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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목] 아서 힐러 감독의 라만차의 돈키호테 - 이름, 그 귀하고 성스러운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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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13-07-13 ㅣ No.687

[서석희 신부의 영화 속 복음여행] (20) 이름, 그 귀하고 성스러운 가치 - 아서 힐러 감독의 '라만차의 돈키호테'

사랑으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들은 꽃이 되었다


- 여행 중에 만난 돈키호테와 알돈자.


1. 성경에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사람이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향해 '이름을 지어 부르는 장면'(창세 2,19-20)이 나온다. 그 순간 이름을 갖지 못해 그냥 움직임에 지나지 않았던 모든 존재들이 그 나름의 고유한 색깔과 향기에 알맞은 특별한 이름을 갖게 되는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것을 하느님은 지켜보고 계신다.

이렇게 사람이 이름을 지어 부르는 행위는 성경에서, 교회 전통에서 그렇게 낯설어보이지 않는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나 야곱 등 많은 인물이 이전 이름이 바뀌고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는 것은 이전까지와 다른 삶으로의 전환이자 하느님과의 새로운 관계 형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전례에서 이름을 새롭게 부여하고 그 이름을 부르는 행위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영화에서는 어떨까? 성경에서, 전례에서 이름을 부르는 이 의식과 행위들의 의미를 잘 표현한 영화 중 하나가 '라만차의 돈키호테'(Man Of La Mancha, 1972)다. 이 영화에 주목해보자.


2. 아서 힐러(Arthur Hiller) 감독의 영화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세르반테스의 유명한 소설 「돈키호테」를 각색한 뮤지컬 영화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라만차에 살고 있던 알론조라는 노인은 기사 이야기를 다룬 소설을 탐독하다가, 자신을 책 속의 기사들과 동일시하게 된다. 이후 알론조는 자신의 이름을 '돈키호테'로 바꾸고 세상의 악을 제거하고 정의를 실현하고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는 충실한 하인 산초와 함께 거대한 풍차를 악한 거인으로 착각하고 달려드는 무모한 행동도 하고, 나그네들이 머무는 여관을 큰 성으로 착각하는 여정에서 알돈자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알돈자를 만나면서부터 돈키호테의 여정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 돈키호테가 죽은 후 눈물을 흘리는 하인 산초와 둘시네아(알돈자).


알돈자라는 여자, 때때로 '불리는 사람의 이름'은 그 사람의 신분과 삶의 처지를 짐작케 한다. 알돈자란 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돈키호테가 만난 그녀 이름은 촌스럽고 천박하다. 이름만 들어도 그의 출신과 배경이 쉽게 드러난다. 영화에서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제목으로 부르는 '알돈자'란 노래에 나오듯, 그의 이름은 누가 붙여준 이름인지 그 조차도 모른다. 그가 태어났을 때, 어느 누구도 그를 소중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냥 누군가가 태어나자마자 마구간에 버린 그를 두고 알돈자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는 이름대로 살아갈 뿐이다. 모진 게 목숨이라 살기 위해 때로는 몸을 파는 창녀로서, 때로 허드렛일을 하는 부엌데기로서…. 그리고 그를 살게 하는 힘은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자존의식이 아니라 오기와 분노다. 세상을 향해 천하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복수하듯이 막가는 대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던 여인이 돈키호테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기사이자,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이뤄주기 위한 소명을 가졌다며 자신을 소개하는 이 기사는 그녀의 이름을 알돈자가 아닌 '둘시네아'라고 부른다. 모두가 그를 천박한 알돈자라고 부르는데, 돈키호테는 자꾸만 고귀한 숙녀, 둘시네아라고 부르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알돈자를 향해 둘시네아라는 노래를 부르며, 그녀야말로 자신이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여인, 희생하고 싶고 지켜주고 싶었던 이상적 여인이라고 고백한다. 둘시네아라는 이름, '아름답고 귀하고 성스러움'의 의미를 지닌 그 이름에 대해 알돈자는 무척 당황해하면서 화를 낸다. 주변 사람들과 마부들도 그가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가당치 않다는 듯 깔깔거리며 비웃는다.

