

사실, 가정에서 가장 먼저 자녀를 교육하는 이는 어머니다. 오늘날에도 어머니가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면, 하루 스물네 시간 아이와 함께 있으며 모성을 한껏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어머니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아이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친밀감과 신뢰를 배우게 된다. 어머니는 어린 자녀들이 커가는 데 필요한 가르침을 주고, 다 자란 다음에도 어머니로서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잠언 31,1 참조).

반면, 아버지는 어린 자녀가 어느 정도 자라면 아들에게 종교적 내용뿐 아니라(탈출 10,2; 12,26; 13,8; 신명 4,9; 6,7.20-25; 32,7.46 참조) 엄격한 교육을 전하기도 한다(잠언 1,8; 6,20; 특히 집회 30,1-13 참조). 종교적 내용이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규정들로, 아버지는 이를 아들에게 가르친다(탈출 10,2 참조). 그뿐만 아니라 직업도 아들에게 전수한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가르친다면, 어머니는 훗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자녀의 어머니가 될 딸에게 아내와 어머니로서 알아야 할 모든 내용을 가르쳐준다.

구약성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거의 함께 언급하며 그들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탈출 20,12; 참조: 신명 5,16; 레위 19,3).

여성은 계약 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겨지지 않던, 남성 중심의 구약성경 세계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나란히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부모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전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자녀로부터 공경과 존경을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실로 부모가 가정에서 자녀에게 가르치는 일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하느님을 대변하는 이들이기보다는 자녀에게 하느님의 법, 곧 토라를 전해주는 이들이었다. 그래서 부모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녀들을 훈계했고, 자녀는 하느님께 순종하듯이 부모에게 순종했다.

“매를 아끼는 이는 자식을 미워하는 자, 자식을 사랑하는 이는 벌로 다스린다.”(잠언 13,24; 참조: 19,18; 23,14)라고 성경은 말한다. 부모가 자녀를 훈계하는 일은 자녀가 지혜를 사랑하며(잠언 29,3)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잠언 10,5) 복되게 살라고 일러주기 위함이다(잠언 7,2 참조).

연로하신 부모를 욕하거나(레위 20,9) 부모의 뜻을 거스르거나(신명 21,18-21) 도둑질이나 돈 때문에 부모를 버려서는(잠언 19,26) 안 된다. 부모를 멸시하는 행위는 계약 공동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하느님을 반역하는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복음 선포자로서 가정교회를 이끌었던 여성

예수님께서 혈연관계를 넘어 하느님의 새로운 가정으로서 신앙의 공동체를 제시하셨다면, 초기 교회는 개인 집에 모여 모임을 가지면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가정교회’다. 집안(household)은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다. 가정교회는 ‘집’이라는 사적 영역과 ‘교회’라는 공적 영역이 분리되지 않고 혼재되어 있던 터라, 여성은 사적 영역에서처럼 편한 마음으로 그리스도교에 매력을 느꼈을 수 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남녀 구성원은 ‘새로운 백성’이라는 이해 속에서 빵을 쪼개고 친교를 나누고자 가정교회에 모였다. 그야말로 하느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되어 가정교회 안에서 선교 파트너십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복음을 전하게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께 속해있다는 분명한 자의식 속에, 가정교회 안에서 형제자매애를 통한 친교와 사랑의 일체감을 나누었다. 그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으로 충만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성령의 권능 속에서 복음을 선포하도록 파견된다. 이제 하느님의 집안으로서 가정교회는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을 구성하며, 예외 없이 모두 ‘형제자매들’이 된다.

이제 가정이란 울타리를 넘어 가정교회를 이끌었던 두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자.

복음 선교사인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사도 12,12-17)는 교회가 박해받던 시절, 여성이 제 집을 공동체 모임 장소로 사용하도록 기꺼이 허용함으로써, 자신의 집에 모인 교회에 큰 활력을 불어넣으며 가정교회를 이끌었다. 요한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로서만 성경에 언급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녀의 집에 모여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복음 선포와 가르침을 전한다.

그리스도교가 처한 상황에서 볼 때, 가정교회를 이끌어가는 일은 투철한 신앙심과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일 터. 누구의 어머니로서만 머물지 않았던 그녀였다.

한편, 부부 선교사로, 가정교회 지도자로 언급되는 부부가 있다. 프리스킬라와 아퀼라다(사도 18,2-3.18.26; 로마 16,3; 1코린 16,19; 2티모 4,19). 부부 이름이 함께 나올 때는 보통 남편 이름이 먼저 나오게 마련인데, 아내 프리스킬라가 남편 아퀼라보다 앞서 나온 곳이 네 곳이나 된다.

이는 프리스킬라가 남편 아퀼라보다 사회적 신분이 더 높았고 장인인 남편보다 교회 안에서 더 활동적으로 일했다는 뜻이다. 그녀는 가정교회 지도자로, 부부 선교사로, 또한 복음 선교사인 아폴로에게 하느님의 길을 더 정확히 설명해 준 교사이기도 했다.

프리스킬라는 예수님께서 제시한 제자직의 모델로서, 유다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사회적 장벽을 허물고 참된 동등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여자, 아내라고 해서 남자, 남편에게 종속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교 선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투철한 자의식을 가졌던 것이다.

가정교회와 관련하여 여성이 신약성경에 거론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콜로 4,15; 필레 1-2; 로마 16,3.5; 1코린 16,9). 이는 가정교회 공동체 안에서 역할과 기능을 결정하는 것은 ‘직책’보다는 성령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 다른 모양으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성령의 선물, 곧 은사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1코린 12장 참조).

따라서 은사에는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다양성만 있을 뿐이며, 그 은사를 받은 이들을 서로 존중하여 교회 공동체 건설에 이바지하는, 공동선을 위하는 일만이 중요할 따름이다(1코린 12,7).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성령의 은사로 충만한 공동체였기에,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이던 사회의 틀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가치관에 충실할 수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인 「가정 공동체」는 가정을 ‘소규모의 교회’(가정교회)로 정의하며(49항 참조), “복음화의 장래는 대체로 가정교회에 달려있다.”(52항)고 강조한 바 있다. 신앙인의 관점에서 보면, 가정은 그 자체로 이미 작은 교회다. 하느님 사랑을 체험한 이들이 모여 그 사랑을 이웃사랑으로 구현해 나가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면, 가정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회와 교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세포로서 작은 교회인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사랑과 생명의 공동체, 사회의 기본 세포, 사회를 향한 열린 공동체, 친교와 섬김, 나눔이 이루어지는 작은 교회로 가정을 제시한다. 작은 교회인 가정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남녀 구분을 뛰어넘어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기며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으로서 신분을 뛰어넘는 열린 공동체를 지향해야 할 일이다.

* 이연수 마리아 - 가톨릭대학교 종교학과에서 성서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종교학과 대학원과 ELP 학부대학 인성교육센터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한국가톨릭문화연구원 연구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2년 5월호, 이연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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