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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공동체 갈등 상담: 투사와 그 해결기법 침묵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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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4-29 ㅣ No.150

[공동체 갈등 상담] 투사와 그 해결기법 침묵의 영성


공동체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들은 대개 인간관계에서 비롯됩니다. 가끔 듣는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같은 성당에 아주 싫은 자매가 있는데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괴롭습니다. 제가 믿음이 약해서일까요, 아니면 속이 좁아서일까요?”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성당을 비롯한 종교 공동체 안에서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이 물음에 대하여 다시 물음을 던집니다. “자매님이 싫어하는 그 자매를 자매님 혼자서만 싫어하나요? 아니면 다른 분들도 다 싫어하나요?” 이 물음에 대하여 “저만 혼자 싫어해요.” 한다면 그것은 본인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싫어한다면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겠지요.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문제인 경우가 아니라 나 혼자만 상대방을 싫어해서 심리적 갈등이 생긴 경우에 대해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어떤 공동체든 대개 갈등의 원인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방어기제’라는 것을 가지고 삽니다. 자기 속을 다 보이고 싶지 않아서 방어막처럼 사용하는 심리기제를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방어기제는 ‘투사’입니다. 투사란,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자기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때 마치 그것이 상대방의 것인 양 책임 소재를 다른 사람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소위 ‘내 탓이오’가 아니라 ‘네 탓이오’를 하는 것이지요. 투사의 대상은 개인의 생각이나 가치관 등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남의 생각처럼 여기고 싶어 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기 책임보다 남의 책임으로 돌렸을 때 심리적으로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안의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들을 남에게 돌림으로써 자기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끼면서 편안해지기 때문에 투사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험담할 때에 무의식적으로 도덕적 우월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투사가 주는 부산물입니다. 그래서 험담과 같은 투사 행위는 자신의 억압된 욕구를 충족시켜줄 뿐만 아니라 공격성도 해소해주기에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치기가 어렵지요.

어떤 사람들이 투사와 같은 미성숙한 행위를 할까요? 자기 문제를 마주하기 힘들어하고 자기 자신안의 어두움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 즉 비현실적이고 회피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대개 투사라는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잘 사용합니다. 간혹 지나치게 영적인 것, 신비로운 것을 추구하면서 자기 안을 말끔하게 정리하려는 분들이 있는데 대개 이런 분들이 투사가 심해서 자기 안의 어두움이 마치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양 착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안의 악한 성향을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혹은 어떤 악한 존재가 따로 존재하는 양 행동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신문 사회면에 난 범죄기사를 보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것, 또 심하게 일어나는 자기 안의 화를 분노마귀가 들어와서 그렇다는 둥 둘러대면서 외부 대상이 문제인 듯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보다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이 더 편하기에 외부로 투사를 심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이런 유아적이고 미성숙한 방어기제를 자주 사용하다 보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까지도 성장이 아닌 퇴행의 길로 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투사는 다른 사람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소통을 어렵게 하여 공동체 안에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병적인 투사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교회가 미사 때마다 기도하는 “내 탓이오”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기서 ‘내 탓이오’란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라는 말이 아니라, 어떤 불편한 감정이 발생하였을 때 그 감정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전가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내 안에서 문제를 찾으려면 침묵의 영성을 수련하여야 합니다. 침묵은 영성 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신학교나 수도원에서는 침묵에 대하여 수없이 강조합니다. 신학교의 경우 낮에는 소침묵, 밤에는 대침묵을 지키게 합니다(그래서 신부들이 강론을 잘 못한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그런데 이런 외적인 침묵을 지키는 이유는 자기 안의 문제를 들여다보기 위함입니다. 만약 침묵이 그저 말하지 않는 피상적 행위로만 끝난다면 오히려 말을 하고 사느니만 못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자기 안의 문제만을 보려는 노력을 하게 되면 외적으로는 조용하나 내적으로는 전쟁터의 장수와 같은 심리적 상태가 됩니다. 스님들이 말하는 묵언수행과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 상태를 가진 분들은 자기 안의 문제를 보느라 너무 바빠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결점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공동체 구성원들이 침묵 안에서 자기 문제를 보고 다듬느라 바삐 산다면 자연히 그 공동체는 조용하지만 활력이 넘치는 수도원과 같은 곳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 신앙인들이 이렇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수도원 같은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수도자처럼 살려고 하면 무리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루 종일 침묵을 지킬 일은 아니고, 미사나 피정 같이 환경적 조건이 주어진 상태에서는 침묵을 지키고 평소에는 즐거운 담소를 나누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5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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