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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최석우 몬시뇰과 한국교회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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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2-04 ㅣ No.1151

최석우 몬시뇰과 한국교회사연구소

 

 

시작하는 말 : 최석우 몬시뇰의 생애

 

필자가 최석우(崔奭祐) 안드레아(1922∼2009) 신부님을 처음 뵌 것은 1983년 10월,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에서 개최한 ‘마테오 리치 신부의 동아시아 전교 400주년 기념 국제 학술회의’ 때였다. 그리고 1984년 4월, 한글회관에서 열린 ‘교황 방한 기념 교회사 특별 심포지엄’ 때도 인사를 드린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듬해 3월 첫 번째의 『한국가톨릭대사전』(단권) 출판 기념회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은 직후에, 스승 이원순(에우세비오) 선생님의 말씀에 따라 어렵게 신부님을 뵙고 연구소 입사 문제 등 이런저런 말씀을 드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광화문 신문로에 있던 연구소 골방(대사전 편찬실)에서였다.

 

그때 신부님께서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갑자기 서재로 가서 족보를 꺼내 오시더니 “잘 살펴보고 해제를 한번 써보시오.”라고 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때마침 연구소에서 김해김씨 집안으로부터 기증을 받았던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집안의 족보, 즉 『김해김씨 족보』와 『선원세보(璿源世譜)』였다. 이후 『교회와 역사』 제118호(1985년 4월호)에 그 해제가 「수증 자료 김해김씨 족보와 선원세보」란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그렇게 1985년 4월 15일자로 연구소에 입사하고 교회사 공부를 시작해서 1999년 9월 31일까지 14년 반 동안 신부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게 되었다.

 

성농(誠農) 최석우 몬시뇰은 1922년 11월 27일 황해도 신천군 노월면 마명리(馬鳴里)에서 최광옥(崔光玉) 루도비코와 이선옥(李鮮玉) 마리아 부부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나 매화동 본당 주임 퀴를리에(L. Curlier, 南一良, 레오) 신부에게 유아세례를 받았다. 이후 신천공립보통학교와 장연경애보통학교(6학년 전입 · 졸업), 서울 동성상업학교(을조) 즉 소신학교, 동경법정대학 법문학부(2학년 중퇴)를 거쳐 1945년에는 경성천주공교신학교(京城天主公敎神學校) 2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50년 4월 15일 그 후신인 성신대학(聖神大學, 현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품을 받았다. 그 집안에서는 1947년 10월 28일에 서품된 장남 최석호(崔奭祜, 바오로) 신부에 이어 두 번째 사제였다.

 

1950년 4월 이후 수원 북수동 본당 보좌 및 소화초등학교 교장, 성신대학 부속 중학교 교사를 역임한 최석우 몬시뇰은 유럽 유학길에 올라 1954년 4월 1일 벨기에 루뱅(Louvain)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런 다음 1956년 6월 20일 신학석사 학위(전공 : 교회사)를 취득했으며, 다음해 1월 독일 본(Bonn)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1961년 8월 23일 신학박사 학위(전공 : 교회사)를 취득한 뒤 귀국하여 12월 1일 가톨릭대학 신학부(대신학교) 부교수로 임명되었다.

 

최석우 몬시뇰이 대신학교에서 사제 양성에 참여한 것은 1972년 10월 30일까지 대략 11년 동안이었다. 그러나 가톨릭대학에 적을 둔 것은 1967년 8월 31일까지였다. 1967년 9월 1일자로 절두산순교기념관 관장 겸 양화진(현 서교동) 본당 주임에 임명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몬시뇰은 이문동 본당 주임(1962년 12월 29일 이후 1년간), 한국순교복자현양회 중앙위원장(1963년 8월 13일 이후 1년간)을 겸직했으며, 특히 1964년 8월 17일에는 가톨릭대학 부설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다.

