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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 인터뷰: 예수살이 공동체 박기호 대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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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5-01-06 ㅣ No.3

[사목 인터뷰] 예수살이 공동체 박기호 대표 신부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현대사회는 인간의 필요성에 부응하는 상품을 생산하던 산업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필요를 창출하는 소비사회 단계에 접어든 지 오래다. 이른바 ‘유도된 필요성’이란 개념만큼 이런 상황을 가장 적절히 묘사하는 말도 없을 것이다. 텔레비전, 영화, 인터넷, 휴대전화 등의 매체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여 새로운 욕망과 필요성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해서 발생한 필요성에 부응하고자 또 다른 새로운 상품들을 만들어내고……. 이 무한 팽창의 욕망이 지금 인간과 사회, 그리고 생태계를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이런 소비사회 한가운데서 과연 그리스도인은 어떤 삶을 선택하고 살아갈 것인가? ‘소비사회에서 그리스도인 되기’라는 화두를 가지고 절제와 나눔의 공동체 정신을 살고자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을 펼치는 박기호 신부(서울대교구 서교동본당 주임)를 서울 합정동 ‘밀알의 집’에서 만나 소비사회의 대안과 공동체 운동의 전망에 대해 들어보았다.

 

 

-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고, 그 현황은 어떠합니까? 

 

1994년부터 저를 비롯한 5명의 신부들이 다달이 정기모임을 갖고 사목과 사회적 관심에 대한 나눔을 해오다가, 1996년에 연립주택을 전세로 얻어서 노동사목 실무자들의 숙소와 소규모 모임 장소로 이용할 목적으로 ‘밀알의 집’을 연 적이 있었습니다. 모두 보좌신부들이니까 자연히 청년 사목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본당마다 청년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결합력이 떨어지는 현상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 원인과 대안을 고민하다가 소비문화의 폐해와 그 사회적 배경에 대한 실체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청년들에게 복음적인 인생관과 공동체적 세계관을 의식화하는 교육과 공동체적 생활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시작한 것이 1998년 1월의 배동교육이었습니다. 

 

그 뒤로 현재까지 24회에 걸쳐 870명의 청년들(배동이)을 교육했고, 그중 예수살이의 삶을 서원한 46명의 청년들(민들레)과 11명의 사제(길벗)가 중심이 되어 공동체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는 장년들을 대상으로 제자교육도 시작했습니다. 또 최근에는 예수살이 영성을 삶으로 담보하는 공동체를 건설하려고 ‘산 위의 마을’ 건립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 예수살이 공동체의 영성은 무엇이고, 이를 실천하고자 어떤 프로그램이나 생활방식을 택하고 있습니까? 

 

