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월)
(백) 부활 제7주간 월요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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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 용서를 통한 치유: 내담자 편, 상담자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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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04-11-20 ㅣ No.82

용서를 통한 치유 (1) 내담자 편

 

 

1. 상처와 용서에 대한 개관

 

이 세상에 치유받아야 할 상처를 지니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크고 작은 나름의 내적 상처를 가슴에 지닌 채 성장해 왔고, 또 앞으로도 상처를 받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연약한 인간이다. 또한 우리 각자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로서가 아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가해자로서 행동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내적인 상처를 객관적인 기준으로 그 경중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상처를 입은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상당히 주관적인 결과를 드러내게 된다. 다시 말해, 일차적으로는 외부의 사건이나 타인의 행동이 내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내 마음 안에서 그 사건이나 행동을 상처로 받아들이기에 고통과 분노를 느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로 보면 똑같은 외적 상황에서도 내적으로 느끼는 마음의 상처는 개인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인간에게는 외부의 객관적 상처를 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상처로 얻는 내적 고통의 정도가 달라진다. 따라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마음과 의식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인식하게 되면, 객관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통해 상처를 입어 상식적으로는 그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 있더라도 진정한 용서를 통해 마음의 치유를 체험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객관적으로 별로 심각하지 않은 사사로운 사건을 통해 상처를 받은 어떤 사람이, 필요 이상의 분노와 한 맺힌 감정을 토로하며 절대 상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처와 용서의 감정에 대한 주관성은 한낱 이론에 불과한 이상적인 이야기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아무리 피해자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무한한 이해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가해자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고의적이며 또한 그 죄질이 상당히 사악했다면 그 피해자의 내적이며 외적인 고통은 말할 나위 없이 심각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용서를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오히려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고, 또한 정의의 차원에서도 옳지 않은 것이 될 수 있다. 곧 그 누가 상처를 입은 피해자에게 “지난 과거를 모두 잊어버리고 이해하며 용서하라.”라는 충고의 말을 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피해자의 상처를 그만큼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간주될 수도 있으며, 또한 가해자의 행위에 대해 묵시적으로 덮어주고 인정하며, 결과에 대해 방조하는 의미로 인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극도의 내적 상처로 견디기 힘들어하는 내담자에게 사목 상담자가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라고 충고하면서 그것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길이라고 이야기해 준다면, 내담자는 이성적으로는 이 말을 수긍할 수 있을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로 치부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극도의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어떤 행위로 보상을 받는다 하더라도 완전한 치유를 경험하기 힘들다. 

 

예를 들면, 보상금을 탄다든지 가해자에게 복수를 한다든지 아니면 가해자에게 진정한 사죄의 말을 듣는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상처의 치유에 근원적인 도움을 주는 요소가 되지 못한다. 한번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육체의 상처와 같이 그 상흔이 남게 되며, 씻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이상, 한번 겪게 된 부정적인 삶의 경험을 내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용서는 평범한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상처 자체를 완전히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기에 용서만이 치유를 위한 길이며 해결책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용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고 하느님의 영역에 있는 은총이므로 그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한 인간적 노력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용서는 물론 근원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러한 하느님의 은총을 갈망하고 그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마음을 준비하는 것은 인간의 몫인 것이다. 이제 상처 입은 신앙인들은 용서를 통해 자신의 내적 치유와 영적인 자유를 얻고 싶어한다. 또한 이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이러한 용서를 통해 하느님께서 대신 깨끗이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으며, 그 은총을 얻으려면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여기에서는 용서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위스콘신 메디슨 대학의 로버트 엔라이트(Robert D. Enright) 교수의 용서 이론을 바탕으로 내담자가 어떻게 내적으로 입은 상처를 용서를 통해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번의 내담자 편에서는 엔라이트 교수의 용서의 네 단계 가운데 제1단계와 제2단계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이야기 쓰기를 통해 어떻게 분노의 감정을 인식하고 용서의 마음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 호에서는 제1, 2 단계를 통해 용서를 결심한 내담자를 제3단계와 제4단계에서 상담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에 관해 설명하도록 하겠다.

 

 

2. 용서를 통한 치유, 그 기본적 인식

 

진정한 용서를 통해 치유의 은사를 얻으려면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사목 상담자는 상담 회기 초반에 내담자가 이러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1) 용서는 분노의 감정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해준다

 

내적인 상처는 곧바로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수반한다. 이러한 감정은 내적으로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옭아매어, 이미 상처로 파괴된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파괴하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내담자는 상처 입은 자신의 내적 치유는 이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을 통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이 방법에는 용서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사목 상담자는 이렇게 용서가 실제로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내적인 평화와 자유를 주는 가장 확실한 지름길임을 내담자가 확신할 수 있도록 인지시켜 주어야 한다.

 

2) 부정적인 감정, 곧 분노의 감정에 직면해야 한다

 

내담자가 분노를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용서의 첫 단계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지난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여 분노의 감정도 억압하는 경우가 흔하다. 자신이 과거의 사건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스스로 치유가 필요한 사람임을 깨닫고 그 분노 감정에 구체적으로 직면하여 그것을 승화시킴으로써 용서의 과정으로 들어가게끔 해주는 첫 발걸음이다.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가 왜 이러한 분노 감정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스스로 다시 생각해 보고 그 원인과 과정, 그리고 현재의 상태에 대해 객관적으로 진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3) 용서는 가해자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흔히 상처 입은 내담자는 용서를 하는 데 어떤 조건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곧 상대 가해자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친다든가, 변화의 기미가 보인다든가, 피해에 상응하는 보상을 한다든가 등등의 조건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내세우는 용서는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런 조건들은 모두 용서가 피해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해자를 위한 선물 같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진정한 용서는 절대적으로 무조건적인 것이어야 하며, 또한 용서의 최대의 수혜자는 가해자가 아닌 바로 내담자 자신이라는 사실을 반드시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곧 용서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상처를 입은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깨달을 때, 내담자는 어떤 의무감이나 당위적 행동 또는 종교적인 이유로서가 아닌 진정한 자신의 상처 치유와 내적 자유를 주는 용서의 개념을 얻게 될 것이다. 