그러나 알돈자에 대한 돈키호테의 진실하면서도 정중한 모습에 그녀에 대해 함부로 비웃을 수 없는 묘한 기품이 흘러 사람들은 더 이상 알돈자를 놀릴 수 없게 된다. 더구나 마부 중 한 사람인 페드로가 알돈자를 함부로 다루며 뺨을 때리는 장면을 돈키호테가 보게 되고, 이에 분개하여 돈키호테가 달려들어 사력을 다해 페드로를 쓰러뜨리면서부터 이제 사람들은 돈키호테가 보는 앞에서 알돈자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알돈자 또한 처음에는 자신을 둘시네아라 부르는 돈키호테에게 당황하며 미친 노인네라며 구박했지만 살아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고귀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존경과 예의를 갖춰 대하는 돈키호테에 대해 묘한 혼란(?)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자신의 겉모습을 치장하기 위해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대접받아야 되는 존재인지에 대해 새롭게 느끼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그간 알돈자를 함부로 대하며 늘 자신들의 쾌락을 추구했던 마부들이 돈키호테가 없는 틈을 타서 한밤중에 알돈자를 납치하고 그를 능욕한다. 처참하게 짓밟히고 만신창이가 된 알돈자는 자신을 발견하고 분노하며 통탄하는 돈키호테를 보자, 절망에 빠져 '알돈자'라는 노래를 통해 절규한다. 노래의 내용에서, 그의 인생은 출생 근원부터 천박한 것으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자신에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돈키호테가 나타나면서 오히려 자신을 더 절망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당신은 내게 꿈같은 환상을 이야기해서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짓밟고 지나갔지만 그들 중에 당신이 제일 잔인해. 당신은 분노만 있었던 내 마음을 절망으로 가득 채웠기 때문이지. 나를 짓밟고 가는 것은 참을 수 있어. 그건 내게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나를 꿈꾸게 하지 마. 나를 더 이상 창녀 알돈자 이상이 되는 걸 꿈꾸게 하지마…."
 
하지만 알돈자는 이런 처절한 자기 부정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이 일로 해서 돈키호테는 오히려 자신이 돈키호테가 아니라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병든 노인, 알론조로 다시 되돌아가 죽게 되지만, 적어도 그는 알돈자를 비롯해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꿈과 희망에 대해, 고귀한 이름에 대해 깨닫게 해준 것이다.

돈키호테의 죽음을 목격한 후 알돈자는 오히려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산초에게 돈키호테는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의 이름을 알돈자가 아니라 둘시네아로 부르라고 주문한다. 동시에 영화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돈키호테는 여전히 그녀의 삶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선언하며 길을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그 앞에 놓인 새로운 길은 이전의 알돈자로서 걸어온 길이 아닌 둘시네아로서의 삶을 살게 될 새로운 길을 의미한다.

- 세상에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여행을 떠난 돈키호테.


3. 이 영화는 소설 「돈키호테」 출판 400주년을 기념하여 1965년에 초연한 뮤지컬을 다시 1972년에 그대로 영화로 옮겨놓은 것이다. 국내에서도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란 제목으로 여러 차례 뮤지컬로 공연됐는데, 뮤지컬에 나오는 노래 '이룰 수 없는 꿈' '둘시네아' '알돈자' 등이 그 노래에 담긴 의미와 더불어 멜로디가 매력적이어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워낙 시대를 뛰어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소설을 원작으로 했기에 이 영화를 여러 가지로 그 깊이를 조명해볼 수 있지만, 누군가의 부름에 의해, 누군가의 진실한 애정에 의해 한 사람의 처지가 소중하고 귀한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영화 내용의 원형을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만난 사람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복음서 내용 자체가 따지고 보면 알돈자가 둘시네아로 바뀌는 반전 과정이다. 복음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 복음서에 등장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묵상해보자. 예수께서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을 때, 그들은 단지 예수를 향해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었다. 그들 인생이 총체적으로 바뀐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오래된 영화이지만, 완성도 높은 뮤지컬을 그대로 영화화했다는 점과 유명 배우 소피아 로렌이 알돈자 역할로 나온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보고 싶지만 그 대가를 비싸게 지불해야 하는 뮤지컬 '돈키호테'에 풀이 죽은 우리 같은 서민에게는 위로를 주는 영화다.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이달 중 DVD로 출시된다.)

[평화신문, 2012년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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