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1일 (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그림으로 읽는 교회사: 화가의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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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31 ㅣ No.978

[그림으로 읽는 교회사] 화가의 블루

 

 

울트라마린 블루와 푸른 밤

 

어린 시절 기껏해야 원색 몇 가지로 그림을 그리다가 더 다양한 색상이 이미 물감으로 만들어져있다는 것을 안 것은 중학교에 들어간 후였다. 그림 좋아하는 아들에게 부모님이 선물해준 물감은 다채로운 색상만큼 이름도 낯설었다. 제 아무리 이름이 생소할지라도 대개 ‘다크 브라운’, ‘올리브 그린’처럼 이름만으로 어떤 느낌의 색상인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예외도 있었다. ‘울트라마린 블루’, 블루에 수식된 ‘울트라마린’이 ‘바다 넘어’란 뜻이란 걸 알고 나선 더 미궁 같았다. 그 느낌이 어렴풋해진 건 유학시절 이탈리아인들이 자신들의 색이라 주장하는 ‘아쭈로(azzuro)’라는 색감을 이해하고서다. 그들은 그것을 밝은 청색의 ‘첼레스테(celeste)’와 짙은 청색, ‘투르키노’(turchino) 중간쯤의 빛깔이라 정의했다. 울트라마린이란 이름 역시 이 빛을 내는데 필요한 광물인 청금석을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중동 지역에서 들여온 때문이란 것을 알고선 더는 생소치 않았다. 그러나 이 색감을 내 안에서 분명히 확정지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색이 아닌 말이었다. 나희덕 시인의 ‘푸른 밤’이란 시의 제목이다. ‘푸른 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지만 나 역시 그런 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목격했을, 밝지도 그렇다고 어둡지도 않은 빛, 여명도 짙은 어둠도 아닌 그런 밤 말이다.

 

 

고귀한, 그러나 혼미한 빛

 

‘상징의 세계’라 할 수 있는 중세에선 형상만이 아니라 색도 한 몫을 차지한다. 교회 전례가 색에 민감한 것은 심미적 이유가 아니라 상징적 기능 때문이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바다 넘어’로부터 수입해야했기 때문에라도 저 묘한 색은 그 자체로 비쌌고 그래서 귀했다. 고귀한 혈통이나 빛과 어둠의 상호 작용 같은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것들을 표현할 때 사용했다. 시스티나 경당 제단화에서 지옥으로 악인들을 저 아래로 내치듯 팔을 들어 올린 심판자 그리스도 옆 성모의 옷자락과 구원과 추방이 어지럽게 뒤엉켜있는 벽면은 모두 이 빛깔이다.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이를 가는, 기다림의 하늘이 열리고 절망의 나락이 입을 벌리는 저 혼미한 순간에 이보다 적절한 색은 없어 보인다.

 

 

조토의 블루

 

이 모호한 색의 이름에 수식이 된 화가가 있다. 르네상스 미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는 이 색을 제 것인 양 즐겨 사용했다. 그가 스승 치마부에(Cimabue, 1240-1302)가 이끄는 견습생 무리에 섞여 참여한 보나벤투라의 대전기를 바탕으로 한 아시시 프란치스코 대성당 벽면의 프란치스코 성인 연작에서도 이미 이 색은 그의 서명처럼 각별하다. 그러나 이 빛을 아예 그의 것으로 각인시킨 것은 단연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경당(Cappella degli Scrovegni, 1303-1305)이다.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묻힐 경당의 장식을 의뢰한 스크로베니는 고리대금업자였다. 그렇게 긁어모은 부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성당 내부 벽은 온통 그 값비싸다는 ‘조토의 블루’로 물들어 있다. 어찌 되었든 이 색은 칭찬받지 못할 지상의 삶을 살면서도 마지막 그날, 천상을 주시하는 중세인의 전형적인 세계관에도, 구원과 추방이 아직은 결판나지 않은 황혼기의 불안에도 모두 어울리는 빛깔 아닐까. 어둡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푸른 밤처럼. 제단 십자가 옆에 그려진 성당 모형을 봉헌하며 이를 받아드는 천사들의 손에 완전히 가 닿지 못한 의뢰인의 엉거주춤한 손처럼.

