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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4: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의료 활동과 지역 사회를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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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4-02 ㅣ No.1668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 (4)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의료 활동과 지역 사회를 위한 노력 ①

 

 

한국 진출 - 원산 시절

 

한국의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역사는 1925년 10월 4일 마틸다 히르쉬(Mathilde Harsch), 크리소스토마 슈미트(Chrysostoma Schmidt), 다니엘라 키르히비클러(Daniela Kirchbichler), 헤르메티스 그로흐(Hermetis Groh) 네 명의 수녀가 독일 툿찡(Tutzing) 모원을 떠나 한국으로 파견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들은 11월 21일 원산(元山)에 도착해서 성 데레사의 집에 기거하며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한국의 언어와 문화, 풍습 등을 습득하는 데 시간을 보냈으나 이듬해부터는 교리실을 꾸며 전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1927년에는 수녀원 건물을 새로 지었고, 6명의 수녀가 모원에서 추가로 파견되었으며, 12월 8일 원산 분원이 본원으로 승격되어 분원장 마틸다 히르쉬 수녀가 본원 초대 원장이 되었다. 또 같은 해 12월 말 최초로 한 요안나와 임 골룸바가 지원한 이래 16명의 지원자가 입회하였고, 1928년 5월 1일 이들 중 9명이 첫 청원자가 되었다. 1930년 5월 24일 6명이 착복식을, 1934년 5월 26일 종신서원을 함으로써 이들이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최초의 한국인 수녀들이 되었다.

 

원산의 수녀들은 교리 교육과 본당 전교 외에도 시약소와 호수천신학교(護守天神學校)를 운영했으며 유치원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1926년 처음 시작한 호수천신학교는 크리소스토마 수녀의 열정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도 공부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빈민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아주 적은 비용만을 받았다. 1941년부터는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 기존의 4년제에서 6년제 정규 학교 과정을 가르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가톨릭 사립학교인 원산 해성학교(海星學校) 운영에 정규 교육을 받은 교사들이 필요하게 되자 수녀들을 훈련하여 해성학교로 파견하기도 했다.

 

시약소는 프룩투오사 게르스트마이어(Fruktuosa Gerstmayer) 수녀의 열심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활동이다. 프룩투오사 수녀는 독일에 있을 때 생약학, 즉 약초를 통한 제약술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원산에서도 채집한 약초 등을 이용하여 의료를 펼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1938년에는 시약소 건물을 새로 짓는 등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듯 수녀원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1933년에는 고산 본당에 신고산 분원이, 1936년에는 회령 본당에 분원이, 1940년에는 청진 본당과 시약소를 위한 분원이, 1941년에는 함흥의 성심의원과 본당 활동을 위한 함흥 분원이 만들어졌다.1)

 

 

 

 

해방 이후의 상황 변화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활동 지역이 대부분 이북 지역이므로 해방이 민족적 기쁨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이들에게는 새로운 시련이 되었다. 해방 얼마 전인 8월 초부터 국경과 가까운 청진, 회령 등에는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소련군의 진주가 신변의 위협이 될 수도 있었기에 청진 분원과 회령 분원의 수녀들은 원산 본원과 신고산 분원으로 피란하였다.

 

8월 15일 마침내 일본이 패망하고 미·소의 분할 점령 정책에 따라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함흥 분원과 원산 본원, 그리고 신고산 분원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이 닥쳐왔다. 원산의 해성학교 건물이 징발되어 한동안 수녀원 운영이 막연해지기도 했다. 다행히 얼마 뒤에 소련군 여군들의 바느질 일감 등을 맡게 되면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여기에 신고산 분원의 농장 일도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1946년 3월 토지 개혁을 실시함에 따라 신고산 분원 농장도 직접 경작 가능한 3천여 평만 남게 되었고, 곡식 등 수확물을 원산 본원으로 가지고 오는 데도 제약이 생겨서 다소간의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2) 수녀회에는 두 명의 일본인 수녀가 있었는데 이들은 본국으로 귀환 조치당하기도 했다.3)

 

 

 

해방 이후 이북에서 포교와 같은 종교적 활동은 사실상 금지되었으므로 소련 군정의 요청에 따라 양로원을 운영하는 일과, 해성학교와 호수천신학교 폐교 이후 새롭게 설립한 여학교인 효성가정여학교(曉星家庭女學校) 운영 등의 소임을 감당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다 1948년 9월 이북 지역에 북한 정부가 수립됨에 따라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다소간 선교의 자유가 허용된 것이다. 한편으로는 어려움도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독일 모원과의 연락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던 점이다.

 

그러던 중 1949년 초에 시약소 운영이 금지당해서 폐쇄되고 말았다. 제한적 상황에서 약간이나마 주어졌던 활동의 자유는 그리 길게 지속되지 못했던 것이다. 시약소 운영 폐쇄 이후로 북한 정부의 종교적 탄압이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4월에는 수녀원과 부속 건물이 징발되었고, 5월에는 급기야 원산 본원부터 분원의 수녀들까지 북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기 시작했다. 당시 수녀원에는 서양인 수녀 20명과 한국인 수녀 25명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도 서양인 수녀들에 대한 처우는 더욱 엄격했다. 한국인 수녀들이 얼마간 취조와 심문의 고초를 당한 후에 방면되었던 것에 비해 서양인 수녀들은 교화소로 보내졌다. 이들은 여러 군데의 교화소에 분산 수용되어 있다가 옥사독(Oksadok) 수용소로 옮겨졌고, 전쟁이 끝나고도 계속 감금되어 있다가 1954년 1월에야 가까스로 본국으로 송환될 수 있었다.

