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수도 ㅣ 봉헌생활

새로 보는 교회사26: 중세 여자 수도원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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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10 ㅣ No.180

[새로 보는 교회사 26] 중세 여자 수도원 조직

 

 

항간에 하느님께서 모르시는 일 가운데 하나로 지금 있는 여자 수도회 숫자를 말하기도 한다. 그것은 수녀회 숫자나 활동이 대단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여자 수도회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지 못하다. 그 이유는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성덕이 모자라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열정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사회 상황과 관습 그리고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안전문제 때문이었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세 초기에는 사회 전체가 안전성이 없었고 10세기까지 북방인들의 약탈이 끊임없이 있어왔기 때문에 남자 수도원 자체도 안정되지 못하고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생애를 통해 따르려고 했던 동정녀나 과부들은 가정에서 봉헌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여지들의 공동체 생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성 베네딕토 회칙을 따르며 수도원 아바스의 지도를 받는 수녀원과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따르며 본당 옆에 살면서 사제공동체의 지도를 받는 공동생활, 그리고 처녀나 과부들이 교구 주교의 지도를 받는 형태 등이 있었다.

 

여자들의 수도생활을 그림 그리듯 명확히 서술할 수가 없는 것은 모양도 다양하려니와 사료가 부족한 것 등이 이유가 된다.

 

 

복수 수도원

 

그레고리오 개혁시대를 거쳐 수도지들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라 살려는 사람들의 설교와 은둔지들이 많아지자 이들의 영향으로 여지들도 순수한 관상을 선호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따라서 남자수도원보다는 현저하게 적고 또 역할도 미비했지만 12~13세기에 들어서서 여자들의 공동체생활도 많아졌다. 당시 사회는 수녀들이 봉쇄구역을 떠나서 활동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고 다만 전례와 관상으로만 생활하기를 원했다. 영적지도 문제와 안전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남자 수도회는 많은 여성 성소자들을 위한 집을 따로 마련했다. 벽으로 구분된 복수 수도원은 수도생활 초창기부터 있었고, 중세에 와서는 여성 성소자들의 증가와 함께 더욱 증가하였다.

 

그러나 1215년에 이르러 헌장 등을 통해서 복수 수도원의 증가를 금지시켰다. 하지만 여성 성소자들의 문제를 당시로서는 만족하게 해결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여성들의 수도생활 형태를 알아보자.

 

가) 퐁테브로(fontevrault)형

 

‘그리스도의 가난’을 따르려는 수녀들을 위해 남자 수도자들이 봉사하게끔 만든 제도였다. 수녀들의 관상생활을 안전하게 보장하고 수사들이 외부 일과 전례 일을 하게끔 만든 제도로서, 수녀들은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을 따르게 하고 그보다 적은 수의 사제들과 보조 수사들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따르게 하였다. 즉 여성들은 완전한 관상생활을 하고 남성들은 활동을 위한 규칙을 선택한 것이다. 여기서는 수녀원장이 최고 책임자로서 모든 수도원의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였다. 수녀원장이 영적지도와 물질적 행정을 보좌하는 수녀를 두기도 했으며, 사제들은 수녀원 밖의 작은 집에서 생활에 필요한 식품 등의 일을 관리했다.

 

나) 셈프린강(Sempringham)형

 

여성들의 수도생활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은 셈프린강의 본당신부였던 질베르토(Gilberto 1093~1189년)가 만든 형태가 있다. 1139년서부터 수도생활을 원하는 처녀들이 모였고 이들의 지도를 시토회에 부탁했으나 1147년에 거절당하자 이들을 위한 수도원을 창설하게 되었다. 이때 열한 개 정도의 수도원이 생겼으며, 이 수도원의 중심은 수녀들로서 베네딕토회 규칙에 따른 관상생활을 하였다. 이들 수녀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따르는 사제공동체를 만들었고, 동시에 보조 수사들은 시토회의 보조 수사들의 형태를 따른 복합 수도원 형태를 띄었다. 사제들은 영적지도를 책임맡고 보조 수사들은 물질적인 일과 외부 일을 책임지게 하였다.

 

수녀들은 본당의 사제관 옆에 집을 마련하였고 퐁테브로와는 달리 성당을 공동으로 썼다. 즉 수녀회로 들어오는 통로와 성당을 벽으로 막아 달리함으로써 전례문제를 해결하였다. 이 수도원의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절대적인 권한을 가진 지도자를 뽑고 그 밑에 수녀들 대표와 사제들 대표와 남녀 수도생활을 감시하는 사람들이 모인 참사회가 문제들을 논의했다. 하지만 이 제도 역시 여러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해 크게 확산되지는 못했다. 여기서는 보호하는 남자들이 모든 책임을 맡았다.

