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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협ㅣ사목회

지금 여기 평신도: 이제는 돌아와 신학자로 살아가는 길 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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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8-07-17 ㅣ No.73

[지금 여기 평신도] 이제는 돌아와 신학자로 살아가는 길 위에서

 

 

2018년을 평신도 희년으로 지내면서 평신도로서 나의 정체성을 성찰하라는 요청에 대답하고는 곧 후회했다. 다양한 평신도 가운데 하나인 모습에 다른 평신도들이 공감할 수 있을지, 또한 신학자로 살아가는 이들이 공감할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이 글을 통해 마주하는 이들 앞에서 나를 온전히 아시는 하느님께서 한 인간의 나약함을 받아 안으신 그 은혜와 섭리를 겸허히 나누는 기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보통의(?) 정상적인(?) 평신도

 

1996년 4월 2일, 로마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미 몇 번의 단절이 반복되면서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열린 유일한 길, 예수의 데레사의 영성을 공부하려는 단순한 열정이 이끈 길이었다.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 신학부 2학년에 편입한 첫날이었다. 앞줄부터 자신의 출신 국가, 소속 수도회, 이름 등 자기 소개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던 나는 수도회에 속하지 않은, ‘보통의’(normal) 평신도로 나를 소개했다.

 

그런데 교수님과 백여 명의 학생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히 웃기 시작했다. 짧은 이태리어로 표현한 그 단어를 ‘정상적인’(normal)으로 이해한 것이었다. 다음 사람부터 자기소개가 농담처럼 바뀌었다. “저는 ○○수도회의 ‘normal 수사’입니다.” “저는 ○○수도회의 ‘normal 수녀’입니다.” 그때마다 웃으며 박수가 쏟아졌다. 나는 신학부의 유일한 평신도였다. 여러 학년의 과목을 동시에 수강하느라 ‘우르바노 집시’라는 별명도 얻었다, 방황 끝에 로마에 이른 아시아의 집시….

 

2년 뒤 영성신학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자 교황청립 ‘데레사’대학에 입학하였다. 백여 명의 학생 가운데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맞이한 60대 사제가 삼분의 일, 본당 사목 경력이 7-8년 되는 내 또래의 사제가 삼분의 일이 넘었다. 여성 수도자도 몇 명 있었지만, 이번에도 나는 유일한 평신도였다.

 

조금 친해지자 동급생 신부님들이 수도원을 창립하라는 제안을 농담 삼아 했다. 실제로 수도원의 정신적 기반을 위해 영성을 공부하는 신생 수도회의 수도자들도 삼분의 일 가량 되었다.그때쯤 내가 ‘정상적’이거나 ‘보통의’ 학생이 아닌, ‘이상한’ 평신도란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는 왜 여전히 신학을 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부르신다면 저는 절대로

 

나는 감리교 신자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나 개신교 신앙 안에서 성장하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집 앞 공터에서 열린 부흥회로 나의 어린 시절에는 비밀스러운 경험이 자리했다. 부흥회의 감동으로 세수를 하다가 맑은 물에 손을 담그고 고백했던 것이다.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 기억은 오랫동안 내 안에서 묻혀 있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신앙과 5차원의 삶에 관해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때로 주님께서 나를 부르신다는 것을 느꼈지만, 대답을 하면 굉장히 어려운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겼다. 그래서 늘 분명하게 “아니요!”라고 했다. 그래서 어린 수도자들이나 신학생들을 보면, ‘어찌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나!’ 여전히 감탄할 따름이다.

 

심리학과를 지원했다가 재수하던 중에 서강대학교에 종교학과가 개설된다는 소식은 새로운 희망이 되었다. 종교학을 공부하면 넓은 세상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특정 종교에 치우치지 않는 종교학의 방법도 매력적이었지만, 예수를 공부하는 기쁨이 늘 새로웠다.

 

대학에서 수강한 첫 신학 과목은 정양모 신부님의 신앙 개론이었다. “산과 강이 엎어졌다가 다시 회복되며 다른 차원의 산과 강이 되는 대짜배기 신학을 해야 한다.”는 첫 수업은 신학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예수를 닮은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를 닮은 이를 만나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무렵 만난 매혹적인 책은 앨버트 놀런의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였다.

