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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신앙과 이성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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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35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회칙 「신앙과 이성」 해설 -

 

 

1. 머리말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도 인류는 꽤 긴 시기 동안 자연적 이성에 의존하여 문화를 형성하며 살아 왔다. 때가 찼을 때,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민의 구원 의지를 선포하셨다. 그 기쁜 소식은 예루살렘에서 주변 세계로 널리 전해져야 했다. 당시는 헬레니즘-로마 시대였기 때문에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시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 유산은 고대 그리스 철학적 사고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초창기에 사도들과 교부들이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자연히 초자연적 계시와 자연적 이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이 만남은 성 아우구스티노와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통해 각각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는 방도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를 거치면서 이처럼 어렵게 성취된 조화로운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기되고 각기 분리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그 부정적인 귀결들이 현대에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 

 

나치 정권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공산 치하에서 사상 또는 이데올로기가 개인과 사회 생활 전반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한1) 교황은 재위 20주년 기념 회칙 [신앙과 이성]2)을 통해 바로 이 ‘신앙과 이성’(fides et ratio), 신학과 철학의 관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요한 바오로 2세는 1978년 교황위에 오를 때부터 교회가 제이 천년기의 마지막 시기를 살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3) 단지 한 세기의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 강생 후 두 번의 천년기가 지나고 이제 막 새로운 천년기가 밝아 오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지난 10세기 동안 자신에게 일어났던 것을 분명히 의식하면서 이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4) 그래서 교황은 이미 2000년을 특별 대희년으로 선포하고,5) 참으로 의미 있는 대축제로 만들 수 있도록 10년이 넘게 준비를 해 오고 있는 터이다. 

 

교황은 2000년 대희년을 위한 직접적인 준비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함께 이미 실제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6) 교황은 지칠 줄 모르고 이제껏 무려 117개국을 순방한 것을, 현대 세계를 향해 교회의 문을 활짝 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시키는 한 방편으로 이해하고 있다. 

 

교황은 자신의 사목 방향을 제시하는 첫 회칙에서 창조의 정점이자 구원의 대상인 인간이 바로 “교회의 길”임을 선언했다.7) 최근에는 윤리 문제를 책임진 최고 책임자로서 [진리의 광채](1993년)와 [생명의 복음](1995년)이라는 두 개의 회칙을 통해 현대 세계의 도덕적 해이와 생명 경시 풍조를 질타했다. 이제 재위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천년기의 여명이 밝아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현대의 위협받고 있는 ‘진리’ 자체에 관한 교도권의 가르침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우리는 이하에서 대체로 회칙의 범위 내에서 그 작성 동기, 현대적 위험들에 대한 진단, 그 역사적 뿌리, 그리고 신앙과 이성이 만나 온 지난 2000년 간의 역사에 대한 회고와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완벽한 해결책을 제시했던 성 토마스 데 아퀴노의 업적에 대한 평가 그리고 이런 고찰들에서 추려져 나오는 해결 지침들을 지면이 허락하는 한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2. 회칙의 동기

 

교황은 처음부터 현대의 위험을 보고 있었다. “금세기는 인간에게 대재난의 세기, 대 파멸의 세기가 되어 왔다. 그것도 단지 물질적 파멸만이 아니고 도덕적 파멸, 참으로 무엇보다도 도덕적 파멸의 세기이다.”8) 그리고 제일 천년기의 순교자들의 피에서 탄생한 교회의 역사가 제이 천년기 말에 와서 다시 순교자들의 피로 얼룩지고 있음을 지적한다.9) 

 

