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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왼쪽 줄에 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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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01 ㅣ No.73

한국 교회사 열두 장면 - 왼쪽 줄에 선 사람들

 

 

현세의 교회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뚜렷한 지상에 있다. 교회는 이 세상을 이끌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 평범한 사실은 독립운동 과정과 해방 공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특히 해방 이후 우리 나라에서는 이념적 대립이 깊어가고 있었고, 한국전쟁을 전후해서는 이념에 따른 살육을 서로들 정당화했다.

 

당시 신자들의 주류는 교회의 공식 가르침에 따라 우익을 표방하며 좌익사상을 거부했다. 그들 대다수는 해방 직후 우리 사회를 갈라놓은 두 줄 가운데 오른쪽 줄을 택했다. 그러나 당시 일부 신자들은 이러한 대세와는 달리 사회주의의 길을 택하기도 했다. 이제 한국전쟁은 휴전 이후 50여 년이 지났다. 50여 년이란 세월은 가톨릭 세례를 받았거나 가톨릭적 문화풍토에 가까웠던 이들 가운데 왼쪽 줄에 섰던 사람들까지도 우리 교회사의 일부로 보듬어 안아야 할 시간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좌익과 우익

 

식민지시대 우리 교회에서는 철저한 반공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때 교황청 공식 기관지에서는 “아무리 온건한 사회주의자라 하더라도 가톨릭 신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식민지 조선의 천주교회는 민족이나 독립에 대한 관심을 공식적으로 표현한 바가 없었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은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당면한 민족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지성 가운데 상당수는 가톨릭보다 개신교 신앙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공산주의 사상도 민족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매력적 사상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교회와 좌파의 관계가 언제나 나쁘지만은 않았다. 예를 들면, 독립운동 단체들 가운데 좌파계열로 분류될 수 있는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 남경의 천주당을 빌려 당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족문제에 고민하던 일부 신자들은 좌파와의 공조를 생각했거나 좌파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나갔다. 이 사례는 강병학의 경우를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해방과 전쟁 그리고 왼쪽 줄의 사람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사회에서는 극심한 좌우 대립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이 일어나기 얼마 전, 고고학자요 저명한 문학자로서 남로당의 간부로 활동했던 김태준이 체포되었을 때, 일부에서는 이승만과 가까웠던 윤을수 신부를 통해서 그의 구명운동을 시도한 바 있었다. 김태준은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지만, 그의 문화권이 당시 가톨릭 문화권과 중첩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시도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서울도 인공치하로 들어갔다. 이때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에 한지성이 부임했다. 한지성은 일제하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대표적 천주교 신자였던 안공근의 사위였다. 한지성은 1943년 중국 중경에서 조직된 ‘한국청년회’의 간사장으로 독립운동을 했던 인물이었다. 상해 교통대학 출신이었던 그는 학창시절 중국 대표 축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가 세례를 받은 신자인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의 관행으로 볼 때 결혼을 하기 위해서라도 세례를 받았을 확률은 여전히 높다.

 

1930년대 조선의 시단을 주름잡던 인물로는 정지용(1902-1950년)을 들 수 있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 프란치스코는 일제시대 때 「가톨릭 청년」의 편집을 주도했고, 해방 직후 교회에서 간행하던 ‘경향신문’의 주간으로 활동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북쪽을 향해 가던 중 동두천 소요산에서 1950년 9월 21일 미군기의 기총소사에 맞아 목숨을 거두었다. 그는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고향땅을 끝내 밟을 수 없었고, 우리도 오랫동안 그를 잊도록 강요당했다.

 

한국전쟁 과정에서 충청남도 당진의 인민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김창배는 국군이 수복한 이후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한 사제의 아버지였고, 일제하에서부터 국내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수감된 뒤 아들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전향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는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던 전향을 거부하고 죽음을 택했다. 그의 아들 사제는 민주당 정권 때에 현실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던 인물이었다.

 

전쟁으로 인해서 왼쪽 줄에 서기를 강요받았던 신자들도 적지 않았다. 북한 지역에서는 천주교 청년들이 징집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이 징집병 가운데 김충성 베드로(1928-1950년)가 있었다. 그는 평안도 강서의 공소회장 아들이었다. 그는 전쟁시 남쪽으로 내려와 탈영한 뒤 특수부대 공작대장으로 행세하면서 교회와 신자들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서울 명동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피신해 있다가 내무서원에게 체포되어 즉결처분을 당했다.

 

 

남은 말

 

이들 이외에도 왼쪽 줄을 택했던 여러 신자들의 존재를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해방을 전후해서 왼쪽 줄에 섰거나 설 수밖에 없었던 신자들은 당시 교회에서 확실히 소수파였다. 그 동안 교회는 쉬쉬하면서 이들의 존재를 망각하고자 했고, 이들의 고민이 무엇이었는지를 차분히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63년 교황 요한 23세는 회칙 「지상의 평화」를 반포한 바 있다. 이 회칙을 통해서 교회는 선의를 가진 모든 사람들과의 대화와 협력을 말하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선의를 가지고 민족문제를 고민한 왼쪽 줄의 사람들과도 역사적 대화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아직도 1950년도 전쟁상태의 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우리는 찌는 듯이 덥고, 폭우가 쏟아지던 그해 6월의 악몽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제 가톨릭 세례를 받았던 선의의 모든 사람들을 우리 교회사의 공동 주역으로 다시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래야만 세상에 지배받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세상을 변혁시키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향잡지, 2003년 6월호, 조광 이냐시오(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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