 

졸업할 무렵 공부의 방향은 신학과 사회의 관계를 다룰 수 있는 종교 사회학을 향했지만 한국의 대학원에서 종교 사회학을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사회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그리고 2년의 활동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성서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예수

는 매력적이었지만, ‘예수의 정치관(마르 12,13-17)’을 논문으로 제출할 무렵, 성서학에 열정이 없는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에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를 사랑한 마리아 막달레나의 히브리식 이름인 ‘미리암’은 루이제 린저의 소설 제목이었다. 예수를 향한 사랑 때문에 세례명은 무척 맘에 들었지만, 여러 에큐메니칼(ecumenical) 단체에서 일을 하며 교회의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예수를 팔며 밥 먹는 것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뒤 공부했던 신학 책 천여 권을 여러 곳에 나누어 주고 손을 털었다. 신학하는 동네 근처에도 얼쩡대지 않으리라…. 1995년 봄이 시작될 때 그렇게 나는 빈손이었다.

 

 

내가 너에게 수도자가 되라고 했더냐

 

피정을 통해 인천 가르멜 수도원의 문을 처음 들어선 것은 1995년 6월 24일이었다. 난생처음 시간 전례에 참석하며 들었던 후렴은 “주여, 내 영혼이 당신을 그리워하나이다.”였다. 그 달콤한 저녁 기도에 수도원 마당의 까치도 함께 노래하는 것처럼 들렸다. 일도 공부도 다 접은 나에게 낯선 열망이 솟아났다. 예수의 데레사, 그의 사랑을 알고 싶은 소망이었다. 그러자 가르멜의 영성을 공부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도움의 손길들이 나타났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6년, 모든 일을 접고 일 년을 칩거한 끝에, 커다란 십자고상 앞에서 세상을 등지듯 서른세 살의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다. 그 무모한 결정은 빈손이라서 가능했다. 하염없이 우시는 엄마와 걱정하는 동생들을 뒤로한 채 유일하게 열린 길을 따라 나섰다. 로마에서 처음 마주한 콜로세움은 거대한 무대처럼 불빛 아래 빛나고 있었다.

 

평신도로 신학을 공부하며 자유의 대가는 배고픔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지속적으로 절망하고 다시 걷기를 반복하며 늘 투덜거렸다. 마치 예수의 데레사처럼…. “주님, 제가 언제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나 했습니까?” 그런데 2000년이 되면서 “예.”라고 대답했던 예수의 어머니 나자렛의 마리아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에 교황님의 전용 경당인 ‘구세주 어머니 경당’(Capella Redemptoris Mater)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경당 안의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꿇어앉은 마리아가 대답하듯이 나 또한 “예.”(Fiat)를 바치면서 이날을 나의 축일로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럼에도 여전한 투덜거림과 질문은 계속되었다. 로마에서 십 년이 지날 무렵, 마음 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이 수도자가 되라는 것으로 알았더냐? 그것은 너의 생각이었을 뿐이었단다.’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았다. 수도자가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 끝에, 오랜 애증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대답을 들었다.

 

 

길을 따라 사는 기쁨

 

예수의 데레사와 에디트 슈타인을 공부하다가 결국에는 예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관한 공부로 이어졌다. 나의 존재 이유를 알아야 하겠기에 멈출 수 없는 걸음이었다. 예수의 데레사가 아니었다면 로마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에디트 슈타인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도중에 그만두었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의 모범과 은혜가 없었다면 결론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에디트 슈타인의 사상 안에서 마리아의 응답인 “Fiat.”을 찾아내면서 나의 논문은 완성되었다. 12년 만에 논문을 완성했고, 그 동안 논문은 나를 만들었다.

 

귀국한 뒤에도 질문은 이어졌다. “주님, 당신이 저와 함께 만들어 가는 저의 역사를 살아가며 저의 응답 ‘Fiat.’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와 함께 어떤 역사를 이루시렵니까?” 올봄에 만난 수녀님을 통해 나직이 알려 주셨다. “네가 존재하는 것이 곧 기쁨이란다.”

 

긴 방황은 이렇게 살아가는 기쁨의 이야기로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인간 예수 안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신학이란 이름으로 나누며, 그 덕에 먹고 사니 이제야 비로소 나를 신학자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마도 혹독한 세월을 지냈지 싶다.

 

* 최우혁 미리암 - 종교학과 신학을 교차하면서 공부하였고, 50대 중반의 평신도 여성으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가톨릭여성신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경향잡지, 2018년 7월호, 최우혁 미리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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