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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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나가사키 아마쿠사 세계문화유산1: 시공(時空)의 기억과 성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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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3-10-11 ㅣ No.1599

나가사키 아마쿠사 세계문화유산 (1) 시공(時空)의 기억과 성스러움

 

 

1. 일본교회의 역사 및 연구 분야

 

일본 가톨릭교회 역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제1단계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 Xaverius, 方濟各 沙勿, 1506~1552) 신부가 규슈(九州) 가고시마(鹿兒島)에 상륙한 1549년부터 나가사키(長崎)가 ‘작은[小] 로마’로 불릴 정도로 그리스탄1) 문화가 번성했던 시기로, 1614년 도쿠가와(德川) 막부의 금교령으로 막을 내린다. 16세기 아시아 및 일본의 교구는, 1534년 인도 고아, 1557년 인도 코친, 1575년 마카오에 이어, 1588년 일본 분고 후나이(豊後府内) 교구가 설정된다. 당시 일본 국내는 후나이, 시모(下, 長崎九州), 미야코(都, 京都大阪) 3개 지역으로 나뉘어 그리스도교 포교가 전개되었다. 선교사들의 서간2) 등을 종합해 보면, 1610년경 신자 수는 약 40만 명, 당시 일본 추정 인구 약 1,200만 명의 3.3%에 달한다.

 

제2단계는 철저한 금교(禁敎)와 쇄국(鎖國)의 시기로, 선교사 부재 속에 살아남은 그리스탄 후손들이 약 250년간 오랜 잠복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의 전통 풍습과 융합되면서 가톨릭 교리와 전례가 변형된 형태로 계승된 시기다. 이들 잠복 그리스탄의 존재는 일본이 서구 열강에 의해 개국한 후, 신도 재발견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상당수 신자는 다시금 가톨릭교회로 돌아왔다.

 

제3단계는 철저한 금교와 엄격한 쇄국을 거친 후, 1873년 마침내 전국에 설치된 금교 고찰(高札)3)이 철거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이 입국하고 재선교가 시작된 이후 시기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한동안 가톨릭에 대한 박해와 탄압은 계속되었고, 대표적인 사례가 나가사키 우라카미(浦上)의 네 번째 탄압이다. 1889년 메이지 헌법에 의해 마침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이후에도, 침체된 일본의 교세는 좀처럼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일본교회는 16개 교구, 신자 수 약 40만 명 정도로 전체 인구의 0.35%에 불과하다. 현재는 일본인보다 더 많은 숫자의 외국인(필리핀, 남미, 베트남, 한국 등) 신자가 전국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일본교회는 이들과 어떻게 신앙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사목적으로 커다란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러한 역사 흐름과 밀접하게 관련해서 일본교회의 역사 연구 분야도 크게 나눠 보면 세 분야로 구분된다. 첫째는 하비에르 이후 예수회 및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등 서양 선교회가 일본에 파견한 12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선교사의 각종 보고서, 연감, 서간 및 서책 등을 통한 호교적 연구이다. 방대한 이들의 기록을 통해서 1601년 예수회 최초의 일본인 사제가 탄생하였고, 1604년 교구 사제가 서품되었으며, 이후 방인(일본인) 사제도 38명이나 배출되었다. 1610년경 예수회뿐만 아니라 탁발 수도회가 각지에 교회를 건립하면서, 일본 전국에 크고 작은 100여 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포로로 끌려온 조선인 신자의 신앙생활과 순교 복자 13명의 기록도 이들에 의해 증언된 것이다. 둘째는 금교 시기 에도(江戶) 막부의 지독한 박해와 탄압 속에 기록된 막부 권력의 박해 측 기록, 즉 파사(破邪)적 연구이다. 연구 대상도 다양하여, 가령 주요 번(藩)의 박해와 종문개역(宗門改易)을 기록한 호적 장부, 불교 사찰을 이용한 사청제도(寺請制度)의 실태, 매년 정초에 실시된 후미에(踏み繪, 성상 밟기)의 실상, 밀고와 포상 제도,4) 기교(棄敎)와 배교(背敎)를 유도하는 잔인한 고문(拷問)에 관한 연구 등이다. 셋째는 오랜 잠복을 거쳐 재발견된 신도들에 관한 연구이다. 이들 대부분은 가톨릭교회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가톨릭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전통적인 자신들의 신앙을 고수하는 가쿠레(隱)5) 그리스탄들의 신앙생활 전모를 밝히는 연구 분야이다.

 

 

2. 금교기 잠복 그리스탄의 신앙생활

 

고찰이 철폐되고 1889년 메이지 헌법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무렵인 1895년 일본의 교세 통계6)를 보면, 교구 4개, 주교 4명,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 88명, 방인 사제 20명, 신도수 50,302명이다. 이들 신자 대부분은 신도 발견 후 가톨릭교회로 돌아온 나가사키의 잠복 그리스탄 후손들이다. 그러면 앞서 언급한 교회 역사 흐름의 2단계에 해당하는 오랜 금교기 잠복 그리스탄의 신앙생활은 어떻게 유지되었을까?