회칙 [신앙과 이성]에서 교황이 가장 염려하고 있는 현대의 위험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 결핍”이다. 금세기 현대인은 신이 없는 시대, 형이상학 부재의 시대, ‘허무주의’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근대 후기(post-modern) 시대’라 불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들은 “확실성의 시대는 지나갔고, 인간 존재자는 이제 모든 것이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총체적 의미 부재의 지평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라고 가르친다(91항). 이 허무주의는 우리 시대의 특징인 가공할 전쟁의 경험으로써 정당화되어 왔다. “이런 극적인 경험은, 역사를 이성의 진보이며 모든 행복과 자유의 원천이라고 보는 합리주의적 낙관주의의 붕괴를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가 끝나 가는 지금, 우리를 무섭도록 위협하고 있는 것은 절망의 유혹입니다”(91항). 그러면서도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자기 운명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착각을 품고 있는 실증주의적 태도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리고 교황은 현대 사조들 가운데서, 역사적 맥락이나 그 깊은 함축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이질적인 철학 체계들로부터 단편적인 내용이나 용어들을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절충주의(86항), 어떤 철학의 진리성이 특정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목적에 필요한지 그 여부에 따라 좌우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진리의 항구한 타당성을 부정하는 역사적 상대주의(87항), 종교, 신학, 윤리학, 미학 등의 가치는 물론, 인생의 의미조차도 단순한 감상 또는 환상으로 매도하는 과학주의(88항),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데 객관적 도덕 원리를 깊이 숙고하지 않은 채 오직 민주적 다수의 합의를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실용주의(89항) 등을 매우 위험한 것으로 지적하면서, 이 모든 위험한 사조들의 공통 기저에는 ‘허무주의’가 자리잡고 있음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다(90항). 

 

이들은 모든 토대와 객관적 진리를 부정한다. ‘존재의 망각’은 객관적 진리와 인간 존엄성을 지탱하고 있는 근본 토대와의 접촉을 상실하게 만든다. 곧 인간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특징을 지워 버리고 파괴적인 ‘힘에의 의지’(니체)나 ‘희망 없는 고독’(사르트르)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자유가 진리라는 방향을 잃게 되면 그저 맹목적 파괴력으로 작용할 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상황을 검토하면서 우리는 다른 시대의 문제들이 새로운 각도로 다시 돌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55항). “이성의 진리 인식 능력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가장 절박한 문제이다. 형이상학의 죽음을 부르짖으며 19세기에 교회를 위협하던 합리주의 또는 맹신주의가 다시 팽배하고 있다. 이 모든 위험들은 “새로운 천년기가 끌어안아야 할 도전들”이다(103항). 

 

현대는 진리의 위기 시대이다. 무엇보다도 인간 이성이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신뢰를 포기한 것이다. 이 모든 것의 뿌리에는 근대 철학이 표방한 자율 이성의 자족성(自足性) 선언에서 빚어진 내재적 원리(principii immanentiae)가 있다(91항). 개신교 신학자 본회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인이 된 인류’가 이제까지의 신의 보호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 나서는 세속화의 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일부 날카로운 비판가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계시가 알려지기 이전인 고대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계시를 거부하고 마치 계시가 없었던 것인 양 살고자 하는 것이다. 회칙은 이를 아담의 불순종에서 빚어진 원죄를 상기시키며 철학의 ‘맹목적 교만’(superbiae caecitas)이라고 부르고 있다(2.22항). 

 

따라서 교황은 회칙의 주제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번 회칙에서는 ‘진리’ 자체라는 주제와, ‘신앙’과의 관련 속에 있는 그 ‘기초’에 초점을 맞출까 합니다. 왜냐하면 급변하는 복잡한 현대는 특히 미래를 걸머질 젊은이들에게 그들이 정당하게 참조할 기준점이 없다는 느낌을 남길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위한 기본적 욕구는, 일시적인 것들이 가치 있다고 주장되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이 의문에 처해지게 되는, 명백한 전망의 부재에 직면하고 있는 이러한 때에는 더욱 절박한 것이 됩니다”(6항). 

 

교회는 20세기에 태어나서 새로운 천년기의 시작을 책임질 젊은이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걸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들에게 남겨 줄 기준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목표점도 그리고 나침반도 지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야말로 표류하는 길밖에 더 있겠는가! 

