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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소통의 도구로 스마트폰을 선택하는 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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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7-26 ㅣ No.944

[경향돋보기 - 스마트폰과 소통의 부재] 소통의 도구로 스마트폰을 선택하는 심리

 

 

스마트폰.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다. 굳이 사용자 비율에 관한 통계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듯, 이제는 거의 누구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스마트폰에는 그 유명한 응용 소프트웨어(애플리케이션) ‘카카오톡’을 비롯해 정말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든 다른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다. 심지어 필자의 중학생 딸은 그들만 아는 신조어인 ‘종카’의 뜻도 얼마 전에 알려주었다. 종카란 ‘종일 카카오톡을 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하루 종일 누군가와 메신저를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이 스마트폰을 소통의 충분조건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왜일까? 더 정확하게는 스마트폰은 언제 소통의 도구가 되고 또 되지 못하는가?

 

 

소통의 도구가 맞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마트폰은 소통의 도구가 맞다. 소통(疏通)의 정의가 무엇인가? ‘사물이 막힘없이 잘 통함.’이다. 그리고 ‘의견이나 의사 따위가 남에게 잘 통함.’이다. 곧 스마트폰을 통해서 더 원활히 의사소통할 수 있는 경우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고받아야 하는 대화의 내용은 간단한데 그 짧은 말 앞뒤의 다양한 정황이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키기가 쉬워 오해 방지 차원에서 사담을 많이 떨어야 하는 경우다.

 

왜일까? 우리는 타인의 면전에서는 하기 어려운 말을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을 통해서 더 잘 할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왜 사소한 부탁도 얼굴을 보고 하기 어려워하는가? 그 어색함을 이겨내고 또 분위기를 잡아야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내용을 말하면 그만인데도 그 말을 꺼내기 전에 많은 군더더기의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 ‘피곤한 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때 스마트폰은 참으로 중요하고도 간편한 소통의 도구가 된다. 불필요한 오해도 없어진다.

 

게다가 스마트폰은 1대 다수의 대화를 할 수 있다. 대화방을 개설하면 내가 던진 내용을 모든 사람이 보게 된다. 심지어는 그것을 몇 명이 봤는지 알 수 있게 숫자로 알려주까지 한다. 실제 대화에서는 사람들의 시선을 나에게 이렇게 집중시키기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에서는 이것이 손바닥 뒤집기보다도 쉽다.

 

필자 또한 대학원생들에게 나 자신의 의사나 공지 내용을 스마트폰으로 전달한다. 열 명도 넘는 사람에게 한 번에 전달한다는 것이 간편함을 넘어서 신기한 일이기까지 하다. 물론 이외에도 스마트폰을 통해 우리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소통할 수 있다. 예전에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한마디로 스마트폰은 신통방통한 소통의 도구다.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인간은 지시의 전달이나 의사의 표현, 또는 1대 다수의 간편한 대화만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과 소통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추구한다. 곧 공감이다. 공감이란 나의 감정을 상대방도 느끼고 상대방의 감정을 나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 안에서 공감이 형성되면 이제 그 관계의 사람들은 동반자가 되어 희로애락을 같이 느끼는 진정한 결속체가 된다. 그리고 내가 공감하는 이와 나를 공감하는 타인을 갖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복에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근원적인 힘이 된다. 문제는 그러한 공감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쉬운 소통의 도구인 스마트폰은 공감의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스마트폰 자체의 역할이 아니다. 공감은 대화하는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의 자리는 물리적인 공간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과 스마트폰으로 오랜 세월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가능해도, 막상 그 사람을 직접 만나면 어색하기 짝이 없다. 공감하려면 사람을 마주보고 앉아 수많은 현장의 단서를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강연이나 방송에서 필자는 가끔 이런 농담을 한다. “한국 사회에는 4대 인맥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학연, 지연, 혈연….” 여기까지는 청중이 다 아는 내용이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다음 말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흡연’이라고 말하면 좌중은 폭소를 터뜨린다. 꽤 많은 사람이 이것이 단순한 농담이 아닌 ‘뼈 있는 말’이라는 것을 이내 깨닫는다(물론 담배는 건강에 백해무익하다).

