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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보는 교회사23: 프란치스코회의 가난에 대한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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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8 ㅣ No.177

[새로 보는 교회사 23] 프란치스코회의 가난에 대한 논쟁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상을 포기하고 가난한 생활을 강조하는 일은 고행생활을 하려는 모든 수도회와 모든 수도자들의 이상이다. 그러나 가난한 생활에는 항상 이견이 있어 끊임없이 논쟁을 일으켰는데, 개인이 어느 정도 물질을 가질 수 있느냐는 문제와 수도회가 어느 정도의 재산을 가져야 하는가에 초점이 모아졌다. 가난에 대한 정신과 물질을 사용하는 정도는 오늘날에도 수도자 각자에 따라서 다르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청빈문제에 대해서 엄격한 사람과 세상에 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는 이것도 저것도 필요하지 않느냐는 좀 느슨한 생각을 하는 사람 사이에서 논쟁은 끝이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완전한 가난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난과 고행의 생활을 복음서가 말씀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뜻이, 성인 사후에 그 제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탁발 수도자의 시대로 일컫는 13세기 유럽에서, 교회나 사회 문제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면서 숫적으로도 수도자가 가장 많은 프란치스코회의 논쟁은 아무래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치스코회는 예수회가 나타나기 전까지 교육과 신학 그리고 학문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상황과 이단문제, 교회의 성사생활 등 전반에 걸쳐 많은 일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본당신부나 주교들과 마찰을 빚었으며, 대학에서는 독특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등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가난에 대한 논쟁은 l4세기의 어려운 유럽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4세기 유럽은 아주 어려운 시기로 대결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교황직과 황제직의 싸움이 고조되었고, 백년전쟁이 일어났으며, 유럽 전역을 공포로 몰아넣은 흑사병이 창궐하였다. 이때 교황청은 아비뇽에 가 있었으므로 교회는 더욱 어려운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발생한 가난에 대한 논쟁은 작은 문제 같으면서도 모든 상황과 맞물려서 교회의 일치된 힘을 감소시켰다.

 

 

엄격주의자들의 탄생

 

가난에 대한 논쟁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아있을 때 이미 시작되었으나, 성인 사후에 두 번째 창시자인 성 보나벤투라(1254-1274년)가 주장한 중용의 길로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보나벤투라 성인 사후에 공동생활을 선호한 사람들이 수도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부동산을 소유하고 고정수입을 가지며 큰 성당들을 건축하자, 가난을 복음서의 문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엄격주의자들이 이단적인 교리를 받아들이고 단체를 형성하면서 논쟁은 과열되기 시작하였다.

 

이단적인 교리는 카라브리아의 시토회 원장 요아킴(1202년 사망)의 사상에서 출발한다. 그는 시대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시대로 나누고, 성부의 시대는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로, 율법과 물질과 결혼한 평신도들의 시대라고 하였다. 성자의 시대는 성직자들의 시대로, 물질과 영적의 중간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시대이며 수도자들의 시대가 도래하여 교계제도와 물질에 물든 교회는 없어지고 완전한 성령의 교회가 생성되어야 하며, 이 일을 위해 새로운 수도회가 탄생된다고 하였다. 이 사상을 프란치스코회의 보르고의 제라르도가 1254년에 플로레의 요아킴의 저서를 “영원한 복음”(Evangelium aeternum)이라는 소개서를 만들어,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새로운 예언자로 다스리는 사람이며, 프란치스코회는 바로 새로운 수도회라고 주장하고 완전히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들 엄격주의파들은 자신들을 ‘영적인 사람(Sprituali)’이라면서 공동체의 형제들과 구별하려고 하였다.