 

교황은 진리를 증언할 사명을 띠고 있는 주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참된 지혜에 이르는 길”을 제공하고자 한다. “신앙의 진리를 재확인하는 가운데 우리는 우리 동시대인들에게 우리의 인식 능력에 대한 진정한 신뢰를 회복시켜 주는 것은 물론, 철학이 그 고유의 충만한 품위를 복원-발전시키도록 촉구할 수 있습니다”(6항). 

 

교황은 신앙과 이성, 신학과 철학의 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성서의 가르침과 철학의 역사 그리고 교도권의 가르침을 역사적으로 회고한다. 

 


3. 성서의 가르침:함축적 철학

 

구약성서의 지혜 문학에서는 현자(賢者)를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으로 묘사한다.10) 이처럼 지혜를 갈망하는 것은 만민의 공통 특성이다. 지혜 문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향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한다. “피조물의 웅대함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는 그것들을 만드신 분을 알 수 있다”(지혜 13,5). 그런데 세계와 역사의 사건들은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결코 제대로 이해될 수 없다. 인간은 이성의 빛을 통해서 어느 길을 택할지를 알 수 있지만, 오직 신앙의 지평 안에서 그들이 추구해야 하는 올바른 정신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방해받지 않고 신속하게 그 목표에까지 따라갈 수 있다(16항). 

 

성서는 인간이 세계, 백성, 하느님 사이의 접합점(coniunctum)이라고 가르치고 있다(21항). 계시를 통해 다가온 신비에 개방함으로써, 이성이 그때까지는 감히 바랄 수도 없었던 깨달음이 하나의 가능성이 되는 그런 무한자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21항). 

성서는 이성이 지켜야 하는 규칙들을 가르쳐 준다. 첫째, 인간 인식은 끝없는 하나의 여정이다. 둘째, 진리 취득은 개인의 정복 결과일 수 없다. 셋째, 이성은 마땅히 하느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이 규칙들을 무시할 때 인간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고, 결국 현자가 아니라 어리석은 자의 처지에 놓이게 된다(18항). 

 

이성이 어려움 없이 감각 소여들을 넘어 모든 사물의 기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원래의 창조 계획의 일부였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창조주와의 관계에서 감히 “충만하고 절대적인 자율을 누리겠다고 나서는 불순종 때문에”11) 하느님께 이르는 이 통로는 위축되었다. 이 순간부터 인간의 인식 능력은 진리의 원천이며 기원이신 분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약화되었다. 마음의 눈은 점점 더 분명히 보지 못하고, 이성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의 포로가 되었다(22항). 

 

그리스도인에게는 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문제의 궁극적 해답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철학에 진정한 도전이 된다. 바로 여기서 이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가 대립되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순수 인간적인 논리로 환원시키려는 온갖 시도가 실패하게 된다. 이성은 십자가로 표상되는 사랑의 신비를 제거할 수 없지만, 그 십자가는 이성이 추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십자가의 지혜는 그것을 제한하고자 하는 모든 문화적 한계를 철폐하고, 그것이 담지하고 있는 진리의 보편성에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라고 한다.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신앙과 철학 사이의 연결 고리가 거기에 걸려 깨질 수 있는 암초이다”(23항). 그러나 그것은 둘이 함께 진리의 끝없는 대양을 항해해 나아가는 전진 기지가 될 수도 있다. 

 

성서 속에서 발견되는 철학적 통찰은 세계와 인간 생명은 의미가 있으며,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오는 그 충만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80항). 

 

 

4. 그리스도교적 철학 전통

 

이어서 회칙은 고대 철학, 교부 철학, 스콜라 철학을 회고한다. 철학(philosophia)의 어원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3항). 이 진리 탐구의 역사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일단 발견된 진리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의 과제는 그리스도교적 철학함의 전통을 옹호하고 재확인하는 것이다. 신앙은 자연적 이성을 비출 수 있고, 죽음과 내세 문제 등 철학 학파들로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적 세계 속에서 자연적 이성의 능력을 발휘하여 진리를 찾아 나섰다. 그런 탐구의 절정은 형이상학적 문제들의 발견이었다. 우리 자신과 세계의 궁극적 근거와 의미를 묻고 그것을 영원 불변하는 신들의 세계 속에서 찾고자 하는 제일 철학 또는 신학은 이런 모든 탐구의 정점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서양 고대 철학의 양대 조류는 기원 후 2세기의 플로티누스의 일원적 형이상학으로 종합되었다. 

