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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임인덕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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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6-05-29 ㅣ No.934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임인덕 신부 (상)


선교사 꿈꾸며 스무 살 때 수도회에 입회

 

 

- 임인덕 신부.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Heinrich Sebastian Rotler). 세례명, 수도명, 성 순이다. 한국명은 임인덕이다. 가족들은 그를 세례명의 애칭인 ‘하이니’라고 부른다. 1935년 독일 뉘른베르크 생이다. 스무 살 때 선교사를 꿈꾸면서 선교베네딕도회 오틸리아 연합회 소속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 입회해 수도자가 되었다. 뷔르츠부르크와 뮌헨에서 신학과 종교심리학을 공부한 후 1965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1966년 한국으로 파견되어 46년간 본당 사목, 청소년 교육, 한센인 사목, 출판과 영화를 중심으로 문화 복음화에 힘썼다. 2013년 본국 수도원에서 귀천하였다.

 

필자는 열두 해 동안 분도출판사 책임자로 일했다. 임기 내내 선임자인 임인덕 신부님께 묻고 들었다. 가르침도 받았지만, 그의 일도 힘껏 도왔다. 열 차례 독일 여행을 함께 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 전시회 참석이 목적이었다. 매번 전시회장 가까이에 살았던 그의 막내 여동생 모니카 집에 묵었다. 그녀의 음식 솜씨는 일품이다. 매부 에크하르트는 의사였는데, 늘 옥토버페스트 비어를 준비해놓고 우리를 기다렸다. 체류 기간 내내 저녁마다 다락방 벽난로 앞에서 얘기꽃을 피웠다. 그의 가족력을 이해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무도 임인덕 신부를 영성가로 인식하지 않는다. 분명 그에게 영성이 있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 오랜 시간과 교류가 필요했다. 대화와 목격으로 알게 된 그에 대해 영성, 출판, 영화로 나누어 세 차례 소개하고 싶다. 영광스런 일이다.

 

 

그는 전달하는 사람이다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놀라운 통 큰 기획이다. 문득 이 기획에 ‘임인덕’이라는 이름을 올리는 것을 잠시 주저해본다. 다른 거장들은 모두 출중한 1차 창작자이나 그는 아닌 연유다. 그는 책을 직접 쓰지 않았고, 영화도 직접 찍지 않았다. 그는 그 시대가 주는 소통 도구를 활용한 충실한 전달자였다. 문화 소개꾼이다. 이 점을 전제해야 그의 참모습이 보인다. 그는 스스로를 전달자라고 했다. 철저히 전달하는 역할만 했다.

 

“나는 예수님의 말씀과, 자유와 사랑과 용서라는 그분의 가치관을 전하고자 이 땅에 왔습니다. 선교사는 주님의 말씀과 복음의 가치관을 전달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의 짧은 두 문장 속에 그의 전 생애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복음적 가치만을 전달한 그는 분명 복음적 영성가일 터이다.

 

 

그는 집념하는 사람이다

 

그를 기억하면 우선 집념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어떤 고통과 비난도 감수했다. 그의 삶은 불타는 집념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신앙과 신념으로 충만한 집념이다. 수도원 안에서도 황소 같은 그의 집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한 선교사의 거룩한 사랑의 집념이다. 집념도 영성이다.

 

 

그는 응해주는 사람이다

 

그는 늘 바쁘게 살았어도 도움을 청하는 이의 말을 들어주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사치다. 그의 사무실 문 앞에 놓인 반쯤 비운 중국집 볶음밥 접시와 그의 낡은 옷이 이를 증명한다. 도움을 청하는 이는 빈손으로 떠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가난한 이웃들의 딱한 사정을 언제나 내치지 않았다. 사랑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듯, 임 신부가 있는 곳에 그 어떤 해결책이 있었다. 가난한 이, 쫓기는 이, 억압받는 이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내주었다. 한 독일인 동년배 수도 사제는 말한다.

