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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ㅣ사상

과학칼럼: P형제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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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01 ㅣ No.500

[과학칼럼] P형제님께 (1)

 

 

얼마 남지 않은 과학칼럼 연재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에 두 통의 ‘편지’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연재를 하면서 한 신자 분께 받은 전자편지(e-mail)이고 다른 하나는 故 최인호(베드로) 선생의 수필집에 나온 편지글(‘소설가 K형에게’)이었습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말처럼, 어쩌면 칼럼을 읽고 그분이 진지하게 건네신 물음이 그분만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물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께 보내는 답신은 개인적인 편지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보내는 하나의 공개서한이요 ‘글’이겠습니다. 마치 최인호 선생이 ‘소설가 K형에게’ 보낸 편지가 그러하듯 말입니다.

 

안녕하세요, P형제님.

지난 5월 보내주신 메일에 짧은 답장을 보내고, 저의 게으름 탓에 이제야 약속드렸던 두 번째 답장을 드립니다.

 

형제님의 메일을 받고 저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실은 아직도 생각 중입니다.

 

신앙과 과학의 관계에 대해 저는 소싯적부터 참 많은 질문을 던졌고 나름 치열하게 고민해 왔습니다. 그것은 모태 신앙인이자 어려서부터 막연하게나마 사제 성소를 느끼던 한 소년이 우연찮게 자연과학을 만나고 미래의 전문과학도로 훈련받으면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과정이겠습니다만,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어떤 섭리의 작용이라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 섭리가 저를 이 서울주보 과학칼럼까지 이끈 것이겠지요.

 

주보에 칼럼을 연재하기 조금 전에, 신앙과 과학 사이(?)에서 제가 겪은 오랜 고민과 방황, 정착의 이야기(monologue)를 제법 긴 글로 담아낸 적이 있습니다. 다만 그 글은 어디까지나 모놀로그, 독백인 탓에 많은 사람의 공감대를 끌어내기엔 조금 힘에 부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던 찰나에 P형제님의 메일을 받았고, 저는 형제님이 주신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고 가다듬으며 혹 이것이 독백(monologue)을 넘어 대화(dialogue)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오늘 저는 그 막연한 기대를 이 지면을 빌어 하나의 작은 현실로 빚어보고자 합니다. 칼럼을 진지하게 봐주시고 허심탄회하게 질문을 보내주심으로써 글의 물꼬를 터주신 형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랜 세월 신앙인으로서 주님께 위로받고 그분께 감사하며 사셨는데, 요즘은 그보다는 오히려 우주의 무한함과 거대함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다고 말씀하셨지요. 이에 저는 지혜서의 말씀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지혜 13,5)

 

이 말씀은 하나의 귀한 통찰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바로 피조물의 웅대함과 그 아름다운 질서는 하느님과 ‘경쟁’ 관계에 있거나 심지어 하느님을 부정하는 근거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분의 위대하심과 선하심, 아름다우심을 불완전하게나마 드러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는 과학과 신앙의 관계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됩니다. [2023년 10월 1일(가해) 연중 제26주일 서울주보 6면, 조동원 안토니오 신부(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교수)]

 

 

[과학칼럼] P형제님께 (2)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P형제님. 예전엔 하느님과 그분께 대한 신앙을 통해 힘을 받으셨지만, 요즘은 우주의 거대함과 신비로움을 떠올리며 위로를 얻는다고 하셨지요. 아마도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많은 분들, 특히 젊은이들이 ‘위대한 우주’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이고 설명해 주는 ‘위대한 과학’을 종교보다 더 신뢰하고 따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한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첫 순간 나는 너무나 놀랐다. 마치 표면적인 원자 현상을 통해 그 배후에 깊숙이 숨겨진 아름다운 근원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이제 자연이 그 깊은 곳에서 내게 펼쳐 놓은 충만한 수학적 구조들을 좇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자 나는 거의 현기증을 느낄 지경이었다.”(하이젠베르크, 《부분과 전체》, 유영미 옮김, 121)

 

20세기 초 물리학자들은 원자의 구조와 안정성을 설명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많은 물리학자들, 특히 젊은 과학자들이 이 어려운 일에 도전했는데 하이젠베르크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던 어느 날 찰나의 깨달음과도 같은 섬광이 그의 머리를 스쳤고, 이를 따라가며 그는 마침내 훗날 양자물리의 중요한 한 축이 될 행렬역학과 불확정성 원리의 기초를 스케치합니다. 하이젠베르크의 표현을 빌면, 이때 그는 자연이 펼쳐놓은 그 아름다운 수학적 구조 앞에 넋을 잃고 경탄합니다.