 

그리스도교 철학의 독특성은 그리스 철학과 유다-그리스도교의 종교적 계시와의 연결에서, 곧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준비하고 있던 그리스 철학과 수많은 철학적 함축들을 담고 있는 종교적인 신조들을 준비하고 있던 유다-그리스도교의 계시를 연결하는 데서 생겨났다. 교부들은 자연 이성이 발견한 지혜의 총화인 철학(주로 플라톤주의 또는 신플라톤주의적 경향의 철학)을 하느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를 선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 

 

기원 후 2세기부터 사람들은 그리스의 어느 철학자의 머리에도 결코 떠오른 적이 없었던, 계시에서 받은 관념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스 철학의 방법들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오직 인간 이성의 능력만을 활용하여 그들의 연구를 가능한 최대까지 추진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계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의 최고 원인으로서, ‘존재하는 분’이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될 수 있는, 어떤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신성(神性)이라는 최고의 속성은 물론 실재 전체의 계획자로서 존재를 확립시키고 있었다. 이때부터 그리스인들은 ‘자연(physis)이란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반해,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전혀 새로운 철학적 문제, 곧 ‘존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12) 

 

교부들은 고대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고에서 함축적이고 예비적인 형태로 남아 있던 것들을 모두 완벽하게 노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들의 독창성은 절대적인 것에 개방되어 있는 이성을 환영하고 그것을 계시에서 끌어낸 풍요로움과 혼합한 데 있다. 이것은 하나의 문화와 다른 문화 사이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만남"이었다(41항).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교 진리를 신플라톤주의의 언어로 해설한다. 곧 그리스 철학의 두 원류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일자와, 일자의 최초의 산출이며 다양한 만물의 원리가 되는 지성 또는 누우스로 종합하고자 했던 기원 후 2세기의 플로티누스의 철학적 노력에서 그리스도교를 이성적으로 적절히 표현할 수단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플로티누스에게서는 최고선인 일자와 필연적 유출에 따라 일자에서 생겨난 세상 만물 사이에는 기껏 정도 차이밖에 없는(범신론) 반면에, 아우구스티노의 그리스도교적 신은 유일하게 존재하시는 분으로서 그분의 자유로운 선의로 만물에게 존재를 나누어 주신 하느님이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필연적인 유출이 아니라 자유롭고 인격적인 창조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노 이래로 서구 사상가들은 유한한 인간 이성이 근본적으로 다른 초월적인 순수 존재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느냐는 대단히 까다로운 문제와 씨름해야 했다. 아우구스티노 자신은 이 문제를 신적인 빛의 조명설로 해결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경험적 사실을 경시하는 플라톤적 영향을 강하게 받은 탓이었다. 그러나 그의 한계는 그리스 철학의 존재론 자체의 한계였고, 따라서 인간 정신이 형이상학 문제 앞에서 도달하게 되는 바로 그 한계였다.13) 

 

교부들과 스콜라 학자들은 한결같이 신앙과 철학 사이의 근본적인 조화를 재확인했다. “신앙은 그 대상이 이성의 도움을 받아 이해될 것을 요구하고, 이성은 그 탐구의 정점에서 신앙이 제시하는 내용이 없이는 자신의 목적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42항). 

 

그러나 12-13세기에는 잊혀졌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이 서구에 소개되고, 이와 함께 그리스도교와는 이질적인 이슬람 종교 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 아랍 사상가들의 저작들도 서구에 유입되어 일대 문화적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특히 아베로에스는 종교적 신앙과는 별도로 순수 이성 자체라고 볼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만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다. 