 

 

두 개의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Michelagelo Buonarotti, 1475-1564)의 최후의 심판은 충격적이다. 기괴한 형상들 때문만이 아니라 언뜻 보아도 하단에 비해 과도하게 부풀려진 상단의 인물들처럼 투시도적 비례마저 무시되어 있다. 이를 두고 혹자는 ‘아름답고 완전무결한 형식에 대한 매우 힘든 항의’이자 ‘그리스도교의 가장 명망 높은 예술가의 손에 의해 선언된 한 세계의 몰락’이라 정의했다. 그러나 아무리 일탈적이라도 혁신은 무릇 전통에서 나오는 법이다. 미켈란젤로는 분명 스크로베니 경당의 조토의 최후의 심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물들의 역동성과 새로운 요소가 첨가되었어도 큰 틀에선 조토가 남긴 구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상단 중앙에 좌정한 심판관 그리스도, 그리고 그의 좌우로 도열한 천사들과 성인들, 아래 오른쪽으로는 구원받은 이들이, 왼쪽으로는 지옥으로 쫓겨나는 저주 받은 자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이러한 양식적 구도를 제단화 하나에 펼쳐놓은 것이라면 조토는 경당 전체를 모두 그렇게 채웠다. 완벽이 아니라 강박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지만 화가는 이 대칭적 구도로 빛과 그림자, 천상과 지상이 서로 교차하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 아니 구원 역사 전체를 설명하고자 했다.

 

 

평면과 공간으로 구현된 중세의 정신

 

경당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프레스코화가 사랑받았던 것은 문맹률이 높던 과거에 교리책노릇을 했다는 기능적 이점 외에 중세 사람들에게 그들의 세계를 표현하는데 이보다 탁월한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평면적 이미지와 입체적 공간 모두가 정확히 맞물려 경당은 그 자체로 중세라는 하나의 우주이자 구원 역사의 장대한 서사였다.

 

경당에 들어선 신자는 제단 위편 창조주를 가장 먼저 마주한다. 아버지의 얼굴은 맞은편 출구 벽면 중앙 상단의 아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좌우 벽면 가장 상층부는 요아킴과 안나 부부로 시작된 마리아의 일대기가 벽면을 한 바퀴 휘돌아 제단 압시데(abside) 아치가 시작되는 상단 오른편과 왼편,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와 그 소식을 듣는 성모로 마무리 된다. 구원 역사의 시작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상층부는 예수의 생애가 연작으로 이어지다 출구 벽면 최후의 심판으로 갈무리된다. 가장 꼭대기 심판자 그리스도 위에 뚫린 아치창 양 옆으로 두루마리를 감으려는 것이진 펼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동작의 천사가 반쯤 열린 황금빛 천국 문을 배경으로 서 있다. 인류 역사를 최종적으로 수렴하려는 것인지 새로 시작하려는 것인지 알길 없다. 맨 하단은, 천국은 현세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환기시키기라도 하듯 자비와 용서 같은 일곱 가지의 덕과 탐욕과 게으름 같은 일곱 가지의 악습이 대칭으로, 그것도 지상의 삶은 천상의 그림자란 사실을 주지하듯 회색 단색조로 표현되어있다. 경당은 좌우만 수평으로 대칭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덧없는 지상의 시간이 있다면 그 위에는 영원한 천상의 시간이 수직적 대칭으로 쌍을 이룬다. 천장에는 ‘푸른 밤’의 빛깔위에 하느님의 영원한 시간을 의미하는 열 개의 성운이 떠 있다. 가장 큰 별 둘은 성모와 예수이고 나머지는 요한 세례자를 포함한 일곱의 예언자들이다. 이로써 경당은 그곳에 들어선 중세 사람들이 처한 현세의 시간과 창조부터 시작해 최후의 심판으로 끝나는 구원 역사 전체의 장구한 시간을 한꺼번에 경험토록 한다.

