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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27: 수도생활의 쇠퇴와 개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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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0 ㅣ No.181

[새로 보는 교회사 27] 수도생활의 쇠퇴와 개혁기

 

 

역사가 발전하면서 사회환경도 많이 달라져 긍정적인 변화도 있고 부정적인 쇠퇴도 있기 마련이다. 수도생활도 시대에 따라서 그 변화가 다양하다. 일방적인 역사가들의 견해에 따르자면 14세기부터 16세기 중반까지는 교회의 시련기인 동시에 혼란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련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역사적 사건이 이른바 ‘종교개혁’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시련기는 바로 수도생활의 쇠퇴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쇠퇴하는 과정에는 당연히 쇄신을 위한 노력이 따르지만, 주위 여건과 이제까지 만들어진 제도와 법과 축적된 관행 따위가 쇄신을 어렵게 하기도 한다. 이렇게 쇄신을 어렵게 하는 사회요인으로는 외적인 요소도 있고 내적인 원인도 있으며, 정치 사회 경제적인 변화도 요인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정신의 변화와 수도원 내부의 요인도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결정적인 요인이 무엇이냐고 하는 것은 사람에 따라, 나라에 따라 다를 수 있고 각 수도원의 특수한 사정이 원인인 경우도 있어 어떤 것이 결정적이라고 하기가 어렵다. 동시에 수도원이 쇠퇴하는 데는 사회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이유도 있기 때문에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쇠퇴의 원인이 되는 역사적인 정황을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여, 우선 외적인 요인부터 알아보고자 한다.

 

 

흑사병

 

1348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흑사병은 상업의 교역로를 따라서 유럽 전체에 확산되었다. 이는 간헐적으로 지속되었기 때문에 유럽의 경제와 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흑사병의 창궐은 공동체 생활을 하는 수도원에 가장 큰 타격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감염되면 별다른 치료 없이 한적한 곳으로 요양을 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던 상황에서 수도원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남부의 몽펠리에(Montpellier)에서는 140명의 수도자들 가운데 겨우 일곱 명만이 살아남았다.

 

흑사병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구가 밀집된 도시나 수도원을 떠나야만 하였다. 이렇게 수도자들은 수도원을 떠나 밖에서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게 되었다. 따라서 흑사병이 지나가고 난 뒤 살아남은 이들이 다시 모였을 때는 이전의 조직이나 규칙을 재건하기가 어려웠다. 흑사병의 재앙은 국가나 교회의 전반적인 체제가 일시적으로 무너지는 사회변화를 가져왔다. 수도원에는 그 여파가 오래갔는데, 규칙과 조직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보충된 지원자들의 자질저하로 인한 것이다. 동시에 흑사병으로 생성된 세속주의가 수도원에도 침투되어 수도정신의 재건도 상당한 기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쟁

 

14세기에는 기근이 또한 심각한 문제였다. 1315년의 대홍수로 인해 극심한 흉작이 있은 뒤에도 여러 차례의 홍수로 심각한 식량난을 겪었다. 사람까지 잡아먹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기근이 심한 상황에서 유럽의 또 다른 재해는 바로 전쟁이었다.

 

14세기초부터, 봉건제도에서 절대 왕정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국가간의 전쟁을 비롯하여 독일의 제후국들간의 전쟁이 유럽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1338~1453년)과 영국의 두 가문간에 벌어진 장미전쟁(1455~1485년) 따위가 잇따랐으며, 이런 와중에 오스만터어키가 1354년부터 발칸 반도에 상륙, 유럽을 위협하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로 봉건제후들이 몰락하고 왕권은 신장되었지만 수도원들은 바로 이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전쟁은 군인들만의 싸움이 아니고 보니, 농토는 황폐해지고 약탈로 가축은 도살되는 등 전장에 속하는 지역은 직접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약탈의 대상이 되는 곳이 바로 수도원인 동시에, 수도자들은 어느 한편에 가담하는 군인이 되어야 했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배

 

우연하게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게 된 사건이 중세교회의 권위를 추락시키고 교회일치를 해치는 한편, 교회와 수도원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친 대분열의 시대를 가져왔다.

