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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땅, 치유의 섬, 소록도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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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14 ㅣ No.360

[아픔의 땅, 치유의 섬, 소록도] 소록도를 가다


끝없는 고통이 치유의 꽃으로 피어난 아름다운 소록도

 

 

- 한센인 거주지에 있는 2번지(병사)성당은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

 

 

4월 25일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4시간 30분을 달려 도착한 녹동항. 소록도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냥 작고 평범하다. 손과 발이 뭉그러진 한센인들이 모여 사는 무시무시한(?) 섬이라는데…. 

 

성당 버스를 타고 소록대교를 건너 소록도성당으로 가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일반인들이 제한 구역이나마 소록도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 불과 20여 년 전이다. 편견과 차별은 그만큼 무섭다. 섬은 섬이되 다리로써 세상과 연결된 섬, 소록도는 이제 외롭지 않다. 소록대교는 세상이 한센인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이다.

 

 

한이 서린 부두 제비선창

 

- 2번지(병사)성당 내부. 제대 왼편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앉았던 의자가, 제대 가운데에는 교황이 선물한 십자가가 있다.

 

 

맨 먼저 제비선창을 찾았다. 예전 소록도는 강제 수용시설이었다. 세상은 전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한센인들을 이곳에 철저하게 격리시켰다. 모든 것을 잃고 부모와 가족에게서조차 버림받은 한센인들은 배를 타고 소록도로 왔다. 제비선창은 소록도로 들어오는 한센인들이 내리는 부두였다. 

 

병원 직원들도 제비선창에서 내렸을까. 그러지 않았다. 한센인들과 배도 따로 탔고, 별도의 부두를 사용했다. 그러다가 제비선창을 폐쇄하게 만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소록도 방문이다. 

 

1984년 당시 이름 없던 소록도가 교황 방문 예정지로 관심을 끌자 미국 NBC 방송은 소록도를 사전 취재하다가 부두가 두 개라는 것을 발견하고 이를 미국 전역에 알렸다. 전염 가능성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부두를 따로 사용하는 것은 부당한 차별이라는 보도는 국립소록도병원장의 마음을 움직여 제비선창을 폐쇄하도록 만들었다. 

 

별거 아닌 것 같은 이 사건은 엄청난 정신적 전환을 가져왔다. 한센인들은 직원들과 같은 배, 같은 부두를 이용하게 되자 큰 위로와 기쁨을 맛보았다. 그래서 한센인들은 제비선창 폐쇄를 교황의 선물로 여긴다. 교황 방문 이후 소록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정부 지원도 늘었고,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이후 제비선창은 태풍으로 크게 파손됐다. 부두였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쓸쓸하다. 제비선창에서는 거꾸로 녹동항이 보였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한센인들도 이곳에 내리면서 고향 땅을 바라봤을 것이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치유의 길

 

-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저항하던 한센인을 감금하던 감금실.

 

 

두 번째로 들른 곳은 ‘치유의 길’이다. 피정센터에 아름답게 꾸며진 14처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치유의 길은 그런 의도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 배경 지식 없으면 호젓한 산길에 불과하다. 

 

1933년 소록도병원 제4대 원장으로 부임한 수호 마사키는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 노역과 인권 유린으로 악명이 높은 인물이다. 1937년 중일전쟁으로 병원 재정이 나빠지고 강제 노역이 시작되면서 소록도 탈출을 시도하는 원생이 많아졌다. 탈출은 숲이 우거진 지리적 특성상 숨어서 바다에 접근하기 쉬운 십자봉 근방에서 주로 이뤄졌다. 

 

수호 원장은 한센인들의 탈출을 감시하고 탈출자들을 신속히 잡으려는 목적으로 원생들을 총동원, 십자봉 주위에 도로를 만들기로 한다. 1938년 1월에 시작한 공사는 불과 20일 만에 끝났다. 4㎞의 길이 완공됐다. 