 

교황은 성 토마스를 ‘인간 지성의 최고봉’으로 격찬하고 있는 [영원한 아버지]를 따라 “성 토마스의 철학이 지니고 있는,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57항). 교황 레오 13세에게는 ‘천사적 박사’의 사상에 대한 쇄신된 강조야말로 신앙의 요구들에 부합되는 철학의 활용을 활성화시키는 최선의 길로 판단되었다. “성 토마스는 이성과 신앙을 날카롭게 구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양자를 조화시켜 각각 자신의 권리와 품위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게 할 수 있었습니다.”14) 

 

토마스는 하느님의 계시가 인간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의 능력을 넘는 어떤 초자연적 목적으로 질서 지워져 있다. 인간이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이 목적으로 정향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이 초자연적 목적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이성의 능력을 넘는 것들이 계시로써 미리 알려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인간 이성의 능력으로 탐구할 수 있는 것들(하느님의 실존, 이 세상 창조 등)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 유익했다. 그 이유는 겨우 소수의 형이상학자들만이 그것도 오랜 탐구 끝에 그리고 다분한 오류 가능성을 안은 채 하느님에 관하여 알 수 있는데, 하느님께 관한 지식은 모든 사람의 구원이 달려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길이 널리, 그리고 확실하게 알려지기 위해서 신의 계시가 필요했다.15) 

 

그리고 토마스는 신학이 다른 학문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논증한다. 신학은 확실성과 주제의 우위성 때문에 다른 사변적 학문들보다 우위에 있다. 왜냐하면 다른 학문들은 틀릴 수 있는 인간 이성의 빛에서부터 확실성을 얻지만, 신학은 결코 속을 수 없는 신의 빛에서 확실성을 얻기 때문이며, 또한 다른 학문들은 이성에 종속되는 것들을 다루지만, 신학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천적 학문이기도 한 신학은 영원한 행복을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다른 하위의 것들을 목표로 삼고 있는 학문들보다 우위에 있다.16) 

 

그리고 거룩한 학문은 상위의 다른 학문에서 어떤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위의 다른 학문들을 ‘시녀처럼’ 활용한다. 그렇다면 아직도 신학과 철학은 각기 자율적인 학문인가? 교황의 말을 들어 보자. “성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 사이의 조화에 영예로운 자리를 배정한 공로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성의 빛과 신앙의 빛은 둘 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고,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그는 논증하고 있습니다”(43항). 이것을 교황 바오로 6세는 “세상의 세속성과 복음의 근본성의 화해”라고 부르고 있다. 

 

토마스는 이렇게 가르친다. 신학이 다른 학문에서 받는 도움은 신학의 어떤 부족함을 보충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좀더 명백히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토마스는 다른 곳에서 철학이 세 가지 방식으로 신학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철학은 신앙이 전제하고 있거나 기초로 삼고 있는 진리들을 증명하는 데 유익하다. 둘째, 자연적 지식의 영역에서 취한 비유와 실례들로써 신앙의 진리들을 조명하는 데 유익하다. 셋째, 신앙의 진리들을 거스르는 공격들이 부당하거나 거짓임을 밝혀 내는 데 유익하다.17) 그리고 같은 곳에서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오용을 신학에 끌어들이거나 신앙에만 속하는 사실들을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때 중대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처럼 토마스는 신학과 철학이 각기 고유의 방법과 원리를 가지고 있는 자율적 학문임을 인정하면서도 둘 사이의 자연적이고 상보적인 위계 질서를 확실히 하고, 이로써 신앙주의의 위험과 합리주의의 위험을 둘 다 피하고 중도의 균형을 유지한다. 성 토마스는 다른 어느 신학자나 철학자보다도 하느님을 이해하는 데 자연이 차지하는 역할을 강조하였다. 은총이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을 완성시키듯이, 신앙은 이성에 의존하고 이성을 완성한다(43항). 

 

토마스 데 아퀴노는 신앙과 이성을 뚜렷이 구분하고 각각의 고유한 방법과 원리들에 입각한 자율성을 확립한 첫 사람이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길을 제시하였다. 

