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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3: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과 북한 사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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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28 ㅣ No.1610

여자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 (3)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의 사회복지 활동과 북한 사도직

 

 

수도회의 결성과 전쟁의 시련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이하 ‘영도 수도회’)는 1932년 6월 27일 모리스(J.E, Morris, 睦怡世, 1889~1987) 몬시뇰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방인(邦人) 수녀회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모리스 몬시뇰은 메리놀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당시 평양교구 제2대 교구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당시 평양교구에서는 메리놀회뿐 아니라 메리놀 수녀회도 활동 중이었으나, 현장의 한국인들과 더 밀접한 사도직을 수행하기 위해서 방인 수녀회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최초의 수녀원은 평양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자리 잡았다.

 

메리놀 수녀회의 제노베파(M. Genevieve Beeze) 수녀를 비롯한 세 사람이 새로 시작될 수녀회의 지원자 교육 등 제반 행정을 도왔다. 1935년 6월 27일 첫 입회자 5명의 청원식을 거행하였고, 1938년 3월에는 마침내 교황청으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았다. 이 무렵 수도회에는 11명의 청원자와 11명의 지원자가 있었는데 지원자 중에서 5명이 곧 청원자가 되었다. 그해 6월에 첫 수련자 16명의 착복식이 있었고, 메리놀 수녀회의 장정온(張貞溫, 아네타)1) 한국인 수녀가 수련자 양성을 전담하게 되었다.

 

1940년 6월 27일 수련 수녀 11명이 첫 서원을 하면서 본격적인 수녀회 활동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41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은 영도 수녀들에게 평양 지역의 소임을 인계하고 서울 본원으로 귀환하였다. 수녀원장은 장정온 수녀가 맡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전쟁이라는 시련을 맞게 된다. 수녀회의 일을 도와주던 메리놀회 수녀들이 적국인이라는 이유로 모두 본국으로 송환되었기 때문이다. 서원 수녀 11명, 수련자 4명, 청원자 4명, 지원자 5명과 현금 160원(당시 쌀 8가마 상당)을 가지고 이제 막 시작한 수녀회는 자립의 길을 걸어야 했다. 메리놀회 신부들도 모두 송환된 상태라 평양교구의 사정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으나 메리놀회의 토지와 건물을 넘겨받게 됨에 따라 서포(西浦)로 본원을 옮겼다.

 

전쟁의 어려움을 견딘 수녀회에 찾아온 두 번째 시련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되면서 소련 점령하에, 그리고 공산당 치하에 놓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공산당에 의한 종교박해가 가속화됨에 따라 1950년 5월에는 서포 본원을 압류당하고 끝내 수녀회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9월 유엔군이 평양까지 북상하면서 흩어져 있던 수녀들이 다시 모일 수 있었다. 전쟁 중에 희생당하거나 소식이 닿을 길 없던 이들을 제외하고 17명의 회원이 모였다. 그렇지만 전선이 다시 남하함에 따라 12월부터는 남쪽으로 피난을 계획하였다. 당시 평양교구 서리로 이북에 체류 중이던 캐롤(G. Carroll, 安) 몬시뇰과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육로로 하여 부산까지 내려온 이들은 서원 수녀 17명과 수련자 3명으로 총 20명이었고, 납치당해 신변을 알 수 없게 된 장정온 수녀와 서원석(요셉)2) 수녀를 포함 이북에 남은 이가 12명이었다.

 

 

남한에서 새롭게 출발한 영도 수도회

 

1950년 12월, 피난 수도 부산의 메리놀 수녀원 공간을 빌려 수도회의 새로운 활동이 시작되었다. 대청동에 위치한 메리놀 수녀원에는 영도 수녀들뿐 아니라 가르멜 수녀회, 골롬반회와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 그 밖의 피난 가족들로 빼곡하였다. 빈손으로 내려온 수녀회였기에 우선은 생계 해결이 중요한 문제였다. 처음 시작했던 것은 편물과 자수, 그리고 세탁 일이었다. 부산 영도 청학동에 미군 부대의 빨래를 전담하는 세탁소가 생겼는데 이 일과 청학동 본당 사목에 협조하기 위해 네 명의 수녀가 파견되기도 하였다.