 

1969년 말 절두산순교기념관 관장을 사임한 몬시뇰은 1970년 1월 15일 가회동 본당 주임으로 임명되었고, 1971년 5월 31일에는 명동 주교좌 본당 주임, 1972년 10월 6일에는 삼각지 본당 주임을 차례로 맡게 된다. 그러다가 1972년 10월 30일에는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를 사임했으며, 1975년 5월 9일에는 삼각지 본당 주임을 끝으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최석우 몬시뇰이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을 맡은 기간은 1964년 8월 17일부터 36년 6개월이었고, 전담한 기간은 1975년 5월 9일부터 2001년 2월 23일까지 25년 9개월이었다. 그야말로 전 학문 생애를 연구소와 함께한 것이다. 그는 2001년 2월 23일 제2대 소장 김성태(金聖泰, 요셉) 신부에게 연구소의 모든 책임을 물려주고 명예소장을 맡은 뒤에도 여전히 연구소와 함께 생활하였다. 그의 한결같은 모습과 생활은 2009년 7월 20일 선종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이에 앞서 최석우 신부는 2005년 3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고위 성직자인 몬시뇰에 임명되었으며, 5월 24일에는 명동 대성당에서 몬시뇰 임명장 수여 미사가 봉헌되었다.

 

 

최석우 몬시뇰이 기억에 담아둔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몬시뇰이 교회사, 그것도 한국 천주교사 연구에 뛰어들게 된 것은 스승이요 선배인 선종완(宣鍾完, 라우렌시오) 신부의 정해진(?) 권유 덕분이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 대해 그는 훗날 이렇게 회고하였다.

 

그 무렵 신학교 일로 부산에 내려갔을 때, 선종완 신부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선 신부는 그때 부산 영도의 임시 대신학교에서 성서를 강의하고 있었다. 선 신부는 대뜸 나에게 유학을 권유하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교회사를 전공할 것과 이를 위해 루뱅대학이 교회사학에서 유명하니 그리로 가라는 구체적인 지시까지 하는 것이었다. 유학, 교회사 전공, 루뱅대학, 모두가 뜻밖이었다. 무엇보다도 교회사 전공은 정말 뜻밖이었다. (…) 선 신부가 성서라면 몰라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생소한 교회사 공부를 왜 권하였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소명이란 이런 것이거니 하는 생각에서 그것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일생 동안 교회사 연구에 전념하게 되었다(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692쪽).

 

이렇게 최석우 몬시뇰은 우연한 기회에 유학을 통해 교회사를 공부하게 되었고, 그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여기며 일생을 살았다.

 

평소에 최석우 몬시뇰은 ‘자신이 존경하는 분 혹은 스승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여럿 계신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네 분이 기억에 남는다.’고 하였다. 우선 국내 사제 중에서는 앞서 언급한 선종완 신부가 있고, 자신의 서품식을 주례했던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대주교가 있다. 노기남 대주교는 몬시뇰에게 ‘유학과 교회사 공부를, 그리고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을 허락해 주신 분’이기도 하였다. 최석우 몬시뇰은 1984년 노기남 대주교가 선종한 뒤 한국교회사연구소 이름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 노기남 대주교』(1985년)를 간행하여 1주기 미사 때 봉헌하기도 하였다. 해외 학자 중에서는, 당연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루뱅대학 시절의 스승인 오베르(M. Aubert) 신부와 본대학 시절의 스승인 후베르토 예딘(H. Jedin) 교수의 이름이 말씀 가운데 자주 회자되곤 하였다. 오베르 신부는 현대 교회사 전공자였고, 예딘 교수는 트리엔트 공의회사 연구로 유명한 학자였다.

 

교회사 연구가 우연히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처럼 시작되었다면,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은 교회사 연구와 강의를 선도한 몬시뇰에게 당연하면서도 필수불가결한 소명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과 정열, 애정 안에서 마지막 소명으로 자리 잡게 된다.

 

연구소 설립에 대한 어렴풋한 구상과 담론이 시작된 것은 최석우 몬시뇰이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가톨릭대학 신학부 교수로 재직한 지 2년여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 몬시뇰은 1964년 파리외방전교회 창립 300주년 기념 전시회를 계획하고 있었다.

 

나는 교회사 자료 전시회 같은 기념행사를 갖고 싶어서 이원순 교수를 만나 상의하게 되었다. 그는 물론 전시회도 좋지만, 이 기회에 교회사 연구 기관을 하나 설립하자고 제의하였다. 나 자신도 한국 교회사의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시키려면 연구 기관의 설립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어서, 우리는 즉시 합의를 보고 함께 연구소 설립을 추진하였다(최석우, 앞의 책, 700~701쪽).

