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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보는 교회사21: 이단과 투쟁하는 도미니코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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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9-07-08 ㅣ No.175

[새로 보는 교회사 21] 이단과 투쟁하는 도미니코회의 탄생

 

 

탁발수도회는 교회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일에 크게 공헌을 하고, 특히 이슬람 지역과 동양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에서 뛰어난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수도회 탄생 초기에는 당시 교회의 기본적인 제도마저 흔들고 있는 이단자들을 개종시키는데 큰 힘을 쏟았다. 12세기에 들어와서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을 하고 교황의 권위가 유럽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시점에서 발생한 이단으로 하여 교회에는 종교재판소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러한 이단자들을 힘으로 근절시키려는 십자군운동까지 일어난다.

 

그러나 탁발수도회의 성장은 이러한 외적인 힘에서라기보다는 탁발수도회를 일으킨 도미니코 성인이나 프란치스코 성인의 모범적인 겸손한 생활과 설교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도미니코 성인은 바로 이단과 대적하면서 그의 수도회가 탄생하게 한다.

 

 

12세기의 이단자들

 

12세기 이단자들은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고 그 주장을 사람들한테 확산시키는 교리적이고 논리적인 이단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1209년에 인노첸스 3세 교황이 한 편지에서 그린 이단자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가톨릭 교회의 신앙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그것을 믿고 고백하고 공공연하게 설교하는 사람들과 다음엔 자신들의 잘못을 계속 고집하고 교회의 성직자들을 반대하고 계속 자신들만의 주장을 일삼는 자들이며 단죄를 받았으면서도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계속 고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단자들은 교회의 교리와 상반되는 것을 주장하면서 대중성까지 가지고 있었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 있었다. 만일에 이들이 비밀스럽게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면 큰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소집단을 구성하고 집단끼리 연계를 가지며 사람들 속에 계속 파고드는 동시에 교회의 부유함을 비판하고 제도 자체를 부정하며, 복음을 마음대로 해석하여 일반적인 교회생활을 비난하는 행동을 보였다. 이들은 특정지역에서는 지방의 귀족들의 동조와 보호로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프랑스 남부지역에서는 교계제도를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이 컸다.

 

이들은 새로운 조직을 형성하여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누가 확실히 이단자인가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을 개종시킨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단자들의 집단적인 행동을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어떤 집단은 자신들만의 지도자를 뽑고 직무수여식도 하였으며, 고유한 직업적인 단체노동을 하기도 하였다. 어떤 집단은 이단 교리를 믿으면서도 가톨릭 교회와 연관을 가지고 전례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더 과격한 집단은 가톨릭 사제가 집전하는 모든 성사를 부인하고 자신들만의 전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들의 공통점은 비밀스럽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면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는 점이다.

 

 

이단의 활동

 

이들 이단자들을 카타리파와 발두스파로 나누는데, 이들은 동방지역에서부터 이탈리아 중부와 프랑스 남부까지 확산이 되어있었다. 그중에서도 발두스파의 한 분파로서 알프스 계곡에서 출발한 알비파가 가장 세력이 크고 교회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것은 툴루스의 백작이 이단자들의 보호자가 되어줌으로써 그 지역 도시들이 이단자들의 도망처가 된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단자들은 정치적 군사적인 힘까지도 보유하는데, 바로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단을 섬멸하기 위한 십자군운동이 일어난다.

 

이렇게 이단이 집합적인 단체를 형성하자, 이단에는 크게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교회의 재산과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귀족과 부유한 기사들이 성직자들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고 성당을 약탈하고 방화하였다. 수도원 역시 같은 운명이었다.

