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월)
(백)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아버지께서 보내실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교회문헌ㅣ메시지

하느님 백성의 전례 교육에 관한 교황 교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Desiderio desidera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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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2-11 ㅣ No.1157

하느님 백성의 전례 교육에 관하여


주교, 신부, 부제와 축성 생활자와 평신도들에게 보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서


나는 간절히 바랐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

 

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교서로 저는 여러분 모두에게 다가가고자 합니다.―자의 교서 「전통의 수호자들」을 발표한 뒤 주교들에게는 이미 편지를 보냈습니다만,―저는 교회 생활의 근본을 이루는 전례에 관하여 여러분과 함께 몇 가지 반성을 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주제가 방대하여, 그 하나하나마다 모든 측면에서 언제나 깊이 숙고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교서에서 그 문제를 모두 철저하게 다루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단순히 그리스도교 전례 거행의 아름다움과 진리를 바라보는 데에 곧바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성찰의 표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전례, 구원 역사의 “오늘”

 

2.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 최후 만찬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깊은 사랑을 우리가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는 놀라운 단초입니다.

 

3. 베드로와 요한은 그 파스카 음식을 차리도록 파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창조와 모든 역사는 이 만찬을 위한 거대한 준비였습니다.―마침내 구원 역사 그 자체가 드러나는 시점이 되었습니다.―베드로와 다른 이들은 그 자리에 있지만, 아직 무엇이 필요한지 모르고 있습니다. 주어지는 모든 선물에는 반드시 누군가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그 선물은 어마어마하게 큰데 그것을 받는 사람은 너무 작아, 우리는 그 엄청난 불균형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비를 통하여 그 선물이 사도들에게 맡겨져, 모든 사람이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아무도 그 만찬에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었지만, 모든 이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드시고자 간절히 바라셨기에 모든 이가 그곳에 이끌려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그 파스카 음식의 어린양이시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파스카이심을 알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만찬의 절대적인 새로움이고 절대적인 독창성입니다. 역사 안에서 참으로 새로운 것인 그 만찬은 유일무이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것은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최후 만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그 친교를 다시 이루시기를 끝없이 열망하고 계시며, 그분의 본디 계획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에서”(묵시 5,9) 모든 사람이 그분의 몸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실 때까지는 성취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그 최후 만찬은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성찬례 거행 안에 현존할 것입니다.

 

5. 세상은 아직도 모르고 있지만, 모든 이는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묵시 19,9). 그 잔치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것은 오직 말씀을 듣고 얻는 믿음(로마 10,17 참조)의 혼례복입니다. 교회는 “어린양의 피로 깨끗이 빤”(묵시 7,14) 흰옷을 모든 이에게 잘 맞게 지어 줍니다. 우리는 아직도 모든 사람이 이 잔치의 초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또 어떤 사람들은 초대받았다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그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순간이라도 쉬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제가 이미 말한 것입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선교 선택’을 꿈꿉니다. 교회의 관습과 행동 양식, 시간과 일정, 언어와 모든 교회 구조가 자기 보전보다는 오늘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한 적절한 경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복음의 기쁨, 27항). 저는 모든 사람이 어린양의 희생 잔치에 앉아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6. 그분의 초대에 우리가 응답하기 전에 ― 그 훨씬 전부터 ― 우리를 위한 그분의 열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지도 못하지만, 우리가 미사에 갈 때마다, 가는 그 첫째 이유는 우리를 위한 그분의 열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로 이끌리는 것입니다. 우리 편에서, 가능한 응답은 ― 그것은 또한 가장 강력히 요구되는 덕목입니다. ― 그분께서 바로 우리를 이끄시도록 이러한 사랑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모든 영성체는 그분께서 이미 최후 만찬에서 바라신 것입니다.

 

7. 떼어 나누는 바로 그 빵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며, 아버지를 향한 사랑에서 나오는 순종의 희생 제사입니다. 우리가 최후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서 그분의 죽음을 미리 예고한 예식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분께서 어떻게 사형 선고를 받고 돌아가시는지 그 뜻을 파악할 수 없어 실제로 그 완전한 예배 행위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예배가 오직 참된 예배 행위이며 오직 참된 전례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그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몸을 내어 주고” “피를 흘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최후 만찬 뒤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모든 성찬례에서 기억하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부활하신 분께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을 위하여, 또한 갈릴래아 호수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물고기를 잡으러 돌아간 당신 제자들을 위하여 빵을 떼어 주실 때, 빵을 떼는 그 몸짓이 그들의 눈을 열어 줍니다. 그 몸짓이 십자가의 공포로 눈이 멀어 버린 그들을 치유하여, 부활하신 분을 “보고” 그 부활을 믿게 해 주었습니다.

 

8. 오순절 뒤에 우리가 어떻게든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나자렛 사람 예수에 대하여 알려고 할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분을 만날 수 있기를 바라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짓을 더욱더 생생하게 보려고 그분의 제자들을 찾아내는 것밖에는 달리 할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기리는 공동체를 만나는 것 말고는 참으로 그분을 만날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언제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가장 귀중한 보화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9. 맨 처음부터 교회는 그것이 단순히 하나의 표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거룩한 것입니다. 스승님 생애의 가장 중요한 순간을 ― 특별히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눈앞에서 ― 그저 “상연”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할 수도 없었고 무의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맨 처음부터 성령의 비추심으로, 예수님 안에서 볼 수 있는 것, 눈으로 볼 수도 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있는 것,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몸짓, 강생하신 말씀의 삶, 그분의 모든 것이 성사가 되어 거행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1)

 

 

전례, 그리스도와 만나는 자리

 

10. 여기에 전례의 크나큰 아름다움이 모두 담겨 있습니다. 만일 부활이 그저 어떤 개념, 관념, 생각이라면, 만일 부활하신 분이 그저 다른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권위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예를 들면 사도들의 기억처럼 권위 있는 기억이라 하여도, 우리가 참으로 그분과 만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되신 말씀의 새로움은 모두 사라졌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강생은 역사가 알고 있는 언제나 새로운 유일한 사건일 뿐만 아니라,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친교의 길을 열어 주시고자 선택하신 방법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살아 계신 그분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 신앙이 아닙니다.

 

11. 전례는 확실히 우리에게 그러한 만남이 가능하게 해 줍니다. 최후 만찬에 대한 희미한 기억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만찬에 참석하여,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의 몸을 받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실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필요합니다. 성찬례 안에서 그리고 모든 성사 안에서 확실히 우리는 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분 파스카 신비의 권능이 우리에게 이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 제사의 구원 능력, 그분의 모든 말씀, 그분의 모든 몸짓, 눈짓과 감정이 성사 거행을 통하여 우리에게 이릅니다. 나는 니코데모이고, 우물가에 있는 사마리아 여자, 카파르나움에서 마귀 들린 사람, 베드로의 집에 있던 중풍 병자, 용서받은 죄 많은 여인, 하혈하는 부인, 야이로의 딸, 예리코의 눈먼 이, 자캐오, 라자로이며, 용서받은 강도와 베드로입니다. 다시는 죽지 않으시는 주 예수님께서는 당신 수난의 표지를 지니신 채 영원히 살아 계시며,2) 성사의 힘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시고 치유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것이 사람이 되신 그분께서 구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분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외치셨던 당신의 목마름을 채우시는 것입니다(요한 19,28).

