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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나가사키 아마쿠사 세계문화유산2: 시공(時空)의 기억과 성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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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1-21 ㅣ No.1608

나가사키 아마쿠사 세계문화유산 (2) 시공(時空)의 기억과 성스러움

 

 

3. 신도 재발견과 교회 재건

 

에도(江戶) 막부 말기, 미국 동인도 함대의 페리(M.C. Perry, 1794~1858) 제독이 우라가(浦賀)에 내항해, 1854년 미일 화친조약이 체결된다. 1858년 막부는 미·영·난(蘭)·러·불 등 유럽 5개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본격적인 개국을 단행하였다. 개항 도시가 된 나가사키(長崎)·고베(神戶)·요코하마(横濱)·니가타(新潟)·하코다테(函館)에는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되었고, 거류지 안에서는 외국인을 위한 종교 자유 보장과 교회를 세우는 것도 허용되었다. 개항에 앞서 1846년 일본 개국이 가깝다고 판단한 로마 교황청은, 일본을 사도좌(使徒座) 대리구로 삼고, 파리 외방전교회의 폴카드(T.A. Forcade, 1816~1885) 신부를 초대 대리구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오키나와(沖縄) 류큐(琉球)에서 일본어를 배우고 프랑스 군함에 승선해 나가사키 항까지 왔지만, 상륙은 허가되지 않았고, 이후 병에 걸려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일본 개국 후 교황 비오 9세는 류큐에 체류하던 지라르(P.S.B. Girard, 1821~1867) 신부를 일본 사도좌 대리구장(일본 포교 책임자)으로 임명하였다. 1859년 지라르 신부는 선교사가 아닌 주일 프랑스 총영사의 통역 자격으로 일본에 입국하였고, 1862년에는 요코하마에 천주당을 건립한다.

 

지라르 신부는 나가사키에 천주당을 짓기 위해, 1863년 1월 푸레(L. Furet, 1816~1900) 신부를 나가사키에 파견한다. 원래대로라면 일본 26 성인 순교지 니시자카(西岸)에 천주당을 짓고 싶었지만, 외국인은 지정된 거류지 밖에서는 거주할 수 없었다. 푸레 신부는 먼저 사제관 건립에 착수하였고, 사제관이 완성된 8월에는 프티장 신부1)도 파견되어 천주당의 설계와 비용 마련을 지원했다. 이듬해 1864년 초 오우라(大浦) 천주당 공사를 훗날 서양풍 건축의 선구자가 된 고야마 히데노신(小山秀之進)에게 발주한다. 동시에 프티장 신부는 그리스탄 후손들을 찾기 위해 우라카미(浦上) 지역을 말을 타고 돌아다녔다. 이후 훗날 오사카 교구의 주교가 되는 로케뉴(Joseph Laucaigne, 1838~1885) 신부가 천주당 건립을 지원하기 위해 나가사키로 왔고, 예정대로 그해 오우라 천주당은 완공되었다. 나가사키 사람들은 흥미진진하게 천주당을 ‘프랑스 절[寺]’이라고 부르며 구경하러 왔다. 그리고 헌당식이 있고 한 달이 지난 3월 17일, 종교 역사상 기적으로 불리는 ‘신도 발견’이 오우라 천주당에서 벌어졌다. 즉, 일본인 10여 명이 천주당을 찾아왔고, 그중 한 중년 부인이 프티장 신부에게 다가와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였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당신과 같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라카미 사람입니다. 우라카미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산타 마리아상은 어디에 있나요?(Santa Maria gozo wa doko?) 아기 예수님(onko Djezous sama)을 팔에 안고 계십니다.”2)

 

이렇게 프티장 신부는 우라카미 지역의 ‘신도를 발견’했고, 우라카미 잠복 그리스탄은 바스찬의 예언대로 7세대를 거쳐 기다려 온 ‘신부를 발견’한 것이다.

 

우라카미 신자들은 사람들 눈을 피해 밤이나 이른 새벽에 천주당으로 숨어 찾아왔다. 한 달이 지나자 나가사키 근교의 섬들과 소토메(外海) 지역, 멀게는 고토 열도(五島列島)에서도 신자 대표가 나가사키로 찾아오게 된다. 그 무렵 우라카미에서는 천주교로 복귀 기운이 높아지면서, 4개의 비밀 예배당이 만들어졌고, 선교사가 비밀리에 그곳을 순회하면서 미사를 올리고 세례를 베풀었다. 소토메의 구로사키(黒崎) 등지에서도 가톨릭으로의 복귀가 시작되었다. 그 지역의 많은 잠복 그리스탄이 선교사의 순회를 기다리고 있었고, 각지의 가톨릭교회로의 복귀 움직임은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신도 발견 이후에도 막부와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종교정책은 ‘프랑스 사찰 참관 금지’였으며, 마침내 ‘우라카미 네 번째 탄압’으로 불리는 최대의 박해 사건이 일어난다. 그 계기는 1867년 4월 마을에서 사람이 죽었을 때, 호적이 등록된 사찰 승려의 입회 없이 시체를 매장하는 장례를 치르고, 나아가 신자들이 앞으로는 사찰과의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 나가사키 치안 감독관은 에도 막부에 이 사실을 보고하는 한편, 밀정을 풀어서 우라카미 여러 지역의 그리스탄 실태와 비밀 예배당을 탐색하게 하였다.