 

“임 신부는 거룩한 사람입니다. 평생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지만,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은혜로운 일입니다.”

 

늘 응해주는 그의 삶의 방식은 예수님의 마음을 꼭 닮아 있다. 그의 장상이 말했다.

 

“일이 너무 많으시니 출판 일과 한센인 사목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그는 한센인과 함께 하였다. 응해주는 영성이다.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에게 좌와 우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에겐 수도자와 사제와 선교사의 차이가 없다. 그는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자신의 소명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에게 유식한 책과 의미 깊은 영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와 인간을 만나게 하는 가교 역할만 한다. 사제 복장을 한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의 기도는 남에게 드러나지 않는 비가시적 특성이 있다. 그에게 활동과 기도는 하나의 통합된 한 뭉치의 ‘하느님의 일’이었다. 그는 법과 규칙과 내규 등 모든 법제적인 것은 오직 사랑 안에서만 의미가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참된 자유는 이런 것이다. 자유의 영성가 임인덕 신부이다.

* 선지훈 신부(왜관본당 주임)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소속 수도사제이다. 대구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에서 신학 석사를 취득했다. 1997년 사제품을 받았고 분도출판사 책임자로 활동한 바 있다. [가톨릭신문, 2016년 5월 29일, 선지훈 신부(왜관본당 주임)]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임인덕 신부 (중)

 

출판을 문화로 승화… 책 속에 혼을 실어

 

 

- 1977년 여름 무렵 일에 파묻혀 있다. 출판사와 시청각실 일을 한꺼번에 맡아 보면서 열정적으로 일하던 때의 모습.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분도출판사 3대 사장 임인덕 신부. 그는 출판이 진정 문화가 되려면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를 보여 준 출판인이다. 1971년부터 22년간 400여 권의 양서를 출간하였다. 주된 책무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최신 연구 업적 소개였으나, 여기에 머물지 않고 넓은 출판 영역을 개척했다. 아무도 그를 사상가로 보지 않지만, 출판에 관한 한 그는 실천하는 사상가였다. 범접할 수 없는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는 뜻이다. 그와 나눈 숱한 대화 내용을 알뜰히 저장해 둔 ‘기억 창고’에서 7가지 주제를 불러내어 그가 책으로 쌓은 중후한 ‘서탑’을 조심스럽게 요리조리 조명해 본다. 일종의 진지하고 귀한 탑돌이 일진데, 그를 기리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쓴다.

 

 

대지평을 구축하다

 

“하이니(애칭), 좋은 책은 무엇입니까?”

 

“좋은 책이란 사람을 착하게 만드는 모든 책입니다.”

 

그는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면 어떤 영역의 책이라도 낼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문학이든 음악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영화든 철학과 신학이든 상관없이 책을 냈다. 그의 출판 사상의 근간이다. 출판이 교육과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믿었던 그는 도무지 교조적이지 않았다. 저자나 역자 선정도 초종파적이었다. 거장의 출판 지평이 고작 짬뽕 아냐? 아님 비빕밥! 때로 둘 다 맛이 좋다. 「분도우화」, 「봉인된 시간」, 「민중의 길」, 「미세레레」, 「종교 박람회」, 「상처입은 치유자」 등을 꼽고 싶다.

 

 

발품을 팔다

 

“하이니, 책 선정은 어떻게 합니까?”

 

“가능한 모든 정보를 접해야 합니다.”

 

결국 품을 파는 일이었다. 발품이다. 그는 매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시회를 누비며 신작 도서 목록을 닥치는 대로 가방에 주워 담았다. 꼼꼼히 죄다 읽었다고 했다. 그는 속독 수준의 독서광이다. 판단이 빨랐던 30대 중반의 젊은 출판인은 시대적 흐름의 맥을 짚을 줄 알았다. 도서전시회는 신작 도서의 현물 전시가 꽃인데, 중심 자리에 전시된 책뿐 아니라 책장 맨 밑에서도 보물을 찾아냈다. 「꽃들에게 희망을」,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리스도교 이전의 예수」 등을 이렇게 찾았다고 했다. 사상가 운운하더니 고작 발품? 느린 시대의 우직한 행각이었다.