예수살이 공동체는 지상에서 ‘천국처럼’, 곧 하느님 나라를 신앙으로만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시작하자는 신앙생활 운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적 성격을 ‘소유로부터의 자유, 이웃과 함께하는 기쁨, 세상의 변혁을 위한 투신’으로 정리하여 예수살이 정신으로 삼고 있습니다. 예수살이의 신앙고백은 역사의 예수님께 대한 고백과 그 인품을 닮는 데 우선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간성을 발견하여 교과서로 삼고 이를 본받는 것을 수행의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인간의 고통과 세상 갈등의 원인이 존재를 서로 대상화하여 경쟁하고 상품과 지배의 대상으로 삼는 데 있다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다른 생김일 뿐 오직 하느님께 의하여 유기적 존재로 창조된 하나의 몸이라는 공동체 이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살이의 수행은 매일의 명상생활, 매주의 적공(積功)활동(자원봉사), 매월의 공동성찰, 매년의 공동생활이라는 4행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 예수살이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우리 시대에서 예수님 따라 살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예수님 당시의 사회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여기에는 인간 삶의 기본적 공통성도 있겠지만, 시간적 공간적 차이에 비례하는 괴리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이 중요할 것 같은데, 그 동일성과 차이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나 유한적 현실을 넘어서려는 종교적 의지는 동서고금에 변화가 있을 수 없겠지만, 이천 년 전의 예수님 제자들과 우리의 차이라고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의 처지와 위치가 확연히 다르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부자와 권력자, 곧 사회적 지배계급을 일컬어서 예수님의 적대자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도 하느님을 믿었고 충실한 신앙인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우리 시대 신앙인들은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 사회 문화적 혜택에서 지배계급이 아닐까요? 시민의 권리, 기술 문명과 도시 생활, 교육 수준, 정보 접근성 등에서 그렇다고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면 대안이 없다는 절박감이 아니라 부자 청년의 질문(마르 10,17-22)처럼 존재론적 공허감이나 심리적 귀속의식과 연계되어 있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 예수살이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현대사회를 소비자본주의 사회라고 규정하고 이를 극복하고자 다양한 오프(OFF) 운동(휴대전화 사용하지 않기, 텔레비전 보지 않기, 신용카드 사용하지 않기 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런 소비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 흐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비자본주의 그 자체를 거부하는 방법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서 인정하고 그 안에서 어떤 긍정성을 찾아내고 좋은 방향으로 이끌겠다는 것입니다.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은 이 가운데 어디쯤에 위치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소비중독 현상은 이미 마약중독 이상으로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삶에 침투해 있습니다. 또한 현실에서 극악(極惡)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의 긍정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비문화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긍정성을 강화시킨다고 해서 소비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인간의 욕구와 본능이 순순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담배 끊었다’, ‘텔레비전 안 본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담배 줄였다’, ‘텔레비전 덜 본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소비문화에 저항하는 ‘광야 운동(오프 운동)’이 부정성 운동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충분한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고 개개인의 생활과 오프 운동의 수준을 존중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수준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오히려 소비문화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자유로워요. 

 

자본주의건 공산주의건 인간이 만들어낸 이념들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소비산업사회가 될까, 자본주의 사회가 될까, 사회공산주의 사회가 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있다면 솔직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 주신 물자를 무한정 낭비해서 쓰레기로 내몰고, 인간과 동식물의 삶터를 오염시키고 서서히 죽어가며 재앙을 맞이하는 이런 사회는 아닙니다. 소비의 천국은 참된 행복이나 하느님 나라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 예수살이의 오계(五戒)를 보면 노동에 대한 강한 긍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는 노동시장에서 배제되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며, 이들은 경제적 물질적 가난뿐 아니라 사회적 몰이해와 소외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부에서도 200만 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 노동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인식을 바꾸고 그에 적합한 사회적 시스템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날의 노동이란 개념은 상품적 교환가치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대가 없이 일하는 것은 봉사거나 착취가 될 뿐 노동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적 세계관에서 노동이란 사랑의 물질적 표현이고,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세계를 아담(인간)더러 다스리라 하신 위탁의 행위입니다. 사랑과 지속적 창조의 행위가 노동입니다. 그러니 상품적 가치로서 노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지요. 

 