 

 

 

1868년 1월 메이지 유신으로 신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신정부는 제도와 기술 면에서 서양 근대화를 추진하는 한편, 천황 중심의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메이지 신정부의 종교정책은 오히려 에도 막부보다도 신도(神道)를 중시하고, 폐불훼석(廢佛毀釋)에 의해 불교마저 배척하는 극단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당연히 그리스도교는 사교로서 종전대로 금지정책을 계속한다. 이리하여 1868년 6월 태정관(太政官)들에 의해 체포된 우라카미 잠복 그리스탄의 총유배가 시작된다. 7월 중심인물 114명이 호출되어 증기선으로 하기(萩, 66명), 츠와노(津和野, 28명), 후쿠야마(福山, 20명)로 보내졌다. 이후 1870년 1월 나머지 전원의 유배가 시작된다. 1월 5일 그리스탄을 전부 모아 사쓰마(薩摩)의 증기선 ‘헤이온마루(平穩丸)’에 태워졌고, 다음 날 이후에도 차례차례 유배지로 보내졌다. 이렇게 해서 우라카미 지역의 신자 전원 약 3,500명 가까이가 서일본 지역의 20개 번으로 유배되어,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면서 고문이나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정작 우라카미의 그리시탄은 이것을 ‘여행(旅)’이라고 표현하였다. 다만 이 ‘여행’의 결과, 오랜 유배 기간 각지의 유배지에서는 613명의 신자가 유배 생활의 어려움 속에 사망하기에 이른다. 유배 생활 중 1,022명은 박해 속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배교하게 되었고, 사망한 순교자를 제외한 1,883명의 신자만이 박해를 견디고, 1873년 3월 금교령이 폐지되면서 우라카미로 다시 돌아와 우라카미 성당을 재건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한다.

 

드디어 금교 해제와 재선교 이후 각지에서는 가톨릭으로 돌아온 잠복 그리스탄의 후손들에 의한 교회 재건과 교회당 건설이 시작된다. 본격적인 재선교와 교회 건설의 주도적 역할은 파리 외방전교회(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와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먼저 프티장 신부는 신자 발견 다음 해인 1866년 일본 사도좌 대리구 대리구장(주교)으로 임명되었다. 외국의 계속되는 요구로 외출 규정은 점차 완화되거나 묵인된다. 1877년부터는 프레노(T. Fraineau, 1847~1911) 신부가 고토를 담당하였다. 1880년경 외국인의 지방 거주도 허용되어 나가사키에서는 지역을 7개로 나눠서 담당 신부를 배치하게 된다. 가령 시모고토(下五島)는 마르망(J. Marmand, 1849~1912) 신부, 소토메 지역은 드로(Marc Marie de Rotz, 1840~1914) 신부가 담당했다. 이렇게 잠복 그리스탄의 천주교로의 복귀 흐름이 강해지면서 신자는 늘어갔다. 1876년에는 일본 대리구를 둘로 분할하였고,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하는 남위 사도좌 대리구는 신자 수 1만 5,000명에서 나가사키가 교구로 독립하는 1891년에는 2만 7,000명으로 증가하였다. 드디어 1889년 2월 11일 제국 헌법에 의해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파리 외방전교회는 곧바로 일본 국내의 전교망을 확대하여 전국 각지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성 모르회(작은 예수회), 아기 예수회, 샬트르 성 바오로회, 마리아회 등 여러 수도회도 일본에 초대되었다. 특기할 사항으로는 일본인(방인) 여자 수도회 창립인데, 1873년 유배지 오카야마(岡山)의 츠루오카(鶴岡) 감옥에서 우라카미로 돌아온 이와나가(岩永) 마키가 드 로 신부의 지도를 받아 가면서 유아원과 고아원을 시작하였다. 당초 ‘십자회’라고 불린 이 수도원을 본받아서 나가사키현 곳곳에 온나베야(女部屋)라는 재속 수도회가 만들어졌다. 이윽고, 나가사키 대주교 야마구치(山口)의 지도에 따라 모든 온나베야를 통합해서, 세이히 시마이카이(聖卑姉妹會)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오늘날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일본에서 가장 큰 여자 수도회로 활동하고 있는 오츠게노(告知) 마리아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4. 그리스탄 취락과 교회당 건설

 

신자 증가와 함께 교회 건립의 기운이 높아졌다. 우라카미에서 오우라 천주당까지 걸어 다니기에는 멀어서 1879년 우라카미 개천변에 가(假)성당을 지었는데 너무 비좁았다. 이를 위해 이듬해 우라카미 중심부(현재의 장소)의 옛 쇼야(庄屋)3) 주택을 매입하여 성당을 건립하였다. 1895년부터 재건축에 착수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중단되기도 하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은 1925년이었다. 한편 오우라 천주당은 1879년 현재의 모습으로 증축되었고, 각 지역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잠복 그리스탄의 후손들은 어려운 생활 속에서 건설비를 모으고, 자신들의 노동 봉사로 계속 교회를 세웠다. 초기에는 대부분 목조 건물로 일반 민가인지 착각할 정도로 작은 교회들이었다.