 

그해 1월은 유난히 추웠고, 공사 현장은 암석 지대여서 길을 내기에 부적합했다. 손과 발가락이 성치 않은 한센인들은 손에 붕대를 감고 오로지 삽과 괭이로 돌산에 길을 냈다. 십 리 길을 내면서 많은 사람이 동상에 걸리고 손발을 잃었다. 

 

강제 수용된 소록도에서도 또 격리된 사람이 생겨났다. 결핵에 걸린 한센인들은 이중 격리를 피할 수 없었다. 결핵 병동은 탈출자를 막으려고 닦은 바로 그 길옆에 지어졌다. 폐쇄된 낡은 병동은 이중 격리된 환자들의 아픔을 짐작게 할 뿐이다.

 

안내를 맡은 소록본당 주임 김연준 신부는 “우리는 이 길과 결핵 병동에서 인간 고통의 맨 밑바닥을 볼 수 있다”면서 “우리가 안고 있는 상처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이들의 상처와 만날 때 위로를 받고 치유된다”고 치유의 길이라는 역설적인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했다. 

 

치유의 길은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덕분에 보존이 아주 잘 되어 있다. 우거진 산 중턱에 만들어진 길 전체가 해안을 끼고 돌기 때문에 풍광이 멋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길이 아닐 수 없다. 묵상하며 걷기에 그만이다. 피정 참가자들은 본당 안내로 치유의 길과 제비선창(일반인 비공개)을 둘러볼 수 있다.

 

 

2번지(병사)성당 

 

이튿날인 26일에 찾아간 곳은 소록도의 역사적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중앙공원 지역이다. 2번지(병사)성당도 이곳에 있다. 한센인들은 1961년 이 성당을 지을 때 직접 땅을 고르고 벽돌을 만드는 등 하느님의 집을 짓는다는 기쁜 마음으로 공사에 참여했다. 2016년 4월 문화재청은 이 성당을 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성당 제대 중앙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소록도 방문시 선물한 십자가가 걸려 있고, 왼편에는 교황이 앉은 의자가 보존돼 있다. 왼쪽 벽에 걸린 대형 벽화는 자비의 예수님 성화다. 광주대교구는 성당을 ‘자비의 특별 희년’ 교구 지정 순례지로 지정했다.

 

- 소록도 성당.

 

 

성당과 가까운 소록도 성모 동굴과 십자고상은 고통과 착취의 강제 노역 현장인 벽돌공장 터에 1962년과 1964년에 각각 세워졌다. 성모 동굴과 십자고상이 있는 정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혈을 담는 성작 모양으로 설계됐다. 고통의 정점인 공장 굴뚝 자리에 십자고상을 세운 것은 한센인들이 저주받아서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처럼 세상의 죄를 대신 속죄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고통의 땅을 치유의 땅으로 변화시키려는 의지를 담은 것이다.

 

중앙공원 지역에는 한센인 인권 탄압의 상징과 같은 감금실과 검시실이 나란히 붙어 있다. 부당한 처우와 박해에 저항하던 무수한 한센인이 감금실에서 죽거나 불구가 됐다. 출감할 때는 예외 없이 정관 절제를 당했다고 한다. 감금실 벽에 걸려 있는 두 편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불신자였다면 이 생명 가치 없을 바에는 / 분노를 기어코 폭발시킬 것이오나 / 주로 인해 내가 참아야 될 줄 아옵니다….”(‘감금실’, 김정균 지음)

 

“그 옛날 나의 사춘기에 꿈꾸던 / 사랑의 꿈은 깨어지고 / 여기 나의 25세 젊음을 / 파멸해 가는 수술대 위에서 / 내 청춘을 통곡하며 누워 있노라….”(‘단종대’, 이동 지음)

 

김정균은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었던 것 같다. 그들의 울부짖음이 귓가를 맴돌았다. 