 

12. 주님의 파스카와 우리의 첫 만남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신앙인들의 삶을 가리키는 사건, 곧 우리의 세례입니다. 이는 단순히 그분의 생각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께서 명하신 행동 강령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술이 아닙니다. 마술은 하느님을 넘어서는 힘을 지닌 양 가장하기에, 성사의 논리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마술은 유혹자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강생과 함께 이 완전한 여정을 계속하면서, 성령의 현존과 활동의 힘으로,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부활할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13.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그 길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세례수 축복 기도는3)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바로 세례를 염두에 두시고 물을 창조하셨다고 밝혀 줍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물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례를 생각하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구원 역사 안에서 일하실 때마다 내내 그분의 모든 행동에 수반되었으며, 그때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구원 활동을 위하여 명백한 의도를 지니시고 물을 사용하셨습니다. 맨 처음에 물을 창조하신 다음에, 그 물이 마침내 세례수가 되게 하시어 물을 완성시키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게 그분께서는 그 물 위를 감돌고 있는 당신 영으로 그 물을 가득 채우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창세 1,2 참조). 그렇게 하여 물은 그 안에 거룩하게 하는 힘을 감추어 담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홍수를 통하여 인류를 다시 세우시려고 물을 사용하셨습니다(창세 6,1―9,29 참조). 그분께서는 물을 다스리시어, 홍해를 건너가는 자유의 길을 열어 주시려고 물을 갈라놓으셨습니다(탈출 14장 참조). 그분께서는 요르단강 물에 들어가시어 그 물을 축성하시고 성령 안에서 말씀의 몸을 흠뻑 적시셨습니다(마태 3,13-17; 마르1,9-11; 루카 3,21-22 참조). 마지막에 그분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피와 물을 섞으시어, 우리를 위하여 살해되신 어린양의 삶과 죽음의 선물에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성령의 선물을 아드님의 찔리신 옆구리에서 우리 위에 부어 주셨습니다(요한 19,34 참조). 우리는 이 물속으로 잠겨 들고 그 힘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결합되어 그분과 함께 불사의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습니다(로마 6,1-11 참조).

 

 

교회, 그리스도의 몸의 성사

 

14.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참된 전통의 기둥들인 성경과 교부들과 전례를 인용하여, “십자가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온 교회의 놀라운 성사’가 솟아 나왔다.”4)고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전례 헌장, 5항 참조). 첫째 아담과 새로운 아담 사이의 유사성은 놀라운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첫째 아담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신 다음 그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빼내십니다. 또한 그처럼,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어 잠이 드신 새로운 아담의 옆구리에서 새로운 하와인 교회가 태어납니다. 새로운 아담께서 바로 당신 자신의 몸인 교회를 바라보시고,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창세 2,23) 하고 말씀하시는 것을 상상해 볼 때에 우리는 매우 놀라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믿고 세례의 물속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뼈에서 나온 뼈가 되고 그분의 살에서 나온 살이 되었습니다.

 

15. 이러한 결합이 없다면, 하느님을 예배하는 충만한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없습니다. 사실, 하느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는 완전한 예배 행위는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곧,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이르실 정도로 순종하신 아드님의 그 순종입니다. 그 아드님의 봉헌에 참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그 아드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받은 선물입니다. 전례 안에서 행동하는 주체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유일한 그리스도-교회입니다.

 

 

전례의 신학적 의미

 

16. 우리는 공의회에, 또 그보다 앞서 일어난 전례 운동에 감사해야 합니다. 공의회는 전례에 대한 신학적 이해와 교회 생활에서 전례의 중요성을 재발견하였습니다.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이하, ‘전례 헌장’)에 적혀 있는 일반 원칙들이 전례 개혁의 토대가 되어 왔듯이, 그 원칙들은 지금도 계속하여 충만하고 의식적이며 능동적이고 효과적인 전례 거행의 증진을 위한 토대가 되어야 하고(전례 헌장, 11.14 참조),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 정신을 길어 올리는 첫째 샘이며 또 반드시 필요한 샘”(전례 헌장, 14)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단순히 이 편지로, 그리스도교 전례 거행의 진리와 힘을 재발견하고 수호하며 생활화하도록 온 교회를 초대하고자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교 전례 거행의 아름다움과 교회의 삶을 위한 필연적인 귀결들이 그 가치에 대한 피상적이고 축소된 이해로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더 나쁘게는 어떤 이념적인 환상에, 그게 무엇이든, 이용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최후 만찬 때에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하시며 사제로서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는, 빵을 떼어 나누는 “자비의 성사, 일치의 표징, 사랑의 유대”5) 주위에서 분열되어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심판합니다.

 

 

전례, 영적 세속성에 대한 해독제

 

17. 저는 여러 기회에 교회 생활의 위험한 유혹에 대하여 경고하였습니다. 저는 그러한 유혹을 “영적 세속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에 대하여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93-97항)에서 길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적 세속성에 자양분을 제공하며 서로 연결된 두 가지 형태로 영지주의와 신펠라기우스주의를 정확히 짚어 이야기한 것입니다.

 

영지주의는 그리스도 신앙을 하나의 주관주의로 축소시켜,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갇혀 버리고 말게 합니다”(「복음의 기쁨」, 94항). 신펠라기우스주의는 은총의 역할을 없애버리고, “자아도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엘리트주의를 낳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복음화하는 대신에 남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며, 은총의 문을 열기보다는 검토하고 검증하는 데에 자신의 힘을 소진해 버립니다”(「복음의 기쁨」, 94항).

 

이러한 그리스도교가 왜곡된 형태에서는 교회의 삶이 처참해지는 결과에 이를 수 있습니다.

 

18. 제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을 보더라도, 전례는 바로 그 본성상 이러한 독소들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분명히, 저는 전례를 그 신학적 의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비오 12세께서 이미 확언하신 대로, 전례는 “장식적인 의례도 아니고, 예식을 거행할 때 따르는 법규와 규정들을 단순히 전부 모아 놓은 것”6)도 결코 아닙니다.

 

19. 영지주의가 주관주의라는 독으로 우리를 중독시켰다면, 전례 거행은 자기만의 논리와 감정으로 키워 온 자기 기준이라는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줍니다. 전례 거행의 행위는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회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치된 신자 전체에게 속합니다. 전례는 “나”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합니다. 이 ‘우리’의 범위를 축소시키려는 모든 제한들은 언제나 악마적입니다. 전례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하여 저마다 추정해 개인적인 지식을 찾아내도록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례는 우리를 모두 한 회중으로 끌어안아, 말씀과 성사적 표징들이 우리에게 밝혀 주는 신비 안으로 우리를 깊숙이 이끌어 들입니다. 전례는 하느님의 행위와 늘 일치하여, 강생의 그 길을 따라서, 모든 사물과 공간과 시간에까지 미치는 몸의 상징적 언어로 그렇게 합니다.

 

20. 신펠라기우스주의가 우리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하면서 우리를 중독시킨다면, 전례 거행은 믿음 안에서 얻는 구원이라는 선물의 무상성을 선포하며, 우리를 정화시켜 줍니다. 성찬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는 것은, 마치 우리가 그것을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기라도 한 것인 양, 우리가 이루어낸 성취가 아닙니다. 모든 전례 거행의 시작은 내가 누구인지를 상기시키면서, 내 죄를 고백하도록 성찰하게 하고, 평생 동정이신 복되신 마리아께 또 천사들과 성인들에게 그리고 나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나를 위하여 우리 주 하느님께 기도해 주십사 간청하도록 나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주님의 집에 들어갈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이 필요합니다(마태 8,8 참조).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참조). 전례는 금욕적 도덕주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전례는 주님 파스카 신비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을 우리가 공손히 받아들이면, 우리 삶이 새로워집니다. 그 이층 방에는 우리와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라시며 이끄시는 그분의 힘을 통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루카 22,15).