 

금교령 후 나가사키 치안 감독처의 단속으로 나가사키 지역에서 그리스탄은 점차 사라져 갔다. 1644년에는 마지막까지 잠복해 활동하고 있던 고니시 만쇼(小西 Mancio)7) 신부가 순교하면서, 일본에서 서양 선교사는 물론 방인 사제마저도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탄압과 박해를 피해 산간, 해안 및 도서 지역으로 이주한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콘후라리아(信心會, Confraternitas)’와 ‘미제리코르디아(慈悲組, Misericordia)’로 불리는 신앙 및 생활 공동체를 형성하고, 신자의 상호 협동조직을 자율적으로 운영하면서, 조직적으로 신앙을 계승하였다. 사제가 없더라도 신자 스스로 세례를 주고, 그리스도교 전례 행사를 지키는 등 신앙을 이어가는 ‘잠복 그리스탄’이 생겨났다.

 

잠복 그리스탄의 후손은 나가사키 주변(우라카미, 나가사키의 여러 섬, 소토메[外海] 해안 지역 등)과 히라도(平戶) 서안, 이키츠키시마(生月島) 등지에 많았는데, 서로 격리된 지리적 거리로 인해 같은 잠복 그리스탄이라 하더라도 미묘하게 신앙 형태나 습속에 차이가 있었다. 나가사키 주변은 전설적인 일본인 수도사 바스찬이 전한 것으로 알려진 바스찬력(교회력)과 7세대가 지나면 신앙의 자유를 다시 찾을 것이라는 바스찬의 예언을 신앙생활의 버팀목으로 삼았다. 게다가 에도 시대 후기에는 소토메의 잠복 그리스탄 약 3천 명이 막부의 허가를 받고, 노동력이 부족한 고토 열도(五島列島)의 여러 섬으로 이주하는 등 각지에서 잠복 그리스탄의 신앙을 이어갔다. 초기에는 신자들 간에도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하고 서로의 신앙을 물어볼 수조차 없는 상황에 처했지만, 신앙의 불이 꺼질 것을 우려한 잠복 그리스탄 조직의 교회 지도자들은 서로 협력해서, 촌락 사람들을 단결시키고, 그리스탄 신앙을 유지하는 지하조직을 계승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잠복 그리스탄의 신앙 조직은 나가사키현 이외에 아마쿠사(天草)나 이마무라(今村)에도 존재했다. 신앙 조직은 지역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된 기본적인 틀은 신앙생활의 기반이 되는 그리스도교력의 축일을 관리하고 전례력을 결정하는 ‘쵸가타(帳方)’를 리더로 해서, 세례를 주는 ‘미즈가타(水方)’, 그것을 일반 신자에게 전달하고 알리는 ‘기키야쿠(聞役)’, 통상 ‘지지야쿠(爺役)’라고 부르는 이 중심 3역이 신자 조직을 운영하였다. 우라카미 지역을 예로 보면, 쵸가타는 우라카미 지역 전체에 한 사람, 미즈가타와 기키야쿠는 각 마을에 한 사람씩 존재했으며, 쵸가타는 보통 한 집안에서 대를 이어 세습적으로 지도자 역할을 계승해 나갔다. 일반 신자는 소토메 시츠(出津)에서는 ‘쵸나이(帳内)’, 구로사키(黒崎)에서는 ‘몬도(門徒)’라고 호칭하는 등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신앙의 성구는 십자가, 메다이,8) 마리아 관음이나 난도가미(納戶神)9) 등으로, 성탄절이나 부활절 등 축일에는 신자들이 모여 오라쇼(oratio)10)를 바친다. 오늘날의 「주님의 기도」와 「아베 마리아」 이외에도 성상을 밟는 후미에를 하거나, 본의 아니게 사찰 참배를 한 후에는 ‘회개의 오라쇼’로 용서를 구한다. 오라쇼 형식도 히라도와 소토메 등 지역에 따라 차이가 생겨났다. 이들은 사찰에서 호적을 관리하는 사청(寺請) 제도에 따라 표면적으로는 특정 사찰의 신자[檀家]로 소속되어 있지만, 지역에 따라 이들 사찰과의 관계와 방식도 달랐다. 가령, 이키츠키시마나 히라도 서안은 사람이 죽을 경우에 불교식 장례를 치르지만, 나중에 자신들만의 형식으로 따로 그리스탄의 장례를 다시 치른다. 한편 나가사키의 우라카미에서 소토메, 고토, 아마쿠사 등지에서는 불교식 장례와 병행하여 (혹은 승려가 돌아간 후) 불경(佛經)의 효력을 없애는 소위 교케시(經消, 경 지우기) 의식을 실행하기도 하였다.