 

 

5. 근대 철학:신앙과 이성의 분리

 

그러나 이렇게 그 능력의 최고 경지에까지 도달한 인간 이성이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스코투스에서 비롯된 인간 이성의 절대적 진리 도달 가능성에 대한 의심은 오캄을 거치면서 심화되었고,18) 근대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수아레즈를 통해서 근대 세계로 확산되었다. 

 

결국 근대 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에 이르러 이성은 신앙과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인 진리 추적의 길을 더듬어 나갔다. 세속화의 첫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일부 신학자들은 맹신주의를 추종했고, 철학자들은 절대 진리의 부적절함과 이성의 자족성을 주장하는 합리주의를 맹종했다. 데카르트에게는 아직 스콜라 철학과 결속된 끈이 남아 있었던 데 반해, 칸트에 이르러서는 이성의 능력을 경험 현상계로 한정하고 형이상학과 신앙의 세계를 이성의 권역 밖으로 완전히 추방해 버렸다. 

 

일부 관념주의자들은 신앙과 그 내용을, 심지어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까지도, 이성이 이해할 수 있는 변증법적 구조로 변형시키고자 하였고, 무신론적 인본주의자들은 신앙을 합리성의 개화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보고 자신들의 주장을 종교로 내세우기까지 하였으며, 실증주의자들은 형이상학과 윤리적 가치를 배격하고 기술적 진보주의만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근대 철학이 추구해 온 합리주의는 결국 현대 허무주의의 도래로 귀결되었다(46항). 

 

이렇게 해서 보편적 진리와 지혜를 탐구하는 고상한 역할을 담당하던 철학적 이성이 이제는 인간 인식의 여러 영역 가운데 지엽적인 영역을 담당하며 향락과 권력 등 실용적 목적에 봉사하는 ‘도구적 이성’(ratio instrumentalis)으로 전락하고 말았다(47항). 이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 낸 것들에게서 위협받는 소외된 가련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19) 

 

해방의 이름으로, 자유의 이름으로, 과학의 이름으로, 그리고 ‘인간의 이름으로’ 조롱받고 추방당한 형이상학과 신학은 결국 니체에 이르러 장중한 장례식을 치렀다. 그렇게 금세기는 ‘신의 죽음’으로 시작되었다. 적응을 강조하는 일부 신학자들은 ‘신의 죽음의 신학’이라는 모순 같은 기획까지 전개했다. 

 

두 차례 세계 대전을 치르면서 인류는 진보주의의 환상에서 깨어나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방향과 규범을 상실한 채 불확실성의 시대를 견디고 있다. 19세기 말의 상황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교황은 현대 문화를 “죽음의 문화”라고 규정한다.20) 현대를 지배하는 것은 ‘허무주의’이다. 그래서 현대인은 절망 속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인 이성의 능력을 기껏 실용적이고 도구적인 가치들을 위해 온통 낭비하고 있다. 

 

 

6. 앞으로의 과제

 

회칙은 사실 인사말에서 이미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신앙과 이성은 인간 정신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마음속에 진리, 곧 당신 자신을 알고자 하는 열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남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함으로써 또한 자기 자신에 관한 충만한 진리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신앙과 이성은 모두 인간이 진리를 향해 나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수단들이다. 따라서 신앙과 이성은 서로 조화롭게 협력해야지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은 계시가 제공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옆길로 치닫게 될 것이고, 이것은 더 이상 보편적 명제이기를 포기할 위험을 무릅쓰는 일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허약한 추론보다 사태를 더 잘 꿰뚫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그때 신앙은 신화로 변질되든지, 아니면 미신으로 전락할 중대한 위험에 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성숙한 신앙에 연결되지 않은 이성은 존재의 새로움과 근본성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잃어버릴 것입니다”(48항). 

 

"바로 이것이 제가 이처럼 신앙과 철학이 각각의 자율성을 훼손당하지 않은 채로 자기 본성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 주는 깊은 일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호소하는 이유입니다"(48항). 