 

 

그리스도교 전례 거행의 진리가 지닌 아름다움의 일상적 재발견

 

21. 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전례의 해독 작용이 효과를 내도록,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교 전례 거행의 진리가 지닌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라는 요구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전례 헌장」 7항에 매우 놀랍게 잘 서술되어 있는 신학적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입니다. 그분의 파스카 신비 안에서 우리에게 드러나고 주어지는 그 사제직은 감각적인 표징들(물, 기름, 빵, 포도주, 몸짓, 말씀)을 통하여 그 신비를 현존하고 활동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우리를 파스카 신비 속에 잠기게 하시어, 우리의 모든 삶을 변모시키시고 우리가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게 해 주십니다.

 

22. 전례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재발견하는 것은, 예식의 외적인 형식에만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예식 규정을 세심하게 준수하는 것으로 충족되는 예식적 심미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단순성을 상투적인 평범함과, 본질성을 무지한 피상성과, 예식 행위의 구체성을 과장된 실천적 기능성과 혼동하는 상반된 태도를 어떻게든 입증해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23.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해 둡시다. 전례 거행의 모든 측면(공간, 시간, 몸짓, 말씀, 기물, 전례복, 노래, 음악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모든 예식 규정을 준수해야 합니다. 마땅히 회중이 하도록 되어 있는 것들을 생략하지 않도록 이러한 관심을 충분히 기울여야 합니다. 곧, 파스카 신비는 그 교회가 정한 예식에 따라 거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례 거행 행위의 고유한 특성과 규범이 보장된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참여를 완전하게 하는 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파스카 신비의 놀라움, 전례 행위의 본질적 부분

 

24. 파스카 신비가 구체적인 성사적 표징들 안에서 현존하게 된다는 사실에 우리가 경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참으로 모든 전례 거행이 흘러나오는 은총의 바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더욱더 훌륭한 전례를 거행하려는 노력들이 가상하다 할지라도, 결코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더욱더 내적인 것만을 요구하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내적인 것은 그리스도교 신비의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공허한 주관주의가 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느님과 만나는 것은 하느님을 찾는 개인적인 내적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당신을 우리에게 양식으로 내어 주시려고까지 하신 그 최후 만찬 안에서 강생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질 이 선물의 아름다운 초대에서 우리가 물러나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이 되겠습니까?

 

25. 제가 파스카 신비의 놀라움을 말할 때에, 흔히 “신비 감각”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말해지는 것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전례 개혁을 반대하는 주요 비난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데, 신비 감각을 전례 거행에서 제거해 버렸다며 비난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놀라움은 모호한 실재나 어떤 신비로운 예식 앞에서 일어나는 동요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님의 파스카 행위 안에서 계시되었다는 사실(에페 1,3-14 참조)에 대한 경이로움이며, 이 파스카 행위의 힘은 “신비들” 곧 성사들의 거행 안에서 계속하여 우리에게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유한한데 충만한 계시는 우리를 초월하는 풍요로움을 지니고 있으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 마지막 때에 완성되리라는 것은 여전히 참된 것입니다. 그 놀라움이 참된 것이라면, 강생에 담긴 그 친밀한 관계 안에서 하느님 현존의 절대적인 다름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만일 전례 개혁이 그 모호한 “신비 감각”을 제거해 버렸다면, 비난거리가 아니라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 될 것입니다. 진리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은 언제나 놀라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들이 하느님의 신비와 관련될 때에 흠숭으로 나아갑니다.

 

26. 놀라움은, 상징적 동작에 담긴 그 특별한 의미를 마주할 줄 아는 이들의 태도이기 때문에 전례 행위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그것은 상징의 힘을 체험한 이들의 경이로움입니다. 그 상징은 어떤 추상적인 개념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징하는 것을 매우 구체적으로 담아 표현하는 것입니다.

 

 

진지하고 활기찬 전례 교육의 요구

 

27. 그러므로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전례 행위를 삶에서 온전히 구현하는 능력을 어떻게 되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의회가 추구한 전례 개혁의 목적이었습니다. 모든 문화가 다 같은 양상은 아니겠지만, 현대인들이 전례 행위의 본질적 특성인 상징적 행동을 직시할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 도전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28. 후기 근대 사회 안에서―사람들은 매우 많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어떠한 종류의 기준도 없고 가치도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무관심해지고, 모두 고아처럼 되어, 함께 어떤 의미도 공유할 수 없이 저마다 떨어져 살기 때문입니다.―사람들은 그 이전 시대가 남겨 준 무거운 유산에, 곧 (펠라기우스주의와 영지주의를 다시 한 번 촉발시키는) 개인주의와 주관주의로 뭉친 무거운 유산에 갈수록 더욱더 짓눌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유산에는 또한 인간 본성 자체와 모순되는 추상적인 영성주의도 있습니다. 인간은 육신을 지닌 정신이기에 상징적인 행동을 하고 그 상징을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습니다.

 

29. 공의회에서 일치된 교회는 현대 세계의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라며, 바로 교회 자체가 “인류의 빛”(「교회 헌장」)이신 그리스도의 성사라는 깨달음을 재확인하고,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계시 헌장」)을 경건하게 경청하며, 우리 시대 사람들의 “기쁨과 희망”(「사목 헌장」)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공의회의 대헌장들은 따로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세계 공의회를―교회 안에서 시노드 정신의 가장 드높은 표현으로, 저는 여러분 모두와 함께 그 풍요로움을 지키는 수호자가 되도록 부름받았습니다.―되돌아 볼 때, 이 위대하고 단일한 노력이 전례에 관한 반성으로 시작되었다(「전례 헌장」)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30. 공의회 제2회기를 폐회하시며(1963년 12월 4일), 바오로 6세 성인께서는 직접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논란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었습니다. 그 결실의 하나로 거룩한 전례에 관한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전례가 교회 생활에서 지니는 그 본질적 존엄성과 중요성으로 보아 다른 모든 주제에 우선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모든 주제들보다 먼저 전례가 다루어졌으며, 저는 오늘 그 결론을 장엄하게 선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가치나 의무와 관련한 올바른 그 순서를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이 일들에 대하여 제 마음은 참으로 기뻐 용약합니다. 하느님께서 첫 자리를 차지하셔야 합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우리의 첫째 의무입니다. 전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는 거룩한 친교의 첫째 원천입니다. 전례는 영성 생활을 배우는 첫째 학교입니다. 전례는 신앙과 열렬한 기도로 그리스도교 백성을 우리와 일치시켜 주는 첫째 은사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거룩하고 진실한 기도로 그 침묵의 소리를 드높이라는 인류를 향한 첫째 초대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우리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인간의 마음속 희망을 선포할 때에 형언할 수 없는 능력, 새로 태어나는 그 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7)

 

31. 이 서한에서 저는 이와 관련된 다양한 표현들이 지닌 풍요로운 의미들을 여러분과 함께 자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 스스로 묵상하도록 권유합니다. 전례가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전례 헌장」, 10항)이라면, 이제 우리는 전례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전례 거행 때에 안타깝게도 있을 수밖에 없는 긴장들을, 특정한 예식 형태에 관하여 달리 느끼는 단순한 감각적 차이로 해석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입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론적인 것입니다. 저는 어떻게 공의회의 타당성을 인정한다고 하면서―어떤 가톨릭 신자는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 놀랍기도 하지만―동시에 「전례 헌장」에서 태어난 전례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전례 헌장은 「교회 헌장」에 매우 놀랍게 진술되어 있는 교회관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전례의 실재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제가 이미 모든 주교에게 보낸 서한에서 표현한 대로, “성 바오로 6세 교황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반포하신 전례서들은 로마 예법의 기도 법칙(lex orandi)의 유일한 표현이다.”(「전통의 수호자들」, 제1조)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 제 의무라고 여겨 왔습니다.

