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강론자료

연중 20 주일-가해-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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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2-08-17 ㅣ No.365

연중 제 20 주일 (가해 )

 

            이사야 56,1.6-7    로마 11,13-15.29-32     마태 15,21-28

 

    2002. 8. 18.

 

주제 : 나는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사는가?

 

한 주간 안녕하셨습니까?  한 주간의 시작을 하느님과 함께 하려는 여러분들에게 그 하느님의 축복을 빕니다.

 

한참동안 우리를 힘들게 했던 하늘의 조화도 이제는 조금 비켜간 듯 합니다. 엊그제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런 자연의 현상은 전세계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사람들이 자연을 함부로 대해서 만들어낸 인재(人災)’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방송에 나오는 말을 들으면서 말만큼 쉽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자연을 좀 더 겸손하게 대우해야할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오늘은 연중 20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가나안 여인의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싸움이라고 표현은 했습니다만, 이 싸움은 우리가 현실에서 주먹을 쳐들거나 티격태격하는 종류의 싸움은 아닙니다. 복음에 나오는 그 싸움의 올바른 의미를 살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만들어낸 여러 가지 잘못된 일들 때문에 자연도 흥분하는 2002년에 살고 있는 나는 과연 어떤 자세로 지내고 있는지 내 모습을 돌아보고 고쳐야 할 것을 내 안에서부터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 ‘가나안 여인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쌓여있던 유대인들이 전통만을 고집하면서 하느님의 진정한 뜻은 멀리하는 일을 꾸짖는 예수님의 이야기 다음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법한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존중하는 마음도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뜻도 따를 수 있도록 시간을 배려해야 한다는 가르침 다음에 나오는 본보기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 사람을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마귀(魔鬼)에 들린 자신의 딸을 치유해주시기를 원했던 이방인,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사람도 아닌 강아지에 비유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감정이 상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감정을 상할 시간적인 여유 없이 더 큰 일이 그녀 앞에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행동을 잘 살펴보면,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쓰면서 자신의 힘을 낭비하고 소비하는 일보다는 정말로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깨닫고 그 우선순위에 따라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000년이 다 돼가는 가르침에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현실을 비교해 봐도 우리가 깨달을 내용은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내게 떨어질 콩고물이 얼마나 될까?’하는 계산에 따라 이합집산(離合集散)이 수시로 반복되고, 마지막 궁지에 몰리면 아주 비참한 심정으로 현실을 인정하거나 ‘너 잘났다’고 큰소리치고 그 현장을 떠나기 십상인 우리의 현실에서 자신을 강아지로 비유해도, 상에 차려진 음식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바닥에 떨어뜨린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겠다는 자세는 비굴한 모습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을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에게서, 내가 이 세상이 완성되는 날에 하느님에게서 이러한 판정을 받거나 질문을 듣는다면 나는 과연 어떤 응답을 할 사람으로 이 현실을 살고 있는지 사는지 새삼 긴장하게 만드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기적을 베풀고 싶지 않았던 예수님, 따라오며 외쳐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돌려보내기를 원했던 제자들의 차원과는 다른 자세를 가나안 여인의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는 기도와 그 삶의 자세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 하느님께 기도를 좀 더 하는 사람, 내 몸을 바쳤다는 자세로 살아가는 자신감의 여부를 떠나서 그에 합당한 자세를 가지려고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 하느님의 판단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겉껍데기의 그럴듯한 모습이 아니라 바른 길을 걷고 옳게 사는 것이라는 이사야예언자의 선언이 첫째 독서에서 반복됩니다.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고 있는지 훤히 꿰뚫고 계실 것입니다. 내가 현실에서 거짓된 모습을 통하여 조금이라도 겉꾸밈을 달리하고자해도 하느님의 눈앞을 비켜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느님의 집이 될 수 있는 것이고, 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전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선언은 무서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세상을 판정할 하느님이 아니고 그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완벽함을 내 삶에 드러내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은총을 내리신 하느님은 그 은총을 쉽사리 거두어가시지 않는다는 바오로 사도의 믿음을 기억한다면 실망하는 일보다는 자신을 돌아보고 더 열심히 살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한 여러 가지 잘못된 일들에 따라 말 못하는 자연도 흥분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지니고 살아야 할 자세는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2002년 8월의 하순, 나는 과연 하느님 앞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내 삶을 위한 기도를 하느님께 봉헌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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