 

아비뇽에 교황청이 머물게 된 동기는, 보르도 대주교 출신으로 교황으로 선출된 클레멘스 5세(1305~1314년)가 언젠가는 로마로 갈 생각이었지만 프랑스 왕과의 관계, 그리고 비엔느(Vienne) 공의회(1311~1312년) 준비와 그 참가 문제로 교황청의 땅이었던 아비뇽에 머물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바로 이 사건이 교황이 로마로 귀환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게다가 프랑스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이탈리아 침입으로 이탈리아는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으며 교황령 국가에서조차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로마에서는 프랑스인 교황에 대한 반대시위가 있어 교황청은 프랑스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아비뇽에 계속 머물게 된다. 1377년 교황청이 로마로 귀환하기까지 70년 동안 일곱 명의 교황이 아비뇽에 머물게 되는데, 아비뇽에 교황이 있는 동안에 백년전쟁이 일어나고 흑사병이 창궐했으며 기근이 유럽 전체를 휩쓸었다.

 

경제 사회 변화가 심각한 상황에서 전세계 교회를 이끌어나갈 교황청이 프랑스 왕의 영향 아래 있었으므로,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의 생활과 조직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동시에 독일지역에서는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어 “교회는 성직자들의 교회가 아니라 평신도들의 교회”라는 평신도주의가 나오게 되니 교황청의 권위 자체가 실추되기에 이른 것이다.

 

교황이 아비뇽에 머무르는 동안에 교황들은 행정적인 능력도 있고 개인적으로 신심도 있었으며 권위도 있어서 나름대로 나쁜 상황을 잘 헤쳐나갔다. 하지만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정치적으로 가장 강력한 프랑스 왕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추기경단이나 교황청의 주요 자리를 거의 프랑스 사람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자 다른 나라 백성과 교회가 보기에는 교황청이 마치 프랑스 국가의 한 부분이 된 것처럼 보였다.

 

 

교회의 대분열

 

시에나의 가타리나 성녀의 지혜로운 노력과 기도로 드디어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을 1377년에 로마로 되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전쟁으로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교황도 로마에 온 지 14개월 만에 서거하여 분열의 조짐이 일기 시작하였다.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을 잇는 교황선거에는 열여섯 명의 추기경이 참석하였다. 이 추기경단은 이탈리아인 네 명과 스페인 추기경 한 명 그리고 나머지 열한 명이 프랑스인 추기경이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로마인 교황을 원했고 적어도 이탈리아 사람이어야 한다고 시위하고 있었다. 이에 추기경단은 이탈리아인이면서 아비뇽에서 오랫동안 일한 바르톨로메오 프리냐노(Bartholomeo Prignano)를 선출하였다. 이때 상황을 잘 모르는 로마인들이 바티칸을 습격하는 사건이 생겼다. 그러나 이탈리아인이 선출된 것을 알고는 추기경단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들의 동의 아래 교황에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르바노(Urbano) 6세 교황은 화해와 타협보다는 개혁이란 이름으로 추기경들의 특권을 없애는 등 추기경들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이탈리아 북쪽으로 도망을 가서 다섯 달 전에 있었던 교황선출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닌 위협 속에서 선출된 것이므로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프랑스 왕의 보호 아래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에 이른다. 클레멘스 7세라고 이름 지은 또 다른 교황이 교황청이 있던 아비뇽을 거처로 삼았다. 따라서 양쪽 교황은 유럽 전체에 자신의 편을 만들기 위해 반대편은 모두 파문시켰다. 모든 나라들이 어느 한 편을 선택하면서 교회가 갈라졌고 정통 교황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두 갈래의 교황선출이 이어지면서 39년(1415년) 동안 지속되기에 이른다.

 

대분열의 시기에 교회가 받은 타격은 무척 컸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공의회를 여러 차례 열었고 공의회가 교황의 권위 위에 있다는 공의회주의가 싹텄으며, 교회 안에서 국가의 이해를 먼저 생각하는 국가주의들이 형성되었다. 또한 교회의 모든 조직이 두 파로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수도생활에도 극심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몽세라(Montserrat) 수도원에서는 로마 편인 수도자들과 아비뇽 편인 아바스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코르베이(Korvey) 수도원에서는 수도자들이 갈라져서 각각 자신들의 아바스를 선출하여 두 아바스가 격렬하게 대항하였다. 이렇게 각 수도원이 어느 한 편을 선택하여 다른 편의 권위는 무조건 무시하였기 때문에 수도원은 쇄신하기가 힘들었다. 어느 편이든지 자신들은 정통 교황한테 인정을 받았고 다른 펀은 비정통 교황이기 때문에 장상이라도 권위를 가질 수가 없었다. 한 수도원에서도 원장과 부원장이 서로 다른 편이 될 정도로 그 혼란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대분열의 혼란 속에서도 적절한 쇄신을 지속시켜 나간 수도원도 있었지만, 수도생활 정신이 전반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경향잡지, 1996년 3월호, 구본식 신부(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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