 

또한 전례 개혁을 피상적으로 이해하여 전례 개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거듭 되풀이하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대한 응답을 찾아야 할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입니다. 곧, 충만한 전례 행위 안에서 살아가도록 우리는 어떻게 역량을 키울 수 있는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거행되는 전례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 계속 경탄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진지하고도 생생한 전례 교육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32. 우리 예루살렘의 이층 방으로 돌아갑시다. 오순절 아침에 교회가 태어납니다. 새로운 인류의 첫 공동체가 생겨난 것입니다. 용서받았기에 화해를 이룬 사람들의 공동체이고, 주님께서 살아 계시기에 살아 있는 이들의 공동체이며, 진리의 성령께서 머무르시기에 참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오직 이 공동체가 영적 개인주의의 협소한 공간을 열어젖힐 수 있습니다.

 

33. 그것은 오순절의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살아 계시며, 그분의 말씀과 함께, 그분의 몸짓과 함께, 그분의 몸과 피의 봉헌과 함께 현존하신다는 확고한 인식 안에서 빵을 떼어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전례 거행은 주님을 만나는 - 유일한 자리는 아니지만, - 특권적인 자리가 됩니다. 우리는 오직 이러한 만남에 힘입을 때에야 인간 존재가 충만한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순절의 교회만이 인간 존재를 하느님과 함께, 피조물과 함께, 형제자매들과 함께 충만한 관계를 맺는 열린 인간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34. 바로 여기에 전례 교육이라는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로마노 과르디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교육에는 또한 실천적인 첫째 임무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내적 변화에 힘입어, 우리는 충만한 인간 존재로서 종교적 관계를 맺는 방법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8) 이 교육이 바로 전례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양성되어야 합니다. 과르디니는 주저하지 않고 선언합니다. 전례 교육 없이는, “예식과 본문 개정은 많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9) 저는 여기에서 전례 교육이라는 매우 풍성한 주제를 빠짐없이 다룰 의도는 없습니다. 저는 반성을 위한 어떤 출발점을 제시하고자 할 뿐입니다. 저는 전례를 위한 교육과 전례에 의한 교육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측면은 본질적인 둘째 측면에 따라 결정되는 것입니다.

 

35. 전례를 배우는 교육의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합니다. 전례 운동의 시작 때부터 여러 학자들과 연구 기관들의 값진 공헌으로 이와 관련된 많은 일들이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학문적 연구의 범위를 넘어 접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지식을 널리 전파하여, 모든 신자가 전례의 신학적 의미를 깨달아 성장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례에 대한 모든 이해와 모든 전례 실천의 바탕을 이루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신자가 기도문과 예식의 역동성과 그 인간학적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 그리스도교 전례 거행의 과정을 이해하도록 해 줍니다.

 

36. 저는 주님의 날에 성찬례를 거행하려고 함께 모이는 우리 집회의 일상적인 생활에 대하여 생각합니다. 주일마다, 부활 대축일마다, 개인이나 공동체의 삶에서 특별한 순간마다, 삶의 다른 모든 시기마다 우리는 함께 모입니다. 성품을 받은 봉사자들은 세례받은 신자들의 손을 잡아, 반복되는 파스카 신비를 체험하도록 이끌 때에 가장 중요한 사목 활동을 수행합니다. 우리는 전례를 거행하는 주체가 사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합시다. 배워서 얻은 지식은 그저 거행되는 신비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첫걸음일 뿐입니다. 분명히, 형제자매들을 인도할 수 있으려면, 회중 가운데에서 주재하는 교역자들은 그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신학의 지도를 놓고 그 길을 연구하거나 살아 있는 신앙 체험으로 그 길을 자주 경험하면서 그 길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완수해야 할 의무만이 아니라 기도에서 그 힘을 얻는 것입니다. 성품을 받는 날 모든 신부는 주교가 자신에게 하는 이러한 말씀을 듣습니다. “자신이 거행하는 것을 알고 실천하며, 주님의 십자가 신비를 따라 살아가십시오.”10)

 

37. 신학교의 전례 연구는 실제로 모든 신학적 지식의 유기적이고 통일된 전망을 제공해 주는 전례 거행 그 자체가 지닌 특별한 힘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모든 신학 과목은 각기 그 고유한 전망에 따라, 사제 양성의 일관성을 명백히 구현하도록 그 과목과 전례의 밀접한 관계를 분명하게 보여 주어야 합니다(「전례 헌장」, 16항 참조). 신학교의 신학 교육에서 전례적-학문적 연구 계획은 분명히 사목 활동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교회 생활의 모든 면들은 전례 안에서 그 정점과 그 원천을 찾을 수 있습니다. 포괄적이고 유기적이며 통합적인 사목 실천은 치밀한 사목 계획의 결과라기보다는, 친교의 토대인 주일 성찬례를 공동체 생활의 중심에 두는 데에서 나오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말은 전례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모든 것을 예배의 측면으로만 축소시킨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전례 거행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도록 인도하지 않는 복음 선포가 진정한 것이 아니듯,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전례 거행은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랑의 증언이 없으면,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 13,1).

 

38. 세례받은 모든 이만이 아니라 성직자들을 위해서도, 전례 교육이란 그 첫째 의미를 보더라도 단 한 번에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거행되는 신비의 은총은 그것을 아는 우리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므로, 자신을 낮춘 이들의 겸손한 자세, 곧 경이로움에 열려 있는 자세와 함께 분명히 모든 이를 지속적으로 양성하려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39. 신학교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의견을 드립니다. 예식적인 관점에서 모범적인 전례 거행만이 아니라, 신학 지식이 지향해야 할 하느님과의 참된 친교를 체험하는 진정하고 살아 있는 전례 거행을 신학생들이 경험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활동만이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완성시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신비는 정신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 미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체험은 매우 근본적인 체험입니다. 신학생들이 성품 봉사자들이 되고 나서도 사랑의 신비인 하느님의 신비를 깨닫는 똑같은 여정을 공동체와 함께 걸어갈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40. 이제 이 마지막 숙고는 “전례 교육”이라는 표현에 관하여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두 번째 의미를 성찰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소명에 따라 전례 거행에 참여하는 가운데 양성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일종의 합리주의가 되지 않으려면, 제가 방금 언급한 바와 같이, 신학 지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 안에서 전례 자체가 실제로 교육 활동이 되도록 봉사해야 합니다.