 

사실 피해자들의 분노심은 처음에는 가해자들을 향한 부정적 감정이었지만, 곧 자기 자신에게 해를 주고 자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또 하나의 정서적 감옥임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는 용서만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최고의 방법임을 깨닫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진정한 용서를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4) 용서는 하나의 과정이다

 

우리는 흔히 일회적으로 “용서한다.”라고 말하면 용서가 되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용서란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향한 계속되는 과정 안에서 비로소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상담자는 먼저 내담자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도록 해준 다음에, 용서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고, 계속해서 이 과정에 충실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3. 용서와 치유를 위한 여정 - 로버트 엔라이트의 용서의 네 단계1)

 

1) 제1단계 : 분노의 감정 인식하기(자신의 이야기 쓰기)

 

사목 상담자는 현재 분노의 감정에 휩싸인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분노를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내담자가 자신의 분노 감정을 피한 적이 있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직면하고 있는지를 알아본다. 만일 내담자가 자신의 분노 감정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억압하고 있었다면, 그 억압에 사용된 방어기제(예: 부정, 억제, 억압, 전위, 퇴행, 동일시 등)로는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스스로 찾아보게 해준다.

 

이 평가가 이루어졌다면 상담자는 곧바로 내담자가 분노 감정에 직면하도록 도와준다. 분노 감정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를 알아내는 과정에서 다시 자신의 과거 상처를 재현해야 하는 아픔이 따르는데, 이때 상담자는 그 분노 감정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며, 절대 부끄러운 것이 아님을 인식시켜 주고 이에 직면하도록 용기를 주어야 한다. 곧 분노는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잘못된 일이 있을 경우 그것을 시정하도록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자신의 자존감 유지를 위해서도 상당히 긍정적이며 건강한 감정임을 알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 분노의 감정이 부정적으로 표출될 때에만 비로소 부정적 결과가 도출되는 것뿐이다. 상담자는 이러한 과정을 위해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요점화하여 기록하게 한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가 사용될 수 있다.

 

- 당신의 분노는 어린 시절에 근거합니까? 아니면 최근의 어떤 사건 때문입니까? 그 감정에 연루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 당신이 느끼고 있는 분노나 부정적인 감정들의 목록을 간단히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분노의 감정에 스스로 점수를 매겨보십시오. 분노의 감정이 가장 강한 상태가 10점이고 가장 약한 상태가 1점입니다.

 

- 각 항의 감정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했는지에 대해 설명해 보십시오.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이 순화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될 수도 있습니다.

 

- 당신은 그 사람에게 직접 그 감정들을 토로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 분노를 대신하고 있습니까? 

 

- 당신이 느끼고 있는 분노의 감정이 부끄럽고 미숙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건강하다고 생각합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일상에서 특별히 이러한 분노 감정이 더 북받칠 때가 있다면 언제입니까? 그 감정 때문에 구체적으로 생활에 방해를 받는다면 어떤 경우입니까? 

 

- 당신은 이 분노 감정으로 생긴 수치심이나 죄의식 등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감정에 대해 점수를 매겨보십시오. 

 

- 그 가해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까? 또 그 때문에 생기는 스트레스는 어떤 것입니까?

 

- 당신의 상처가 삶에 단순한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아니면 영구적인 큰 영향을 끼쳤습니까?

 

이 외에도 사목 상담자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면서, 내담자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와 관련된 이야기를 써나가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작업은 내담자가 자신의 존재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미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 쓰기는 자신의 과거를 들여다보게 되고 현재를 검토하며 미래를 준비하는 데 무척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한편, 구체적인 과거의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삶에서 그 사건과 직접 관련되지 않았더라도 다른 많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것도 권장할 만하다. 이것은 매일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차츰차츰 자신이 용서를 향한 여정을 걷고 있음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근본적인 치유의 원천이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쓰는 시간과 날짜를 반드시 기록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담자 자신의 현재의 마음 상태와 이후의 마음 상태의 변화를 체크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통해 이야기를 쓰기 전 상태와 이후의 상태에 대한 상담의 결과도 평가할 수 있다. 이렇듯 자신의 이야기 쓰기는 치료의 중요한 한 부분이며, 이미 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감정의 순화를 체험하게 된다. 

 

다음은 이러한 이야기 쓰기를 위한 원칙들이다. 사목 상담자는 이러한 이야기 쓰기의 원칙을 내담자가 염두에 두도록 도와준다.

 

① 취향에 따라 컴퓨터에 기록할 것인지 두꺼운 노트에 기록할 것인지를 먼저 정하고, 자신의 현재의 삶을 중심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과거의 삶을 중심으로 할 것인지 나름대로의 이야기 형태를 선택한다. 

 

② 사목 상담자가 각 회기마다 던져주는 질문들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전개해 나갈 수 있도록 쓰기 전에 미리 마음속으로 준비를 한다. 

 

③ 이야기를 쓰는 시간을 정하면 좋다. 아침형 인간인지 저녁형 인간인지도 고려할 수 있다. 하루 중 가장 정신이 맑고 스케줄에 영향을 받지 않는 고요한 시간에 작업을 한다.

 

④ 이야기를 쓰는 장소도 정해두면 좋다. 이곳저곳에서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중단하고 고요히 머무를 수 있는 적당한 장소가 좋다. 특별히 직장을 가지고 있지 않고 가사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성당의 감실 앞에서 성체조배를 하면서 이야기를 쓰는 것도 좋을 것이다.

 

⑤ 세세한 것을 기록하다 보면 내용이 너무 산만해지므로 요점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쓰는 것이 좋다.

 

⑥ 강박을 느끼며 이야기를 쓰지 않고 자연스럽게 부담 없이 이야기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 이 작업이 오히려 자신을 구속해서는 안 된다.

 

⑦ 이 이야기는 나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인 만큼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⑧ 이 이야기가 만일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경우에는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생각해 놓아야 한다. 또는 본인이 죽은 뒤 다른 사람들이 이 기록을 어떻게 다루어주기를 원하는지 미리 밝혀두는 것도 좋다.

 

⑨ 이야기를 쓰는 도중에 발생하는 수많은 정서적인 반응들에 대해서는 혼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상담자와 논의한다. 또한 자신이 스스로 처리할 수 없는 감정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것이 좋다. 