 

자연의 질서는 참으로 오묘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들여다보게 된 사람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놀라움, 경탄은 과학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시인은 시인으로서, 화가는 화가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며 그 앞에서 경탄하고 이를 시와 그림에 담습니다. 베토벤 교향곡 6번은 또 어떻습니까? 자연의 아름다움과 힘, 그에 대한 놀라움과 찬탄의 감정이 곡 전체에 실려있지 않습니까? 나아가 과학을 모르고 예술에 문외한이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자연 앞에서 ‘자연스럽게’ 놀라워하고 감동합니다. 그러한 경탄과 감격은 사실 과학에 앞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만 과학은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느끼게 해줄 따름이지요.

 

과학이 나오기 전부터 인간이면 누구나 자연 앞에서 느끼던 경탄의 감정, 그것은 아마 하느님께서 우리 존재 깊숙이 넣어주신 그분의 흔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한처음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소감’을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그렇습니다. 우리에 앞서 창조주신 그분께서 당신의 작품을 보시며 스스로 ‘경탄’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자연에 대한 경탄이 하느님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자연을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하고 풀이하는 과학이 그 자연을 만드신 분께 대한 신앙에 어긋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자연을 보고 놀랄수록, 과학을 알면서 감탄할수록 그렇게 오묘하게 세상을 지으신 분을 찬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을 알면 알수록 신앙에 회의적인 경우가 많지 않느냐고, 형제님은 제게 반문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에 대한 저의 대답은 한편으로는 ‘네’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아니오’입니다. [2023년 11월 5일(가해) 연중 제31주일 서울주보 6면, 조동원 안토니오 신부(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교수)]

 

 

[과학칼럼] P형제님께 (3) 또한 겸손한 마음으로 진리를 찾는 모든 분들께

 

 

P 형제님.

 

흔히 과학이 발전할수록 신앙심은 약해진다, 또는 과학을 알수록 신앙과는 멀어진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과학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과학주의’가 널리 퍼져 있는 건 사실입니다. 과학주의에 따르면 자연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모든 것은 다 오류나 미신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과학주의가 퍼질수록 신앙심은 약해질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과학주의는 과학이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오히려 과학의 전문가가 아닌 분들이 과학주의에 젖어 드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또한 과학을 이제 막 배우는 초심자 과학도는 쉽게 과학주의에 빠지곤 합니다. 저 역시 햇병아리 과학도 시절에 그러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학을 아직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과학이 보여주는 힘을 믿고 숭배하다시피 한다는 점입니다.

 

과학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하나의 ‘믿음’이요 거의 종교적인 ‘숭배’입니다. 이는 자신이 갖고 있다고 여기는 과학적 앎에 대한 믿음이요 숭배고,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입니다. P형제님, 저는 여기서 창세기 3장, 뱀이 인간을 유혹하는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다.”(창세 3,5)

 

과학주의는 우리를 과학에 대한 숭배로, 지식에 대한 교만으로 이끌지만, 과학은 오히려 우리를 창조주와 그분께 대한 열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과학이 우리에게 열어주는 ‘진리’의 한 부분을 보며 경탄하고 그 진리 앞에 겸손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자연에 대한 경탄은 우리를 창조주께 대한 경탄으로 인도하고, 진리 앞에서의 겸손함은 우리를 진리 자체이신 분께로 이끕니다.

 

종교를 가진, 신앙이 깊은 과학의 대가들을 몇 알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겸손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됩니다. 꼭 외적인 태도나 개인적 성품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겸손’은 진리 앞에서의 겸손입니다. 그들은 각자 자기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지만, 자신의 과학 지식이, 나아가 과학 자체가 모든 것을 다 아우른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오히려 과학을 통해 살짝 보이는 진리의 한 조각 앞에 경탄하며 동시에 겸손하게 서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 경탄과 겸손이 그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 형제님. 몇 년 전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 메달을 받은 허준이 박사의 인터뷰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습니다. “이론을 만들고 난 뒤 …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전체적인 통일성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때가 있다. 그런 아름다움 속에서는 신이나 절대적인 어떤 존재의 솜씨를 의심하게 된다. … 인간은 영원히 모르겠지만 말이다.”(매일경제 2021년 5월 7일 자) 이 위대한 수학자는 인간은 영원히 모를 것이라 말했지만, 우리는 신앙의 빛을 받아 그 ‘모름’을 뛰어넘어 알고 또 보게 됩니다. 과학이 보여줄 수 있는 곳 그 너머로 신앙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부활성야 때 울려퍼지는 바룩서의 한 말씀으로, 형제님께 그리고 모든 분께 드리는 이 글을 맺고자 합니다. “야곱아, 돌아서서 슬기를 붙잡고 그 슬기의 불빛을 향하여 나아가라. … 이스라엘아, 우리는 행복하구나!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우리가 알고 있다.”(바룩 4,2.4) [2023년 12월 17일(나해)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서울주보 4면, 조동원 안토니오 신부(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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