 

41. 우리가 전례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한 것들만 보더라도, 우리 삶의 중대한 문제인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지식은 어떤 이상에 정신적으로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신의 인격을 다 내놓는 실존적인 투신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례가 커다란 교육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전례 헌장」, 33항 참조), 전례는 “지식”에 관한 것도 아니고 일차적으로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전례는 성자의 파스카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파스카의 구원의 힘이 우리 삶에 미칩니다. 전례 거행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갈라 4,19 참조) 일하시는 성령의 활동에 순응하는 우리의 실존에 관련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이 충만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완전히 동화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거듭 말합니다. 그것은 관념적으로만 이루어지는 정신적인 과정이 아니라, 우리가 바로 그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선물로 주어진 목적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가는 활동입니다. 이는 성찬의 빵과 함께 이루어지며, 세례 안에서 은총으로 받은 것을 나날이 더 이루어 나가도록, 곧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가 되도록 부름받은, 세례받은 모든 이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대 레오는 이렇게 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우리를 우리가 먹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11)

 

42. 이러한 실존적인 투신은―강생의 방식과 일치하여 지속적으로―성사적인 방식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례는 영성적 추상화와는 정반대되는 것들로, 곧 빵, 포도주, 기름, 물, 향, 불, 재, 돌, 천, 색깔, 몸, 말, 소리, 침묵, 몸짓, 공간, 움직임, 행동, 순서, 시간, 빛으로 이루어집니다. 피조물 전체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현현이며, 그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충만하게 드러났을 때부터 모든 피조물은 그 십자가로 이끌렸습니다. 강생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아버지께 올라가신 말씀을 만나도록 피조물 전체가 안배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샘의 물 위에서 기도를 바치며 노래할 때에, 또한 축성 성유를 이룰 기름 위에서 기도를 바치고, 우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열매인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는 기도를 바칠 때에도 그렇게 안배되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43. 전례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사시는 다가갈 수 없는 빛의 아름다움에 또는 천상에서 영원히 울려 퍼지는 천사의 완전한 노래에 무엇인가를 덧붙일 수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1티모 6,16 참조). 전례는 우리가 여기 이 지상에서 신비들을 거행할 때 하느님을 뵙게 해 주고, 하느님을 뵐 때 그분의 파스카에서 생명을 얻게 해 주기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잘못을 저질러 죽었다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된(에페 2,5 참조) 우리가 바로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일치’의 학자인 이레네오는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 있는 사람이고, 사람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데에 있습니다. 일찍이 창조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가 이 세상에서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었다면,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시는 아버지의 계시는 하느님을 보는 이들에게 얼마나 더 풍요로운 생명의 원천이 되어 주겠습니까!”12)

 

44. 과르디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다시 한 번 상징들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전례 교육의 첫째 과업과 관련하여 그 윤곽이 그려집니다.”13) 이것은 성품 봉사자들과 신자들, 모두 같이 져야 할 책임입니다. 현대인은 더 이상 상징들을 읽을 줄도 모르고 그 자체에 대해서도 거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문맹이 되어 버렸기에 이 과업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몸의 상징에 대해서도 이해할 줄 모릅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과 육신의 내밀한 결합이며, 육신의 질서 안에서 영적인 영혼을 볼 수 있기에 상징입니다. 이 안에 인간의 유일무이성, 곧 살아 있는 다른 형태의 어떤 존재로도 축소될 수 없는 그 특별함이 있습니다. 초월자를 향하여, 하느님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합니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는 결국 하느님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무지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원한 젊음의 신화에 빠져 거의 강박적으로 몸만 돌보거나 몸이 지닌 모든 존엄성을 부인하고 오직 물질로만 격하시켜 버리는 그 역설적인 태도만 보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바로 그 몸 자체에서만 출발한다면 그 몸에는 어떠한 가치도 부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상징은 강력하기도 하고 동시에 무력하기도 합니다. 상징이 존중을 받지 못한다면, 상징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상징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 힘을 잃어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가 태양을 형제라고 느끼며 태양을 형제라고 부른 그 시선으로 더 이상 태양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는 태양을 보며 “아름답고 찬란한 광채를 내는”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경이로움에 가득 차 태양이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모습을 담고 있나이다.”14)라고 노래합니다. 현대인이 몸과 모든 피조물의 상징적 가치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전례의 상징적 언어를 현대인이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그러한 언어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언어는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말씀의 몸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시려고 선택하신 방법이기 때문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전례의 상징들을 보여 주고 이해하는 힘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가 앞서 말하였듯이, 이 차원은 인간에게 본질적이며, 또한 – 영혼과 육신의 일치를 부정하는 - 유물론과 유심론의 폐해들에도 불구하고 이 차원은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 언제나 다시 떠오를 준비가 되어 있기에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45. 그러므로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상징들을 이해할 줄 아는 존재로 돌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상징들을 읽을 줄 알게 되고 그 상징들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성사들의 거행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로 효력을 지닌다는 것(사효성, ex opere operato)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성사 거행의 언어를 적절한 방식으로 만나지 않는다면, 이것이 사람들에게 그 충만한 참여를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상징을 읽는다는 것은 정신적인 지식을 쌓거나 개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살아 있는 체험을 하는 것입니다.

 

46. 무엇보다도 우리는 창조에 관하여 다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성사들을 ‘이루는’ 그 사물들이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물들은 하느님을 지향하고 있으며, 강생 안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육신을 취하시듯, 하느님께서는 사물들을 취하여 쓰십니다. 그리하여 사물들은 구원의 도구, 성령의 수레,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분명히 이러한 전망은 유물론적이거나 유심론적인 전망과는 그 차이가 매우 큽니다. 창조된 사물들이 우리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성사적 행위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 사물들을 피상적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존중하고 감사하는 눈길로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야 합니다. 바로 한처음부터, 창조된 사물들은 성사들의 성화 은총의 씨앗을 담고 있습니다.

 

47. 전례가 우리를 어떻게 양성해 주는지 계속 성찰해 볼 때 또 다른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가 전례의 상징들을 보여 주고 이해할 수 있는 내적 자세를 갖추도록 필요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저는 이를 단순하게 표현해 보겠습니다. 저는 부모님들과 더 나아가 조부모님들만이 아니라, 우리의 목자들과 교리 교사들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은 바로 그들에게서 전례의 몸짓이 지닌 효력, 예를 들면, 십자 성호, 무릎 꿇기, 그리고 우리 신앙 조문들의 효력을 배워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에 관한 생생한 기억이 없을 수 있지만, 아이의 작은 손을 부여잡고 처음으로 우리 구원의 표지를 긋도록 이끌어 준 그 커다란 손짓을 쉽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그 움직임에는 말이 뒤따릅니다. 마치 그 몸짓의 모든 순간을, 그 온 몸을 다 끌어안으려는 듯, 그 움직임에 말이 느리게 뒤따릅니다. “성부와 … 성자와 … 성령의 … 이름으로 … 아멘.” 그런 다음에 아이의 손을 내려놓고, 혼자서 그것을 모두 따라 하는 아이를 지켜보며, 도와주려고 곁을 지킵니다. 이제 전해진 그 몸짓은 마치 주님과 함께 자라나면서 형성되는 습관처럼 되어, 성령께서만 아시는 그 의미를 얻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는 그 몸짓과 그 상징의 힘이 우리에게 속하게 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그 몸짓에 속하게 되어, 그것이 우리를 길러 주고, 우리는 그 몸짓으로 양성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고, 그 몸짓에 담긴 모든 것을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그 몸짓을 하면서도 그 몸짓을 받아들이면서도 작은 이가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상징적인 언어로 들어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풍요로움을 빼앗길 수 없습니다. 자라나면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더 많은 길을 알겠지만, 언제나 작은 이들로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거행 방식

 