 

1951년에는 전쟁으로 잠시 피신했던 메리놀 수녀회가 한국으로 돌아왔고, 곧 메리놀 병원을 재개하면서 영도 수녀들도 약국과 진찰실, 원목 봉사 활동 등으로 함께 하게 되었다. 이때 메리놀 병원을 통해서 가톨릭 구제회의 구호물자가 분배되었다. 메리놀 병원은 단순한 의료 시설이 아니라 전쟁 난민과 어려운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을 위한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영도 수녀들도 캐롤 몬시뇰의 지시에 따라 물자 배급과 그 밖의 사업에 참여하였다. 주로 도입된 물자로 피난민들에게 지급할 이불을 만드는 일과 성탄 카드 제작 등에 동원되었다.

 

본격적으로 수녀회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서 공석으로 있던 원장 수녀의 자리를 강성효(康聖孝) 베드로 수녀가 채웠고, 메리놀 수녀회 뒤편에 새로 건물을 지어 메리놀 수녀회로부터 독립된 공간을 마련하였다. 메리놀 수녀회가 돌아온 뒤로는 식량이나 물품을 일부 지원받게 되어 피난 직후보다는 형편이 조금 나아졌다. 부산에 본원이 꾸려지고 1952년에는 처음으로 5명의 종신 서원자가 나왔고 수련소도 재개할 수 있었다. 영도 세탁소는 문을 닫았지만 동대신동에 공간을 얻어 세탁소 사업을 했는데, 세탁소 사업에 인근의 피난민이나 전쟁 과부 여성들이 함께했기 때문에 때로는 구호물자를 분배하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수도회에서는 이들을 위한 교리 교육을 했으며 이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양재소(洋裁所)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메리놀 병원의 구호 사업이 확장되면서 물품을 저장할 공간이 필요해져서 1953년에 본원으로 쓰던 땅을 돌려주고 세탁소 사업장이 있는 동대신동으로 이전하였다. 부산에서 피난 중이던 어려운 와중에도 오갈 데 없던 고아들을 거두어 수녀원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데, 메리놀 병원의 구호 사업으로 인해 인근으로 모여드는 고아들의 수가 많았다. 이들을 위한 공간과 시설이 필요하다고 보아 1954년에 동대신동 본원 옆에 ‘성모 보육원’을 설립해서 고아와 혼혈아 등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거두었고, 기회가 되는 대로 돌보던 아동을 입양 보내기도 하였다. 성모 보육원을 운영하게 되면서 세탁소 사업은 그만두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10월에는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초청으로 청주에 분원을 설치하고 60여 명의 ‘성심 고아원’ 원아를 돌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청주교구가 메리놀 외방전교회의 관할이었으므로 1956년부터는 충주에 있는 보렐(W. Borer, 玉保乙) 신부의 ‘성심맹아학교’에도 수녀들을 파견하였다. 강 루갈다와 강성숙(康聖淑) 로욜라 두 수녀는 이 사도직을 위해 서울 국립맹아학교 보통사범과에서 농아와 맹아를 위한 특수 교육 과정을 마치고 전문성을 갖춘 뒤 1957년에 현장에 합류하였다. 1960년 맹아 교육과 농아 교육 부분이 분리되고 충주 ‘성심농아학교’가 세워지면서 수도회는 농아학교 사업을 지속했다. 1971년에는 학교 운영을 위임받아서 강 로욜라 수녀가 교장에 취임했으며, 충북 진천의 성모중학교를 같은 재단으로 통합해서 직업보도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영도 수녀들은 성심농아학교를 운영하면서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생활이 위축되지 않도록 하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고, 이를 위해 밴드부와 야구부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렇게 청주교구와 인연을 맺고 성심농아학교 사도직을 감당하면서 수도회의 사업 영역에 장애아동 특수 교육이라는 한가지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장애아동 사업이 이후로도 수도회의 특수사도직으로 쭉 이어지게 된다.

 

 

본원 서울 이전 및 다양한 사회복지 사도직 담당

 

전쟁이 끝나고 피난 수도 시절도 끝났다. 국가기관과 학교 등 여러 기관이 서울로 귀환하기 시작하였다. 수도회도 서울로 이전을 계획했으나 대지 마련을 고심하던 중에 한 독지가의 지원으로 흑석동에 본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서울에 본원과 수련소를 갖추면서 지역 사회를 위한 사업으로 ‘성 마리아 의원’을 개설했다. 의사 1인과 간호사 1인을 두고 메리놀 병원 약국을 담당하던 오귀봉(吳貴鳳) 다윗 수녀가 약국 책임자로 일하며 하루 평균 70~80명의 외래 환자를 치료했다. 병원 운영이 잘되어 1962년에는 확장 이전하면서 영원한 도움의 성모병원으로 개칭했으며, 1967년에는 가톨릭대학병원 부속병원이 되었다. 구제 사업을 위한 의료기관이었으므로 진료비를 저렴하게 받거나 혹은 아예 받지 않았기 때문에 시일이 지남에 따라 운영이 어려워졌고, 사회적 흐름과 맞물려 결국 1980년에 폐원하고 말았다. 병원 교목 사도직을 감당하던 수녀들은 같은 해 신설된 강남 성모병원에 파견되었다.