 

좀더 구체적으로 활동을 지도한 사람은 베드로 올리비(Olivi, 1248-1298년)로, 그는 ‘영적인 사람’ 단체를 이끌며 완전한 가난을 강조하였다. 즉 모든 철학연구를 부정하고, 꼭 필요한 옷과 음식 이외에는 완전한 가난을 서약하고, 프란치스코 성인의 규칙과 복음대로 살며, 모든 교황청이 내린 특권은 불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이들을 고무하는 일이 얼어났는데 그것은 첼레스티노 5세 교황의 등극이었다. 교황 선거단인 추기경들의 당파 싸움으로 2년 3개월 동안 교황 선거를 끌어오다가 어느 편으로도 기울지 않는 명성있는 은수자인 첼레스티노 5세를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들 단체에 호의적이던 교황은 다섯 달 뒤에 스스로 물러나고, 첼레스티노 5세와는 정반대로 정치적이며 법률가인 보니파시오 8세가 새 교황이 됨으로써 수도회와 교황청의 불협화음이 시작된다.

 

올리비 다음에 지도자가 된 사람은 카살레의 우베르티노였다. 우베르티노는 첼레스티노 교황이 허락한 모든 특권을 무효화한 새 교황을 반그리스도이며 위선자라고 공격하였다. 따라서 영적인 사람들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되었다.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기고 난 뒤에 아비뇽 교황청에 후원자들을 가진 우베르티노는, 프란치스코회의 중용의 길은 이미 가난 서약을 지킬 만한 서원이 못되고 규칙은 의미가 없어졌으니, 규칙을 문자대로 살기를 바라며 완전한 가난을 지키려는 사람들을 내버려두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교황은 비엔느 공의회(1311-1312년)에서 올리비의 이단적인 교리는 단죄하고, 가난에 대해서는 우베르티노의 주장을 수용하였다. 즉 모든 작은 형제들은 규칙이 말하는 문자대로 따르는 것이 의무라고 규정하였지만, ‘영적인 사람’들이 공동체로 돌아가는 문제나 장상한테 순명하는 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이러한 결정에 처음에는 양편이 다 만족한 것처럼 보였으나, 새로운 총장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사건이 생기게 된다.

 

새 총장이 된 체세나의 미카엘은 고집센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 요한 22세 교황의 도움을 받아 회원들한테 순명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교황은 1317년 엄격주의파들을 아비뇽으로 오게 하여 수도자한테 가난보다는 순명이 먼저 중요하며, 장상은 수도회의 모든 생활과 활동을 결정하고 순명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고집스럽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종교재판소에 보내어 그들 중 네 명은 화형시켰다. 여기서 이탈리아의 이단적인 분파가 생겨나고 수도회에서 이탈하여 자기들만의 단체를 결성한 극단론자들이 생겼다.

 

 

청빈에 대한 논쟁

 

가난을 엄격하게 지키려는 열성적인 사람들을 박해하는 데 함께 힘을 모으던 교황과 총장은 이제 서로 대립하게 된다. 재정에 밝은 요한 22세 교황은 일흔두 살에 교황이 되어 아흔 살까지 살면서, 교회의 많은 수입을 아비뇽으로 들어오게 만든 장본인으로 교황청을 부정적인 눈길로 바라보게 하는 데 기여하였다.

 

문제의 발단은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개인적으로나 단체로서 재산을 가졌느냐 아니냐는 이론이었는데, 이 이론은 당시의 속권과 교권의 대결에 묘한 영향을 끼쳤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고 세상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않으셨다면, 세상일이나 물질에 대해서 영적 권한을 가진 교황은 아무런 권한이 없고 황제가 세상사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동시에 사유재산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계명 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죄 후 죄의 결과로 인간에게 나타난 것인지 하는 이론적인 문제였다.