48. 전례의 상징들을 생생하게 이해하도록 그것들을 지키고 성장시켜 주는 하나의 길은 분명히 거행 방식(ars celebrandi)을 잘 살피는 것입니다. 이 표현 또한 다양한 해석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우리가 이미 여러 번 언급한 「전례 헌장」 7항의 신학적 의미를 살펴본다면 분명해집니다. 거행 방식은 예식 규정을 준수하는 것으로만 축소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규칙도 없이―때로는 다듬어지지 않은―상상력을 펼쳐 만들어 내는 것일 수도 없습니다. 예식은 그 자체로 규범입니다. 규범은 결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수호해야 할 더 높은 실재를 위하여 언제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49. 모든 예술 방식처럼, 거행 방식은 다양한 지식을 요구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전례 안에서 펼쳐지는 역동성에 대한 이해를 요구합니다. 전례를 거행하는 그 순간은, 기념제를 통해 파스카 신비를 현존하게 하여, 세례받은 이들이 거기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신비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는 자리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없으면, (대체로 세련되어 보이는) 외형주의에 쉽게 빠지거나, (대체로 경직된) 예식 규정에만 집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모든 전례 거행 안에서 어떻게 활동하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거행 방식은 성령의 활동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거행 방식은 개인적인 감각을 앞세우는 주관주의에서 자유로워지고, 토착화의 올바른 과정과는 전혀 무관한 문화적 요소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주의에서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끝으로, 상징 언어의 역동성과 함께 그 특수성과 효력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50. 이렇게 간략히 언급한 것만 보더라도, 거행 방식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거행 방식에는 끊임없는 적용이 필요합니다. 장인은 기술로도 충분하지만, 예술가는 기술적인 지식에 더하여 반드시 긍정적인 영감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참된 예술가는 그 예술을 소유하지 않고, 오히려 그 예술에 사로잡힙니다. (저는 어떤 의향을 판단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효과를 보고 말하는데,) 웅변술이나 설득력 있는 의사소통의 기법을 익히는 과정을 밟는다고 해서, 거행 방식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수단이 유용할 수 있지만, 그 수단들은 언제나 전례의 본질과 성령의 활동 아래에 있어야 합니다. 전례 거행 안에서 우리가 그 방식을 배울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하여 전례를 거행해야 합니다. 과르디니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도 개인주의와 주관주의에 얼마나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지, 우리가 위대한 부르심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우리가 신앙생활을 얼마나 작은 잣대로만 재고 있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기도에 대한 감각을 다시 깨워야 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그 기도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되살려야 합니다. 이 목적을 이루는 길은 나약한 감상주의를 거부하고 규율을 배우는 것입니다. 곧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교회에 순명하며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입니다.”15) 이것이 바로 거행 방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51.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말할 때에, 우리는 이것이 집전자로서 봉사하는 성품 성직자에게만 관련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그렇게 살아가도록 불린 세례받은 모든 이가 지녀야 할 태도입니다. 저는 회중이 하는 모든 동작과 말을 생각합니다, 한데 모임, 행렬, 앉음, 일어섬, 무릎 꿇음, 노래, 침묵, 환호, 바라봄, 들음입니다. 이것들은 온 회중이 “일제히”(느헤 8,1) 전례 거행에 참여하는 여러 방법입니다. 모든 이가 함께 같은 동작을 하는 것, 모든 이가 함께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 이것은 전체 회중의 힘을 각 개인에게 전해 줍니다. 그것은 결코 개성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며, 그와 반대로 신자 개개인을 교육하여 개인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한 몸이라는 의식 안에서 고유한 개성들이 참된 단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해 주는 통일성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전례적 예절을 따라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것을 지킨다면, 오히려 우리를 양성하는―과르디니가 언급한 대로―하나의 ‘규율’입니다. 곧 우리에게 그 감정과 태도와 행동을 체험하게 하면서 우리의 내적 세계에 질서를 놓아 주는 동작과 말들인 것입니다. 이것들은 우리를 고무시키려는 어떤 이상적 표현이 아니라, 몸이 온전히 참여하는 활동, 다시 말하자면 몸과 영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입니다.

 

52. 전체 회중이 하는 예식 동작 가운데에서, 침묵은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침묵은 여러 번 예식 규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성찬례 거행 전체는 그 시작에 앞서, 또한 그 예식이 펼쳐지는 내내 중요한 순간마다 침묵에 잠깁니다. 실제로, 침묵은 참회 예식 안에, 기도의 초대 다음에, 말씀 전례 안에(독서 전, 독서들 사이, 그리고 강론 다음에), 감사 기도 안에, 영성체 후에 있습니다.16) 그러한 침묵은 일종의 분심으로서 예식은 뒷전에 두고 혼자 고립되어 자신을 숨기는 피난처가 아닙니다. 그러한 종류의 침묵은 전례 거행의 본질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전례의 침묵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침묵은 전례 거행의 모든 활동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성령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상징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침묵은 어떤 예식의 진행에서 정점을 이루기도 합니다. 바로 침묵이 성령의 상징으로서 성령의 다양한 활동을 표현하는 힘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앞서 언급한 이 순간들을 뒤따르면서, 침묵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려는 열망으로 나아갑니다. 침묵은 말씀을 경청하게 하고 기도를 불러일으킵니다. 침묵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흠숭하게 해 줍니다. 침묵은 우리가 영성체의 내밀한 일치 안에서,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삶에서 원하시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떼어 나눈 빵과 깊은 일치를 이루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침묵의 상징적 행위를 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침묵 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를 양성해 주십니다.

 

53. 모든 몸짓과 모든 말은 우리의 삶에서 언제나 새로운 순간에 마주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새로운 특정 행동을 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단순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용서를 청하려고, 우리의 교만을 꺾으려고, 우리의 눈물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려고, 하느님의 개입을 간청하려고, 받은 은총에 대하여 그분께 감사를 드리려고 무릎을 꿇습니다. 언제나 똑같은 이 몸짓은 우리가 본디 미천한 존재임을 하느님 앞에서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다양한 순간마다 하는 이 몸짓은 우리 내면 깊숙이 파고들어, 하느님과 또 형제들과 맺은 우리의 관계를 외적으로 드러내 줍니다. 무릎을 꿇는 것은 또한 예술적 표현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존재 양식을 드러내는 이러한 몸짓을, 그 필요와 상징적 의미를 온전히 깨닫고 해야 합니다. 이 단순한 몸짓에 대하여 말한 것들이 다 사실이라면, 말씀의 거행에서 이루어지는 몸짓들은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나타내겠습니까?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으로 기도하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어떠한 방식을 배우도록 부름받고 있습니까? 이 모든 것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예술적 방식”으로 표현되는 전례 거행의 모든 몸짓과 모든 말이 개인과 공동체의 그리스도인의 특성을 형성하기에, 형식적이거나 단순히 외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내적인 것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54. 거행 방식이 전례를 거행하는 회중 전체에 요구되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성품 봉사자들은 바로 그 거행 방식에 매우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방문하면서, 저는 그들의 사목자가 집회에서 집전하는 방식에 따라 그들의 전례 거행 생활이―더 좋게, 또는 불행히도 더 나쁘게―좌우되는 것을 자주 목격하였습니다. 집전에는 여러 “방식들”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면서도, 또한 명백히 부적절한 집전의 특징적인 자세들을 여기에 나열할 수 있습니다. 곧, 경직된 엄격함이나 과장된 상상력, 영적 신비주의나 실용적인 기능주의, 서두르는 조급함이나 과도한 느슨함, 소홀한 부주의나 지나친 꼼꼼함, 과다한 친밀감이나 성직자같이 경직된 태도입니다. 다방면에 걸쳐 이러한 사례들이 있지만, 저는 이런 부적절한 집전 방식이 하나의 공통된 뿌리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곧 관심의 중심이 되고 싶어 하는 숨길 수 없는 욕구를 때때로 드러내는, 거행 형태에만 치중하는 지나친 개인주의가 그 뿌리입니다. 흔히 이것은 우리의 전례 거행이 온라인으로 중계될 때에 더 분명해지는데, 온라인 중계가 늘 적절한 것은 아니기에, 이것에 관하여 우리는 잘 성찰해야 합니다. 이러한 경향이 널리 퍼져 있지는 않다고 알고 있지만, 회중들은 드물지 않게 이러한 “전례적 남용”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55. 전례를 집전하는 것의 중요성과 그 세심한 배려에 대해서는 할 이야기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기회에 저는 강론을 해야 할 임무에 대해서도 숙고하였습니다.17) 저는 우리가 전례로 어떻게 양성되는지를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성찰하기를 바라며, 이제 다른 몇 가지를 폭넓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공동체 안에서 일상적 주일 미사에 대하여 생각하며, 저는 바로 사제들은 물론 모든 성품 봉사자들에게 말합니다.