 

한국인 수녀들이 취조당하고 방면된 뒤에 수녀원은 강제로 해산되었다. 북한 정부는 이들의 수도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하였다. 본원과 분원장, 각 사업을 담당하던 서양인 수녀들은 아직 영어의 몸인 상태로, 공간마저 징발되어 정처 없어진 수녀들은 일단은 본가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축일 등 기회가 될 때마다 모이는 등 서로 연락을 유지했다. 고향이 남쪽이던 이철희 보니파시아 수녀 등은 개인적인 방법을 마련해 월남을 택하기도 했다. 그조차 여의찮았던 이들은 원산에 남았다. 이렇게 어려운 시기 중에 일부 기간 서원 수녀 중 몇몇은 서원 기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수녀회를 벗어나게 되기도 하였다.

 

 

한국전쟁과 수녀회

 

북한 정부의 계속되는 종교 박해로 수녀들은 베네딕도 수도회 수사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갈 것을 계획하게 되었다. 1950년 초에 박정덕(朴靜德) 골룸바 수녀가 월남했다. 곧 김원집(金媛集) 스테파니아 수녀와 조재환 스테파노 수사가, 그다음으로는 이용호(李庸鎬) 모니카 수녀와 제삼례(諸三禮) 후밀리타스 수녀도 남쪽으로 향했다. 이렇게 소규모로 조금씩 월남을 시도한 끝에 서울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 도움을 얻은 방 한 칸에서 겨우 다시 모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향후의 거취를 논의하는 중에 전쟁이 발발하면서 모든 것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서울에 모인 이들이나 아직 월남하지 못한 이들이나 최대한 몸을 피하고 상황을 살피며 견뎌야 했다. 이 과정에서 결국 끝내 희생당한 가족들도 있었다.4)

 

 

 

9월의 인천 상륙작전과 10월의 서울 탈환에 이어 유엔군이 계속 북쪽으로 진주하게 됨에 따라 이북에 남아 있던 이들은 종교의 자유를 되찾았고, 남쪽에 있던 이들도 다시 원산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중공군의 참전으로 희망은 깨어지고 말았다. 평양 인근에 머물던 여섯 명의 수녀는 사복으로 변복하고 전선의 후퇴와 함께 서울로 합류해서 육로로, 그리고 원산에 있던 이들은 가까스로 배편을 이용하여 부산으로 피란해야 했다.5)

 

전쟁 피란의 어려움 와중에도 흩어져 있던 이들이 부산에서 다시 만나는 기쁨과 감격을 누릴 수 있었다. 서울에서 피란 온 9명의 수녀들은 부산 중앙 성당에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의 호의를 얻어서 함께 기거하고 있었는데, 원산에서 피란한 8명이 합류하게 되었다. 비록 재회는 기쁜 일이었으나 겨우 얻은 좁은 공간에서 17명이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큰 어려움이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해성학교 졸업생 중 간호 장교로 복무 중이던 황영희(안토니아) 대위를 만나 그 인연으로 육군병원에 일자리를 얻어 수녀 10명의 거취가 마련되었다. 병원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환자로 들어온 군인들을 간호하고 또 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전교 활동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생활 공간은 여전히 턱없이 부족했고 수녀회의 살림 또한 맥카티(Mc’Carthy) 군종 신부의 후원금 등 여러 사람의 호의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다 광주교구장 현 하롤드(W. Harold Henry, 玄海) 주교의 주선으로 수녀 7명이 광주 북동 성당으로 파견되었다.

 

이렇게 간신히 버티어 나가던 중에 베네딕도 수도회가 대구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이를 계기로 수녀회 또한 대구교구 최덕홍(崔德弘, 요한) 주교의 도움으로 남산동(南山洞) 성당 내로 이전할 수 있었다. 마침 툿찡의 모원에서도 북한에 구금되어 있는 서양인 수녀들을 대신할 인물로 스위스인 오트마라 암만(Othmara Ammann) 수녀를 파송해 주었다.6) 다만 대구교구에서 마련해준 공간도 협소해 오래 머물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향후의 거취를 두고 이미 일부 수녀가 파견되어 있는 광주로 갈 것인지, 전쟁이 끝나면 최대한 빨리 이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서울로 갈 것인지, 대구에 남을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모원에서 대구에 남을 것을 결정해 주었고, 이렇게 해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대구 생활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52년 10월 2일 드디어 공평동(公坪洞)에 100여 평 규모의 터전을 마련하여 새롭게 분원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파티마 병원과 의료 봉사의 시작

 

1953년 봄에 수녀들은 공평동 분원 안에 작은 규모의 무료 시약소를 만들어 ‘성 안토니오 의원’이라고 이름 붙이고 해방 이전의 의료 사업을 재개하였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 입회하는 지원자가 생기는 등 수녀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평동 부지로 충분치 않게 되었다. 이에 1955년 신암동(新岩洞) 302-1번지의 땅을 사 수녀회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그 부지 안에 병원 건물도 신설하였다. 새로운 병원은 ‘파티마 의원’이라 이름 붙였으니 이것이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파티마 병원의 시작이었다. 1956년 수녀회와 병원 건물이 완공되고, 대구 분원이 대구 본원으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초대 원장은 오트마라 암만 수녀였다.

