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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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레지오의 영성: 공짜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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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10-06 ㅣ No.831

[레지오 영성] 공짜는 없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나라의 왕이 백성들에게 모두 잘살 수 있는 지식을 가르쳐주고 싶었답니다. 하여, 학자들에게 ‘세상의 모든 지식을 총망라하여 백성들이 다 잘살 수 있는 비결을 담은 책을 만들라’는 명을 내렸지요. 학자들은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담은 책을 열두 권으로 정리하여 왕에게 바쳤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도 힘든데 독서 할 시간을 내기는 더 힘든 백성들에게 너무 많은 분량이었겠지요. 왕의 명령으로 한 권으로 줄였지만, 그것마저 백성들에게는 무리였습니다. 왕은 다시 그 모든 내용을 한 줄로 줄이라고 명령을 내렸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학자들이 내놓은 마지막 한 줄은 ‘천하막무료(天下莫無料)’ 즉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인생에는 공짜가 없지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처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이 삶의 이치입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면 값을 지급해야 하고, 열심히 땀 흘려 일해야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의 마음속에는 쉽고 편하게 내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심보가 숨어있습니다.

 

천주교 신앙을 참된 진리로 받아들였던 선조들에게 신앙은 공짜로 얻는 싸구려 은총이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바쳐 지켜야 할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고, 자손들에게도 반드시 물려주어야 할 귀한 유산이었으며, 기회가 되는 대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야 할 값진 선물이었습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삶의 터전을 버리고 함께 모여 교우촌을 이루고 산 신앙의 선조들은 서로에게 부모, 형제, 자매가 되었고, 죽음의 칼날 아래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었던 데는 교우촌을 통해 하늘나라의 삶을 지상에서 살았던 수덕생활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당시 선교 사제들은 교우촌의 신자들이 은총에 응답하는 수덕생활로 마치 수도원과 같은 삶을 살아가며, 가진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복음을 생활로 실천한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봤다고 증언했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과 보다 깊은 일치에 도달하는 신비생활과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을 닦고 생활을 성화하는 수덕생활이 함께 해야만 은총이 열매를 맺습니다. 순교자들이 살아냈던 참된 믿음살이는 하느님의 은총을 귀한 선물로 알고 받아들이는 신비생활과 그 선물을 주신 분의 뜻을 알고 선물을 귀하게 사용하는 수덕생활이 함께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지요.

 

 

싸구려 은총

 

오래전에 전 국민의 인기를 휩쓴 영화 ‘투캅스’에 나오는 주인공 조 형사는 온갖 비리로 경찰 생활을 이어가는 막장인생입니다. 그는 아침마다 새벽기도회에 나가 눈물로 통성기도를 바치는 열렬한 신자이지만, 교회를 나서자마자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의 장사꾼을 윽박질러 돈을 뜯고, 자기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면 물불을 안 가리고 비리를 일삼으며 살아갑니다. 신앙과 삶이 철저히 분리된 이중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재미나게 보여주지만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에 만연한 위선과 세속화된 신앙을 비웃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지금 교회가 겪고 있는 신앙의 위기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상으로 주어진다는 생각과 그 은총에 합당한 응답을 하지 않고도 끝까지 누릴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은총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목숨을 대가로 치르고 마련해주신 복되고 귀한 선물입니다.

 

이 은총은 믿는 이들에게 베풀어지는 무상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 안에는 우리의 행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깊은 사랑이 응혈되어 있습니다. 수덕생활은 이 사랑의 신비에 감동하고 감사하며 기꺼이 삶의 방향과 태도를 전환하는 응답의 여정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세속화되면 하느님 은총의 무상성을 잘못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지게 되지요. 교회에 적만 두고 있으면 세상에 나가 어떤 처세를 하고 살아도 신앙의 축복을 획득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런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은총을 싸구려 물건처럼 취급하며 교회는 싸구려 은총을 사고파는 장터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처럼 싸구려 은총은 그 은총을 받은 사람들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고 멋대로 말하면서 믿음과 삶을 분리합니다.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회개하기보다는 죄와 타협하고 정당화합니다. 십자가의 은총을 빙자하여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하느님이 다 용서해 주시니 실컷 세속적인 재미를 즐기고 나중에 고해성사 한 번이면 다 해결되니 참 편하고 쉬운 신앙이지요. 구원이 보장되었으니 날마다 말씀과 기도로 성화의 삶을 살려는 의지도, 실천도 없는 형식적이고 나약한 신앙 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이들은 싸구려 연대감으로 뭉친 세속적인 패거리가 되어 교회를 자신들의 놀이터로 만들고 맙니다.

 

 

은총의 탈렌트

 

복음에 나오는 ‘탈렌트의 비유’(마태 25,14-30)는 하느님의 은총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게 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 비유는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탈렌트를 맡기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탈렌트’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종들에 대한 주인의 ‘신뢰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에 따른 소명도 함께 받습니다. 선물에는 그 선물을 주신 분의 마음과 뜻이 담겨있습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선물의 값어치만을 셈한다면 선물을 주신 분의 마음과 뜻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주인은 돌아와 셈을 할 때 선물에 따라서 셈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어떻게 썼는지, 곧 그 소명을 얼마나 이루었는가에 따라 더 큰 상을 베풀어 줍니다.

 

주인은 자신이 맡긴 탈렌트를 잘 사용하여 두 배로 늘려 바친 종에게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이라고 칭찬하며 “네가 작은 일에 충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맡긴 탈렌트를 땅에 묻어두었던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짖으며 “저 쓸모없는 종은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으로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며 그 은총에 합당한 응답을 하는 신앙생활은 더욱 성숙한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약속입니다.

 

레지오 마리애는 교회 안에서 많은 단원들을 거느린 영향력 있는 단체로 성장했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레지오 마리애에게 맡겨주신 탈렌트인 ‘성화의 은총’은 과연 어떤 결실을 맺고 있는지 성찰해야 할 때입니다. 수덕생활이 없는 신앙생활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처럼 쓸모없는 신앙으로 땅만 차지하거나, 여물기도 전에 바람만 불어도 땅에 떨어져 버리는 낙과와 같은 신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0월호, 김영수 헨리코 신부(전주교구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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