 

검시실은 한센인들의 시체를 해부하던 곳이다. 사망자는 가족의 의사와 무관하게 검시를 마친 뒤에야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시신은 화장됐다. 이를 두고 한센인들은 “한센병 발병으로 한 번, 사망 후 시체 해부로 한 번, 장례 후 화장으로 한 번, 모두 세 번 죽는다”고 했다. 감금실과 검시실은 2004년 문화재청 문화재로 등록됐다.

 

 

앞  못보는 오르간 연주 봉사자 정봉업씨와 부인 이공순씨

 

 

김연준 신부의 소개로 한센병 후유증으로 앞을 볼 수 없으면서도 악보를 외워 19년째 성당 오르간 연주 봉사를 하는 정봉업(다니엘, 70)씨와 부인 이공순(막달레나, 74)씨를 만났다. 정씨에게 한센병에 실명까지 겹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낼 용기를 얻을 수 있었냐고 물었다. 

 

“죽고 싶은 유혹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눈마저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당시 원헥톨(과달루페외방선교회) 주임 신부님이 저를 볼 때마다 ‘다니엘, 인생 길어봐야 100년이야’라고 말씀하셨어요. 처음에는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위로가 되는 말씀으로 다가왔어요. 짧은 세상살이보다는 영원하신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의미였지요.”

 

자신처럼 고통받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한마디를 부탁하자 정씨는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플 때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더라”고 했다.

 

정씨는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 그런 절망을 딛고 지금껏 열심히 살아왔다. 한없이 자비로운 하느님께서 침묵 중에 정씨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지금까지 같이 걸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께서 정씨와 함께해오셨듯이 나와도 늘 그렇게 함께하심을 믿는다. 내가 깨닫지 못할 뿐.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평화신문, 2016년 5월 8일, 글 · 사진 남정률 기자]

 

 

소록도 역사와 현황

 

 

소록도는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600여 m 떨어진 섬이다. 면적은 4.42㎢에 불과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과 빼어난 해안 절경을 자랑한다. 2009년 소록대교가 개통함에 따라 소록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다. 이전에는 녹동항에서 배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소록도가 한센인의 고향이 된 것은 1916년 일본 조선총독부가 소록도 자혜병원(국립소록도병원 전신)을 설립하고 100여 명의 한센인을 소록도로 강제 이주시키면서부터다. 자혜병원은 당시 유일한 한센병 전문의원이었다. 

 

나병으로도 불린 한센병은 한센균에 의해 발병하는 만성감염성 질환이다. 감염 경로가 명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면역력이 약한 극소수에게만 발병한다. 한센병은 천형이 아니라 약물로 치료되는 감염병에 불과하다. 병에 걸렸더라도 2주∼2개월 정도 약을 먹으면 타인에게 전염되지 않으며, 5∼20년 정도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치된다.

 

소록도 한센인 대부분은 한센병 후유증에 따른 재활 치료 대상자들이다. 요즘은 의학의 발달로 한센병에 의해 장애가 발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재 소록도에 거주하는 한센인은 530여 명. 많을 때는 6000명이 넘었다. 

 

소록도의 복음화는 1935년 세 명의 한센인이 기도와 공소 예절을 하면서 시작됐다. 1938년 최초의 세례식이 거행됐고, 1943년 김필현(광주대교구 나주본당 주임) 신부 주례로 첫 미사가 봉헌됐다. 1946년에는 공소가 설립됐고, 1958년에는 병원 직원들을 위한 별도의 공소가 설립됐다. 

 

공소는 1960년 8월 소록도본당으로 승격했다. 직원들을 위한 1번지(관사)성당과 한센인을 위한 2번지(병사)성당은 1961년에 완공됐다. 당시 신자는 관사성당 50여 명, 병사성당 1200여 명에 달했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을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5월 4일 소록도를 방문한 것은 소록도 역사상 가장 감격스러운 사건이었다. 교황은 한센인들을 위로하며 병사성당에 대형 십자고상을 기증했다. 