 

사업이 확장되고 지원자와 수련자의 수도 늘어남에 따라 정릉에 넓은 대지를 마련해서 본원을 이전하게 되었다. 1964년에 우선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보도원 건물을 지었다. 건축비 마련을 위해 오스트리아 부인회에서 일부 원조를 받기도 했으나 나머지 건축비 마련을 위해 수녀회가 총동원되었다. 본원과 수련소도 1966년에는 정릉으로 이전할 수 있었고, 흑석동 건물은 병원에 근무하는 수녀들과 학생 수녀들의 숙소로 사용하였다.

 

정릉 본원의 직업보도원은 1968년으로 사업이 그치게 되어 1969년에는 부평에 ‘성 요셉 직업보도원’ 사업을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인천 도화동에서 한 독지가에 의해 시작했던 보양원이란 이름의 고아원에서 유래한 이 사업은 1962년부터 수도회와 관계 맺으면서 계산동으로 이전해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평으로 옮기면서 성 요셉 직업보도원이란 이름의 사회복지 법인을 만들고 사설 직업 훈련소로 노동청의 인가를 받았다. 직업보도원은 14세 이상의 고아(연장 고아)와 영세민 가정의 청소년에게 양재와 편물 등의 기술과 함께 생활 교육, 중학교 수준의 교과 교육 등을 가르치는 기숙학원이었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경제적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강 루갈다 수녀가 초대 기관장을 맡았다. 다만 사회적 요구가 달라짐에 따라 1979년에 그만두게 되었다.

 

1980년대 초에 이르자 기존의 교육이나 사회사업 위주의 특수사도직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병원 폐원 후에 건물을 수리해서 1981년에 ‘성모 어린이집’을 개원한 것이 시작이었다. 성모 어린이집은 뇌성마비 아동을 조기에 진단해서 물리치료와 유아 교육을 병행하는 특수 교육 시설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새로 개발된 물리치료 기법과 몬테소리(Montessori) 교육법을 도입하는 등 최선을 다했다. 1982년에는 강동구 고덕동에 신설되는 서울장애인복지관을, 1985년에는 도봉구 상계동에 있다가 고덕동으로 이전하게 된 시립양로원을 서울시로부터 위탁 운영하게 되었다.3)

 

1985년에는 ‘명휘원(明暉園)’을 넘겨받게 되면서 사업의 분야가 넓어졌다. 명휘원은 1969년 영친왕비 이방자(李方子) 여사가 YMCA에서 빈민구제를 위해 운영하던 보린원(保鄰院)을 인수해 농아와 소아마비 아동을 위한 기관으로 바꾸어 설립했던 곳이다. 1971년에 종로에 명휘원 건물을 새로 올리고 사회복지 시설 인가를 받았으며, 1978년에는 광명시 철산동으로 이전했다. 1982년부터는 명혜(明蕙)학교라는 특수교육학교도 설립했다. 이방자 여사가 천주교 신자였던 연고로 수도회와 연이 닿아 1971년부터 명휘원 산하의 여러 기관에 영도 수녀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연로하여 재단 운영을 계속하기 어려워지자 1985년 6월 수도회로 재단을 넘기게 되었던 것이다.

 

 

 

1990년에는 안산시 사동으로 이전하면서 부지를 넓혔고, 장애인 공동생활 가정(1996년), 장애인의 자립을 위한 편물 작업장 ‘해동일터’(1997년) 등 사업 영역 또한 확장하였다. 기존 대지에서는 명휘원 종로 밥집을 시작했으며, 1992년에는 같은 대지에서 ‘성모 어린이집’을, 1993년에는 안산시에서 수탁받아 ‘명휘 어린이집’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어린이집 운영은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아이들을 안심하고 맡기고 생계를 도모할 수 있게 하는 사회복지적 활동의 일환이기도 했다.