 

2) 제2단계 : 용서하기로 결심하기

 

제1단계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과거 사건과 현재의 상처 그리고 그 때문에 생긴 분노와 기타 여러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다면, 이제 구체적으로 치유를 위해 용서가 필요함을 깨닫고 가해자를 용서하려는 결심을 하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결심을 하는 데 다음과 같은 체크리스트가 도움이 될 것이다.

 

- 당신은 지금까지 이러한 감정에 대처하는 여러 방법을 써왔을 것이다. 그러한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지금까지 효과가 있었는가? 그 방법들의 효과에 대해 각각 1에서 10까지 점수를 매겨보라. 이러한 방법들의 효과가 미진했다면 이제 마지막 대안으로 용서가 필요함을 느끼는가?

 

- 정말 용서를 통해 변화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용서의 정의는 무엇인지 적어보라. 혹시 거짓 용서, 곧 조건이 있는 용서이거나 과거의 사건을 잊어버리기 위한 용서 또는 스스로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의식을 통해 도덕적으로 우월감을 느끼기 위한 방편으로 용서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만일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용서가 진실된 용서와 차이를 지니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이러한 차이점은 단순히 우연적인 것인가? 아니면 심각하게 고려해야 될 사항인가? 

 

- 당신이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이러한 용서의 차이점을 계속해서 극복해 나가야 하므로 사목 상담자와 꾸준히 대화하라.

 

- 이제 진정한 용서를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으면 의지를 모아 결심을 하라.

 

- 이러한 용서의 결심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임을 다시 한번 명심하고, 처음에 잘 되지 않더라도 용서란 반드시 충분한 시간을 거쳐 이루어지는 것임을 생각하여 희망을 잃지 말라. 또한 용서란 누가 강요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절대 상담자나 다른 사람들의 충고를 듣고 억지로 이 과정에 들어서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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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엔라이트는 용서의 네 단계(제1단계: 분노의 감정 인식하기, 제2단계: 용서하기로 결심하기, 제3단계: 구체적인 용서를 위한 작업, 제4단계: 정서적인 감옥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해방되기)를 이야기하면서 용서는 이처럼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후의 내용은 로버트 엔라이트, Forgiveness is a Choice: A Step-by-Step Process for Resolving Anger and Restoring Hope, Washington D.C. :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2001의 내용을 참조한 것이다. [사목, 2004년 8월호, 박현민(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 · 본지 주간 · 신부)]



용서를 통한 치유 (2) 상담자 편



지난 호에서 우리는 로버트 엔라이트(Robert D. Enright) 교수의 용서의 네 단계 과정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두 단계는 사실 내담자 편에서의 용서를 위한 준비 단계의 성격이 더 강하다. 따라서 이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단계에서는 상담자가 직접적인 개입을 하기보다는 내담자가 스스로 용서를 향한 마음의 정리를 할 수 있도록 뒤에서 기다려주고 지켜보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만일 내담자가 구체적으로 지금까지 상처 치유를 위한 모든 방법을 써보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해 용서밖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스스로 느끼며 결국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면, 이는 용서의 세 번째 네 번째 단계를 시작하는 때이며, 상담자는 앞서의 두 단계에서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내담자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3) 제3단계:용서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작업하기

 

용서를 하기로 마음의 결심을 굳혔다면 용서를 위한 구체적인 작업에 들어간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과거의 사건과 가해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이해가 필요하다. 지난 호에서 언급한 바처럼 과거의 사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는 스스로의 주관에 많이 달려있다. 

 

따라서 사목자는 이 단계에서 내담자가 자신에게 피해를 준 가해자와 자신의 과거 사건에 대한 인식이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평가하는 관점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만일 내담자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이해와 전혀 다른 또 다른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용서는 훨씬 더 쉬워질 수 있다. 

 

(1) 상대방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기

 

이 세 번째 단계는 이전의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가 자신의 이야기와 자신의 분노 감정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던 것과는 반대로 상처를 준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작업의 단계이다. 따라서 사목자는 내담자가 지금까지 가해자에 대해 생각해 보지 못했던 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었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어 적극적으로 내담자를 인도해 나가야 한다.1) 어떤 사람은 사목자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이러한 사고의 유연성을 보일 수 있지만 어떤 내담자는 이러한 상담자의 길 안내가 없을 경우 그동안 자신은 무조건 피해자이며 가해자는 무조건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사고 유형에서 결코 자유롭게 벗어날 수 없다. 

 

다음은 사목자가 내담자를 좀 더 마음과 이성을 열어 가해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다. 사목자는 내담자에게 이러한 설명과 질문들을 듣고,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기술한 그 방식으로 가해자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며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 상담자 편에서 해줄 수 있는 도움말의 예 

 

이제 당신은 가해자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만일 이 결심이 어떤 다른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내적 치유를 위한 것이라면 이미 당신은 용서하기로 결정한 것만으로도 치유의 체험에 한발 더 나아가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용서하기로 결심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인정한다는 소극적 의미가 아니라 진심으로 용서하고 싶다는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이 되려면 가해자에 대한 좀 더 폭넓은 관점에서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가해자가 당신에게 행했던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은 물론 절대로 정당화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의 이면에는 반드시 그 행동이 나오게 되었던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중요합니다. 곧 그러한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지만 그 행동에 대해 폭넓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폭넓은 이해가 갑자기 기적처럼 다가와 이전의 모든 분노와 슬픔 등의 감정을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처 입은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체험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시간을 위해 이 작업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의 질문을 보시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형식으로 가해자에 대한 나의 관점을 좀 더 넓혀 나가봅시다.

 

질문 1.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습니까? 

 

가해자가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어떻게 보냈는지 아는 대로 기술해 보십시오. 많은 경우 상처를 준 사람은 나와 무척 가까운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의 과거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어린 시절에 대한 정보가 없다면 당사자에게나 아니면 다른 주변 사람에게 물어 알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은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까? 혹시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가난에 찌들었거나 큰 신체적 질병에 시달렸거나 주변 친구들에게 외면을 당했거나 등등의 특별한 사항은 없었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있었다면 가해자는 그 당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그 상황을 대처하며 지금까지 살아왔을까요?