 

‘가톨릭대학교 부설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은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의 1964년 8월 17일자 공문으로 인가되었다. 총재는 노기남 대주교, 소장은 최석우 신부였고, 연구소 소재지는 가톨릭대학 구내의 옛 가르멜 수녀원 건물이었다. 이에 따라 8월 27일에는 창립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8월 28일∼9월 3일에는 ‘한국 교회사 자료 전시회’(전시 유물 204점)가 개최되었다(장소 : 신문회관).

 

연구소의 업무는 수집된 자료의 정리 작업에서 시작되었다. 자신이 유학 시절에 모은 자료는 물론 가톨릭대학장 한공렬(韓玜烈, 베드로) 신부가 1961년 초 전주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임하기 전에 서울 주교관 서고에서 수집 정리해 준 자료들, 그리고 순교자 현양회에서 수집해 온 자료들이었다. 훗날 몬시뇰은 한공렬 학장이 유럽에 와 있을 때 자신과 약속한 자료 수집 작업을 지켜주었다고 회상하였다. 1964년의 전시회는 그가 수집해 준 주교관 소장 자료들이 중심이 되었다.

 

유학 시절 초기부터 자료의 중요성을 깨닫고 교황청 포교성성, 예수회, 파리외방전교회 등지를 방문하면서 자료 수집에 열정을 쏟은 적이 있던 몬시뇰은 연구소 설립 직후 무엇보다도 먼저 자료 수집과 정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966년 어느 날 상서국장실에 들렀다가 뜻하지 않게 처음 보는 문서들, 다시 말해 ‘주교관 지하실에 보관되어 있던 문서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야말로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문서군이었으니, 이것이 곧 ‘뮈텔(G. Mutel) 문서’였다. 이 문서들은 1967년 3월부터 주로 이원순 교수에 의해, 그리고 서양어 자료들은 몬시뇰에 의해, 1978년 이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배세영(M. Pélisse) 신부에 의해 정리되었다.

 

1967년 8월에 대신학교 교수를 사임한 최석우 몬시뇰은 9월 1일자로 절두산순교기념관 관장에 임명되었다. 그 자신이 회고한 것과 같이 ‘본당 사목이냐? 학문이냐?’의 기로에서 택한 길이었고, 연구소의 재정적인 지원을 염두에 두고 택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은 모두를 충족시키지도 못하고, 어느 한쪽에 치우칠 수도 없었던 “정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8년 동안의 허송(?)세월”이 되고 말았다. 그의 기억 속에는 이 유랑 시절이 언제나 아픈 손가락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75년 5월 9일 최석우 몬시뇰은 본당 사목을 떠나 연구소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5월 22일에는 합정동(367-27번지)에 사제관 겸 연구소 건물이 마련되고, 6월 21일에는 개소식이 있었다. 이어 연구소 규정이 마련되었으며, 8월 11∼13일에는 제1회 한국 교회사 강습회(장소 : 절두산)가 실시되었고, 1975년 9월 13일에는 연구소 부설 ‘한국교회사연구회’(회장 : 박노연)가 발족됨과 동시에 제1회 교회사 월례 발표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몬시뇰은 「기해일기의 몇 가지 문제점」이라는 연구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소식지 『교회와 역사』가 창간되었다.

 

몬시뇰의 자료 수집과 정리 작업은 이후로도 계속되었다. 1978년 8월에는 파리국립도서관 지도부에서 김대건 신부의 「조선전도」를 발견했으며(1797년 5월 복원 간행), 이듬해 3월에는 몬시뇰의 요청에 의해 파리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에 소장되어 있던 다블뤼 비망기 3·4권(전사본) 즉 훗날 몬시뇰에 의해 『다블뤼 주교의 조선사 서설 비망기』와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사 비망기』로 명명된 자료의 복사본이 연구소에 전달되었다(1983년 7월 전사본 기증). 몬시뇰은 1983년 7월에 교황청 민속박물관에서 「황사영 백서」 원본을 확인하였고, 1984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뮈텔 주교 일기를 비롯하여 교회사 관계 자료 일체를 기증받았다.