 

56. 사제는 성품성사 안에서 받은 은총의 힘으로 전례 거행에 특별히 참여하며 살아갑니다. 이 특별함은 바로 집전 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가 부름받아 수행하는 모든 직무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본디 공동체가 그에게 부여한 임무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서품 때에 성령이 부어진 결과입니다. 사제는 또한 전례를 거행하는 회중을 이끌고 집전하면서 양성됩니다.

 

57. 이러한 봉사가―바로 올바른 방식으로―잘 이루어지게 하려면, 사제는 자비를 통하여, 무엇보다 부활하신 분의 특별한 현존을 드러내는 생생한 의식을 가지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 회중이 다른 여느 모임과는 다른 유일무이한 것이 되게 해 주는 주님 현존의 여러 형태들이 있는데, 성품 봉사자는 바로 그 자신이 주님 현존의 한 형태가 됩니다(「전례 헌장」, 7항 참조). 이러한 사실은 집전하는 이의 모든 몸짓과 말에 - 폭넓은 의미에서 - “성사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회중은 최후 만찬 때처럼 오늘 그러한 몸짓과 말에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파스카 음식을 드시기를 간절히 바라셨던 그 열망을 마땅히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분이 바로 주인공이십니다. 우리 것이 아닌 어떤 역할과 자세를 취하면서 그럴듯하게 따라하려는 미성숙한 우리의 태도가 결코 중심이 아닙니다. 사제 자신이 주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지니신 이러한 친교의 열망에 압도되어야 합니다. 사제는 사랑에 불타오르는 예수님의 마음과 주님 사랑의 대상인 모든 신자의 마음, 그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찬례를 집전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용광로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거나 파악할 수 있게라도 된다면, 분명히 우리에게는 적절한 행동을 하라고 제시해 놓은 어떤 ‘규범집’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하다면, ‘우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규범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실제로 이루어지는 성찬례 거행 그 자체입니다. 그 거행은 적절히 선택된 말과 몸짓과 느낌들이 맡은 그 임무에 알맞은 것인지 아닌지를 우리가 이해하게 해 줍니다. 이것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는 사제에게 적용을 요구하는 어떤 거행 방식입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 세상에 지르러 오신 사랑의 불을 계속해서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루카 12,49 참조).

 

58. 최초의 공동체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빵을 떼어 나눌 때, 그것은 교회의 첫걸음에 함께하신 마리아께서 바라보시는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습니다”(사도 1,14). 동정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드님께서 사도들에게 맡기신 그 몸짓을 ‘지켜보십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씀을 받아들이신 뒤 당신의 태중에서 사람이 되신 말씀을 보호하셨듯이, 동정녀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몸이 되게 하는 그 몸짓들을 교회의 태중에서 다시 한 번 보호해 주십니다. 성품성사 안에서 받은 은총의 힘으로 그러한 몸짓을 되풀이하는 사제는 동정녀의 태중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는 규범이 참으로 필요합니까?

 

59. (프란치스코 성인이 노래하였듯이) 세상에 주님 사랑의 불을 지르는 도구가 되고, 교회가 되신 동정 마리아의 태중에서 보호를 받는 사제들은 성령께서 함께 일하시어, 그들의 서품 때에 시작하신 일을 완성시켜 주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의 활동은 그들이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베드로의 두려움으로(루카 5,1-11 참조), 고통받는 종의 크나큰 겸손으로(이사 42장 이하 참조), 자신들에게 맡겨진 백성들에게 “자신을 먹도록 내어주는” 열망으로 날마다 직무를 수행하면서, 성찬례 모임을 집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60. 사제가 그 자질을 갖추어 이렇게 집전하도록 교육하는 것은 바로 전례 거행 그 자체입니다.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우리의 온 마음과 우리의 감정이 그 거행에 녹아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떤 정신적인 교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제는 전례가 그의 입술과 그의 손에 맡긴 말과 몸짓으로 집전하는 가운데 양성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의 겸손으로 다스리시기에, 사제는 왕좌에 앉지 않습니다.18)

 

사제는 신자들의 관심이 제대에 집중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찔리신 심장에서 피와 물이 흘러내려 교회의 성사들이 세워졌으니, 제대는 그리스도의 표지가 되고, 우리의 찬미와 감사의 중심이 됩니다.19)

 

예물 봉헌을 위하여 제대에 다가가, 사제는 이러한 말로 겸손과 통회를 하며 양성됩니다. “주 하느님,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어, 오늘 저희가 바치는 이 제사를 너그러이 받아들이소서.”20)

 

사제는 자신에게 맡겨진 주님의 직무를 수행하기에 자기 자신을 과신할 수 없습니다. 전례는 사제가 물의 표징 안에서 정화되도록 “주님,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21)라는 기도를 바치라고 그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전례가 사제의 입술 위에 놓아두는 말은 어떤 특정한 어조를 요구하는 다양한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말들의 중요성 때문에 참으로 이 ‘말하는 방식’(ars dicendi)이 사제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회중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간청하는 때에, 회중에게 권고를 할 때에, 온 회중과 함께 한목소리로 환호할 때에, 그러한 말들은 사제의 내적 감정을 형성해 줍니다.

 

감사 기도에서―이 기도에서, 세례받은 이들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으로 침묵 가운데 귀담아듣고” 환호로 참여합니다.22)―집전자는 “거룩한 백성 전체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서 최후 만찬 때 하신 아드님의 봉헌을 상기시키며 그 무한한 은총이 재대 위에 새롭게 현존하게 하는 힘을 지닙니다. 그 봉헌에 사제는 자기 자신을 봉헌하며 참여합니다. 사제는 자신이 바로 최후 만찬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최후 만찬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는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라고 말할 수 없으며, 그 자신의 몸을, 그 자신의 목숨을 자신에게 맡겨진 백성을 위하여 내어 주겠다는 그 열망대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는 바로 그의 봉사 직무를 수행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으로, 그리고 또 다른 많은 것으로, 사제는 전례 거행 행위 안에서 지속적으로 양성됩니다.