 

때로는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과거에 대해 절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는 개인적인 질문이 아닌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에 바탕을 둔 4번과 5번의 질문에 근거하여 이야기를 써 내려가도 좋습니다.

 

질문 2. 당신에게 피해를 줄 당시에 그 사람은 어떤 상태였습니까?

 

당신이 상처를 받은 그때에 가해자의 여러 차원(지성적, 심리적, 정서적, 육체적, 경제적, 가정적)에서의 환경은 어떠했습니까? 극한 상황에서 아주 힘든 상태였습니까? 상당한 스트레스에 처한 상태였다면 그것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당신에게 했던 그 말이나 행동이 만일 우발적이고 일회적이었다면 그 당시에 그 사람의 상황이 정상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에 당신이 받은 상처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누적된 것이라면, 왜 가해자는 그처럼 당신에게 계속적인 상처를 입히는 삶의 유형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당신의 어떤 말이나 행동이 원인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요? 혹시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이나 부모의 문제 때문에 그러한 행동이 생겨나게 된 것은 아닐까요?

 

질문 3. 구체적으로 상처를 주었던 그 사건을 일단 접어두고 그 사람과의 원래의 관계에 대해 진술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람과 얼마만큼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습니까? 만일 당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면이나 장점들을 몇 가지 찾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에 떠오르는 과거의 좋은 관계에 대한 기억이나 이미지는 없습니까? 상대의 가해 사건 외에 그 사람과 행복했고 기쁜 추억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사람 나름의 좋은 점들을 찾아보십시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면 관계성의 측면에서 당신이 상처를 받은 그 사건 자체가 가해자 측에게도 또한 상처요 부정적인 체험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가해자는 당신에게 상처를 주고 나서 행복해졌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똑같이 어렵고 힘든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까? 가해자는 당신에게 이러한 상처를 주고 나서 인생이 어떻게 변하였습니까?

 

만일 가해자가 낯선 사람이었다든가 아니면 별 관계가 없었던 사람이어서 이 세 번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다면, 다음의 철학적 관점과 종교적인 관점의 질문으로 넘어가도 좋습니다.

 

질문 4. 철학적 관점에서 본 그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2)

 

질문이 어려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질문과 다음 질문은 구체적인 나의 시각을 벗어나 세상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좀 더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줄 것입니다. 이는 그 가해자를 당신과의 둘만의 관계 안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전체적인 인간의 시간적 역사 안에서 그리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곧 이 관점은 내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시간과 세계적인 공간이라는 넓은 관점에서 나와 가해자를 인간 세상의 한 구성원으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이러한 시각 안에서 우리는 모두 세상에 살아가는 가치 있는 한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비록 상처 입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상처를 준 사람도 반드시 상처를 받아야만 한다는 논리는 이 철학적 관점 안에서는 타당하게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상처를 주는 인간으로서 살아가기도 하고, 상처를 받는 입장에서도 살아가게 됩니다. 곧 나는 현재 상처를 입은 피해자의 입장이지만 어느 면에서는 어떤 다른 사람에게 동시에 피해를 주는 가해자의 입장으로 살아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 상처를 입혔거나 입었거나 하는 구체적인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지기에 앞서 모든 인간관계 안에는 이러한 상처가 존재한다는 현상학적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상처는 어쩌면 본질적으로 서로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필요악처럼 인식됩니다. 

 

이러한 관점을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생기십니까? 만일 그렇다면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한 개인적인 고통은 훨씬 더 숭고한 차원에서 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상처에 대한 고통의 체험 강도가 개인적이며 감정적인 차원에서 느껴질 때는 무척 견디기 힘들 수 있지만, 그 고통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철학적이고 인간학적인 인식 차원으로 승화된다면 상대적으로 그 강도는 약화될 수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상처를 분명히 받았음에도 그것을 상처라기보다는 인생의 한 과정 안에서 자연적으로 겪게 되는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자신은 훨씬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합시다. 그 죽음의 원인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었을 경우(사고이건 고의적이건 간에) 그에 대한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며, 그는 용서할 수 없는 나의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에 대한 사건을 단순한 개인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한 번 세상에 태어나 한 번 죽어야 하는 세상과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만일 이러한 관점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사람에 대한 분노와 증오심에 초점을 맞추었던 태도에서 좀 더 겸허한 마음으로 세상과 사람을 대하거나 또는 종교적 초심으로 돌아가는 자신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용서를 가능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질문 5.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가해자는 당신에게 어떤 존재입니까?3)

 

당신이 만일 영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삶의 철학과 이러한 영적인 견해에 대한 통합을 이루려 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번쯤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물론 이 질문은 특정한 종교나 신앙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당신이 현재 가지고 있는 인생관 안에서 좀 더 영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당신의 마음을 넓혀가는 기회를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유일신 종교의 전통은 아무리 사악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사악하고 이기적인 사람일지라도 회개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언제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은 그 가해자를 단순히 당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성하고 신비로운 계획 안에서 나름대로 어떤 존재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까? 또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 사람이 당신의 삶에 비록 상처를 안겼지만 그것이 꼭 부정적인 상처로만 기억되는 절대적인 악(惡)으로 보아야만 합니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어떤 심오한 계획 안에서 나의 긍정적인 변화를 위한 시련 가운데 하나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까? 따라서 그 가해자를 더 넓은 하느님의 심오한 계획 안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할 수는 없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하느님의 섭리를 삶의 여러 사건을 통해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치의 병에 걸려 투병하는 환자들 가운데는 정상인이 이해할 수 없고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체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이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의 힘은 이들의 현세적이고 실제적인 불행을 오히려 영적으로는 더 큰 깨달음과 안식에 이를 수 있도록 이끌어줍니다. 곧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실의 시련과 고통은 오히려 더 성숙한 자아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기회며 과정인 것입니다. 당신의 고통과 상처를 이러한 일련의 영적 변화의 과정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없습니까?