창조행위와 사랑이라는 개념이 빠진 노동에서 교환가치의 노동이 나왔고 여성 차별도 거기에서 나옵니다. ‘전업 주부’란 말이 나타났는데, 이것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가정을 위한 숭고한 희생을 교환가치로 보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직접 돈을 벌어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으로서 노동을 부정해 온 반작용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우리 예수살이가 기도, 노동, 공유, 배려, 정직을 5계로 삼고 있는데, 노동을 강조하는 것은 노동이 우리 시대에 참으로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할 일이 없을 때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쓰는 것 등은 대가를 받는 것이 아니지만 노동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 공동체 성원들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강학집을 보니, 안중근 의사를 ‘본받아야 할 신앙인 상’이라고 적고 있는데 좀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안중근의 항일 투쟁이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일종의 대항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에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최근의 국제 상황, 그러니까 미국의 폭력과 이에 대항하는 이슬람 세력의 대항폭력, 그리고 이에 더욱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미국의 폭력 등으로 점차 폭력의 악순환 상태에 빠져드는 형국에서 안중근의 대항폭력 노선은 자칫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예수살이가 역사의 예수님께 접근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와 신앙고백을 쉽게 하듯이, 예수살이 각 공동체는 역사적 지정학적으로 좀 더 가까운 인물을 신앙인 상으로 만나고 자유롭게 선택하여 따를 수 있게 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저격이 안중근 의사의 생애에 봉우리처럼 상징되는 데다가 그분의 신앙고백이 제대로 알려져있지 않아서 생기는 오해입니다. 그분의 신앙은 조선시대 교리서인 「상재상서」에 기초한 당대의 신앙전통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시대적 고뇌를 해석함은 남미의 해방신학보다 100년을 앞선 전환기 신학에 속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인데도 말입니다. 일본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고뇌하고 시대정신을 알고 우선적 결단을 내린 안중근 토마스 의사처럼 소비문화의 거대한 위력 앞에 고뇌하는 시대정신이 예수살이의 복음적 성찰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 요즘은 우리 사회에서도 현대사회의 병폐와 모순에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대안적 삶을 찾아가고자 다양한 공동체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이 본받을 만한 공동체 모델은 무엇입니까? 

 

전 세계의 유명한 공동체들을 가끔 둘러보곤 했는데 산상설교를 해석 없이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영국의 부르더 호프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역사는 90년에 이르고, 미국 호주 등 전 세계에 5개의 공동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살이 청년 모임은 운동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정신과 생활이 합일되려면 그 이상의 삶을 요구합니다. 모두가 무소유의 공동체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해서 정신만 강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산 위의 마을’을 건립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적 삶을 실현하고자 하는 공동체 마을은 일차적으로 평가할 때, 인간이 어떤 이상과 정신을 가지고 어떻게 조화롭게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상사회의 모형(모델)인 것입니다. 마치 맛보기 음식을 진열한 시식 코너에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이 작은 공동체의 삶을 통해 자신들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고, 무엇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발견하고 배우게 됩니다. 

 

한국사회에서 현재 개신교는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를 갖고 있고, 불교에서도 정토회, 인드라망 등 여러 공동체가 출현하고 있으며 여기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도 이런 이상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살이가 ‘산 위의 마을’을 건립해서 한국 가톨릭 교회의 증거가 되고자 합니다. 

 

 

- ‘공동체 운동’을 생각할 때 드는 심리적 부담 가운데 하나는, 혹 ‘개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서구에서야 이미 근대의 역사가 오래되어 개인의 독자성 같은 경우가 사회제도나 문화 속에서 충분히 인정받지만, 우리의 경우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아직도 개인을 인정하지 못하는 봉건적 습속들이 잔재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상태에서 자칫 공동체가 자유로운 개인들의 감옥이 될 수도 있고, 또 그래서 선뜻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를 강조하면 개인의 자유가 위축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면 공동체성이 붕괴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습니까? 이는 마치 공맹(孔孟)의 유가사상을 강조하면 사회윤리가 강조되고, 노장(老壯)의 도가사상을 강조하면 해방과 자유가 강조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 체계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함께하는 공동체의 경우 형식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공동체 운영이나 진로와 관련해서 아무래도 성직자의 발언권이 강할 수 있으며, 따라서 평신도의 참여가 위축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럴 경우 양자 사이에 갈등은 없을까요? 공동체의 중요한 의사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대안 공동체들의 경우 보통 만장일치제 의사결정 방식을 채택하고 있어요. 우리 역시 별다른 이의 없이 오늘까지 왔는데, 아마 아직은 성장에 주력할 만큼 공동체 운영에 대한 반성기를 맞지 않아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점차 청년들의 자체적인 의사결정을 존중하고 따라가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소한 것이라도 성직자가 나서서 지적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중요한 결정인데도 자발적 결정을 존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 어떻게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느냐가 문제라고 봅니다. 또 그런 면에서 볼 때 아직은 큰 갈등 없이 지내오고 있습니다. 앞으로 예수살이에서 청년들, 구성원들은 점점 성장해야 하고 성직자들은 점점 작아져야 할 것입니다. 