 

1950년대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고, 전쟁으로 파괴되고 무너진 모든 것의 복구와 재건이 시대적 요청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땅한 생활 공간을 확보하는 것조차 어렵던 시기에 해외 지원을 바탕으로 한 천주교의 보건과 의료 활동은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성 안토니오 의원도 처음에는 가톨릭 구제회(CRS, Catholic Relief Services) 등에서 지원받은 의약품을 필요한 이들에게 분배하는 역할이 컸다. 인근 대구대학병원에서 근무 중인 스위스인 의사의 지원으로 비정기적이나마 진료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본원이 설립된 신암동 또한 전쟁 피란민들로 이루어진 열악한 지역이었다. 그 때문에 새로운 보금자리에서도 의료 사업은 필수적이었다. 파티마 의원은 미8군 산하 원조기구인 AFAK(American Forces Assistance to Korea, 미군대한원조)와 독일 주교회의 산하 원조기구인 미세레오르(Misereor), 스위스 부인회 등의 후원으로 2층 건물을 지어서 진료를 시작했다. 시약소의 성격이 강했던 성 안토니오 의원과 달리 상주 의사는 물론 각종 검사실까지 갖춘 본격적인 의료기관이었다. 초대 병원장은 마리아 살루스(Maria Salus) 수녀였으나 한국에 들어와 언어를 익히고 한국 의사 면허를 따기까지 시일이 걸려, 그동안에는 청원 수녀이자 의사였던 이종원 수녀가 현장을 맡았다. 간호사인 이화련(李花蓮) 수녀는 물론이고 나머지 수녀들도 각종 봉사로 병원 일을 거들었다. 살루스 수녀가 1957년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처음으로 외부에서 의사를 초빙하였다.7)

 

한편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본국으로 송환된 수녀들이 1955년부터 다시 남한으로 파견되어 왔다. 끔찍한 고생을 겪고도 한국 땅에 대한 애정과 소명의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956년에는 초창기부터 활동했던 크리소스토마 슈미트 수녀와 겔트루드 링크 수녀가 대구에 도착하였다. 1958년에 재입국한 디오메데스 메펠트(Diomedes Meffert) 수녀는 1930년대 원산 본원 시절부터 한국 의사 면허를 취득하여 의료 활동을 했었는데, 파티마 의원에서는 산부인과 · 피부과 · 이비인후과 영역을 전담하였다.

 

이상으로 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의 초기 설립 과정부터 한국전쟁을 거쳐 대구에 자리 잡고 파티마 의원을 개원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지면 여건상 한 번에 전부 다룰 수가 없어 다음번에는 수녀회의 다양한 활동과 의료 사업의 구체적인 양상을 밝히고, 이들이 지역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했는지, 그리고 수녀회의 발전상은 어떠했는지 정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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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48년에는 흥남 분원도 설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정권에 의해 성당과 수녀원을 몰수당하면서 폐쇄되고 말았다.

 

2) 이 무렵 암브로시아 엥글러(Ambrosia Engler, 王順哲) 원장 수녀의 건강 문제가 악화하였고, 변화하는 상황에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해졌으므로 1948년 5월부터는 겔트루드 링크(Gertrud Link, 林仁順) 수녀가 제4대 원장이 되었다.

 

3) 사베라 노무라(Xavera Nomura, 野村房子) 수녀와 막달레나 무로(Magdalena Muro, 室富美子) 수녀이다.

 

4) 장 악녜타(이름은 불명) 헌신자(1910~1950)는 전쟁 직전부터 교화소에 갇혀 있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피살당했고, 박빈숙(朴彬淑) 루치아 수녀(1919~1950) 역시 유엔군 진주 직전에 북한 정치부원에게 피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5) 오윤애(吳允愛) 알퐁사 수녀처럼 다른 수녀들과 함께 움직이지 못하고 고향의 본가 등에 흩어져 있다가 개인적으로 남하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김인선(金仁善) 로사 수녀는 천신만고 끝에 1952년 7월에야 대구의 수녀원으로 합류할 수 있었으니 그 고생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6) 당시 오트마라 암만 수녀는 1920년대에 한국에 파송되어 의료 사업을 하다가 1935년에 본원으로 귀국해 있던 상황이었다.

 

7) 최초의 외부 의사는 내과 전문의 김재하로 1957년부터 약 10년간 파티마 의원에서 근무했다.

 

[교회와 역사, 2024년 2월호, 김가흔(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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