 

또한 영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겸손한 마음을 갖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당신은 자신의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최선의 방법인 용서의 힘을 얻는 데 하느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용서를 하는 데 어떤 도움이 필요하며, 그 도움을 어떻게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종합:이제 당신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에 대해 당신이 지금까지 위의 질문에 답하며 생각해 왔던 여러 가지 관점들을 종합할 시간입니다. 당신이 처음 그 가해자를 생각했던 관점과 지금 이러한 질문들에 답을 해나가면서 얻은 관점 사이에 차이점을 느끼십니까? 바뀐 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것들을 구체적으로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해 두십시오. 

 

(2) 가해자에 대해 공감하기

 

물론 가해자에게 처음으로 가지고 있던 감정에 변화가 없다면 공감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위의 다섯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서 점차로 상대도 상처를 받은 사람이요 나와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에게서 또는 어떤 구체적인 환경에서 나름대로 상처와 고통을 겪고 있었음을 깨달을 때 가능해질 수 있다. 

 

이러한 긍정적인 감정의 변화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따라서 사목자는 너무 급하게 이 단계를 내담자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또한 때로는 이러한 공감에 대한 감정이 생겨나면서도 동시에 사라지거나 아니면 이러한 긍정적 감정의 변화가 오면서도 동시에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교차할 수도 있다. 사목자는 내담자의 상황에 너무 급격히 반응하지 말고, 시간을 충분히 주고 기다려야 한다.

 

이런 감정의 긍정적 변화를 기다리는 시간에 이야기 쓰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에서 사용했던 이야기 쓰기가 이 세 번째 단계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다.

 

만일 자연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가 너무 요원하다고 느낄 때는 사목자 편에서 긍정적인 변화에 대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요청해 볼 수는 있다. 예를 들면 “나는 아무개(상처를 준 사람의 이름)가 정말 행복하고 평안하기를 소망한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큰 소리로 암송하게 할 수도 있다. 사목자는 이때의 느낌을 내담자가 노트에 기록하도록 한다. 처음에는 짜증이 나고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이 정상이다. 또한 분노의 감정이 오히려 더 북받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목자는 여기에 실망하지 말고 계속적으로 위와 같이 긍정적으로 용서하는 문장을 암송하도록 한다. 시간이 흐르면 분명 그 가해자를 생각할 때 조건반사와 같은 형식으로 연상되었던 분노의 감정이 서서히 변화되어 감을 내담자 스스로 느끼게 된다. 곧 내담자가 가해자의 이름을 부르면서 축복의 좋은 메시지를 자꾸 암송하다 보면 조건반사적 학습의 원리에 따라 점차로 그 가해자의 이미지가 바뀌게 되어있다. 이것은 부정적 심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주는 행동심리학적 접근인데 사목자는 때로 이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3)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고 가해자에게 마음을 전하기

 

이제까지의 노력으로 내담자는 점차로 가해자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고 그 결과로 자신의 고통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상태에 이르면 사목자는 내담자에게 구체적으로 가해자를 위한 선물을 하도록 이끌어준다. 이것은 진정한 용서의 한 표현이며, 나아가 화해를 위한 시작이 된다. 다음과 같은 내담자의 고백은 용서의 동기와 종류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단계에 이미 들어서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분명히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어요. 처음엔 정말 비열하기 짝이 없는, 인간 이하로 생각하였지만 아버지가 얼마나 할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심한 욕을 들으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는지를 알고 난 뒤 분노보다는 동정심이 들었어요. 내가 만일 아버지의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더 형편없이 되어 가정을 꾸리지도 못했을지 몰라요. 그런 면에서 왜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가요. 아버지 마음속의 슬픔을 왜 진작 알지 못했는지 오히려 속상한 마음이 들어요.”

 

“나는 그 사람을 이제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내가 누구인지 더 잘 알게 되었고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내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늘 그 사람에게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에게 내 모든 인생을 걸었기 때문에 더 큰 상처와 배신감에 몸을 떨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아픔을 겪고 난 뒤 이제 내가 내 삶의 주인이라는 것, 누구도 나의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바로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뒤 그 사람을 마음속에서 놓을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그를 용서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분명 내게 죄를 지은 사람이라서 내가 용서해도 분명 하느님께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이 사실을 깨닫고, 이후부터는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용서합니다. 또한 그러한 용서의 행위가 그 사람의 죄를 묵인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도 잘 압니다. 따라서 이 용서는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이 나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을 원치 않고 평화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에 저는 우리 부처 상관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그 사람은 저를 벌레만도 못하게 취급했어요. 얼마나 내 자신이 한심해 보였는지 자살을 생각해 본 적도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은 우리 직원들이 좋은 성과를 내면 자신이 한 일인 것처럼 꾸미고 모든 공로를 가로챕니다. 그리고 질책을 받을 일이 있으면 모두 제 책임으로 돌려 상부에 보고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수없이 상급기관에 불려나가 질책을 당하고 시정 명령을 받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얼마 전 승진 발령에 제 이름이 끼어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차장에서 청장으로 승진한 것이었습니다. 전 믿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청장의 직위는 이전부터 저를 그토록 집요하게 괴롭히던 바로 그 상관에게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상관은 떨어지고 제가 올라갔으니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더니 상부에서는 제가 희생정신이 투철하고 상사와 부하직원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다고 보아 이를 아주 높이 평가했다는 것입니다. 인사위원회에서는 제가 늘 칭찬받는 좋은 보고는 제 상사에게 양보하고 질책을 당할 사항이 있으면 제가 희생해 온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국 저는 저를 괴롭히는 상사 때문에 진급하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섭리라 생각하니 더 이상 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에게 아주 못되게 굴었지만 결국 그 상사 때문에 저는 진급을 하게 되었으니 원수가 아니라 은인이라 해야겠지요.”

 

위에서 예로 제시한, 내담자 마음이 변화하게 되는 원인은 가해자의 상황과 마음을 이해함, 내 자신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자신의 행복과 치유를 진정으로 바람, 하느님의 폭넓은 섭리 안에서 가해자를 바라보는 데에 있었다. 내담자를 상대하는 사목자는 더 많은 상황에서 이처럼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체험이 쌓이면 사목자는 내담자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에 대한 유형을 파악할 수 있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노하우를 가지게 될 것이다.

