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5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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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세계]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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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8-10 ㅣ No.1227

[유럽의 도시와 교회사 이야기] 걸어서 세계 교회사 속으로

 

 

2. 이스탄불(콘스탄티노폴리스)

 

대축일 미사 때면 가끔 본당 신부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자고 말하는데,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로 시작되는 신경이 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 신경이다. 세 개 구절을 제외하곤 니케아 공의회(325년) 신경 전체가 포함되어 있어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이라고도 불리어진다.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초기교회 역사 안에 중요한 도시로 등장하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재위 306-337년) 덕분이다. 황제는 아리우스 이단과 부활대축일 날짜를 의사일정에 올린 첫 번째 세계 공의회(325년)를 이곳 니케아에서 열었다. 또한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와의 전투로 본거지를 트리어에서 밀라노, 니코메디아를 거쳐 최종적인 수도로(330년) 삼은 곳이기도 하다. 비잔티움으로도 불렸던 이곳은 그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폴리스라 명명되었고, 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이 바로 그곳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동방으로 천도한 이유는 정치 · 경제 · 종교적인 관점에서 여러 가지로 추측할 수가 있다.

 

381년에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소집명령에 따라 두 번째 세계 공의회인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가 열렸는데, 그 이유는 아리우스파와 성령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 때문이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 공의회를 통해 서로마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각시킴과 동시에 자신이 그리스도교의 수호자이며, 그리스도교 제국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다. 실제로 이를 위해 공의회가 열리기 한 해 전(380년 2월 28일), 그는 그리스도교를 국교화시켰다.

 

니케아 공의회 때만해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교회사 안에 등장한 도시는 아니었다. 또한 많은 학자들도 이 새로운 주교좌가 사도들의 설교나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랬던 곳이 바야흐로 동방 그리스도교의 정상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물론 그 뒤에는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있었다. 다만 새로운 것은 로마에 이어 명예수위권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부여된 것이었는데, 이것은 교회적이 아닌 단순히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주교좌의 의미는 당시 도시의 정치적인 의미, 즉 황제의 도시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기 전승은 성 안드레아 사도가 흑해 주변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 목록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한(476년) 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스만 투르크족에게 멸망되기까지(1453년) 동로마 제국 수도로서의 역사를 이어갔다. 그러나 새로운 로마의 급부상으로 옛 로마와의 마찰이 불가피해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이냐티우스와 포티우스 사이에 벌어진 비잔틴 논쟁 때(858년), 교황 니콜라우스 1세가 포티우스 총대주교를 파문하고, 포티우스 총대주교는 교황을 퇴위시키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교황사절 훔베르트 추기경이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를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에서 파문하고, 총대주교는 교황사절을 파문하는 서구대이교(1054년)가 있어났다. 하지만 동‧서방 교회 분열을 결정적으로 야기한 것은 십자군 전쟁이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계략으로 예루살렘이 아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것이다, 몇 세기 동안 이슬람교도의 공격에도 견뎌왔던 곳이 어이없게도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인 십자군에 의해 약탈당했고, 약 60년 간 라틴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한스 큉(Hans Küng, 가톨릭 신학자) 신부의 언급대로, 교황이 그 거룩한 전쟁을 주도했고, 동방의 자매교회도 공격했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동방 그리스도교계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다.

 

그래서 오스만 투르크족의 침략이 눈앞에 닥쳤을 때(15세기), 교회의 일치를 지향한 피렌체 공의회(1439년)의 교령(Laetentur coeli)이 동방의 성직자와 수도자, 신자들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람들은 그들이 신앙을 돈을 받고 팔았다면서 비난했다.

 

심지어 해군 총제독 루카스 노타라스는 투르크족과의 교섭이 결렬되었을 때 ‘콘스탄티노폴리스 한복판에서 교황의 삼중관(Tiara)을 보느니, 차라리 터키인들의 터번을 보는 게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역사는 1453년 5월 29일에 끝이 난다. 14세기부터 영토를 넓혀왔던 오스만 투르크족의 수중에 넘어간 것이다. 그날로부터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이슬람사원이 되었다.

 

이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사를 간직한 이스탄불에 도착하면 먼저 하기아 소피아 또는 아야 소피아(Aγια Σοφια)성당을 둘러보면 좋을 듯하다. ‘성스러운 지혜’란 뜻의 이 대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건립되었지만(360년) 두 번의 소실을 겪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비잔틴 양식으로 재건되었다(537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성당 건립 때 기쁨에 겨운 나머지 외쳤다는 ‘솔로몬이여, 내가 그대에게 승리했도다!’란 말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던(1453년 5월 29일)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하기아 소피아로 향하면서 외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느님은 없고, 알라만 존재한다!’란 말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1935년, 하기아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지정한 터키정부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Ayasofya Muzesi)으로 개조해 일체의 종교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대성당 안 벽면에 고정된 원판에는 알라(Allah, 유일신), 무하마드(Muhammad, 예언자), 이슬람 제국 초기의 4대 칼리파(Kahlifah, 무하마드의 대변자)들의 이름이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대성당 주변의 모스크와 궁전들, 그리고 그랜드 바자르(Kapali Carsi) 등도 찾아가 보면 좋을 명소이다. 또한 아시아와 유럽을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바다를 보면서 식사를 하는 것도 추천한다.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 니케아 ‧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바치며, 동방과 서방 교회의 일치를 위해 기도를 한다면 그 또한 뜻 깊은 여행이 아닐까 생각한다.

 

[외침, 2020년 2월호(수원교구 복음화국 발행), 황치현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세계교회사, 라틴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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