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백)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이 제자가 이 일들을 기록한 사람이다. 그의 증언은 참되다.

강론자료

성령강림 대축일-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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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gold] 쪽지 캡슐

2002-05-16 ㅣ No.359

성령 강림 대축일

 

          사도행전 2,1-11 1고린 12,3ㄴ-7.12-13  요한 20,19-23

     2002. 5. 19.

 

주제 : 우리 삶의 새로운 만남을 위해

 

교우 여러분 안녕하셨습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통해서 ‘이별’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했습니다. 지난주일에 기념한 예수님의 승천을 인간적으로 설명할 때 ‘이별’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오늘 기억하는 성령의 강림은 새로운 형태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만남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 말씀드릴 내용을 준비하다가 새롭게 발견한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과 관련된 것입니다. ‘회자정리’는 ‘만난 사람은 헤어지게 돼 있는 것이 정해진 이치’라는 뜻을 가진 불교용어입니다. 그런데 만남이라는 좋은 경험을 하고 그 만남을 통하여 삶의 활기를 얻은 사람들이 그것을 바탕으로 좋은 일을 해 나갈 생각은 접어두고 격언을 사용하는 것처럼 헤어지는 이야기를 먼저 기억하고 사용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헤어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격언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격언처럼 반쪽의 자세만을 갖고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힘이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셨다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이야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올바로 생각하려면, 그분은 승천으로 우리를 떠난 분이라는 것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성령 강림을 통하여 또 다른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할 방법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내용을 함께 살펴야 합니다. 만남과 헤어짐은 연결돼 있는 법이고, 헤어짐은 새로운 만남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이 가르치는 것이고 우리가 하느님을 기억하고 살아가는 힘을 갖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유지하고 드러내고 산다고 말하면서도 하느님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만남과 이별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다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성령 강림 시기는 팔레스티나 땅에 살던 반(半)유목 반(半)농경민족들이 기억하던 축제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다른 곳에 비해서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땅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봉헌하는 축제의 때였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하늘을 향하여 정성을 드리는 일에 하느님도 응답하신다는 것이 성령강림에 우리가 기억할 일입니다. 또 창세기 11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욕심 때문에 분열되었던 마음을 치유하고 새로운 공동체의 형성을 축하해주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입니다. 실제로 성령강림은 부활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계기가 된 교회의 생일(生日)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축하를 받은 사람들이 표현한 것은 놀라움이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갈릴래아 촌동네 사람들인데 우리가 모르는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가 사용하는 외국말을 저 사람들이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들이 갖는 생각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올바른 마음과 자세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세상이 우리를 그냥 놔두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노력에 노력을 더하고 하느님의 힘을 청한다면 그 어려움쯤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겠지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정말로 하느님의 도움을 찾아야 할 때에 하느님을 찾고 거기에서 힘을 얻으려고 하기보다는 세상 전체를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으면서도 자기 생각을 앞세우고 어려움 앞에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우심이 작용할 공간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자신에게 명예가 돌아오고 영광스럽겠는지 우리는 인간의 문제를 잘 압니다. 그 다음 문제는 아는 대로 사는 일입니다. 분열의 모습을 보였던 고린토 교회의 공동체가 제대로 된 모습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전하는 바오로 사도도 자신의 편지에서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방법을 강조합니다. 우리들 각자가 하느님에게서 받은 능력과 재능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그 움직임의 목적이 자기 영광을 자랑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기에,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로서 같은 성령을 받아 일치의 모습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로서 우리 각자가 가진 재능을 발휘하여 조화를 이루고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 쉽지 않은 일이 가능하려면 내가 존경받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자격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사는 일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바꿀 힘으로 먼저 다른 사람들의 죄와 잘못을 용서해줄 것을 권고하십니다.  세상의 변화는 다른 사람이 좋은 일을 먼저 하고 내가 그 뒤를 쫓아서 똑같은 일을 흉내 내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런 용서는 가장 먼저 나에게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하느님도 우리의 행복을 원한다는 것이 말씀드리는 의도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행복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리도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서 용서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사는지 돌이켜봐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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