 

도시의 상업과 산업을 이단자들이 장악하고 조직함으로써 중산층 역시 귀족들을 따라서 보이지 않게 이단 추종자들이 많이 생겨났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교회는 이단을 물리치기 위한 방법으로 내외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이단이 생겨나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조하게 되는 데는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교회의 비윤리성과 부유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프랑스 남부의 교회상황을 살펴보면, 그레고리오 개혁시대에는 교회정신이 살아있었고 12세기까지는 모든 지역에서 윤리적으로 홀륭하였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개혁이 끝나가면서 교회의 부동산 재산이 커지고 교회의 고위직을 귀족들이 독차지하면서 상황은 달라져갔다. 귀족 출신의 주교들이 사제성소에 대한 관심보다는 교회의 부에 관심을 가지게 되니 재산에 대해 탐욕스러워지고 사치와 환락을 즐기며 백성을 괴롭히게 되었다. 고위성직자가 이렇게 자신의 본분을 등한히 할 때 교회는 전반적으로 부패해지고 이는 이단자들이 교회를 비판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툴루스의 라이문도 6세 공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교회일이든 세속일이든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려는 생각으로 교회를 공격하는 이단과 쉽게 손을 잡았다.

 

 

이단과 투쟁하는 교회

 

인노첸스 3세 교황은 일찍이 이단의 위험을 인지한 분이다. 그는 교황에 선출되고 나서 바로 이단자들을 근절해 나갈 방법을 썼는데, 그것은 이단자들을 파문하는 동시에 이단이 심한 지역은 도시와 지방 자체를 단죄하였고, 이단자들이 공직에 오르는 일을 금지시켰다. 만일 판사가 이단자라면 그가 하는 재판은 아무런 효력을 가질 수 없으며, 변호사라면 변호를 할 수 없다고 천명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회개하여 개종할 기회는 언제든지 있어야 하므로 사형제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결정은 자신이 군주로 있는 교황령 안에서 시행한 것이며, 프랑스 남부 같은 지역에는 사절을 보내어 정통교리로 돌아오도록 격려하고 훈계하도록 하였다.

 

또 물질적인 손해와 사회적인 방법을 통해 이단을 근절시키려는 노력과 동시에 이단자들이 교회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반이단 설교를 강조했다. 따라서 시토회 등의 수도자들을 파견하였고, 반이단을 개종시키기 위한 설교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학문분야에서도 이단의 비논리를 조목조목 따지는 노력을 하도록 하였지만 그 결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 못되었고 오래 지속되지도 못하였다.

 

이단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정치적이고 세속적이며 물리적인 방법이었다. 그 첫째가 십자군을 구성하여 알비파와 전쟁을 하는 것이었다. 교황사절인 카스렐노의 베드로 수사가 1208년에 살해되는 것을 계기로 교황은 북부 프랑스인으로 구성된 십자군을 창설하여 프랑스 남부의 알비파와 전쟁(1209-1229년)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지속되던 격렬하고 잔인한 싸움이 1229년의 파리 강화조약으로 끝은 났지만, 이단을 완전히 소멸하지는 못하였다. 이때 이단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조사하고 이단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종교재판소(Inquisition)가 구성 되어 완고한 이단자들을 화형시키는 관습이 이어져 이후 교회사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기에 이른다.

 

이단자들에 대한 처벌은 대 테오도시오 황제에서부터 시작이 되었다. 국가 반란죄를 적용하여 재산몰수나 추방이나 사형을 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중세에 와서는 파문이나 속죄규정 같은 영적인 벌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벌이 되더니 그 다음에는 체포, 구금, 고문, 추방과 사형을 하기에 이르렀는데, 사형은 대체로 화형을 시켰다.

 

조직적으로 종교재판소가 형성된 것은 1231년경 그레고리오 9세의 헌장에 따라서였는데, 이 종교재판소 운영에 관한 것은 독점적으로 탁발수도회 특히 도미니코회에게 맡겨졌다. 이후 고문기구를 이용한 고문이 횡행하였는데, 이는 이단문제뿐 아니라 마술, 마법 등을 조사한다는 이유로 여러 문제에까지 권한을 확대시켜 당시 사회에 공포의 대상이 된 기구이다.

