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세계교회ㅣ기타

스페인 마드리드: 하느님의 작은 포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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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12-21 ㅣ No.184

[해외 한인 공동체 소식] 스페인 마드리드 - 하느님의 작은 포도밭


한해의 마무리 달인 12월은, 땅에 묻은 김장 김치가 맛을 더해가는 달이고 아기 예수의 탄생의 달로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대림시기를 보내는 매우 뜻있는 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고국이 그리워지는 달이지요.

1987년, 이곳 스페인 마드리드 한인 공동체가 첫 미사를 봉헌한 이래로 수많은 신부님들이 공부를 하러 오시는 길, 가시는 길에, 아니면 잠깐 들르시는 때에 이 하늘 밑에 있는 작은 하느님의 텃밭을 돌보아주시고는 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 드디어 주임신부님께서 정식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기뻤는지, 그 시간들은 참 당당하고 행복했었습니다. 임기가 끝나고 가시는 신부님과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을 맞으며 다시는 주임신부님 없이 뿌리 없는 공동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러나 채 배를 채우지도 못한 어린 아기에게서 젖꼭지를 별안간 빼버린 엄마처럼 우리는 임기를 채우지도 못하고 미국으로 떠나버린 두 번째 신부님을 망연히 배웅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공동체는 마리아 기도회의 끈질긴 기도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신부님이 없어 미사를 드리지 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하느님 포도밭의 일꾼들

어떻게 일꾼들 없이 하느님의 포도밭에 열매가 열리겠습니까? 가장 중심이 되는 사목회도 체계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고, 마리아 기도회, 전례부, 복사단 등이 있습니다.

봄에는 야외미사 후에 공동체의 즐거운 놀이로써 서로 형제애를 다지며 백여 명의 신자들이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냅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전에는 이웃돕기 음식 바자회로 본당의 스페인 가족들과 한국 음식 소개와 판매로 올린 수익금을 봉헌합니다.

가을에는 우리 한인 공동체의 1박 2일 피정으로 신부님의 수도회 소속 학교의 기숙사를 이용하여 이곳에서 공부하시는 신부님들로 구성된 탄탄한 교수진(?)의 강의에 힘입어 알찬 시간들 속에 주님 안에 모두 하나가 되는 은총의 시간들을 보낸답니다. 지난해에는 다섯 분의 신부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한국 파견기업의 직원 교우들은 한국으로 가서도 이 같은 가족적인 공동체의 체험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일꾼들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이곳 수녀원에 파견 나오신 한국 수녀님께서 마리아 기도회를 영적으로 지도해 주셨고, 2003년에는 스페인 수도회인 ‘성가정수도회(Sagrada Familia)’의 이병권 세바스티아노 신부님께서 기적처럼 저희 공동체를 맡아주셨습니다.

신부님은 파라과이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가신 후 수도회에 입회하여 사제품을 받으신 분으로, 스페인 수도회 소속의 한국인 신부님이시지요. 연세 드신 스페인 신부님과 함께 사제관에서 사신답니다.

이미 임기가 끝나 다른 곳으로 가셨어야 했는데 우리 공동체를 버리지 못하시니 장상의 선처로 저희 공동체를 가꾸고 계십니다. 벌써 만 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소성당을 빌려 쓰고 있어서 오후 시간을 이용하여 미사를 드리지만, 축복받은 우리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없습니까?”

오늘은 성당에 가 자리를 잡고 앉아서 공동체 식구들과 여느 때처럼 성가 연습을 하고 나서 미사 시작성가를 부르는데 신부님 세 분이 들어오십니다. 어린 복사들을 앞세우시고….

가운데 서 계신 주례사제는 처음 뵙는 분입니다. 왼쪽에 우리 이병권 신부님, 오른쪽에는 벌써 우리 공동체에 나오신 지 꽤 되시고 예비신자 교리를 맡아주시는 가브리엘 신부님, 다른 한 분을 궁금해 하는데 우리 신부님께서 소개를 하십니다.

우리 신부님이 미국에 계실 때에 성령 세미나를 많이 도와주며 가깝게 지내시던 베드로 신부님인데, 사제품을 받으신 지 4개월 되는 새 신부님이랍니다. 이탈리아에 공부를 하러 오셨다가 이웃인 스페인에 신부님을 만나러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리가 불편하신지 지팡이를 짚고 계십니다.

얼마나 인물이 훤하신지…. 그 신부님이 강론대에 오르기 전 우리 신부님이 눈시울을 벌겋게 적시며 제의방으로 가십니다. 눈치 못 챈 신자들은 의아해했습니다. 그 신부님과 지내셨던 옛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리셨겠지요.

그러나 베드로 신부님은 담담하게 강론을 합니다. 20년 전 나이 스물에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를 잃고 당당하게 모든 것을 극복하고 신부님이 되신 이야기 끝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를 신부님과 함께 합창하는데 왜 눈물이 앞을 가리는지…. 그것은 가벼운 감상적 분위기가 아니라 각자 자신이 ‘내가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습니다. 곧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의 기쁨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끝으로 신부님께서는 “나는 다리가 하나 없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없습니까?” 하고 물으신 뒤 침묵하는데 저는 마음속으로 금세 대답이 나왔지요. ‘저는 사랑이 없습니다.’ 참 신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대답이 망설여지지도 않고 빨리 나온다는 것이.


빠빠의 모자도 제병도 날아갔지만

지난여름 빠빠(PaPa = 교황님)가 세계청년대회로 마드리드에 오셨을 때가 생각납니다. 연일 폭염 속에 빠빠께서 도착하신 금요일 첫 미사가 공군 비행장에서 열리게 되었을 때, 세계에서 모여든 백오십만 청년들과 성직자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미사는 시작되었고 성체 강복을 하기전 갑자기 돌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빠빠의 모자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강복 전이었지만 그 많은 참가자들을 위한 제병도 모두 바람에 날아갔습니다. (그날 영성체는 없었습니다.)

날씨를 예상하고 의자들을 줄로 묶은 상황에서, 더위로 이미 수천 명이 응급실로 실려갔는데 거기 어디에선가 신자들을 인솔하고 계신 우리 신부님이 보였습니다.

휘몰아치는 돌풍에도 빠빠는 미소로 비가 그치기를 침묵 중에 기다리시고, 참가자들이 꿈쩍도 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데, 빠빠를 환호하는 소리들이 연달아 터져 나왔습니다. 저는 빠빠의 미소에 겹친 우리 신부님의 미소를 보았습니다. 이 작은 포도밭을 한결같이 정성껏 가꾸시는 목자의 미소를….

비가 그치자 빠빠는 “이 날씨는 하느님의 강복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며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 속에 미사를 계속 봉헌하였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 찌는 듯한 더위가 사라져버렸습니다. 현장에서 자고 내일 아침 미사를 다시 드려야 하는 참가자들에게 그 소나기와 돌풍은 더위를 씻어가 버린 하느님의 배려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한 사람 한 사람 새 신부님의 정성 어리고 성령이 충만한 강복을 받고 찡한 감동 한 자락을 안은 채, 모두들 친교의 방으로 향하며 잔잔하고 행복하게 웃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바로 그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작은 포도밭’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 오수애 아녜스 - 시인. 세계한민족작가연합회 회원이며, 시집 「빗장열기」, 「우물에 꽃이 피면」을 펴냈다.

[경향잡지, 2011년 12월호, 오수애 아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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