 

광주대교구장 김희중 대주교는 2011년부터 매년 성금요일에 소록도 2번지성당에서 주님 수난 예식을 거행하면서 환우들을 격려하고 있다. 19대 주임으로 부임한 김연준 신부는 피정과 신앙 강좌, 누리집 개통, 영상물 제작 등을 통해 ‘치유의 섬’ 소록도를 적극적으로 알려 나가고 있다.

 

현재 신자 수는 340여 명으로, 복음화율은 50%에 가깝다. 2003년에는 아기 사슴 피정의 집을 지었다. 가톨릭 외 종교 시설은 교회 5개, 원불교당 1개다. 

 

문의 : 061-844-0528, www.sorok.org 소록도본당 [평화신문, 2016년 5월 8일, 남정률 기자]

 

 

11년 만에 다시 소록도 찾은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


소록도에서 43년 “행복했습니다. 하늘만큼…”

 

 

소록도(小鹿島).

 

‘아기 사슴’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이 섬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한센인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서다. 천형(天刑)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는 한센병. 소록도는 육신의 아픔과 세속의 편견에 눈물짓는 한센인들의 피난처였다. 

 

소록도 한센인 정착 100년을 맞아 주교회의 홍보국(국장 이정주 신부)이 4월 25∼26일 ‘아픔의 땅, 치유의 섬, 100년의 소록도’라는 주제로 마련한 종교 기자단 현장 동행 취재를 다녀왔다. 한센인들의 눈물과 한이 밴 소록도를 구석구석 둘러봤고, 한센인의 어머니 마리안느 수녀를 만났다. 

 

아픔이 큰 곳에 은총도 크다고 했던가. 소록도는 고통을 은총으로 승화시키는 치유의 섬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든 한결같은 사랑으로 대했다. 내 엄마 같다고 느꼈다. 어떤 여자아이는 온몸에 물집이 생겨 진물이 흐르고 있었다. 터지고 또 터지고 했다. 그런 아이도 조금도 싫은 기색 없이 친절하게 치료했고, 심한 상처도 다 치료해줬다.”

 

“신앙을 배웠다. 봉사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 행동이 나를 변하게 했다. 생활 자체가 기도였고, 하느님을 향해 있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공을 조금이라도 보이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한다. 그런 게 전혀 없었다.”

 

소록도 한센인들이 마르안느 스퇴거(82) 수녀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록도에서 1962년부터 43년간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하다 2005년 11월 짐이 되기 싫다며 훌쩍 고국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느 수녀가 11년 만에 다시 소록도를 찾았다. 광주대교구와 고흥군, 국립소록도병원이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17일) 행사에 수녀를 초청한 것.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던 마리안느 수녀가 4월 26일 소록도병원 회의실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기자들과의 첫 만남을 가졌다. 

 

마리안느 수녀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지만 따스하면서도 다정한 눈빛은 한센인을 돌보던 예전 그대로인 듯했다. 우리 말이 유창하지는 않았으나 짧은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전해지는 진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마리안느 수녀는 그동안 언론과의 접촉을 피한 것에 대해 “특별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알릴 필요가 없었다”면서 “사소한 일이 기사화되고 높게 평가받는 것이 힘들었다”고 밝혔다. 마리안느 수녀가 “기자들이 거짓말도 하고…”라고 웃으면서 말해 기자들도 함께 웃었다.

 

“소록도에 다시 오니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아름다운 섬에 온 것이 정말 기쁩니다. 와서 보니 많이 변했고 또 좋아졌습니다. 한센인들을 위해 애쓰는 모든 이가 고맙습니다.”

 

- 마리안느 수녀(왼쪽)가 11년 만에 다시 소록도를 찾아 환자를 만나고 있다. 소록도본당 제공.

 

 

한센인들이 가족에게 냉대 받을 때 마음 아팠다 

 

마리안느 수녀는 “28살 젊은 나이에 소록도로 온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따라 고통받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현하자는 생각 하나로 기도하면서 하루하루를 살다 보니 4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고 회고했다.