 

 

성 도미니코의 활동

 

도미니코 성인은 이단자들을 훈계하고 설득하는 설교가로 교황청의 초대를 받았다. 카스틸리아에서 1170년경에 태어난 그는 1191년에 아우구스티노회에 입회하였다가 장상인 디에고와 함께 이단자들을 개종시키는 순회설교를 하게 된다. 그리고 여행 중에 만난 교황사절 카스렐노의 베드로 등을 통하여 단순한 설교뿐 아니라 완전한 가난이라는 새로운 정신과 함께 이단과 투쟁하도록 초대를 받은 것이다.

 

이단과 투쟁하기 위해서는 가난 정신이 가장 큰 모범이었고 또 무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이단자들은 교회의 부와 권력을 가장 중요한 비판의 쟁점으로 삼아 초대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자신들 멋대로 복음을 해석하였는데, 그들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가난 정신이 꼭 필요하였다. 이단자들 역시 가난과 정결과 순명을 장상에게 서약하고 나막신을 신고 다니며 거지차림으로 자신들의 교리를 설교하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단자들한테 넘어가지 않고 정통교리의 설교를 듣게 하기 위해선 거지차림이 꼭 필요했다고 할 수 있다.

 

성 도미니코는 이단과 투쟁하기에 맞는 영성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느님과 함께 말하고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라는 별명과 함께 인간의 영혼구원을 위해서 사람들한테 다가가 그들한테 하느님을 설교하는 실천적인 덕성이 뛰어났다. 이러한 목적으로 그는 설교수사들의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가 먼저 1207년에 창설한 수도단체는 이단에서 개종한 귀부인들을 받아들이는 여자단체였다.

 

1214년부터는 그의 주변에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고, 1215년에 툴루스의 폴코 주교가 도미니코와 그의 동료들을 자신의 교구에 복음을 전하는 순회설교사로 초대하면서 단체가 창설되었다. 이 단체를 호노리우스 3세 교황은 성 아우구스티노회의 회칙을 준수하는 설교단체로 인정하였다. 그들은 설교와 학문연구 그리고 공동체의 가난을 추구했다.

 

그러나 도미니코회는 초기부터 프란치스코회보다는 가난에 대하여 덜 엄격하였으므로 나중에 프란치스코회가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가난에 대해 의견 차이를 심하게 겪지 않는다. 도미니코회원들은 사목을 위해서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여행을 할 경우에 금이나 은 또는 화폐나 선물 등을 받거나 가지지 못한다. 다만 먹을 것과 옷가지와 같은 꼭 필요한 물건이나 책 등은 예외로 하였다. 도미니코회원들은 나가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에 대해서 설교하고 이웃의 영혼을 구하는 일에 오롯이 자신을 바치는 것을 가장 큰 목적으로 하였다.

 

도미니코 성인은 1221년에 사망하였고,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은 1234년에 그를 성인으로 시성했다. 도미니코회는 성인의 후임인 독일인 죠르다노에 의해 크게 발전했다. 죠르다노는 수도회 헌장을 만드는 등 조직능력이 뛰어났으며 도미니코 수도회를 여러 나라에 확산시켰다. 그래서 이미 전유럽에 확산이 되어있던 프란치스코회와 대등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도미니코 수도회는 사도적 설교, 사목, 이교인에 대한 선교 그리고 이단과 투쟁하는 과정 등에서 활동을 전개하였고, 사제 수도회로서 신학의 체계적 교육과 학문을 장려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

 

13세기는 유럽에 대학이 탄생하고 학문연구에 중심이 되는 시기로, 이 탁발수도회는 이들 대학의 학문발전에도 크게 기여한다. 특히 도미니코회는 스콜라 학문을 발전시키는 일에 크게 기여하는데 대 알베르토(1193-1280년) 성인이나 중세의 스콜라 학문을 집대성한 가톨릭 대학의 수호자이며, 천사들의 박사, 교회박사라고 일컫는 아퀴노의 토마스(1226-1274년)가 도미니코회 수사이다.

 

[경향잡지, 1995년 9월호, 구본식 신부(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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