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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5주간 토요일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다.

윤리신학ㅣ사회윤리

인권의 공동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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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규 [mugeoul] 쪽지 캡슐

2001-03-07 ㅣ No.212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사실 ’요람’과 ’무덤’이야말로 인간의 공동체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사회적 산물이다. 인간은 타인이 만들어 놓은 요람에서 삶을 시작하고 타인이 만들어 주는 무덤 속으로 들어가 삶을 마감한다.

 

따라서 바람직한 인간의 삶이 공동체적이어야 함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무슨 비현실적인 주장이거나 도덕적 차원의 당위성만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선진사회는, 특히 그를 뒷받침할 시민의식의 바탕은 그런 도덕군자식이라기보단 ’give and take’식의 지극히 ’영리한’ 현실적인 차원에 근거를 둔다. 이른바 영국의 철학자 홉스(T.Hobbes)가 말한 "계산된 이기심"이다. 성숙된 자는 자신이 펼치는 행동이 결국은 부메랑처럼 자신에게로 피드백해옴을 아는 눈을 지녔기에, 자신을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올곧게 하고 ’공동선’을 추구한다.

 

그것은 상호부조인 보험의 원리와 같다. 보험이란 누가 피보험자가 될지 아무도 모르나 누구라도 피보험자가 될 수도 있는 산술적 확률의 게임으로써, 그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보험자들은 적립해 두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 당장 혜택을 입는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에 대한 준비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 타인에 대한 배려는 결국 자신에 대한 배려인 것이다.

 

이제 우리 사회도 이른바 정보화시대로 선진국화하면서 사회전체 시스템의 모든 면이 데이터베이스화하여 토지거래나 금융거래가 거의 투명하게 체크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해 있다. 사실 사회시스템 전체가 조망될 수 없었던 때는 내 개인의 잘못이 타인과 사회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 잘 몰랐기에, "나 하나쯤이야"하며 우리는 스스럼없이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질렀었다. ’팔꿈치 사회’라는 표현 그대로 우리는 혼자서만 잘 살겠다고 둘레의 사람들을 자신의 팔꿈치로 밀쳐 내면서 바둥거렸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러한 이기주의의 폐단을 뼈저리게 느낄 뿐 아니라,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것이 수치적으로 잡히고 눈에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나비 한 마리의 날개 떨림이 온 우주를 떨게 한다’는 카오스 이론처럼 모든 것은 그물망 속에서 하나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의 지성적 사상가 크리슈나무르티(J.Krishnamurti)는 "인간의 의식은 인류라는 네트워크 속에서 일체이다"라고 갈파하였다.

 

인권문제에 대한 접근과 해결책도 그런 관점에서 모색되어져야 한다. 인권은 생명원리가 그러하듯 공동체적이다. 그것은 앞서의 보험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인권파괴는 우리 공동체 전체에 대한 파괴요 동시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인권파괴로 반드시 되갚아져 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의 현실 속에서 분명히 검증되고 있는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따라서 인권수호의 당위성도 깊이 들여다보면 아주 현실적 논리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곧 타인의 인권에 대한 배려는 우리 공동체 전체에 대한 배려인 동시에 결국엔 나 자신의 인권에 대한 배려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운동 역시도 무엇보다 인간조건의 그러한 공동체성에 주목해야 하고 동시에 거기에서 자신의 나아갈 바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밀레니엄을 향한 우리 사회의 패러다임의 창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는 근대화를 거치면서 공동체성을 잃게 되었다. 서로를 살려주는 ’삶의 고리’는 갈수록 파괴되고 서로를 삼키려 드는 ’죽음의 고리’만 모두를 옭아매고 있는 이 사회를 온전케 하는 길은 한마디로 독점과 독식의 ’벽(壁)의 구조’를 사랑과 나눔의 공동체의식의 ’장(場)의 구조’로 변환시켜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구현함으로써 ’전체성의 회복’을 이루는 것뿐이다.

 

가치관의 바탕은 심성이다. 새 시대는 새 인간이 만든다. 따라서 우리 사회에다 공동체적 삶의 연대망을 구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공동체적 삶의 방식을 익힐 수 있는 사회화의 터전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하여 우리 사회가 공동체성 곧 전체성을 회복할 때 ’인권의 공간’도 온전히 확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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