 

신도 발견 이후 다카하마(高浜村), 오오에(大江), 이마토미(今富) 등 촌락으로 구성된 아마쿠사 지역의 잠복 그리스탄의 예를 보면, 4개 촌락의 잠복 그리스탄은 총 지역 인구 10,669명 중 5,205명으로 49%를 점하고, 특히 다카하마는 2,368명 중 1,710명으로 72%를 차지한다.11) 우라카미 지역에서도 마을 사람의 과반 이상이 잠복 그리스탄이었는데, 나머지는 불교도로 함께 섞여 생활하고 있었고, 그중에는 이교도와 한 가족인 경우도 있었다. 이 때문에 때로는 그리스탄이 적발되는데, 이를 ‘무너질 붕괴를 의미하는 구즈레(崩, 탄압)’라고 한다. 1859년 우라카미 세 번째 붕괴 탄압에서는, 제7대 쵸가타 미게르 요시쿠라(吉藏)가 붙잡히면서, ‘한타 마리야(마리아 관음)’와 ‘이낫쇼(예수회 창시자 이냐시오 로욜라의 청동 불상)’ 등이 압수되었고, 요시쿠라는 옥사하였다. 이후 줄줄이 여러 마을의 미즈가타 등 교회 지도자가 체포되어 옥사하였고, 그 결과 우라카미 지역의 쵸가타는 소멸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과정 속에서도, 잠복 그리스탄의 신앙 형태는 무너지지 않고 이어졌다.

 

한편 가쿠레(隱) 그리스탄은 신도 발견 이후에도 가톨릭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전통적으로 토착화된 민속 신앙의 형태를 유지한 신자 집단인데, 근·현대 농어촌의 인구 감소와 고령화로 가쿠레 그리스탄 조직을 승계하는 사람이 감소하고, 조직을 해산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2000년경에는 이키츠키시마 269호, 소토메(니시시츠, 시모쿠로사키) 57호, 고토 59호까지 감소했다는 조사 기록이 있다. 2017년 시점에서는 소토메에서는 구로사키와 시츠에 각 1개 그룹씩 2개 조직만이 남아 있으며, 전부 합쳐도 신자는 50호 정도에 불과하여, 오늘날 실제로 전례 행사에 참가하는 가쿠레 그리스탄 가구는 20호도 되지 않는 실정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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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6세기 일본교회 역사에서 그리스도교인을 ‘기리시탄(キリシタン)’으로 표기하고 학술용어로 통용하고 있다. 그 유래는 포르투갈어 ‘Cristão(=Christan)’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필자는 「기리시탄」이라는 용어가 단순히 일본어 가나에서 ‘으’ 표기와 발음이 없어서 생긴 현상이며, 특히 박해와 탄압의 금교 시기 ‘切死丹’, ‘切支丹’, ‘鬼理死丹’, ‘鬼理至丹’ 등 절단 · 죽음 · 귀신 등과 같은 파사적(破邪的)이고 부정적인 한자를 차용해서 표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한국어로는 ‘그리스탄’이라고 표기한다.

 

2) 「가스팔 비레라 신부 서한」, 루이스 프로이스(Luís Fróis) 저, 마츠다 기이치(松田毅一) · 가와사키 모모타(川崎桃太) 역, 『일본사』 10, 中央公論新社 ; 고노이 다카시(五野井隆史) 저, 이원순 역, 『일본 그리스도교사』,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 ; 나가사키 처치 트러스트(NCT), 『탐방, 나가사키의 교회군』 등 참조.

 

3) 에도 시대의 법령 포고 게시판. 일본 전국 주요 도로의 교통왕래가 빈번한 길목에 감시소(關所)와 함께 고찰이 설치되었다.

 

4) 서양 선교사(바테렌), 수도사(이루만), 전도사(도주쿠) 등 직급에 따라 현상금에 차등을 두고, 바테렌의 경우 금 300~500매(현재 가치로 3~5억 원 정도)의 막대한 포상금을 지급하였다. 아리마(有馬) 세미나리오 1기생으로 마카오에 유학한 일본인 최초의 방인 사제 기무라(木村) 세바스티안(1565~1622) 신부는, 조선인 여신도의 밀고로 체포되어, 겐나(元和) 대순교 때 화형으로 순교했고, 1867년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5) 가쿠레(隱) 그리스탄은 신도 재발견 후에도 여전히 가톨릭교회로 돌아오지 않고, 전통문화와 융합된 조상숭배와 토속적으로 변형된 신앙 형태를 고수하고, 이를 유지해 온 잠복 그리스탄의 집단을 칭한다.

 

6) 다카기 가즈오(高木一雄), 『메이지 가톨릭교회사』 2, 敎文館, 2008.

 

7) 그리스탄 영주로 임진왜란 때 제1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손자.

 

8) 예수상이나 성모상이 새겨진 메달(medal)을 일본교회에서는 이렇게 불렀다.

 

9) 가옥의 다락방 난도(納戶)에 모셔진 신. 통상은 에비스(惠比須)나 다이코쿠(大黒) 등 불상이나 토속신이 많지만, 잠복 그리스탄의 경우는 성상 및 성화(聖画像)를 숨기고 모셨다.

 

10) 라틴어 기도문으로, 구로사키에서는 60종류가 확인됨.

 

11) 「아마쿠사 잠복 그리스탄 종문 처리 전말」 등의 자료 참조.

 

[교회와 역사, 2023년 9월호, 글 이세훈 토마스 아퀴나스(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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