 

“환자가 치료를 받고 가족에게 돌아갈 때가 가장 행복했습니다. 한센인은 가족과 단절된 경우가 많은데, 가족이 기다려 주고 받아줄 때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완치된 후에도 여전히 외면당하는 한센인을 볼 때는 무척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리안느 수녀는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한센인을 아주 친한 친구로 여기며 지냈다”면서 자신도 한센인들에게 좋은 친구로 기억되기를 희망했다. 

 

2005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달랑 편지 한 장만 남긴 채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것은 마리안느 수녀에게 가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더 이상 일할 수 없어서 떠나는 것이었기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마음이 무거웠고,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전화와 편지로 소록도 소식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서 예수 발견하도록 노력

 

마리안느 수녀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안다면 그 믿음으로 살 수 있다”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고통받고 있는 사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백 년 가까운 소록도에서의 인생이 행복했느냐는 질문에 마리안느 수녀는 더없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답했다.  

 

“행복했습니다. (양손으로 큰 원을 그리며) 하늘만큼….” [평화신문, 2016년 5월 8일, 남정률 기자]

 

 

마리안느 스퇴거 수녀가 걸어온 길


방역복도 입지 않고 짓무른 상처 맨손으로 치료

 

 

- 한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마리안느 수녀(오른쪽).

 

 

어려서부터 봉사하는 삶을 꿈꿨던 마리안느 수녀는 오스트리아에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병원에서 5년간 근무했다. 1960년대 초 당시 광주대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의 요청에 따라 1962년 2월 마가렛 피사렛 수녀와 함께 소록도로 온 마리안느 수녀는 미감아(한센병에 걸리지 않은 한센인의 자녀)를 돌보는 영아원 일부터 시작했다. 

 

감염을 막기 위해 병사(病舍) 지대 아이들을 영아원으로 데려오는 일은 쉽지 않았으나 부모들은 수녀들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봐주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운영 주체가 천주교라 꺼리던 개신교 신자들도 아이들을 맡기며 감사를 표시했다.

 

마스크와 장갑, 방역복을 착용한 병원 직원들과 달리 흰 가운만 걸친 수녀들은 짓물러 달라붙은 환자의 손과 발가락을 맨손으로 소독해 줬다. 상처의 피고름이 얼굴에 튀어도 개의치 않았다.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 교정 수술을 해주고 물리 치료기를 들여와 재활 의지를 북돋웠다. 한센인 자녀 영아원 운영 및 보육사업, 재활 치료와 계몽, 자활 정착 사업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포장(1972년)과 국민훈장 모란장(1996년)을 받았다. 

 

43년의 소록도 생활 중 마리안느 수녀가 소록도를 떠나 있던 기간은 단 10개월. 대장에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으러 오스트리아로 떠났던 그는 수술이 끝나자 요양도 마다하고 소록도에 돌아왔다. 

 

두 수녀는 1960년대 초부터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에서 보내준 의약품과 지원금으로 활동했다. 지원금은 주로 쓰러져 가는 초가를 현대식 주택으로 개량하는 데 썼다. 그 사이 두 수녀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하는 할머니가 됐다. 주민들은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다. 

 

2005년 11월 21일 소록도 주민들은 슬픔에 휩싸였다. 43년간 동고동락한 마리안느ㆍ마가렛 수녀가 이른 아침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기 때문이다. 주민들은 두 수녀가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 위해 아침 일찍 섬을 떠났다는 소식을 해가 중천에 떠서야 들었다. 신자들은 성당에 모여 두 수녀를 위한 밤샘기도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43년 생활을 정리한 짐이라곤 낡은 여행 가방이 전부였다. 이들은 섬을 떠나며 편지 한 장만 남겼다. 그 편지도 광주로 나와서 부쳤다. 수녀들은 편지에 “한국에서 같이 일하는 외국 친구들에게 가끔 저희가 충고해 주는 말이 있는데 그곳에서 제대로 일할 수가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줄 때는 본국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자주 말해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말을 실천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다. 