 

사목자를 찾아온 내담자가 구체적으로 이렇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사목자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바로 그 사람에게 구체적인 선물을 하도록 말해준다. 이것은 꼭 물질적인 선물만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편지나 전화 통화와 같은 형식도 포함된다. 또한 진정으로 마음이 담긴 기도를 봉헌해 주는 것도 아주 좋은 선물이 된다. 이러한 선물의 행위는 구체적인 용서의 실천적인 체험을 내담자가 얻게 된다는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다음 호에서는 용서의 네 번째 단계에 대한 설명과 사목자 편에서 내담자의 용서 치유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전문적인 심리학적 평가 도구들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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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ewise Smedes는 이 과정을 ‘새로운 눈으로 보는 것’(seeing with new eyes)이라고 설명한다. L. B. Smedes, Forgive and Forget:Healing the Hurts We Don’t Deserve, San Francisco, CA:Harper, 1984년.

 

2) 이 질문 4와 이어서 나오는 질문 5는 원서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필자가 임의로 수정, 보완하였다. 로버트 엔라이트 교수는 원래 ‘철학적 관점’이란 용어를 쓴 것이 아니라 ‘세계적 관점(global perspectiv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세계적 관점이란 내담자가 가해자를 인류의 한 구성원으로, 곧 내담자 자신처럼 가해자도 이 지구에 속해있으며, 이 세상에 살아갈 존재 의미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세계적 관점’이란 용어보다 이 지구 안에 살아가는 인간에 대한 이해뿐 아니라 세상과 인간에 대한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철학적 관점’이라는 용어가 훨씬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본래 엔라이트 교수의 ‘세계적 관점’이란 용어의 의도는 인간 자체에 대한 존중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은 세상에 대한 현상학적 이해와 인간에 대한 인간학적 이해의 토대를 전제한다. 따라서 그가 직접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 용어가 포함하고 있는 이러한 내용을 철학적 관점이라는 용어로 다시 확장하고 그에 대한 내용을 나름대로 생각하여 보완하였다.

 

3) 엔라이트 교수는 종교적 관점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우주적 관점(cosmic perspective)’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이 용어보다는 종교적 관점이란 단어가 훨씬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필자가 임의로 수정하였다. 사실 엔라이트 교수도 이 우주적 관점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것이 영적이며 종교적인 관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시사하였다. 그가 굳이 우주적 관점이라고 표현한 의도는 자신이 심리학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 의미가 어떤 특정한 종교에 국한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서상으로는 우주적 관점보다는 종교적 관점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Recall that the cosmic perspective focuses on spiritual or religious outlooks… I deliberately use language that is not specific to any one religion, so my images may be a bit vague.”, Robert D. Enright, Forgiveness is a Choice:A Step by Step Process for Resolving Anger and Restoring Hope,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Washington DC, 2001년, 153면. [사목, 2004년 9월호, 박현민(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 · 본지 주간 · 신부)]

 

 

용서를 통한 치유 (3) 상담자 편

 

 

잠시 지난 호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용서의 제1단계(분노의 감정 인식하기)와 제2단계(용서하기로 결심하기)는 내담자 편에서의 용서를 위한 준비 단계의 성격으로서 사목 상담자는 직접적인 개입을 절제하면서 내담자가 스스로 용서를 치유의 방법으로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도록 도와주게 된다. 

 

제3단계(용서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작업하기)와 제4단계(영적인 자유 체험하기)에서 사목 상담자는 구체적으로 용서를 결심한 내담자가 용서의 작업을 해나가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직접적인 개입을 시도하게 된다. 구체적으로 제3단계에서 사목 상담자는 일단 내담자가 자신의 가해자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다. 이로써 내담자는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자신의 좁은 이해심과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더 넓은 시각으로 상대방의 새로운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이것은 상대방을 향한 나의 마음과 관점의 변화를 뜻한다. 

 

이제 구체적으로 상대방을 향한 나의 감정적 에너지의 흐름이 변하기 시작함을 내담자가 느낀다면 제4단계를 통해 사목 상담자는 그러한 에너지의 방향을 내담자 자신으로 돌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재구성을 꾀하도록 도와준다. 곧 제4단계에서 내담자는 상대방과 세상에 대해 전혀 다른 관점과 변화된 감정을 경험하고 난 뒤, 다시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이러한 영적 여행으로 나는 어떻게 변해있으며 나에게 이 고통은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나의 삶의 목적과 의미는 무엇인지 등등의 자아성찰 또는 영적 정체성의 재정립을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이 다 이루어지면 내담자는 용서의 실천을 통해 진정한 영적인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4) 제4단계:영적인 자유 체험하기

 

제1-2단계를 거치며 용서를 희망하고, 제3단계를 거치며 상대방과 세상에 대한 더 폭넓은 이해를 경험한 내담자는 이제 제4단계에서 자신을 돌아다보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이제 내담자는 자신의 상처가 분명 고통이지만 그것이 주는 또 다른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1) 자신의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기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e) 박사는 사람은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지만 일어난 일에 대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그 고통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곧 고통이라고 하는 마음의 괴로움은 그것을 견뎌내고 수용하며 의미를 깨달은 자에게는 그 고통의 정도가 경감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각자 나름대로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 고통 안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의미는 그냥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고통의 열매인 것이다.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가 용서의 3단계를 거쳐 사람과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얻게 된 뒤에는 이처럼 자신의 고통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이 훨씬 수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3단계를 거쳐서 온 내담자는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서의 제4단계에서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며 자신의 고통의 참 의미에 대해 기술해 나간다. 

 

여기에 사목 상담자는 십자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영적 의미를 내담자가 묵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수 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간다. 이 십자가의 길은 원하지 않는다고 피하거나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이기에 십자가를 원망하며 부정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이 십자가를 어떻게 지고 갈 것인지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피할 수가 없다면 즐겨라.’라는 말도 있듯이,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나만의 십자가를 원망하지 않고, 그 십자가 속에 깊이 숨겨진 참된 고통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십자가의 길을 인간적으로는 피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이라는 고통의 잔을 거두어주실 수만 있다면 거두어주시기를 아버지께 청원하시면서도 마지막 결정은 아버지의 뜻에 따르셨다. 만일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인생의 고통을 경험하는 이 삶의 질곡을 하느님께서 나에게 그 고통을 통한 참된 의미를 발견하여 부활의 기쁨을 주시고자 마련하신 하나의 영적 선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십자가의 길은 결코 고통으로만 얼룩진 인생의 걸림돌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참된 영적 자유와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통해 더욱 영적으로 성숙한 자유인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이러한 묵상과 함께 내담자는 다음의 질문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써나간다.