 

교황은, 신스콜라 철학 또는 신토미즘의 시대는 지나갔고 이제는 신학의 다원주의 또는 심지어 토미스트적 다원주의의 시대가 왔다고 주장하는 일부 초월주의 신학자들의 목소리를 일축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와 교황 레오 13세,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시를 따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를 “진리의 사도”(44항)이며 “우리 시대의 스승”(magister nostrae aetati)으로 강력히 추천하고 있다.21) 성 토마스는 신앙과 이성에게 각기 어울리는 제 값과 한계를 지적하고, 둘이 함께 진리 탐구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을 가리켜 보여 준 유일한 사람이다. 서슬 같던 이단의 혐의에도 굽힐 줄 모르고 오직 깨달은 진리를 위해 투신하던 그의 불굴의 용기는 진리 자체에 대한 굳은 신뢰에서 오는 것이다. 

 

교황은 현대의 절박한 과제를 세 가지로 압축한다. 첫째는 “의미의 위기”이다. 지혜적 차원 복원이 시급함을 강조한다(81항). 둘째는 이성이 자신의 본질을 포기하는 위험을 지적하며 “인간 지능이 현상 세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므로, 비록 죄의 결과로 어느 정도 흐려지고 약해지기는 하였지만 인식 대상의 실체를 참으로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라는 사목헌장의 확신을 재확인하고 있다(82항; 사목헌장, 15항). 셋째는 현상으로부터 토대를 관통할 수 있게 해 주는 형이상학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험적 현상 세계 속에만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 영성의 핵심과 그것이 솟아나는 토대를 관통해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83항). 

 

건전한 실재주의에 입각한 형이상학의 복원이 시급하다. 인간 이성이 존재 현실력(actus essendi)에 바탕을 둔 형이상학적 차원을 복원할 수 있을 때라야만 근본적 토대를 포기하고 현상에 집착하는 현대의 무질서와 혼돈은 바로잡힐 수 있을 것이다. 

 

회칙은 특히 [영원하신 아버지]에서 기틀을 놓은 철학 쇄신의 기본 원칙들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점을 강조한다(57항). 그리고 철학은 “학생들이 인간과 세상과 하느님을 건전하게 연결시켜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구원(久遠)의 가치를 지닌 철학 유산에 기초를 두고 현대 철학의 여러 사조들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22) 

 

교황은 동일한 절대 진리에서 나온 선물들이기에 절대로 모순될 수 없는, 인간의 초자연적 계시 수용 능력인 신앙과 자연적 이성을 다시 조화롭게 화해시키는 일이야말로 두 번의 천년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천년기를 시작하면서 인류가 이루어야 할 가장 절박한 과제라고 보고,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에게 이 과제에 투신할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다. 

 

 

7. 맺음말

 

자신의 교황직을 맡으며 좌우명으로 “Maria, totus tuus”(마리아님, 저는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를 선택할 만큼 마리아께 대한 신앙이 남다른 교황은23) 마지막으로 ‘마리아와 함께 철학을 작업할’(cum Maria philosophari) 것을 호소하고 있다. “마리아께서 대천사 가브리엘의 전갈에 동의하면서도 자신의 진정한 인간성과 자유를 잃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복음의 진리의 호소를 받아들일 때에 자신의 자율성을 조금도 상실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철학의 모든 탐구가 최고의 표현을 얻게 되는 것은 바로 그때입니다”(10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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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 빌콩들레, [요한 바오로 2세 : 고뇌의 삶과 희망의 메시지], 고인숙 외 옮김, 정우 출판사, 1995년, 119-150면 참조. 

2) 요한 바오로 2세, “신앙과 이성(1998.9.14.)”(이재룡 옮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제10호,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9년, 31-152면.(이 회칙은 곧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한 아버지](1879년)를 부록으로 첨부하여 단행본으로 발행될 것이다.) 

3) [인간의 구원자], 1978년, 1.7.16.22항; [제삼천년기], 1994년, 23항 참조. 

4) [제삼천년기], 33항 참조. 

5)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 1986년. 