 

그 과정에서 다블뤼 비망기의 원본을 찾으려는 몬시뇰의 노력은 1998년 3월에 그 제5권 즉 『다블뤼 주교의 주요 순교자 약전』(전사본)을 파리외방전교회 로마 대표부에서 발견하는 결실을 얻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망기 원본들과 몬시뇰이 명명한 「정약용의 조선 복음 전래사」 혹은 이와 유사한 자료는 아쉽게도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최근에 인류복음화성 고문서고에서 1811년의 신미년 서한과 1824년(혹 1825년) 서한 원본이 확인된 것처럼 이 자료들도 모두 교황청 어느 문서고에서 발견될 확률이 높다. 해외 사료 수집과 관련해서 2002년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한국 천주교 해외 사료 수집 및 체계화 사업’에 대한 국고 보조금을 정부에 신청했다가 철회한 일이 있었는데, 연구소와 아무런 상의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몬시뇰께서 정식으로 항의한 적이 있었다.

 

연구소에서는 이후 중요한 자료들을 연구 자료집, 번역 자료집, 연구 총서 등으로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연구 자료 제1집 『황사영 백서』(1966), 제6집 『사학징의』(1977), 제9집 『벽위편』(1978), 연구 총서 제2집 샤를르 달레 신부의 『한국 천주교회사』(상·중·하, 1979~1980), 연구 총서 제3집 『최양업 신부 서한집』(1984), 『뮈텔 주교 일기』(1~8권, 1986∼2008) 등등 한국 천주교사 연구에서 가장 바탕이 되는 자료들이요, 몬시뇰이 생전에 아끼던 자료와 작업의 결과들이었다.

 

자료의 정리 간행과 함께 연구 추진과 성과의 보급, 교회사에 대한 계몽 활동도 몬시뇰과 연구소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 교회사 강습회, 한국교회사연구회 발족과 연구 발표회 개최, 『교회와 역사』 창간은 이미 언급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회는 1987년에 한국가톨릭 문화사연구회로 개칭되었다가 1995년에 본래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교회와 역사』는 처음 연구회에서 발간을 담당하다가 제3호(1975년 1월)부터 연구소 이름으로 간행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소식지에서 ‘학문적이고 계몽적인 두 가지 임무’를 맡는 월간지로 발돋움하면서 현재 535호(2019년 12월)까지 발간되었다.

 

1976년 5월 20일에 제1집이 발간된 최초의 교회사 연구지인 『교회사 연구』는 현재 제54집(2019년 6월)까지 발간되면서 한국연구재단 등재지로 손색이 없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교회사 강습회는 1994년 제14회까지 계속되다가 중단되었고, 1988년 4월 21일~6월 28일에는 제1기 한국 교회사 공개대학이 개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1기 교회사 공개대학 수료생들이 모여 1989년 9월 23일에 설립한 것이 ‘한국 교회사 공개대학 동문회’(1991년 한국 교회사 연구 동인회로 개칭, 초대 회장 : 오병한 마티아)이다.

 

연구소와 연구회에서는 연구 발표회 외에 간담회와 심포지엄, 학술회의, 세미나 등도 개최하였다. 그중에서 교회사 간담회는 1979년 12월 13일에 제1회 교회사 간담회가 개최된 이래 2001년 제77회 간담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연구소에서 심포지엄이란 이름으로 대규모 학술회의를 개최한 것은 1981년 9월 25일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교구사 심포지엄’이 최초였다(장소 : 한국일보사 강당). 그리고 1989년 10월 27~28일에는 연구소 설립 25주년 기념으로 ‘동아시아[東亞細亞] 교회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주제 아래 국제 학술회의를 처음으로 개최하였다(장소 : 세종호텔). 이때 상해교구장 김노현 주교가 직접 학술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던 것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이로부터 2년 뒤인 1991년에는 몬시뇰과 천진암의 변기영 신부 사이에 한국 천주교의 기원과 창립 문제로 논쟁을 벌이다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관 아래 ‘한국 천주교회 기원 문제 세미나’를 가졌으나(『사목』 144호, 1991년 1월), 일방적인 주장으로 인해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그 실체 파악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몬시뇰과 연구소의 역사에서는 후원회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후원회는 ‘한국교회사연구소 후원회’란 이름으로 1975년 12월 16일에 창립되었으며(회장 : 양한모), 이듬해 10월 26일에는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사)와 공동으로 ‘성지순례추진회’를 결성하였다. 이 후원회는 1986년 10월 ‘한국 가톨릭 문화 선양회’로 개칭되었다가 1996년 3월 ‘한국 순교자 현양 위원회’와 통합되면서 연구소의 활동과 구분되었다. 반면에 연구소에서는 1994년 2월 18일에 ‘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 후원회’가 설립되었다가 2006년 ‘연구소 후원회’로 변경되었다. 한편 별도 후원 모임 성격으로 1976년에 시작된 ‘육일모임’(회장 : 양마태 마르타, 원복순 크리스티나)에서는 정기적으로 모여 미사도 봉헌하고 계를 타서 몬시뇰을 도와드리곤 하였다.