 

이윽고 메이지 중기 이후 벽돌로 만든 서양식 성당이 늘어난다. 내부는 리브 볼트4) 형태가 많아서 교회다운 분위기를 느끼게 했다. 다만 그만큼 건축비가 많이 들어 신자들은 항구에서 벽돌을 메고 직접 미장 작업을 하는 등 정성껏 성당을 만들었다. 이렇게 잠복 그리스탄이 살았던 나가사키 여러 지역에는 차례로 교회가 세워졌고, 그 수는 나가사키 현내에서만 130개에 이른다. 작고 검소한 교회가 많은데 고난의 역사를 견뎌낸 신앙의 증거로 감동을 자아낸다. 시공(時空)의 기억을 넘어선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특기할 사항은 초기 교회 건축은 프랑스 신부의 설계와 지도로 일본인 목수가 시공 건축을 했다는 사실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교회인 옛 오륜(五輪) 교회(1881년 건설, 초대 하마와키[浜脇] 교회)는 마르망 신부 지도로 목수는 히라야마 가메키치, 호키(寶龜) 교회(1898년)는 마트라(Jean-François Matrat, 1856~1921) 신부 지도로 목수는 에모토 쇼이치, 구로시마(黑島) 교회(1902년)는 마르망 신부 지도로 목수는 마에카와 사키치, 도자키(堂崎) 교회(1908년)는 페루(Albert Charles Arsène Pélu, 1848~1918) 신부 지도로 목수는 노하라 요키치(野原與吉) 등이 그러하다.

 

이후 일본인 목수가 서양 공법을 습득하면서 메이지 후기가 되면 설계부터 시공까지 전 과정을 수행하게 된다. 그 대표 격이 데츠카와 요스케5)이다. 가미고토(神事)의 목수 집안 동량(棟梁)6)에서 태어나 수련 중이던 20세 때, 페루 신부로부터 리브 볼트 천장의 기초를 배운다. 38세에 가업을 이어받자, 이듬해 목조 히야미즈(冷水) 교회(1907년)를 건립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리고 건축학회 회원이 되어 기술을 연마하고, 목조 · 벽돌 · 석조 · 철근 콘크리트 등 여러 다양한 교회 건설에 관여하였다. 이 가운데 고토의 노구비(野首) 교회(벽돌조, 1908년), 에가미(江上) 천주당(목조, 1918년), 가시라가시마(頭ヶ島) 천주당(석조, 1919년), 아마쿠사의 사키츠(崎津) 교회(목조, 일부 철근 콘크리트, 1934년)가 나가사키의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어 있다. 무엇보다 1915년에는 우라카미 천주당 주교관(옛 나가사키 대주교관)을 건립하는데, 이곳에서는 교회 건축의 일가견을 갖는 드 로 신부로부터 성당 건축의 기술과 정신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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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티장(Bernard-Thadée Petitjean, 1829~1884) 신부 :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1865년 나가사키 잠복 그리스탄 후손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신도 발견의 장본인. 1866년 일본 사도좌 대리구 대리구장(주교)으로 임명되었다.

 

2) 나가사키 준신여자 전문대학 나가사키 지방문화사 연구소, 『프티장 주교 서한집』.

 

3) 에도 시대 마을 유지를 쇼야라 하는데, 우라카미 성당이 세워진 쇼야 가옥 터는 매년 잠복 그리스탄 후손들이 정초에 후미에(踏み繪, 성상 밟기)를 강요당했던 장소다. 1945년 8월 원폭으로 완전 폐허가 된 성당은 재건되었고, 현재는 나가사키 대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어 있다.

 

4) 나가사키현 내에 세워진 교회 내부는 서양식 리브 볼트(Rib Vault) 형식으로, 통상 리브가 붙은 아치형 천장, 일명 박쥐형 천장이라 불린다.

 

5) 테츠카와 요스케(鐵川與助, 1879~1976) : 불교 신자지만 서양 신부의 지도를 받고 나가사키 우라카미 천주당을 비롯하여 각지에 벽돌로 지은 서양식 성당을 건축한 인물로 유명하다.

 

6) 나무로 궁궐 · 사찰 따위의 규모가 큰 건축물을 짓는, 대목(大木) 일에 능한 장인인 대목장(大木匠) 집안을 말하는 것 같다.

 

[교회와 역사, 2023년 10월호, 글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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