 

 

주춧돌을 놓다

 

“하이니, 교회 토착화는 무엇입니까?”

 

“원문에 충실한 번역 성경과 다양한 성경 해설서와 성경 시대를 잇는 교부 문헌과 분야별 신학개론서와 열린 시각의 교리서가 먼저 나와야 합니다. 그 후에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춧돌을 먼저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각종 논문에서 그가 낸 책의 인용 빈도가 이를 증명한다. 기조는 독일의 헤르더와 콜함머, 프랑스 도미니코회 세르, 미국의 오르비스 출판사와 많이 비슷하다. 「200주년 신약성서」, 「교부문헌총서」, 「신학총서」, 「아시아신학총서」, 「종교학총서」,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 「예수의 비유」, 「가톨릭 신앙 입문-화란 교리서」, 「하나인 믿음」 등을 들고 싶다. 초석은 대개 무겁다. 병간호하며 들어봤는데 그의 몸무게가 장난 아니던데, 그가 놓은 초석들은 더 묵직하다.

 

- 첫 미사 후 축하연에 함께한 정양모 신부. 당시 정 신부는 뷔르츠부르크대학의 슈낙켄부르크 교수 밑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던 명민한 신학도였다. 훗날 한국에서 평생 동안 이어진 정 신부와 임인덕 신부의 우정은 뷔르츠부르크에서 시작됐던 것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시대 징표를 읽다

 

“하이니! 우리 책이 너무 빠르다고들 합니다?”

 

“아닙니다. 그때가 바로 때입니다.”

 

징표 읽기는 그에 대한 오해가 많은 주제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동향 파악의 선점이다. 일종의 이정표 역할을 자임하는 일이다. 시의성을 충족시키면, 영향사적 결과가 좋다는 뜻이다. 또 다른 뜻의 징표 읽기는 시대 참여다. 그의 시대는 7, 80년대인데, ‘지금-여기’가 그에게 소중했다. 정보기관 사람과 임신부의 대화다. “신부님, 책이 어둡습니다.” “안 그래도 인쇄소에 말해 좀 밝게 찍으라고 할 참이었습니다.” 유머러스? 능구렁이! 그가 낸 첫 책인 「성난 70년대」, 「해방신학」, 「제3의 인생」, 「어떤 정치적 인간의 초상」을 소개한다.

 

 

기조를 일관하다

 

“하이니, 버스터미널에 물건 찾아오는 일까지 하십니까?”

 

“누구든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됩니다.”

 

이 주제에도 두 가지 뜻이 있다. 쇠를 만드는 세 과정을 모두 갖춘 제철소를 일관제철소라고 부른다. 그는 이를테면 ‘일관출판사’를 구축하였다. 그는 기획, 번역, 편집, 디자인, 인쇄, 홍보, 판매 등 모든 과정을 챙겼다. 또 다른 의미는? 그의 출판 방향이 한결같았다는 점이다. 결코 즉흥적이지 않았다. 「분도소책」 시리즈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완벽을 추구하다

 

“하이니, 책 만드는데, 왜 이리 오래 걸립니까?”

 

“그건 편집부에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들의 대답. “그렇게 하면 우리가 욕먹습니다.” 빨리 끝내라는 독촉에 대한 편집부의 입장은 항상 ‘끝나야 끝난다’였다. 그는 편집부의 뜻을 존중했다. 일종의 방조다. “책은 분도가 잘 만들지.” 안팎의 평판이었다. 당시 두루 분도에서 책을 내고 싶어 했다.

 

 

결국 사람이었다

 

“하이니, 인복이 많습니다?”

 

“진실하게 다가가면 됩니다.”

 

그는 프랑스 갈리마르사(Librairie Gallimard)에는 수 겹의 조건그룹이 있다고 했다.