 

① 이전의 당신은 고통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② 지금 당신은 이 고통을 더 큰 삶의 상황 속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까? 만일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면, 하느님께서 어떤 의미로 나에게 허락하신 십자가라 생각하십니까? 또 그 결과 내 자신이 더욱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2)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사실 용서는 혼자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하지만 하느님 은총의 힘과 이웃 형제자매들의 사랑의 힘이 함께한다면 용서는 가능하다.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가 1단계와 2단계를 통해 자신의 용서가 필요함을 깨닫고 이후에 제3단계를 거쳐 가해자와 세상에 대한 관점을 변화시키는 개인적인 용서의 길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면 이제 전례와 성사를 통한 영적 치유와 공동체적인 사랑의 도움을 통해 진정한 용서를 이루어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먼저 전례와 성사적인 도움은 하느님 사랑의 힘을 깨달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원천이다. 잘 준비된 참회예절과 고해성사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한 영적인 은총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용서의 절대적인 내적 근간이다. 내담자는 이러한 전례와 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시는지에 대해 깊이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내적인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식은 십자가 신학에 대한 깊은 성찰이 전제되어야 한다. 

 

나에게 상처와 고통을 주고 나를 외면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 고통을 허락하셨지만 나와 함께 아파하시고 그것을 잘 견디어내어 부활의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늘 옆에서 지켜보아 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내가 결코 버림받았거나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과 함께 용서를 통한 진정한 치유에 들어서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또한 공동체적 도움을 위해 사목 상담자는 교회 내에 지지자 그룹(peer group 또는 supporting group)을 활성화하고 지지연대(supporting network)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내담자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공감하는 동료 그룹은 서로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장을 마련해 주고 이를 통해 내담자는 자신도 용서를 통한 치유가 실제로 가능하다는 희망과 용기 그리고 적극적인 의지를 가질 수 있다. 

 

(3) 삶의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기

 

사목 상담자가 용서를 통한 치유의 과정에 내담자가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고 생각하면 이제 구체적으로 앞으로의 삶에 대한 새로운 목적과 방향을 설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진정한 용서의 과정은 내담자가 경험했던 상처와 고통에 대한 치유만이 목적이 아니라, 앞으로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전망하고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재정립하는 것까지를 뜻한다. 만일 이러한 삶의 재정립이 형성되지 않는다면 근본적인 치유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담자는 사목 상담자의 도움을 통해 앞으로 대인관계는 어떻게 이루어갈 것이며, 내 자신이 사람과 세상을 보는 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정할 것인지, 그리고 내 삶의 주인으로서 나는 어떤 인생의 목적을 가지고 살 것인지를 재정립하게 된다. 사목 상담자는 이렇게 삶의 새로운 방향성을 설정하려는 내담자가 이 과정을 잘 이루어낼 수 있도록 내담자의 구체적인 상황에 맞게 잘 이끌어주어야 한다.

 

(4) 용서를 통한 영적인 자유로움을 발견하기

 

이제 용서를 통해 내적 치유를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는지는 내담자 자신만이 알 것이다. 실제로 내적인 치유는 영적인 자유를 선사한다.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신이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고 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 용서의 과정을 잘 이루어왔음에 감사하고 그 결과에 대한 기쁨을 발견할 때에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담자의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감정과 인식이 변화되었음이 느껴질 때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의 현 상태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통해 무엇이 더 필요하고 부족한지 그리고 어느 부분에서 자신이 성장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배려해 줄 수 있다. 

 

다음의 각 질문들에 답변하면서 내담자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솔직하게 1점에서 10점까지의 점수로 표기한다. 각 질문의 대답이 1점에 가까울수록 그 질문에 대한 부정이 강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반대로 10점에 가까울수록 그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가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①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 사람을 생각할 때 어느 정도 화가 나십니까? (1점 = 전혀 화를 내지 않는다. 10점 = 극도의 화가 치민다.) 

 

② 당신에게 일어난 그 상황과 상처를 생각할 때 수치심이 어느 정도 드십니까? (1점 = 전혀 수치스럽지 않다. 10점 = 극도의 수치심이 든다.)

 

③ 당신은 하루 동안 가해자에 대한 생각과 그가 나에게 한 일에 대한 생각이 들 때마다 그 감정과 생각을 추스르느라고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계십니까? (1점 = 매우 적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10점 = 하루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비한다.)

 

④ 과거에 시도했던 다른 방법들에 비교해서 지금의 용서는 당신에게 어떤 효과를 내고 있습니까? (1점 = 다른 해결책보다 별로 효과적이지 않다. 10점 = 다른 해결책들에 비교하여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⑤ 이제 당신은 가해자에 대해 얼마나 많은 동정과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1점 = 절대로 동정이나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10점 = 아주 많은 동정과 연민의 마음이 든다.)

 

⑥ 당신이 겪은 그 고통을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1점 = 너무 어렵다. 10점 = 매우 쉽다.)

 

⑦ 당신은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1점 = 없다. 10점 = 사람을 깊이 용서해 본 적이 있다.)