 

최석우 몬시뇰과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어쩌면 그 업적 가운데서도 가장 부각되어 왔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1982년 7월~1985년 3월과 1993년 2월~2006년 4월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 간행 사업이었다. 몬시뇰은 이처럼 방대한 대사전의 편찬 · 간행 작업을 추진하게 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첫째, 한국 가톨릭 문화의 실상을 종합적으로 정리한다.

둘째, 가톨릭교회와 신앙의 바른 모습을 일반인들에게 정확히 알려준다.

셋째, 교회 안의 신자들이 교회의 제반 사항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궁금증에 대해 간단명료한 해답을 제공해 준다(『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사, 1984·1994).

 

물론 대사전 편찬 사업이 쉬운 작업이 아니었고, 또 쉽게 생각되지도 않았으며, 실제로 그 앞에는 많은 난관들이 있었다. 두 번째의 대사전 편찬 · 간행 계획을 수립할 당시에 그 기간을 5년으로 잡았었는데, 완간까지 13년이 걸린 사실만 보아도 이러한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에서는 2년 8개월 만에 첫 번째 대사전을 완간했으며(본문 1권, 부록 1권), 두 번째 대사전을 전 12권으로 완간하였다.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의 브리태니커’ 혹은 ‘한국 천주교의 기념비적 출판물’이라고 할 수 있는 대작이었다. 몬시뇰은 두 번째 대사전의 편찬 간행은 물론 대사전에 대한 신자들의 관심을 높이는 일에 기여한 공로자로 1993년 10월 이후 보좌 신부와 연구소 부소장을 맡았던 변우찬(사도 요한) 신부를 꼽았다.

 

몬시뇰께서는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어려웠던 일을 거론한 적이 없다. 적어도 개인적인 어려움은 그랬다. 우연히 자신에게 닥쳐온 것이지만, 교회사 연구와 연구소 운영 모두를 자신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소명으로 생각해서 받아들인 때문일까?

 

 

뭇 기억에 살아 있는 한국교회사연구소와 최석우 몬시뇰

 

최석우 몬시뇰을 도와 한국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던 이원순 교수는 몬시뇰과 연구소 50년사를 초창기(1964~1970년), 유랑기(1970~1975년), 재건기(1975~1986년), 발전기(1986~2002년, 명동 시대), 비약기(2002년 이후, 저동 시대) 등 다섯 시기로 구분하면서 각 시기별로 주요 방역자(傍役者) 즉 협력 인사들을 설명한 적이 있다(이원순,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나」, 『한국교회사연구소 50년사』, 2014, 331~357쪽). 그 과정에서 보면 무엇보다도 몬시뇰이 천주교 신자뿐만 아니라 비신자 혹은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지 않고 두루 친분을 쌓았던 점이 눈에 뜨인다.

 

김진소(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한국교회사연구소의 아버지 최석우 몬시뇰은 인복이 많은 분”(김진소,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나」, 같은 책, 358쪽)이라고 회고한 것이 생각난다. 새 신자였던 김정신(스테파노) 교수에게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불어넣어 주고, 한국 성당 건축사의 선구자로 이끌어준 사람도 최석우 몬시뇰이었다(같은 책, 394쪽). 김정신 교수는 이후 한국교회사연구동인회 제2대(1995~2000년) 회장도 맡아 봉사하였다. 한국교회사연구회의 제4대(1991~1993년) 회장을 맡았던 노길명(세례자 요한) 교수는 한국교회사연구소는 “내가 학문적 식견과 업적을 쌓아가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연구 기회와 함께 그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 최석우 몬시뇰의 격려는 교회사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켜 주었다.”고 회고하였다(같은 책, 385쪽).