6) [제삼천년기], 20항: “본인은 교황직의 첫 문헌 [인간의 구원자]를 발표한 이래, 대희년에 이르게 되는 시기를 ‘새로운 대림시기’로 살아야 한다고 시사함으로써 대희년에 관해 명시적으로 언급해 왔습니다(1.7항). 이 주제는 이후에도 수차례 연이어서 재등장하기도 하였으며, 회칙 [생명을 주시는 주님](1986년)에서 길고도 상세하게 설명되었습니다. 실제로, 2000년의 준비는 이를테면 ‘본인의 교황직에 대한 해석학적 열쇠’가 되었습니다”([제삼천년기], 23항). 

7) [인간의 구원자], 14항; 이동익, [인간:교회의 길], 성바오로 출판사, 1998년 참조. 

8) [인간의 구원자], 17항. 

9) [제삼천년기], 37항. 

10) M. 질베, [솔로몬의 지혜] 1-2, 박영식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1998년 참조. 

11) [생명을 주시는 주님], 36-38항 참조. 

12) E. 질송, [철학과 신], 김규영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1966년, 58-59면 참조. 

13) 위의 책, 70-74면 참조. 

14) 레오 13세, 회칙[영원하신 아버지], 23항. 

15)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1,1, 정의채 옮김, 성바오로 출판사, 1985년, 29-32면; Summa contra Gentiles I, c.3.; J. Wippel, Mediaeval Reactions to the Encounter between Faith and Reason, Milwaukee, Marquette University Press, 1995년 참조. 

16)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대전] I, 1, 5, 37-40면; Summa contra Gentiles, c.4-6. 

17) 토마스 데 아퀴노, In Both.de Trinitate, 2,3, tr. by A. Maurer, Faith and Reason, Toronto, PIMS, 1987년, 45-51면. 

18) 오캄을 자신의 존경하는 마음의 스승으로 삼았던 종교 개혁자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해](1535년)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신앙은 전 세계와 전 피조물을 가지고도 죽일 수 없는 이성을 죽인다. 이리하여 아브라함은 … 신의 말씀에 대한 신앙에 의해서 그것(이성)을 죽였다. 이성은 아브라함 안에 있는 이 말씀에 곧 동의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성은 아브라함 안에서 그의 신앙과 맞싸웠다. … 그러나 신앙은 그에게 있어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리하여 신앙은 신의 가장 맹렬하고 위대한 원수를 죽여서 제물로 삼았다”(제3장 6절, 바이마르판 제40권, 362면:이나가끼 뇨수케, [신앙과 이성], 박영도 옮김, 서광사, 1980년, 149면에서 재인용). 

19) [인간의 구원자], 15항 참조. 

20) [생명의 복음], 12.21.26.28.100항. 

21) John Paul II, PP., Lettera apostolica Inter Munera Academiarum, in forma di Motu Proprio sul ruolo della Pontificia Accademia di San Tommaso d'Aquino e della Pontificia Accademia di Teologia, 1999.3.24., n.4. 참조. 이 짧은 문헌은 회칙 [신앙과 이성]을 반포한 직후에 맞은 첫 번째 성 토마스 기념 축일(1999.1.28.)에 ‘안젤리쿰’ 대학에 보낸 교황 교서이다. 이 교서에서 교황은 [신앙과 이성]이 성 토마스 철학의 탁월함을 강조한 레오 13세의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1879년)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4항), 특히 인간학과 관련된 현대 문화의 ‘격변’을 강조하고, 이 심각한 변화들이 ‘신앙과 이성 사이의 격차’(distantia inter fidem et rationem)가 점점 더 크게 벌어지는 데에서 오는 것이라고 지적하며(2항), 둘 사이를 조화시킨 토마스 데 아퀴노의 지혜와, 진리를 향한 불굴의 용기와 사랑을 본받을 것을 촉구하고 있다. 

22)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 양성 교령, 15항. 

23) V. 메소리(편), [희망의 문턱을 넘어: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수상집], 박문수 옮김, 시공사, 1994년, 218-222면.

 

[사목, 1999년 8월호, 이재룡(가톨릭 대학교 교수, 신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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