 

마가렛 수녀는 지병으로 이번에 한국을 찾지 못했다. 마리안느 수녀는 오스트리아의 고향 마을 마트레이에 살면서 일주일에 세 번 20㎞ 떨어진 인스부르크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아픈 마가렛 수녀도 만난다. 오스트리아 정부에서 주는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수녀라는 호칭에 익숙해져 있지만 엄밀히 말해 두 사람은 수녀가 아니다. 그리스도 왕 시녀회라는 재속회 회원으로, 평신도 선교사에 가깝다. 

 

국립소록도병원은 2006년 5월 개원 90주년 행사 중에 두 수녀가 생활했던 공간을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집’으로 명명하는 기념식을 가졌다. 1938년에 처음 지어지고 2015년 복원 공사를 거쳐 새로 단장한 이 집은 소록도 병사 성당과 함께 문화재로 등록 예고됐다. 마리안느 수녀는 소록도병원 100주년 행사가 끝나면 귀국할 예정이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8일, 남정률 기자, 사진=소록도본당 제공]

 

 

김연준 신부(소록도본당 주임)


마리안느 · 마가렛 수녀는 한센인들의 ‘엄마’였습니다

 

 

“마리안느ㆍ마가렛 수녀는 한마디로 ‘한센인의 엄마’였습니다. 갈수록 인간성이 황폐해지는 현실에서 두 분은 인간 존엄성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소록도본당 주임 김연준 신부는 “두 분은 여기 계시는 내내 월급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내놓으셨다”면서 “고국으로 돌아가실 때는 비행기 삯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소록도에 바쳤다”고 두 수녀의 숭고한 뜻을 기렸다.

 

 

다큐영화 제작 등 기념 사업 ‘착착’ 진행 

 

김 신부는 두 수녀가 2005년 오스트리아로 돌아갈 당시 소록도본당 보좌였다. 김 신부는 “소록도에 부담을 주기 싫어 반겨 줄 부모나 친척도 없는 고향에 돌아가는 것이 죽기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라며 “이들이 수녀로 알려지는 바람에 아무도 노후를 챙겨 주지 않은 채 빈손으로 떠나보낸 것이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이후 광주대교구에서 두 사람의 노후를 책임지겠다는 뜻을 전했으나 이들이 간곡히 고사했다는 김 신부의 귀띔. 

 

소록도 근무를 자청해 2013년 본당 주임으로 다시 부임한 김 신부는 두 사람의 삶과 정신을 기리는 사업에 발 벗고 나섰다. 

 

지난해 (사)마리안마가렛이라는 별도의 법인을 세운 김 신부는 고흥군의 지원을 받아 다큐멘터리 영화 「소록도의 마리안느 마가렛」(가제)을 제작하고 있다. 이르면 올해 7월이나 12월께 극장에서 개봉할 계획이다. (사)마리안마가렛은 두 수녀처럼 해외에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이들을 돕는 사업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광주대교구도 두 사람의 삶을 담은 전기를 준비하고 있으며, 연말께 출간할 예정이다. 

 

“보좌 신부 시절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든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마가렛 수녀님께서 제게 “예수님은 제자들 발을 닦아주셨다. 그것이면 족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한마디로 일깨워 주신 거죠. 저를 일으켜 세우는 귀한 말씀이었습니다.”

 

 

소록도에서 치유의 은총 받기를 

 

김 신부는 “작은 상처는 큰 상처를 만나면 치유된다”면서 “상처의 섬 소록도는 다른 말로 치유의 섬”이라고 강조했다. 자신의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한들 한센인이 겪는 고통보다 클 수 없고, 한센인들이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킨 과정을 나의 것으로 만든다면 자신의 아픔 또한 신앙으로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마리안느ㆍ마가렛 수녀님은 이기심을 버리고 다른 이를 도울 때 사람은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두 분의 삶은 그 자체로 우리를 정화시켜 줍니다. 많은 이가 소록도에서 그런 치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 2016년 5월 8일, 남정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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