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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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오ㅣ성모신심

허영엽 신부의 나눔: 고해성사의 은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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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2 ㅣ No.819

[허영엽 신부의 ‘나눔’] 고해성사의 은총

 

 

사목 생활 중 힘든 일이 무엇인지 물으면 많은 신부님들이 강론과 고해성사라고 답합니다. 강론과 고해성사는 사목활동 중 가장 중요하고, 아무도 사제를 대신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강론과 고해성사는 한편으로는 사제에게도 하느님의 현존 체험을 가장 많이 하게 하는 현장이기도합니다.

 

그런데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고해성사를 들을 때 마음의 부담뿐 아니라 체력적(?)으로도 너무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좌 신부로 사목할 당시에는 우리 서울대교구에 보좌신부가 있는 큰 본당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있던 본당에서는 판공성사 때 주임신부님과 보좌 둘이서 모든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어야 했습니다. 당시 본당의 신자 숫자는 1만 명에 가까운 큰 본당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순시기와 대림시기 1년에 두 번 단단히 마음을 먹고 홍역(?)을 치러야 했습니다. 판공성사 기간은 보통 몇 주일 정도 지속되는데 나중에 성사표를 계산해보면 평일은 하루에 100명 이상, 주일 같은 경우에는 500명이 넘기도 했습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수백 명에게 성사를 주면서 체력적으로 몹시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후임 신부님은 몸이 너무 아플 때 본당사무실 간이침대에 누워 옆으로 고해틀을 세워두고 고해성사를 주었다고도 합니다.

 

당시 저는 좁은 공간 안에 있는 것이 몹시 힘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폐쇄공포증이었나 싶기도 합니다. 일단 좁은 공간에 들어가 시간이 지나면 답답해지고 숨쉬기가 불편해지고 어지럽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추울 때는 옷을 껴입으면 되지만 더울 때는 정말 난감했습니다. 당시에는 냉방장치가 제대로 된 된 성당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도 온몸이 흠뻑 땀으로 젖곤 했습니다.

 

 

사제에게도 고해성사는 하느님 은총의 체험 현장

 

그럼에도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은총을 깊이 체험하는 현장임이 틀림없습니다. 어느 때는 정말 몸이 피곤해 졸기도 하는데 “신부님, 고백한 지 20년 되었습니다” 하면 마치 성령이 깨우시는 듯 갑자기 정신이 맑아져서 오랜만에 성당을 찾은 신자에게 한마디라도 더 따뜻한 말을 하려고 노력하곤 했습니다. 우선 고해성사를 오랜만에 보는 분을 만나면 반가운 생각이 듭니다. 나도 이런데 하느님은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지곤 하죠.

 

많은 분들의 고해성사가 체험이 있었지만 역시 특별히 생각나는 성사가 있습니다. 독일에서 유학할 때의 일입니다. 도서관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는데, 외국인들 사이에서 한 젊은 자매가 쭈뼛쭈뼛 다가오더니 “저, 혹시 신부님이세요?” “네 그렇습니다.” “신부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저도 한국에서 온 신자예요. 신부님 한 가지 청이 있어요. 고해성사를 주실 수 있으세요?” “네 그럼요, 그럼 어디로 가실까요?” “여기서 주셔도 돼요. 어차피 외국 분들은 한국말을 모르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도서관에서 내 옆에 나란히 앉아서 성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외국에 있다 보니 오랫동안 성사를 보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 자매는 작은 목소리로 성사를 시작했고, 나는 그 자매에 바짝 붙어 귀를 쫑긋 세워 들었습니다. 주위에 있던 외국인 학생들이 우리 둘을 힐끗 쳐다보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중간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는 소리가 점점 커졌지요. 그러자 외국 학생 중에서 나를 째려(?)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내가 그 자매에게 무엇을 잘못해서 울고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훈계와 사죄경이 끝나자 그 자매는 아주 환하게 웃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주 은혜로운 고해성사였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억이 남는 또 다른 고해성사 체험이 있습니다. 예전 사제서품 미사 때였습니다. 당시 저는 서품 받은 지 몇 년 안 되어 앞에서 대여섯 번째 줄에 서서 입당행렬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새 사제로 서품될 부제님들은 뒤쪽에 줄지어 왼팔에는 제의를 오른손에는 초를 들고 거룩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중에는 입학 동기인 K부제도 있었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급히 불렀습니다.

 

“왜?” “허 신부, 나 고해성사 좀 빨리 줘~!” “뭐라고?~ 5분 후면 성당으로 행렬을 해야 하잖아.” “그러니까 저쪽으로 걸어가면서 고해성사를 줘!!” 작은 목소리지만 다급했어요. “알았어.” 행렬에서 약간 벗어나 이야기를 나누듯 잠시 걸었습니다. “죄인에게 강복하소서….” 다행히 명동대성당 행렬이 들어가기 전 고해성사를 마쳤습니다. 동료 부제님들과 입당 행렬하던 K가 나를 돌아보며 고맙다는 듯 씩 웃어보였습니다. 사제품을 받기 전 가장 깨끗한 영혼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순수한 마음에 지금도 콧등이 시큰해집니다.

 

 

차장 소녀들의 힘겨운 삶의 고해성사 기억에 남아

 

첫 보좌 신부로 지냈던 수유동성당 근처에 예전에는 버스 종점이 있었습니다. 오래전에는 ‘버스 차장’이란 직업이 있었습니다. 대개가 시골에서 홀로 올라온 어린 소녀들이 돈을 벌어 동생 공부시키고, 고향 식구들 생활비를 보냈지요. 버스 종점 근처에는 버스 차장들의 기숙사가 있었습니다. 말이 기숙사지 밖에서 보아도 공장 같은 허름한 큰 건물이었습니다.

 

주일날 오후면 수유동성당에 와서 미사와 고해성사를 보는 17~18세가량의 어린 차장 소녀들이 많았습니다. 그 소녀들이 고해소에 들어왔을 때 그저 “많이 힘들죠?” 사제의 말 한마디에도 울음을 터뜨리곤 했습니다.

 

사실 당시에 그 차장 소녀들은 의식주가 다 힘들었습니다. 옷이야 사시사철 유니폼을 입고 있었지만, 추운 겨울 손바닥이 버스 벽에 착착 붙는 한겨울에 장갑도 없이 온종일 밖에서 일해야 했던 이들도 많았습니다. 먹는 것도 형편없었고 늘 모자랐겠죠. 식사시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겁지겁 먹고 또 서둘러 다음 배차 시간에 나가야 하니 몇 년 버스차장을 하면 위장병, 하지정맥류와 부인병 등 스무 살 이전에 종합병원처럼 되는 이가 많다고 했습니다.

 

몸이 힘든 건 젊음으로 견딘다 해도 요즘 같으면 말도 안 되는 인권유린에 요금시비에 승객들이 “못 배운 ○” 운운하며 머리채를 잡는 등 사람 대접을 못 받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차장 소녀들이 가장 부러운 사람이 버스 안에 책을 읽는 ‘여고생이나 대학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월급 대부분을 자기 자신보다 가족들과 동생들 공부를 위해 송금했다지요.

 

차장 소녀들의 고해성사가 기억이 많이 나는 것은 어린나이에 세상 한가운데서 너무 힘겹게 사는 것이 마음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모두 중년이 되었을 그 소녀들이 모두 행복해졌기를 기도합니다. 고해성사는 신자뿐 아니라 사제에게도 더할 수 없는 하느님을 만나는 현장이 되지요. 사제들만이 갖는 특별한 은총이라 할 수 있겠지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7월호, 허영엽 마티아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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