 

실제로 이런 일은 무심히 지나칠 수 없을 만큼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사항으로 열띤 회의를 하고 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잠시 회의를 중단하고 휴식을 취한다. 당연히 회의 참석자들 가운데 애연가는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올 것이다. 그런데 다시 시작된 회의에서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온 사람들이 갑자기 결론에 도달하고, 그 뒤 회의 내용이 급진전된다. 이런 경우를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비흡연자는 ‘정작 회의 중에는 그런 말 없다가 잠시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자기들끼리 중요한 이야기를 다한다.’라는 불평이나 푸념을 많이 하기도 한다. 오죽하면 어떤 사람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서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 꼭 따라나간다고 할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일에 관한 회의나 논의는 말, 곧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국한되면 화상회의나 스마트폰을 이용한 내용 전달만으로도 얼마든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언어적 활동이 진정한 소통의 결과를 가져오려면, 같은 공간에서 직접 상대방과 나의 신체적 활동과 비언어적 단서까지 공유해야만 그 뜻한 바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쉽게 말해서, 같은 동작은 같은 생각과 그 생각이 만들어내는 말을 할 수 있게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 동작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말이다.

 

최근 네덜란드의 심리학자인 민규안 추(Mingyuan Chu) 교수와 영국의 심리학자 소타로 키타(Sotaro Kita) 교수가 이를 잘 보여주는 연구를 발표했다. 이들은 아주 사소한 동작을 사람들에게 같이하게 시켰다. 예컨대, 특정한 방향을 가리키거나 머그잔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말이다. 이렇게 지극히 사소한 행동을 같이하게 되면 사람들 사이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관찰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그 사람 의견에 동의하면서 점점 같은 결론에 도달할 때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단순히 “동의합니다.” 또는 “찬성이요.”라고 무미건조하게 반응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더 한다. 예컨대, 고개를 끄덕이거나 ‘아’, ‘응’, ‘오’와 같은 짧은 말이 동반된다. 전자는 몸짓(제스처)에 해당하고, 후자는 감탄사다. 재미있는 점은 이렇게 사소한 동작을 같이하게 되면 제스처와 감탄사도 동질적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쉬워지거나 합의하기 쉬워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자, 이제 담배 피우러 나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무언가 작당을 해서 같은 결론에 도달하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공유하는 이유가 몸에 해롭기만 한 담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해진다. 사소한 동작이나 감탄사 또는 눈빛을 같이함으로써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언가를 공유하거나 공감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더 쉽고 원만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조율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공감이 그렇게 쉽게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표정과 몸짓은 물론이고 수많은 음성적 감탄사를 통해 정밀하게 주고받는 다양한 형태의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주고받는 이 순간에, 바로 이 자리에서만 공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으로 하면 별로 좋지않다는 것을 넘어 오히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공감의 재료인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감사와 사과다. 감사는 고마움을, 사과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이런 소통일수록 우리는 최대한 사람을 마주보고 해야 한다. 그래서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날아온 감사나 사과의 내용을 보고 우리는 대부분 ‘성의 없다.’라고 느낀다. 왜 그럴까? 온도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온도를 상대방이 느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맨 먼저 무엇을 판단하는가? 그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따뜻할지 아니면 차가울지 그 온도를 판단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실제로 우리의 말에 그대로 녹아들어 사용된다. ‘따뜻한 사람’ 또는 ‘차가운 마음’과 같은 표현이 얼마나 많은지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왜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것일까?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서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온도’를 느끼고자 한다. 그런데 스마트폰으로 그 온도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은 너무나도 다양한 목적과 기능을 지니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동영상을 시청하고, 전자우편도 확인하며, 사진도 찍는다. 이런 다목적 복합기로는 특별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

 

요약하자면 스마트폰은 매우 좋은 간편한 소통의 도구다. 하지만 공감이나 소통의 도구는 아니다. 이는 직접 사람을 대하여야만 가능해진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녁식사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메신저에 빠져든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저 손에서 내려놓으라고 하면 다 해결이 될까? 그렇지 않다. 그보다는 우리 자신이 먼저 쉽고 간단한 대화와 공감의 대화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마트폰과 직접 만남으로 각각 연결시켜 보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이들도 스마트폰으로 해야 할 소통과 사람의 얼굴을 직접 보고 해야 할 소통의 구분을 스스로 깨달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축하하거나 감사하며 또 사과하는 것일까? 내가 그만큼 감정의 온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만큼 기쁘거나 감사하지도 미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감정을 둔하게 느끼는 이상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스마트폰을 감정의 소통 도구로 착각하고 사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과 후손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진심으로 감사하고 또 미안하게 생각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을 가르쳐주지 못하면 우리는 앞으로도 이 착각을 계속할 것이다. 그 결과로 말미암아 ‘성의 없는’ 관계와 말 속에서 공허함을 달랠 방법을 찾지 못할 것이다.

 

* 김경일 - 아주대학교에서 심리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미국 텍사스대학교에서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중앙심리부검센터 센터장을 지냈다. 저술로는 「이끌지 말고 따르게 하라」, 「지혜의 심리학」 등이 있다.

 

[경향잡지, 2016년 7월호, 김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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