 

갈등이 있다는 것은 반성과 애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의사가 대립되었을 때 사도행전의 방식에 따라 기도하고 제비를 뽑아서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는 규정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 사용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의 또 다른 축이라고 볼 수 있는 ‘산 위의 마을’은 현재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또 앞으로 어떤 지향점을 갖고 있는지요? 

 

2년 전부터 다달이 준비모임을 하고 있는데 30명이 모였습니다. 이번에 산 위의 마을을 후원해 달라고 홍보하는 광고를 했는데, 후원금을 보내온 분은 없었지만 준비모임에 참가하겠다는 분들이 나타나서 40명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우선 두 세대가 충북 단양으로 귀농을 했는데 그곳이 산 위의 마을로 성장할 수 있는지 관찰하고 있습니다. 산 위의 마을은 자급자족을 추구하는 임?농업의 생태마을이며, 장기적으로는 초중고 대안학교 설립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 특정한 신앙생활 방식에 동의하는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다 보면,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본당 생활과 충돌하는 경우는 없습니까?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을 하면서 본당 청년 사도직에 참여하는 청년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본당 사도직에 공동체 영성을 보급하여 오히려 본당 청년 단체의 활성화에 도움을 줍니다. 그리고 본당 청년 단체의 침체에 대한 고민을 여기 예수살이 공동체에서 나누고 새롭게 시도하곤 합니다. 

 

 

- 공동체 운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현재 한국교회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소공동체 운동을 어떻게 생각하시고, 이것이 성공하려면 어떤 노력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서울대교구가 지난 10년 동안 진행해 온 소공동체 운동은 일차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봅니다. 특히 도시사회에서 신앙생활의 조직화와 연대의식으로 나누는 생활과 기도의 공동체는 큰 성과입니다. 그러나 공동체는 철학과 삶, 곧 영성과 생활이 합일되어야 합니다. 소공동체는 각 본당에서 행사 준비와 예비신자 안내, 냉담자 방문, 상가 연도 등 과거의 레지오가 도맡았던 역할을 거의 모두 이어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본당에서 레지오의 자리는 점점 더 줄어들 것입니다. 이것은 레지오가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소공동체도 마찬가지로 공동체성의 강화라는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변화하지 않으면 또 그런 역사를 맞이하게 될지 모릅니다. 

 

 

- 마지막으로 우리 한국교회의 현 상황 안에서 예수살이 공동체 운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한국교회는 우리 시대에 어떻게 사는 것이 복음적 삶인지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본당에서 사제의 강론이 과연 기쁜 소식의 해설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날 소비문화의 기술문명은 영상과 게임과 쇼핑, 미인 제조 기술들로 기쁜 소식을 대신하고 있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정신없이 여기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각 기업들이 행하는 소비 마케팅에 공습당하고 있습니다. 수입이 늘어도 지출의 증가를 따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과거 부유층의 상징인 승용차 안에서, 아파트에서 돈 때문에 자살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면 예수님께 도전했던 악마의 실체가 아직도 살아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다음 기회를 노리고 물러갔던 악마’는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보라고 유혹했고, 그 후에는 종교 재판관이 되어 과학과 신학과 지역문화를 억압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기술문명을 찬양하며 그것이 고상한 문화이고 감동적인 삶이라고 속삭이며 소비중독의 바이러스를 살포하고 있습니다. 소비문화의 극복 없는 복음선포는 아마 문명이란 이름의 악마에 속아서 굴복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삶, 그래서 자발적으로 좀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복음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사회가 서로 하나의 몸이니까 서로 공존하며 사는 것이 바로 복음의 삶이고 제자의 길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사목, 2004년 4월호, 인터뷰 정리 엄재중 기자, 사진 이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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