 

 

여자 수도원의 조직

 

16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수녀들의 활동이 다양해지고 또 그 중요성이 인식되기에 이른다. 그 전에는 여성들이 관상생활을 하기 위한 적절한 방안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 형태가 다양할 수밖에 없었다. 여성들만의 독립된 수도원도 안전문제가 많았고, 남자 수도원의 예하에서도 적절한 해법이 찾아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그 모든 문제를 덮어두고 일반적인 조직을 알아보자.

 

먼저 수녀회는 관상생활을 했지만 안전과 생계수단 때문에 도시 안에 자리잡았다. 공동체의 인원은 수입과 필요에 따라 정해졌지만 형편을 고려해서 대개는 인원을 고정하였고 이를 엄격히 지켰다. 시토회에서는 인원이 넘는 것이 수녀원장을 면직시키는 사유가 되기도 했다.

 

보조 수녀들은 숫자가 고정되었지만 14세기부터 재산을 수녀원에 기탁하고 들어와 사는 사람의 숫자는 제한이 없었다. 수녀들은 처음 들어올 때부터 완전히 기도와 고행만 하는 사람과 경제적 자선적 지적 활동을 하는 수녀들로 갈라져 있었다. 농삿일도 동냥도 할 수 없는 수녀들은 기본적인 재산이 있었다. 그 재산은 정해놓은 기부금이나 지참금이나 봉사의 대가 등으로 형성된 것이다.

 

가) 여자 아바스

 

베네딕토회나 시토회에서는 여자 아바스를 투표하여 수녀들이 선출하였다. 보니파시오 8세(1303년 사망) 교황 때 이 규정이 정해졌는데, 선거권은 서원 뒤 12년을 넘겨야 하고 피선거권은 대서원을 지난 지 30년이 되어야 했으며, 처음 선거에서 삼분의 이 찬성을 얻지 못하면 선거가 무효가 되고 반대자들의 반대 이유를 정밀하게 조사하기도 했다. 선출이 되고 주교에게서 인준을 받으면 축복을 받고 아바스로 확인되었다는데, 이 원장직은 대체로 종신직이었다. 그러나 모든 법의 적용과 마찬가지로 선거는 항상 객관적이고 정당하게 치르기 힘들고 어떤 힘에 좌우되기 쉽다. 그 힘은 신분이 귀족이라는 것일 수도, 많은 재산을 유산으로 받은 것일 수도, 주변의 권력일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공작의 딸은 불과 22세에 원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여자 아바스는 특정 관할권을 가지고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물질적인 재산을 관리하는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지도 역시 여자 아바스의 권한이었다. 그러나 수녀들에게 수건을 씌워주는 등의 일은 따로 임명된 명의 아바스에게 순명하게 되어 있었다. 수녀원에 봉사하는 성직자들을 임명하기도 하였고 또 직무해제도 하였다. 따라서 어떤 여자 아바스는 거의 주교와 같은 관할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런 여자 아바스는 남자 아바스와 같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맹렬 여성들이었다.

 

따라서 교황청은 여자 아바스의 권한 남용에 대해서 개입을 하기도 했다. 여자 아바스가 설교를 하고 축복을 주는 일을 금지했다. 인노첸스 3세 교황은 성모님도 여자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영적 권한을 받지 않으셨다고 상기시켰다.

 

베네딕토 성인의 규칙과 여자 수도원은 재산과 함께 권위를 누렸기 때문에 가끔은 성소에 관심이 없는 여자 아바스도 있었다. 따라서 여자 아바스는 수녀원에 거주해야 한다는 훈령을 자주 받는다. 여러 달 또는 여러 해를 수녀원을 비우는 일을 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자 아바스처럼 수녀원 안에 따로 거주하면서 손님들을 초대하고 화려한 삶을 살기도 했다. 엄격한 생활로 수녀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페캄(Peckham)의 장부 등에 나타나는 대로 친구들과 친척들 그리고 동물들을 키우면서 세속적인 삶을 산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14세기의 혼란 중에 더욱 가중되었다.

 

거지 수도회의 규칙을 따르는 수녀원의 경우, 여자 아바스는 공동체와 따로 살지는 않았다. 규율이 엄했고 형식적으로는 베네딕토회 규칙과 비슷했다. 아바스는 평생직이었지만 일반적인 관습으로 수녀원을 이끌었다. 글라라회에서는 여자 아바스가 모든 서원자가 참석하는 회의나 참사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프란치스코회 총장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도미니코회는 여자 아바스(Badessa)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원장(Priora)이라고 하였다. 1259년 헌장으로 잠시 임명하기도 했지만 자유로운 선거에서 선출하였고, 남자 수도원장의 통제 안에서 수녀원을 관할했다고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규칙을 따르는 사제공동체의 지도를 받는 수녀회들도 남자 수도원장의 영향력이 컸다고 한다.

 

[경향잡지, 1996년 2월호, 구본식 신부(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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