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토)
(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하느님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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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7 ㅣ No.211

"가난한 이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

 

이 진리를 감상주의적으로 파악하려 들 때

거기엔 무서운 오류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그들에게 동정 어린 시선과 동전 한 닢을 던져 주고선

그 자신이 만든 하느님의 환상을 스스로 그 위에 포개어 그려보며

자위적인 만족을 꾀하는 위선을 양산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현실이 그러하다.

가난한 이들을 향한 우리들의 태도의 십중팔구는

감상주의적 오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하느님의 참사랑으로 그들과 함께 할 때,

한마디로 참 신앙의 접근을 할 때

그 진리가 확연히 드러남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 진리엔

신앙문제 이전의 의미가 내재되어져 있다.

그들의 삶, 그 상황에서 드러나는 건

정확히 말해

’하느님’이기보단 하느님의 ’뜻’이다는 사실이다.

하느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정의(正義)’이다.

 

물론 이 정의는

결국 악마성을 띨 수밖에 없는 수동성을 띤

차가운 세속의 산술적 정의의 차원을 넘어서는

그야말로 능동적인 나눔이 있는 자비와 사랑이 낳은

하느님의 참 평화의 뜨거운 정의이다.

 

나눔의 문제에 있어 맑스주의는

그리 나무랠만한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하나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근본적인 오류가 비롯되었다.

공산국가 수립 백 여년사에 있어서의

그런 악마적인 광란과 방황 그리고 좌절 역시

바로 이 점 때문이었다.

거기엔 나눔의 참 출발점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빚어진 공동화 현상의 모든 것이

맑스 레닌 백여년사이다.

 

즉 가난한 이들을 만남으로써

우리가 보는 것은 ’정의의 외침’ 그 자체이다.

달리 말해 그것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불의에 대한

고발이요 폭로이다.

또한 ’막혀 버린 나눔의 통로’를 뚫어 보려는

순리(順理)의 외침이요,

나의 탐욕에 의해 빚어진

그들의 아픔의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해방의 외침이요,

또한 벽(壁)의 구조를

장(場)의 구조로 전이(轉移)시키기 위한

몸부림의 외침이다.

 

참으로 그들에게서 우리가 보는 것은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외침,

하늘의 소리이다.

그 뜻이,

그 맺힌 것이

그대로 실현될 때,

곧 온전히 풀리게 되었을 때,

그 때

그 뜻,

그 외침에 가려져 있었던

하느님의 얼굴이 드러난다.

 

참되게 나눔이 이뤄져 하나 된 그곳에

하느님이 비로소 함께 하신다.

그 불의한 아픔의 상황을 온전히 치유시켜

그들이 참 인간화의 길을 걷게 되었을 때

하느님은 그를 통해서 우리께 오신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 속에 하느님이 함께 계신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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