 

이 7개의 질문 가운데 마지막 질문을 뺀 나머지는 이미 용서의 1단계에서 평가해 보았던 사항들이다. 1번, 2번, 3번의 질문에 대한 새로운 평가점수가 이전의 점수보다 낮다면 사실 내담자는 영적으로 성숙하고 치유되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4번, 5번, 6번의 질문에서는 오히려 새로운 평가점수가 이전의 점수보다 높을 때 내담자 상황이 향상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점수표를 보고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가 용서의 길을 통해 내적인 치유를 얻고 있는지, 아니면 예전과 같은 수준이거나 전보다 훨씬 더 상황이 악화되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문제의 답변에 양 끝의 점수, 곧 1점이나 10점의 점수로 대답하는 내담자는 사실 많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의 현 상태가 과거의 상태와 비교하여 얼마나 변화하였는지 그 정도의 차이를 잘 읽어내야 한다. 이때 사목 상담자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뚜렷한 향상을 보여 완벽한 용서를 이루어낸 것처럼 점수가 나올 수도 있지만 이럴 때 그 점수의 참된 지위 여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진실한 상태를 점수로 표현했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변인이 개입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의 답변의 점수를 통해 가장 높게 발전된 사항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칭찬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또한 용서를 방해하고 어렵게 만드는 사항이 드러났다면 그것들을 천천히 다시 살펴보면서 대처해야 한다. 내담자가 이 모든 결과에 대해 만족하고 영적인 자유를 체험하기 시작했다면 이제 어느 정도 상담을 마칠 때가 다가옴을 서로가 느낄 수 있다. 

 

이 상담의 종결은 새로운 고통과 상처가 온다 하더라도 이전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생겼다고 상담자나 내담자 모두 인정할 수 있을 때이다. 상담의 종결 뒤에도 이러한 용서의 과정을 매일의 삶에서 쉬지 않고 계속해 나간다면 점차로 내담자 자신은 용서가 처음보다 훨씬 쉬워지며 자신이 점점 영적으로 강해지고 자유로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용서의 4단계에 대해 살펴보면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알아야 할 점은, 용서는 일회적인 완성이 아니라 삶의 모든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여정이라는 사실이다. 곧 사목 상담자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용서는 아주 갑자기 이루어지거나 짧은 시간 안에 높은 향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과정 속에서 천천히 이루어지는 삶의 긴 여정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보통의 경우 용서를 하고 나서 1년 또는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아직 오래 묵은 상처가 있음을 발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용서를 하고 난 뒤에도 새로운 상처들이 생겨나고 새로운 고통이 자신을 괴롭히게 됨을 느끼게 된다. 곧 인간은 용서의 과정을 통해 누구나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준비를 할 수는 있어도 그것에 결코 면역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사목 상담자는 내담자의 상담 결과에 대해서 섣부른 샴페인을 터뜨리거나 때 이른 절망을 할 필요도 없다. 용서는 일회적인 결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할 기나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글을 마치면서 내담자의 이야기에 의존하지 않고 좀 더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통계를 통한 내담자의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심리학적 도구를 소개한다. 이 도구들은 각자가 느끼는 분노의 감정 지수가 다르며 또한 용서에 대한 가능성 여부가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 상담자가 나름대로 상담의 계획을 세워나가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 용서를 위한 사전 측정 도구

 

① Coopersmith Self-Esteem Inventory(CSEI) : 내담자의 자기개념과 자존감을 평가할 수 있는 척도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쉽게 용서할 수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척도가 사용된다. S. Coopersmith, Self-esteem inventories, Palo Alto, CA: Consulting Psychologists Press, 1981년.

 

② Beck Depression Inventory(BDI) : 우울감의 지수가 높을수록 더 쉽게 상처를 인식하고 더 높은 강도의 고통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우울 지수가 높으면 사람과 사물에 대한 올바른 인지능력이 떨어지며 부정적인 사고와 감정이 발생한다. 용서는 일단 세상과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전제로 한 만큼 이에 대한 사전 평가가 필요하다. Hope Scale과 함께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A. T. Beck·C. H. Ward·M. Mendelson·J. Mock, and J. Erbaugh, An Inventory for Mesuring Depression, Archives of General Psychiatry 4, 1961년, 561-571면.

 

③ Spielberger State-Trait Anxiety Inventory:상태 불안 척도, 긍정적인 관점과 시각에 걸림돌이 되는 요인을 측정해 줄 수 있다. MMPI와 더불어 시행할 수 있다. C. D. Spielberger·R. L. Gorsuch· R. Lushene·P. R. Vagg and G. A. Jacobs, Sate-Trait Anxiety Inventory(Form Y): Self Evaluation questionnaire, Palo Alto, CA: Consulting Psychologists Press, 1983년.

 

♠ 용서의 가능성과 결과를 위한 측정 도구

 

① Psychological Profile of Forgiveness Scale(PPFS) : 이것은 로버트 엔라이트 용서 지수(EFI)의 전신으로서 특정한 불의의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에게 용서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측정한다. 용서 지수에 대한 일반적인 측정도구로서 EFI 와 함께 용서 지수 측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② Enright Forgiveness Inventory(EFI) : 용서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에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으로서 로버트 엔라이트 교수와 그 연구팀이 위스콘신 메디슨 주립대학에서 고안하여 용서 지수 측정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 측정 도구의 특징과 효용성은 다음과 같은 요소의 구별을 나름대로 보장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엔라이트 교수는 용서하는 사람은 가해자에 대해 긍정적인 감정과 인식 그리고 행동을 취하며 동시에 가해자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인식 그리고 행동들을 지양한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측정하는 데에는 기존의 평가도구로 한계가 있음을 지적했다. 예를 들어, 어떤 내담자는 때로 진정한 용서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고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마치 자신은 진정한 용서를 한 것 같은 반응을 나타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것이 참된 용서이며 거짓된 용서인지에 대한 개념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내담자가 간혹 자신이 가해자를 용서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담자가 가해자의 행동에 대해 무조건 눈감아주거나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며 “나는 더 이상 화가 나지 않는다.”라든가 “나는 더 이상 괴롭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용서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엄연히 거짓 용서인 것이다. 

 

용서는 결코 범죄의 묵인이나 사면 또는 그 사실을 없던 것처럼 지워버리는 망각과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엔라이트 교수는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PPFS 측정 도구를 좀 더 보완하게 된다. 그는 감정과 지성 그리고 행동의 세 차원에서의 용서 지수와 거짓 용서의 가능성에 대한 측정을 추가하여 통합적인 용서 지수 측정을 고안하였다. 이 측정도구에 대한 구입과 저작권에 대한 사항은 International Forgiveness Institute, P.O. Box 6153, Madison, WI 53716에 문의하거나 www.forgivenessinstitute.org를 참조하면 된다. [사목, 2004년 10월호, 박현민(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홍보국장 · 본지 주간 ·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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