 

1988년에는 25년간 운영해 오던 부산의 ‘성모 보육원’을 아이들의 집으로 바꿔서 장애아동의 치료와 교육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한국의 경제적 발전에 따라 보육원의 사회적 필요성은 감소했고, 그에 비해 장애 영유아를 위한 시설은 아직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장애아동을 비롯한 장애인 복지 사업의 분야가 수도회의 새로운 특수 사도직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도 수도회의 북한 사도직 전개

 

한편 1970년 평양교구 소속이던 수도회가 통일 전까지 서울대교구 소속으로 임시 전환되었다. 통일된 뒤에는 두 교구장이 수도회 총원장과 논의하여 정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수녀들은 서포에 두고 온 본원을 한시라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런 관계로 항상 남북한 관계의 변화와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침 1988년부터 북한의 종교정책이 변화하면서 북한 내에서의 천주교 활동이 북한 정부의 통제하에 일부 재개되었다. 한국의 천주교회도 북한의 상황에 관심을 두고 대북 선교와 통일 문제를 준비했다. 수도회에서도 1985년부터 북한 선교와 관련된 교회 기관, 단체에 수녀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였다.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 통일사목위원회 등의 기관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1990년 수도회 제8차 정기총회에서는 1992년을 “북한에 남은 회원들을 찾는 노력과 북한 선교의 길을 모색”하기로 목표를 세웠다.

 

이러한 수도회의 북한 선교에 대한 관심은 북한과 관련된 특수 사도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1999년 설립된 ‘북한 이탈주민 정착 지원 사무소’(하나원)이 설립되면서 영도 수녀 2명이 새터민의 종교 생활을 위해 기관에 파견되었고, 하나원 안에 미사실을 만들었으며, 하나회 입소자들의 한국 생활 적응을 위해 가정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를 위해서 체험 프로그램에 동참하는 봉사자들에게 새터민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사전 교육하였고, 입소자들은 봉사자 가정에서 1박 2일 함께 생활하면서 문화적 접촉을 늘려갈 수 있었다.

 

하나회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2000년대에는 청소년과 여성 새터민을 위한 시설을 새로 갖추게 되었다. 단신으로 탈북한 청소년이나 젊은 여성 새터민이 늘어나 이들에 대한 추가적 지원이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무연고 청소년의 경우 하나원을 수료한 뒤 성인이 될 때까지 체류할 장소가 필요했다. 정부가 제공하는 거주 공간은 성인이 되어야 지급되었기 때문이다. 2002년에 성북구 동소문동에 처음 공간을 마련했는데, 여건에 따라 지역을 몇 번 이동하기는 했지만, 이는 영원한 도움의 집 사업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012년에는 안산과 수원에 청소년을 위한 공동생활 가정(Group Home) 시설로 ‘나르샤 홈’을 운영하다가 2015년에 종료했다. 이 사업은 1915년 베타니아 공동생활 가정의 신설로 이어졌는데 청소년에서 아동까지 그 대상을 확장하였다. 수도회가 남한에서 활동을 재개하면서 처음 시작했던 보육원 사업으로 쌓은 역량과 북한 선교에 대한 새로운 방향성이 만나서 현재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이상으로 평양에서 처음 시작한 방인 수도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가 한국전쟁 이후 남한에서 어떻게 자리 잡았으며, 어떤 방향의 사회복지적 활동을 전개했는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지속되면서 북한 선교와 평화를 위한 노력의 필요성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서포 본원에 대한 소망을 간직한 수도회의 역할 또한 사회적으로 더욱더 중요해진다. 평화 통일이 이루어져 영도의 수녀들이 그들의 소망대로 고향으로 돌아가 북한 주민들에게 자유로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우리도 함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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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정온(張貞溫, 아네타) 수녀(1906~1950) : 장면(張勉) 박사의 여동생. 미국 메리놀 수녀회 첫 번째 동양인 입회자로, 1925년 4월 30일 첫 서원 후 귀국하여 1935년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선생 수녀로 소임을 받았고, 1941년 초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10월 평남 송림리 공소에서 정치보위부원들에게 피랍, 행방불명되었다.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선정되어 시복 추진 중이다.

 

2) 서원석(요셉) 수녀(1914~1950) : 1932년 6월 27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 첫 지원자로 입회하였고, 1950년 수녀원이 폐쇄되자 본가로 귀가하였는데, 10월 8일 정치보위부원들과 함께 나간 아버지 서정요(프란치스코)를 찾으러 간 동생 서경석(마르코)을 뒤쫓아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부친, 동생과 함께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로 선정되어 시복 추진 중이다.

 

3) 서울장애인복지관은 2017년까지, 서울 시립양로원은 2015년까지 수도회에서 운영하다가 비교적 최근에 수탁 기관이 다른 곳으로 변경되었다.

 

[교회와 역사, 2023년 11월호, 김가흔(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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