 

법학자요 개신교 신자로 한국교회사연구회의 제2대(1980~1987년) 회장을 역임했던 최종고 교수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몬시뇰의 인간관계와 학문적 업적을 잘 설명한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법학자이지만, 교회사가로서의 최(석우) 신부님의 학자적 면모에 매료되었고, 최 신부님도 나를 사랑해 주셨다. 그래서 약 3년간 매월 교회사 강좌를 개최하면서 강사 교섭에서 사회까지 맡아서 열심히 참여하였다.… 최 신부님의 매력 하나는 철저히 학자적이시니, 개신교 역사학자인 서강대 이광린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내신 최영희 선생과도 매우 가까우셨던 것이다. 이것이 교회사 연구의 매력같이 보였다. 분명 최 신부님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를 역사학계에 본격적으로 접목시키고 자리 잡게 하신 것이라 생각한다(최종고, 같은 책, 390쪽).

 

1997년 5월부터 『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 후원회 제2대 회장을 맡았던 한영석(바르톨로메오) 변호사는 “한국교회사연구소와 인연을 맺기 전부터 연구소와 최석우 신부님의 노고에 존경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후원회장을 맡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다.

 

평소에 최석우 소장 신부님을 뵙기 전부터 노(老) 사제께서 평생 동안 한국천주교회사만을 붙들고 노심초사하시는 모습을 여러 경로를 통하여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별로 빛은 나지 않지만 교회사 연구가 중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사 연구에 힘을 보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기고 회장에 취임했던 것입니다(한영석,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나」, 같은 책, 362쪽).

 

그동안 연구소 후원회와 『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 후원회 회장을 맡아온 이들이 모두 한영석 회장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원순 교수는 연구소 50년 역사 중에서 어려웠던 시기로 우선 1970년 1월 몬시뇰이 가회동 본당 주임으로 임명된 이후의 유랑기요 침체기를 꼽았다. 그러나 유랑기의 실제 내용 가운데는 1967~1970년 절두산순교기념관 시절의 어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다음으로 이원순 교수는 몬시뇰이 연구소 전담 소장으로 임명된 이후의 재건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바로 첫 번째의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 간행과정에서 있었던 시행착오와 재정 문제 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가톨릭대사전』을 완간하여 천주 대전에 봉헌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몬시뇰의 소명 의식과 추진력이 있었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

 

편간(編刊)의 총 책임자로 작업을 선도하는 데 끝나지 않고 막대한 편간 사업 자금을 직접 조달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의연하게 대처하시고, 기어이 『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의 대사업을 완수한 최석우 소장 신부님의 확고한 소명 의식과 추진력이 한국 가톨릭 교회사상 최초의 『한국가톨릭대사전』을 마침내 천주 대전에 봉헌하게 하였다는 점을 의심할 수 없다(이원순,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나」, 같은 책, 346쪽).

 