 

그는 사람을 귀히 여겼다. 꼽는다면, 역저자 권정생, 김영무, 장익, 정양모, 최민식과 편집자 김윤주, 정한교가 그의 친구들이다. 그는 사람들이 무시해도 이용해도 배반해도 그들을 아낀다. 끝까지 지켜준다. 아는지 모르는지 내색이 통 없다. 멍청이 아냐? 글쎄? 고술 걸!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신비로웠다.

 

그는 책 속에 혼을 담은 출판인이다. 아직도 유통되고 있는 그가 낸 책을 보라. 그가 책으로 쌓은 거탑은 ‘르네상스’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결코 순진하지 않은 영민한 출판인이었다.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5일, 선지훈 신부(왜관본당 주임)]

 

 

[한국 가톨릭문화의 거장들] 임인덕 신부 (하)

 

“예수님은 영화감독으로 메시지 전하지 않을까”

 

 

- 스튜디오에서 영화 편집 과정을 확인하고 있다. 원작 선정에서부터 번역, 제작, 홍보, 유통, 재정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과정도 임 신부의 손을 거치지 않은 곳이 없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영화인, 임인덕 신부는 빼어난 영상미와 가치로운 내용을 겸비한 작품만 선정하는 이로 유명하다. 여기에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암시적 여운이 신묘하게 담긴 작품이라면 더욱 최상이다. 한 30년 전쯤,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의 영화감독 마르틴 신부가 내한해 한국 순교자에 대한 영화를 찍었다. 공동작업을 했던 그는 친구 마르틴 신부가 촬영한 필름을 사장시켰다. 편집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추구한 ‘영화적 가치’를 충족하지 못했던 것 같다. 누가 그의 영화관을 요약해 보라면, ‘자각적 여운과 암시적 감각에의 집착’이라고 즉답하겠다. 아무도 그를 철학자로 인지하지 않지만, 그는 시류 앞에 꼼짝도 없는 ‘영화철학자’였다. 그는 이론과 실무와 감각을 철학적으로 집적한 영화인이었다. 어찌 그가 우리에게 왔을까? 더듬어 본다.

 

 

천생 이야기꾼

 

이야기를 자산으로 쳐주는 시대다. 삶에서도 이야기는 참 소중하다. 그는 준비 없이 이야기를 풀 수 있는 ‘천생 이야기꾼’이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시작된 독서의 산물이다. 어린 동생들과 그가 만난 학생들이 일차 수혜자들이었다. 은연중에 비유적으로 변하는 그의 이야기는 전혀 교도적이지 않다. 이야기가 그를 만들었다. 그의 마음에 수록된 이야기들이 좋은 시나리오를 찾아주었다. 그가 출시한 아동과 청소년 대상물, ‘프레데릭 백의 선물’, ‘핑크트헨과 안톤’, ‘하늘을 나는 교실’, ‘야생닭 클럽 I II’, ‘쌍둥이 찰리와 루이제’, ‘하얀 꼬마곰 라스’, ‘잊혀진 장난감’, ‘닥터 코르작’ 등은 한 이야기꾼의 삶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문화교육도시 뮌헨

 

뮌헨은 영화와 그를 맺어준 결정적인 곳이다. 거기서 종교심리학과 교리교수법을 연구했다. 당시 수도자들은 수도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는데, 대학 뒤편 어느 가정집 베란다에 수도복이 휘날렸다. 고모 집에 걸린 그의 수도복이다. 그의 시절을 단적으로 시사하는 장면이다. 그때 그는 영화 포럼에 참여하며 수많은 영화와 감독과 배우를 만났고 마침내 하느님의 부재와 침묵을 담은 영화, 잉마르 베리만의 ‘침묵’을 보았다. 신학이 전하지 못하는 메시지를 영화는 전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가 출시한 베리만의 ‘일곱 번째 봉인’, ‘산딸기’, ‘침묵’, 펠리니의 ‘길’ 등이 그 시절에 그가 접한 영화라는 사실은 축복이다, 그에게 우리에게.