 

이 같은 이론적인 문제가 교황청 재판소에 상정되었을 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장상들은 판결이 나기 전인 1322년에 회원들한테 회람을 돌려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며 그것은 가톨릭 안에서 건전하고 확실한 신앙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교황은 장상들을 감옥에 가두고 새로운 장상들을 선출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러자 이들은 교황과 대립관계에 있는 황제한테로 도망가 먼저 요한 22세 교황을 반대하고, 다음에는 교황직 자체를 약화시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이때 이들은 평신도주의를 주장하고 교회의 세속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이들 중 파도바의 마르실로와 윌리엄 옥캄 등이 유명하다. 특히 옥캄은 ‘유명론(Nominalism)’을 주창한 사람으로서, 처음엔 아비뇽에서 커다란 역할을 하다가 교황과 가난 문제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교회의 교계제도와 교리를 정면으로 반대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쨌든 창시자 프란치스코의 정신과는 반대로 교회를 위해 순명하지 않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이다.

 

 

논쟁의 해결

 

모든 수도자들이 다 교황청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를 한 것은 아니다. 현실로 돌아와 교황한테 순명을 하였으나 가난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중에는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교황이 생기고 교황청이 두 군데나 생겨 모든 사람이 다 파문되는 대분열의 상황을 겪게 되고 흑사병이 찾아와 대부분의 수도자들이 희생되고 난 후에 두 개의 다른 모양으로 갈라지면서 해결의 조짐을 보였다. 말하자면 ‘규칙 준수자’와 ‘공동체 생활자’로 구분되기 시작했는데, 전자는 공동체에서조차 재산과 고정적인 수입과 부동산을 거부한 반면에, 후자는 공동의 재산과 수입을 가졌다.

 

1517년에 레오 10세 교황은 ‘규칙 준수자’들이 자신들의 총장을 선출하고 하나의 새로운 회로 독립하도록 함으로써,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프란치스코회(O.F.M.)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O.F.M. corv.)로 갈라지게 되어 각기 활동하면서 발전해 나가게 된다. 세 번째의 다른 공동체는 프란치스코회가 둘로 나뉘어 얼마 뒤에 생겨났는데 큰 문제없이 인가를 받았다. 프란치스코 카푸친회(O.F.M. cap.)라고 부르는 이 회의 명칭은 일반대중의 별명에서 유래한다. 이들은 끝이 뾰족하고 긴 삼각형 형태의 모자 ‘카푸치오’(cappuccio)를 쓰고 다녔는데, 이 모자 이름에서 카푸친회라고 하게 되었다. 그들의 또 다른 특징은 회원 모두가 수염을 길렀다는 것이다.

 

이들은 새로운 청빈생활로 개혁운동을 일으켰는데, 이탈리아 중부 안코나 지방에서 바시오의 마태오(1552년 사망)와 포솜브로에의 루도비코(1555년 이후 사망) 등이 중심이 되어, 더욱 엄격하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활을 닮고 규칙과 복음서를 문자대로 철저히 더 생활하고자 하였다. 1525년경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1528년에 이미 클레멘스 8세 교황이 이들의 새로운 창설을 인가하였고, 1608년 바오로 5세 교황은 ‘Ecclesiae Militantis’라는 칙서를 통해 카푸친회가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는 하나의 또 다른 회라고 인정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상과 삶과 활동과 청빈한 생활은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적인 요구에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 카푸친회는 성인의 영적 유산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인이 살던 초기의 모습대로 살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다른 두 회와 차별화하였다. 카푸친회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초기 모습대로 살면서 독일과 스위스 등지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을 저지하고 이교인 지방의 선교에도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이어받은 또 다른 회는 제3회이다. 세속에서 살면서 직업을 가진 남녀 평신도들이 성인의 정신(회개와 자선)과 영성을 실천하고자 하였는데, 차츰 가정과 세상을 떠나 은둔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 사람들을 지도하고 교회로 이끌기 위하여 1323년 요한 22세가 인정하고. 1447년에는 니콜라오 5세 교황이 이탈리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모든 3회 사람들을 위한 총장을 정하고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으로 살려는 제3회 수도자로 인정하였다.

 

이렇게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따라 살려는 형태는 네 개의 커다란 공동체로 형성되었다. 네 회는 모두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본받으려 하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영성생활의 모범이며 그분의 모습을 따라 순명 · 청빈 · 정결 서원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5년 11월호, 구본식 신부(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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