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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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명동 사순특강2: 두 번째 선택, 사랑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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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1-04-25 ㅣ No.135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본당 사순특강 (2) 두 번째 선택, 사랑하기 위하여


예수 아가페 사랑 따르자

 

 

오늘 강의의 주제는 ‘가장 멋진 삶’이다. 우리 모두 가장 멋지게 살아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 않은가.

 

역사상 많은 분이 멋진 삶을 사셨지만 가장 멋진 삶을 사신 분은 바로 ‘이 분’이 아닌가 싶다. ‘이 분’에 얽힌 일화 하나를 말씀드릴까 한다.

 

1년 전 경북 김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분원 피정에 참가한 적이 있다. 피정 마지막 날 미사 때 수녀님 몇 분이 종신서원을 하기로 돼 있었다. 미사 전 수녀님들께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메모를 주면 참고해서 강론을 하겠다고 말했다. 수녀님들이 건넨 메모 중에 ‘예수님만큼 멋진 남자 있으면 나와봐!’는 글이 있었다. 강론 중에 “오늘 참례한 남성분 중에 예수님만큼 멋진 남자 있음 나와봐요” 하고 말하자 다들 웃고 난리가 났다. 수녀님들은 종신서원을 통해 ‘한 남자’를 선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멋진 남자가 예수님이라 생각했기에 수도생활을 선택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는 비단 수도자나 신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다. 미신자 중에서도 예수님을 가장 멋진 사람으로 꼽는 이들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인도의 해방자로 불리는 간디다. 그는 “예수님의 매력이 대단하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상에 완전히 매료됐다”고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를 해방시키기 위해 ‘비폭력 운동’으로 맞섰다. 그 결과 인도는 해방됐다.

 

이처럼 다양한 사람을 매료시킨 예수님의 멋진 점은 과연 무엇일까. 나름대로 생각해본 예수님의 멋진 매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유다. 예수님은 진정한 자유인이셨다. 재물, 성(性), 체면, 전통, 유행 등에 얽매이지 않으셨다. 참 자유롭게 사셨다.

 

둘째, 정의다. 예수님은 매우 양심적으로 사셨다. 정직한 분이셨다. ‘맞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 하고 말씀하셨고 언제나 바른 것을 주장하고 실천하셨다.

 

셋째, 자비다. 정의로우셨지만 동시에 매우 자비로우신 분이셨다. 예수님 말씀 중에서도 그 자비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30). 예수님은 눈먼 사람, 벙어리, 귀머거리 등 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들과 가난한 이, 과부, 죄인 등 어려운 이웃을 늘 환영하고 돌봐주셨다.

 

넷째, 인생고(人生苦)다. 예수님은 참 많이 당하고 사셨다. 탄생하실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따돌림, 오해, 박해를 많이 당하셨다.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고문을 받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가장 잔인한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다. 이처럼 어려움이 많으셨는데도 불구하고, 늘 악을 선으로 이기셨다.

 

다섯째, 지혜다. 예수님은 아주 똑똑한 분이셨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마태 13,54)에서 볼 수 있듯 예수님은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음에도 여러 사람에게 조언을 하는 지혜로운 분이셨다.

 

여섯째, 권위다. 예수님은 언제나 “나는 … 말한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세상 그 누구도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참으로 놀라우신 예수님이시다.

 

마지막은 기도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다. 언제 어디서나 아버지 하느님 뜻을 받들기 위해 늘 기도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에서처럼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으로 사셨다.

 

이같은 예수님의 인격과 품성 덕에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매력에 빠져드는 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도 예수님을 본보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택’하면 가능하다. 예수님은 우리 각자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씀하시지만 따라가고 안 따라가는 것은 여러분 선택에 달렸다. 삶의 본보기로 예수님을 선택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닮고 싶은 예수님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바로 ‘아가페’일 것이다. 아가페의 사전적 정의를 살펴보면 ‘종교적 사랑,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라고 나와 있다. 맞는 말이다. 예수님의 삶 전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수님의 삶을 우리 스스로 따라가는 것을 ‘예수살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예수의 삶을 산다’는 것이기에 예수살이라는 말이 적당할 듯하다.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도 아가페적 사랑이 언급돼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사랑의 종류를 이성간 사랑, 정(情), 아가페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한다. 우리는 여기서 아가페 사랑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예수살이를 선택하는 길이고, 가장 멋진 삶을 사는 길이다.

 

[평화신문, 2011년 4월 3일, 두봉 주교, 정리=이서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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