 

- 세계 가톨릭 미디어 총회 참석차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임인덕 신부. 1974년. 임 신부는 다른 아시아 나라들에서 좋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이 점점 사라져 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의 사명감을 더욱 굳건히 하곤 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제공.

 

 

최초의 이름, 시청각실

 

안팎으로 다들 그냥 ‘시청각실’로 불렀다. 이 이름은 그의 총체적인 시청각 작업을 대변한다. 정확히 44년 동안 이어진 결실들을 나열해 본다. 융판화(35종), 슬라이드 필름(120여 종), 사진말(총 9집), 음악 테이프(소노룩스 코리아 130여 종), 이콘과 성물(40여 종), 비디오물(100여 편) 등이다. 참으로 놀라운 업적이다. 그림, 음악, 사진, 성화, 슬라이드 등을 총망라하는 그의 시청각 작업은 영화로 최종 귀결됐다. ‘사계절의 사나이’, ‘나자렛 예수’, ‘찰리 채플린’ 등으로 기억되는 16㎜ 영화 상영과 비디오 제작 작업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다. ‘겨울 빛’, ‘십계’, ‘거울’, ‘잠입자’, ‘잔다르크’, ‘어머니와 아들’, ‘단스’ 등 거장들의 작품을 소복하게 소개했다. 그는 영화가 주는 종교적 체험의 의미에 주목하며 작품을 선정했다.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그에게 들어봐야 한다. 주옥같은 그의 조각 말들을 모아본다.

 

“좋은 영화는 사람의 가치관을 변하게 합니다. 종교 영화가 아니더라도 좋은 영화는 인간의 품위, 삶과 죽음, 구원, 올바른 가치관, 양심, 평화, 인권 등의 메시지와 영성을 충분히 발전하게 해줍니다. 좋은 영화는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감춰진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이 매력적입니다. 최상의 영화는 그저 암시만 줄 뿐 정곡을 찌르되 가르치려 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작가주의 영화와 예술영화는 굳이 신앙이라든지 신을 주제로 삼지 않고도 종교적 체험에 가치 있는 기여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시대에 오신다면 분명 영화감독으로서 메시지를 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쉽고 편안한 비유들로 말씀하셨습니다. 영화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업주의에 물든 영화, 폭력을 담고 있는 영화는 그런 역할을 절대 할 수 없습니다.”

 

- 2005년 ‘시네마 천국을 향한 순례, 임인덕 신부의 영화 사목을 기리며’ 축하식에서 당시 주교회의 매스컴위원장 최덕기 주교가 임 신부에게 공로패를 전달하고 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그를 기리는 묘안들

 

필자가 사목하고 있는 왜관본당 교육관 보수 공사가 완료됐다. 이참에 문화관으로 개칭하고 강당을 ‘준영화관’으로 꾸몄다. 바닥은 원목, 벽과 천정은 고급 흡음재로 마감했다. 합당한 음향 시설도 갖췄다. ‘월례영화포럼’을 준비하고 있다. 임인덕 신부가 아꼈던 영화, ‘파리 텍사스’가 첫 상영물로 정해져 있다. 그의 사역을 잇는 신나는 일이다.

 

왜관 수도원에 그의 체취가 아직 남아 있는 사무실과 스튜디오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소박한 박물관으로 꾸며 그의 업적을 기리면 좋겠다는 멋진 아이디어가 들려온다. 천국에서 웃으실까? 권은정이 쓴 평전, 「책으로 노래하고, 영화로 사랑하다」가 있다. 일독을 권한다. 막내 여동생 모니카 베커 여사와 이미림과 정태영이 생을 두고 그의 영화인생에 동반했다. 3주간, 3부작 글쓰기 끝. 휴~. 복된 ‘피정시간’이었다. 영화로 세상을 무지 사랑한 하이니! 고마워요~. [가톨릭신문, 2016년 6월 12일, 선지훈 신부(왜관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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