물론 첫 번째의 『한국가톨릭대사전』 간행 이후에도 몬시뇰과 연구소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는 연구소가 합정동 연구소(도서실)와 신문로 편찬실이라는 이원 체제를 벗어나 명동 가톨릭회관 6층으로 이전함과 동시에 연구소(도서실) · 편찬실 통합의 ‘명동 시대’로 접어들면서 큰 어려움이 사라지고 발전기로 접어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인 재정적인 어려움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가톨릭대사전』이 간행된 1985년 3월부터 1988년 3월 25일 사단법인 설립에 이를 때까지는 과도기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단법인 설립 추진도 현실적으로는 재정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1989년의 연구소 설립 25주년 기념사업으로 1987년 가을부터 추진된 ‘한국 가톨릭 문화사 대계’ 간행 사업이 지지부진해지다가 중단된 이유, 1990년 이후 『한국가톨릭대사전』 보유편 간행 사업이 중단된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이 무렵에 이르러 몬시뇰은 연구소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서울대교구의 몇 가지 지원 사업, 자체적으로 따낸 서울과 지방의 프로젝트 업무만으로는 현실을 타개하기 어렵고, 희망의 미래를 예약하기도 어려웠다. 한국 가톨릭 문화사 대계 간행 사업을 재개하자니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도 컸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가칭) 『새한국가톨릭대사전』(1993년 2월의 1차 편찬회의 때 『한국가톨릭대사전』으로 명명) 편찬 간행 사업이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연구소는 1991년 말부터 연구소의 미래 사업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연구소는 『한국가톨릭대사전』 수정 · 증보판을 편찬하기로 결정하고, 그 이름을 ‘새 한국가톨릭대사전’(가칭)으로 명명했다. 한편 1992년 중반에 서강대학교 종교 · 신학연구소에서 생활성서사(까리따스 수녀회)와 함께 독일 미시오(Missio)의 후원 아래 『종교 · 신학대사전』의 편찬 · 간행 사업을 계획하였으나, 초기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2년 말에 서강대학교 종교 · 신학연구소에서는 대사전 편찬 사업을 중단하고, 관련 자료들을 연구소에 이관하겠다는 제의를 하였다. (…) 연구소에서는 1993년 2월 24일에 새 『한국가톨릭대사전』 제1차 편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인 26일에 서강대학교 종교 · 신학연구소와 대사전 편찬사업의 이관에 관한 약정서를 체결하고, 향후 편찬 간행될 사전의 명칭을 『한국가톨릭대사전』으로 명명하였다(차기진,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나」, 같은 책, 405~406쪽).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두 번째의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간행 사업은 그 기간만도 13년이 소요된 기념비적인 출판 사업이었다. 여기에는 결코 충족될 수 없었던 재정, 인적 자원, 신자들(교회)의 관심 등 세 가지 요소들을 원망(?)하면서도 거부하지 않고 돌파해 나가고자 했던 최석우 몬시뇰의 용기와 집념이 있었다. 몬시뇰이 이야기한 것처럼 변우찬 신부의 공도 컸다. 변 신부는 “대사전 편찬 사업은 연구소가 당연히 해야 할 본연의 업무를 수행한 것이었고, 이 사업을 통해 기본 자료와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같은 책, 442쪽)고 술회하였다. 2006년 9월 두 번째로 『한국가톨릭대사전』(6~12권)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봉정할 당시, 교황 성하에게 직접 그 의미를 설명하던 몬시뇰의 사진이 눈에 선하다.

 

연구소의 제2대(1999~2002년) 재단법인 이사장을 역임한 김수창(야고보) 신부는 생전에 “최석우 신부님은 교구장님이나 교구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현실에 섭섭하셨을 법하지만, 공식석상에서 그 섭섭한 마음을 표현하신 것을 본 일이 없다.”고 회상하였다. 연구소 밖에서는 ‘연구소가 교회 것이 아니라 최 신부님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었지만, 누구보다 연구소를 사랑하고 아꼈던 몬시뇰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다. 김수창 신부의 솔직한 표현이다.

 

사실 최 신부님은 교회를 위해서 연구소를 세웠고, 교회사와 순교자들을 위해서 당신의 평생을 바친 분이셨습니다. 사심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정리하고 순교자를 공경하는 중요한 일을 하는 데 경제적인 지원은 불구하고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는 그 상황이 섭섭하셨을 겁니다. 교구에서 그런 점을 이해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같은 책, 428~429쪽).

 

“현재 교회 내에서 말로는 연구소가 중요하다고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가톨릭문화선양회의 제11대 회장을 역임한 김태희(요한) 회장의 말이다.

 

 

지나온 과거, 나아갈 미래

 

몬시뇰은 일찍이 금경축을 맞이하여 천주교 사학계에 몇 가지 제언을 한 적이 있다. 첫째 자료 수집, 둘째 사료 비판, 셋째 교회사 서술, 넷째 교회사관, 다섯째 교회사의 사명감 등이다. 실증 사학 위에서 호교론을 경계하고, 소신을 갖고 객관적인 연구와 의견을 개진하도록 가르쳤다. 눈을 감기 전까지도 교회 설립에 관한 의견을 굽히지 않았고, 가칭 「정약용의 조선 복음 전래사」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위의 다섯 가지 제언 중에서도 필자는 네 번째의 교회사관에 대해 자주 강조의 말씀을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역사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교회사는 근본적으로 구원의 역사이다. 물론 민족사나 일반 사회와 관련된 역사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지만, 그때에도 구원사적이고 선교사적 사관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박해시대의 신앙을 내세주의니 개인 구원주의니 하며 과소평가하고, 반면에 민족이나 사회와 관련된 역사를 교회사의 전부인 것처럼 과대평가할 위험이 생긴다(최석우, 「나와 교회사 연구」, 『민족사와 교회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717쪽).

