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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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공동체 갈등 상담: 갈등해소를 위한 주님의 죽음과 부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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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2-07-01 ㅣ No.152

[공동체 갈등 상담] 갈등해소를 위한 주님의 죽음과 부활 묵상


사순 시기가 시작되면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은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기 시작합니다. 간혹 지나치게 열심한 신자들은 주님과 같은 고통을 느끼겠다고 채찍으로 자기 몸을 때리기도 하고 십자가에 매달리기도 합니다. 영화배우 멜 깁슨이 제작한 ‘그리스도의 수난(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이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은 주님 수난의 처절함에 대해 진저리칠 정도로 마음 아파하고 그런 고통을 공감하는 것이 수난시기의 묵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우리가 놓치는 것들도 적지 아니합니다. 초점을 주님의 고통에만 두어 그분의 죽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요. 주님의 죽음은 행복한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강렬한 메시지를 줍니다. 행복한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나의 죽음에 대하여 많은 이가 아쉬워하고 그리워한다면 가장 행복한 죽음이겠지요. 그렇게 본다면 주님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으신 분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보통 애도기간이 6개월 정도라고 합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기억 속에서 점차 사라져갑니다. 그런데 주님의 죽음은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하고 애도합니다. 6개월이 아니라 무려 2,000년이 지났는데도 말입니다. 이렇게 오래도록 기억되고 세월이 지나면서 더 그 이름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가는 분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이것을 묵상하면 주님의 죽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이라면 이러한 관점에서 자신을 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본당마다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내가 옳네, 네가 그르네 하면서 속상해하기도 합니다. 마치 그런 일들이 아주 중요한 듯이...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죽고 난 후에 나를 기억해주고 안타까워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는가이겠지요. 본당에서 아무리 큰소리를 내고 사람들을 휘어잡았어도, 죽고 난 후에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다면 그 죽음은 가장 불행한 죽음일 것입니다. 그래서 안팎으로 시끄러울 때일수록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자리 잡기를 다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만, 더 중요한 점은 내가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나의 부활을 반겨줄 것인가입니다. 주님께서 은총을 주셔서 부활한다 하더라도 갈 곳이 없으면 소위 부활노숙자가 되고 말겠지요.

어떤 집에 아주 성격이 고약한 남편이 있었습니다. 술만 먹으면 주정을 부리고 살림을 때려 부수어서 아내가 참다못해 남편을 데려가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여전하여서 주님께 따졌더니 남편의 기도가 더 세서 안 된다고 말씀하셨답니다. 화가 난 아내가 기도의 양을 두 배로 늘렸습니다. 그리고 그 보람 때문인지 남편이 죽었습니다. 아내는 행여 남편이 살아날세라 관을 대못으로 촘촘히 박고 매장을 하였는데 어찌된 일인지 사흘 만에 남편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아내를 다시 괴롭혔습니다. 이번에는 아내가 기도를 열 배를 더 해서 남편을 보내고는 관을 아예 거꾸로 땅바닥에 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남편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기가 막힌 아내가 주님께 어찌된 일이냐고 따지자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나도 네 남편을 한 방에 보내고 싶은데 그 녀석이 성모님과 계약을 맺었느니라. 자기가 성모성당을 지어드릴 터이니 세 번 살아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제 한 번 더 남았느니라.” 그러자 아내가 울부짖었습니다. “안 됩니다, 주님. 이제 제가 맞아 죽을 차례입니다.” 그러자 고민하던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알았다. 성모님께서 저기서 무슨 소리를 하나 엿듣고 계시니 내가 메모를 하나 주마.” 하고는 메모를 주시는데 거기에는 ‘092’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 내용을 아무리 보아도 알 수가 없어서 머리 아픈 김에 이제 말문이 트인 손주에게 ‘옛다, 너나 봐라.’ 하고 주었는데 손주 녀석이 혀 짧은 소리로 ‘공구리 공구리’ 하더랍니다. ‘아, 콘크리트를 치라는 말이구나!’ 하고는 세 번째로 남편이 죽자 콘크리트를 쳐서 다시는 부활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하심을 죽자고 믿고, 우리의 부활에 대하여 아무리 깊은 믿음을 가져도,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부활한다고 치더라도 내가 살아나는 것을 아무도 반기지 않는다면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처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가족만이라도, 적어도 내가 다니는 성당 식구들만이라도 나의 죽음을 그리워하고 다시 살아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다면 성공한 인생이고 진정으로 행복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처럼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고 주님의 부활처럼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기다리는 부활의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위해 기도해줄 사람들을 가능한 한 많이 모아야 합니다. 기도를 해주건 밥을 사건 이런 저런 방법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서 그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본당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자신이 마치 본당의 주인인양 행세하면서 신자들뿐만 아니라 신부나 수도자에게까지 심리적 행패를 부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개 성격적인 결함이 심한 분들인데, 이런 분들은 내가 죽고 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울어줄까, 내가 부활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겨줄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콘크리트 친 무덤 안에서 생매장 부활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소공동체모임길잡이, 2012년 7-8월호, 홍성남 신부(서울대교구 가좌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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