 

* * *

 

61. 저는 거룩한 신비들의 거행에 담긴 엄청난 보화를 분명하게 다 다룰 수는 없더라도 단지 몇 가지 성찰을 함께 나누고자 하였습니다. 저는 모든 주교들과 사제들과 부제들에게, 신학교의 양성자들에게, 신학 대학과 신학 학교의 교수들에게, 모든 교리 교사들에게 요청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그리스도교 영성의 첫째 원천인 전례에서 그 보화를 길어 올리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전례 헌장」 첫 부분에 제시된 풍요로운 일반 원칙들을 재발견하고 공의회의 첫 번째 헌장과 다른 모든 공의회 문헌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파악하도록 끊임없이 부름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베드로와 함께 베드로 아래서’ 공의회 교부들이 성령의 인도 아래 목자로서 양심에 따라 개혁의 원칙들을 승인하면서 개혁이 필요하다고 여긴, 저 예식 형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거룩한 교황 성 바오로 6세와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개정된 전례서들을 승인하시며, 공의회의 개혁을 충실하게 보장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교회가 다양한 언어로 하나의 동일한 기도를 바치며 그 일치를 드러낼 수 있도록, 자의 교서 「전통의 수호자들」을 썼습니다.23) 제가 이미 쓴 대로, 저의 의도는 이러한 일치가 로마 예법의 온 교회 안에서 재건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62. 저는 이 교서가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전례 거행의 진리에 담긴 아름다움에 다시 경탄하게 하고, 올바른 전례 교육의 필요성을 일깨워 주며, 세례받은 모든 이가 저마다 자신의 특별한 소명에 따라 파스카 신비의 진리에 봉사하고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게, 전례 거행 방식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도와주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풍요로움은 우리에게서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그리스도교 축제들 안에, 주일 중심의 삶 안에, 우리가 거행하는 성사들의 힘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성장의 여정입니다. 우리는 기쁨과 친교 안에서 우리 자신이 양성되도록 부름받고 있습니다.

 

63. 이를 위하여 저는 우리의 여정을 계속 이어갈 수 있도록 또 하나의 제안을 여러분에게 하고자 합니다. 저는 ‘전례주년’과 ‘주님의 날’의 의미를 재발견하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 또한 공의회가 우리에게 남겨 준 것입니다(「전례 헌장」, 102-111항 참조).

 

64. 우리가 위에서 말한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 전례주년은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분의 파스카 신비 안에 잠겨 그리스도의 신비에 대한 지식으로 날로 성장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지속적인 양성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건들이 무작위로 일어나는 혼란의 연속이 아니라,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24) 가운데, 우리를 그분과 동화시키며 파스카에서 파스카로 넘어가는 하나의 여정입니다.

 

65. 파스카 신비로 새로워진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교회는 여덟째 날마다 구원 사건을 기리는 주일을 거행합니다. 주일은 하나의 계명이기에 앞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하여 마련하신 선물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교회는 이를 계명으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주일 거행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성찬례를 통하여 양성될 수 있게 해 줍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은 주일에서 주일까지 우리의 삶을 비추어 주며, 파견되신 말씀은 우리 안에서 그 사명을 이루고자 하십니다(이사 55,10-11 참조). 주일에서 주일까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루어지는 친교는 또한 우리의 삶이 나눔과 환대와 섬김의 형제적 친교 안에서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희생 제물이 되도록 합니다. 주일에서 주일까지, 떼어 나눈 빵의 힘은 복음 선포 안에서 우리를 지탱해 줍니다. 그 안에서 바로 우리 전례 거행의 진정성이 드러납니다.

 

우리 논쟁을 그만두고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시는 것을 함께 들읍시다. 친교를 지켜 나가며, 전례의 아름다움에 끊임없이 경탄합시다. 파스카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주님께서 계속하여 우리와 함께 파스카 음식을 드시기를 열망하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시도록 맡겨 드립시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로마, 성 요한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교황 재위 제10년, 2022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에.


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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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서

제대 위 사제의 손 안에 현존하실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온 세상이 떨며

하늘이 기뻐 뛰게 하소서!

오, 위대한 고귀함이여, 놀라운 겸양이여!

오, 숭고한 겸손이여! 오, 겸손한 숭고함이여!

온 세상의 주님,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

우리 구원을 위하여 그토록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조그만 빵 안에 감추고 계시나이다!

형제들이여, 하느님의 겸손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을 여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들어 높이시도록

여러분 자신을 낮추십시오!

당신 자신을 여러분에게 온전히 내어 주신 그분께서

여러분을 온전히 받아 주시도록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놓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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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 전체에 보내는 편지 II,26-29

 

 

1) 대 레오, 「설교집」 74: 승천에 관한 설교 2,1: “우리가 볼 수 있던 우리 구세주의 현존이 이제 성사로 옮겨졌습니다.”

 

2) 부활 감사송 3, 『로마 미사 경본』(2017년), 569면: “그분께서는 희생되셨으나 다시는 죽지 않으시고, 처형되셨으나 영원히 살아 계시나이다.”

 

3) 『로마 미사 경본』(2017년), 파스카 성야 46항(390면).

 

4) 아우구스티노, 「시편 상해」, 시편 139(138)편, 2항; 『로마 미사 경본』(2017년), 파스카 성야, 30항, 제7독서 후 기도(384면); 거룩한 교회를 위한 기원 미사, 1 교회 나, 예물 기도(1166면) 참조.

 

5) 아우구스티노, 「요한 복음 강해」, 26,13 참조.

 

6) 회칙 「하느님의 중개자」(1947년 11월 20일), AAS 39(1947년), 532면.

 

7) AAS 56(1964년), 34면.

 

8) R. 과르디니, 「전례와 전례 교육」(마인츠, 1992년) 안에 있는 ‘전례 교육’(1923년), 43면.

 

9) R. 과르디니, 「전례와 전례 교육」(마인츠, 1992년) 안에 있는 ‘예배 행위와 전례 교육의 당면 과제’(1964년), 14면.

 

10) 「주교, 사제, 부제 서품 예식」(1990년 표준판), 95면: “Agnosce quod ages, imitare quod tractabis, et vitam tuam mysterio dominicae crucis conforma.”

 

11) 대 레오, 설교 43, 주님의 수난에 대하여 3,7.

 

12) 리옹의 이레네오, 「이단 반박」, 4권, 20,7.

 

13) R. 과르디니, 「전례와 전례 교육」(마인츠, 1992년) 안에 있는 ‘전례 교육’(1923년), 36면.

 

14) 태양의 노래, 프란치스코 문헌, 263면.

 

15) R. 과르디니, 「전례와 전례 교육」(마인츠, 1992년) 안에 있는 ‘전례 교육’(1923년), 99면.

 

16)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5.51.54-56.66.71.78.84,88,271항 참조.

 

17)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2013년 11월 24일), 135-144항 참조.

 

18)「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310항 참조.

 

19)「성당과 제대 봉헌 예식」, 제대 봉헌 기도 참조.

 

20) 『로마 미사 경본』(2016년), 「미사 통상문」, 26항: “In spiritu humilitatis et in animo contrito suscipiamur a te, Domine; et sic fiat sacrificium nostrum in conspectu tuo hodie, ut placeat tibi, Domine Deus.”

 

21) 「미사 통상문」, 28항: “Lava me, Domine, ab iniquitate mea, et a peccato meo munda me.”

 

22)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78-79항 참조.

 

23) 바오로 6세, 교황령 「로마 미사 경본」(1969년 4월 3일): AAS 61(1969년), 222면 참조.

 

24) 「미사 통상문」, 125항: “…… exspectantes beatam spem et adventum Salvatoris nostri Iesu Christi.”

 

 

영어: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en/apost_letters/documents/20220629-lettera-ap-desiderio-desideravi.html

이탈리아어: https://www.vatican.va/content/francesco/it/apost_letters/documents/20220629-lettera-ap-desiderio-desideravi.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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