 

고민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지만, 지금의 환경과 흐름 안에서도 새겨들어야 할 말씀으로 생각된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 직후부터 연구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조광(이냐시오) 교수는 설립 50주년을 앞두고 연구소 본연의 과제를 두 가지로 함축해서 설명하였다. “첫째, 사료의 정리와 번역 및 간행을 통해 교회와 연구자들에게 봉사하는 일이다. (…) 둘째, 기존의 자료를 발굴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서 새로운 사실 및 그 사실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밝혀내는 연구 분야이다.”(조광, 「한국교회사연구소의 과제」, 『교회와 역사』 457호, 2013년 6월) 연구소가 나아갈 미래의 방향을 잘 짚어주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또 다른 측면에서 연구소가 풀어나가야 할 과제도 있다. 연구소의 연구실장으로 오랫동안 재임했던 방상근(석문 가롤로) 선생의 설명이다. “첫째, 연구소 안에서 실제로 연구소를 이끌어가는 구성원들의 주인 의식 확립이다. 둘째, 교회사 연구의 중요성에 대한 교구와 교회 구성원 모두의 의식화이다.”

 

이 중에서 전자는 연구소의 지나온 과거와 현재, 나아갈 미래 모두를 위해 풀어야만 할 당면 과제이다. 연구소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인적 자원, 전문화되고 숙련된 인재들이기 때문이다. 연구소의 실무 직원으로 가장 오랫동안 연구소와 함께했던 한창언(가브리엘) 부장은 이렇게 회고한다. “그동안 연구소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신부님, 수녀님, 직원들의 헌신과 후원회 및 연구회원들의 도움으로 연구소가 지금처럼 발전할 수 있었다”(한창언, 「한국교회사연구소와 나」, 앞의 책, 423쪽).

 

후자의 문제 역시 연구소의 지나온 과거 안에서 수없이 되풀이되어 온 ‘외부 지원’과 직결되어 있다. 진리의 참 증인들로 공경되어야 할 신앙 선조들의 모범, 현세의 삼구와 싸우면서 고통과 고뇌의 강물을 건넜던 순교성인 · 복자 · ‘하느님의 종’들의 참 신앙을 널리 알리고 본받기 위해서는 교회사 연구와 지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풀이해야 할 것 같다. ‘침묵’은 결코 메아리가 되어 연구소로 돌아오지 않겠지만….

 

1991년 연구소에서는 한국 가톨릭 교회사 신서 제7집으로 최석우 몬시뇰 수상집 『나의 교회 나의 역사 - 고집쟁이 앤디 신부』를 간행하였다. 연구소에 재임하던 유토마스(토마스 아퀴나스) 보좌 신부가 붙인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렇게 몬시뇰은 교회사 연구에 있어서 선각자이면서 우직한 고집쟁이였다. 그는 오로지 한 가지 결실만을 기대하면서 꾸준히 밭을 갈던 농부[誠農]였다. 그리고 한국교회사연구소는 그 농부에게 늘 살펴보고 가꾸어야 할 문전옥답과 같은 존재였다.

 

몬시뇰이 생전에 계획했다가 이루지 못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한국 천주교의 시복 시성 운동이 그랬다. 전주교구와 수원교구의 시복 시성 추진작업에 함께하면서 적어도 서울대교구의 시복 시성 운동이라도 시작했으면 했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사 통사 집필도 있었다. 다행히 연구소에서 2009년부터 『한국천주교회사』(2014년 현재 전 5권)를 편찬 간행해 오고 있어서 서운했던 한쪽이 메워진 느낌이다. 다시 말하지만,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 원본과 가칭 「정약용의 조선 복음 전래사」도 하루빨리 발견되었으면 좋겠다.

 

[교회사 연구 제55집, 2019년 12월(한국교회사연구소 발행), 차기진(청주교구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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