 

 

두 계절 사이의 빛

 

미술사적으로 보면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스크로베니 경당의 블루는 화가 자신이기도 하다. 투시도적 시선과 그림에 배경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해 인물들의 몸짓과 행동, 표정을 일상에서 마주할 법한 정제되지 않은 현실의 사람들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것은 천 년간 고수된 정형의 틀을 부수는 혁명적인 일이었다. 물론 아직 최초의 르네상스 화가로 불린 마사초(Masaccio, 1401-1428)는 한 세기, 르네상스의 종말이자 근대미술의 시작이라는 미켈란젤로의 등장까지는 또 다른 한 세기가 필요하지만 분명 그는 새로운 시대의 마중물임에 틀림없다. 그러면서도 동시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자문과 고증을 충실히 따른 상징과 구도로 당대의 세계관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작품은 중세 정신의 위대한 종합이자 결정체라 평가할 수 있다. 계절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쇠락이 시작되듯 그는 절정이자 추락의 서막이고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그러나 중세라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고 그렇다고 충분한 빛을 머금은 여명도 아니었다. 저 모호한 블루, 푸른 밤은 이로써 화가 자신이기도한 것이다.

 

 

절정과 쇠락

 

공교롭게도 의뢰인이 경당을 짓기 위해 터를 사들인 때는 교회사 최초로 ‘성년’(Giubileo)이 선포된 지(1300년 2월 20일) 두주 지나서다. 마지막으로 만개하는 꽃처럼 2-30만에 이르는 순례자를 로마로 불러들인 성공한 성년이었지만 때는 바야흐로 중세 천년을 군림한 교황권이 분명히 쇠락하던 시점이다. 단테가 신곡에 이름을 거론할 정도로(신곡, 지옥편 19곡 54행 이하) 성직매매, 탐욕과 권모술수의 대명사로 굴절된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조토처럼 정점에 다다른 한 시대의 끝자락에 선 인물이다. 조토의 최후의 심판에도 저주받은 지옥 맨 밑바닥은 돈주머니를 든 주교 앞에 머리를 조아려 성직을 사들이는 수도자와 루시펠에 휘감긴 교황 같은 성직자들의 차지였다. 정치적으로는 봉건 영주에서 아직 절대군주까지는 아니어도 민족 국가로 이행되던 시기로 자국 내 교회를 교황의 영향력에서 제 발 밑으로 두려는 군주들의 국가교회주의적 도전들이 감행되던 시절이었다. 시대착오였을까. 유능한 법률가이자 저명한 신학자였던 보니파시오는 저 위대한 선임 그레고리오의 환영처럼 다시 한 번 세속적이고 영적인 모든 차원 위에 군림하는 사도좌의 권위를 장엄하게 선포(교황칙서 Unam Sanctam, 1302년 11월 18일)했다. 그러나 마당은 이미 기울었다. 프랑스의 필립 미남 왕에다, 콜론나 가문(Colonna) 같은 내부의 적까지 혼자 감당하기엔 이미 쇠잔한 교황이다. 보니파시오의 비극적인 죽음(1303년)과 함께 교황청은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졌고 70년간(1309년-1377년) 사도좌는 프랑스인들의 차지였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로 귀환했지만 그도 잠시, 교회는 난립하는 ‘대립교황’으로 두 쪽에서 다시 세 쪽으로 쪼개진 분열을 견뎌야 했다. 보니파시오는 어떤 의미에서 중세의 실제적인 마지막 교황이었던 셈이다. 종말이 임박한 때에 가장 절정을 이루던 시절의 생각으로 무장되어있던 그 역시 저 모호한 색감, 조토의 빛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블루

 

곡절이 많았던 2017년.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불통의 권력이 광장의 불빛에 굴복했다. 혹여나 싶던 마음들은 도도한 역사의 노정에 겸손을 배웠을 것이고 역사를 다시 신뢰했을 것이다. 절정과 쇠락, 어둠과 빛을 동시에 품은 한해의 빛깔도 푸른 밤이다. 교회도 안팎으로 부끄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저 봄날의 광장을 경험한 우리가 또 기억할 장면이 있다. 교회 역사상 가장 가난한 프란치스코의 수도생활을 허락한 것은 다름 아닌 힘과 부에 있어 가장 정점에 있던 교황들이었단 역설이다. 이 순간을 담은 장면의 바탕색도 ‘푸른 밤’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17년 겨울호(Vol. 40), 장동훈 빈첸시오 신부(인천 교구 중1동 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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