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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ㅣ 봉헌생활

수도원 이야기: 기둥 위의 첫 사람 - 시메온의 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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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0-05-07 ㅣ No.643

[수도원 이야기 - 기둥 위의 첫 사람] 시메온의 고행

 

 

터키 카파도키아의 광야.

 

 

영어에 ‘스타일라이트’(stylite)라는 단어가 있다. 기둥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스툴리테스’(στυλιτη?)에서 유래한 말로 ‘주상 성자’(柱上聖者), ‘주상(柱上) 수도자’, 곧 ‘기둥 위의 수도자’라는 뜻이다.

 

동굴의 수도자, 사막의 수도자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기둥 위의 수도자’는 무슨 말일까? 이는 말 그대로, 기둥 위에서 고행하며 살았던 수도자를 말한다. 지금은 생소하게 보이지만 4세기 이후 동방 교회에서는 이러한 봉헌 생활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 ‘기둥 위의 성자’ 시메온 성인이다.

 

크로아티아 자다르 포럼의 고대 기둥. 지금은 생소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4세기 이후 동방교회에서는 이러한 기둥 위에서 봉헌 생활을 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개종한 양치기 수도자

 

4세기 말 시리아에서 이교도로 태어난 시메온은 양치기였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양치기들의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도시 생활에 지친 많은 이가 전원생활을 꿈꾼다. 그들은 시골에 가기만 하면 산과 들을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유토피아적 삶이 펼쳐지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농촌 생활, 산촌 생활은 생각처럼 목가적이지 않다. 낭만적이지도 않다. 나는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 안다. 시골의 산과 들판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단한 일인지 말이다.

 

시메온이 처한 환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양치기들은 여유롭게 전원생활을 한 이들이 아니다. 도둑과 들짐승들로부터 양 떼를 지키고자 밤에도 들에서 야영했다. 양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늘 긴장을 유지해야 했다. 자신의 양을 뺏으려는 사람이나 짐승이 나타나는 비상 상태에 이르면 극도로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험한 일을 하다 보면 대체로 완력이 세지고 성격도 거칠어지기 마련이다. 양치기들은 아마도 턱수염 덥수룩한 산적 같은 외모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당시의 양치기 시메온은 거친 세상에 맞서 거칠게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실제로 우리는 양치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내가 가진 양을 빼앗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우리와 쏙 빼닮은, 눈을 뜨면 일어나 움직이고 눈을 감으면 자는 의미 없는 일상을 반복하던 양치기 시메온에게 어느 날 계시가 찾아들었다. 봉헌 생활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예수님께 경배한 목동들이 하느님께도 찬양했다면, 시메온은 이를 봉헌 생활로써 실천했다. 그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규율이 엄격하기로 유명한 한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곳의 규율마저 싱겁다고 느낀 그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밧줄로 자신을 꽁꽁 묶어 단식하는 등 극도의 고행을 실천했다.

 

그런데 수도원은 ‘함께’ 봉헌 생활을 하는 곳이다. 유독 혼자서 과하게 고행하는 시메온을 품기란 어려웠다. 수도원을 나온 시메온은 인근 오두막에서 잠시 살다가, 다음에는 작은 동굴을 찾아 들어가 노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눈에 기둥 하나가 들어왔다. 시메온은 무릎을 쳤다. 기둥 위야말로 자신이 꿈꾸던 완벽한 고행처였다.

 

 

기둥 위의 고행

 

그는 그렇게 사막이나 동굴로의 수평적인 탈출이 아닌, 수직적인 탈출을 감행한다. 처음에는 3m 높이의 기둥에 올라가서 생활했는데, 곧 6m 기둥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더 높이 옮겨 갔다. 마지막 기둥의 높이는 자그마치 18m나 되었다. 더 높은 기둥의 선택은 불가능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다리를 댈 수 없으니 식량을 공급받을 수 없었으며, 둘째, 기둥 아래 있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기둥 꼭대기에는 난간을 둘러친 가로세로 각각 2m의 공간이 있었다. 시메온은 이 작은 공간에서 햇빛과 비바람을 고스란히 맞으며 노숙했고, 잠잘 때 외에는 앉거나 눕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소박한 식사만을 했는데, 음식은 자발적으로 제자가 되기를 청한 이들이 기둥 아래에서 일일이 챙겨 주었다.

 

위대한 성자가 기둥 위에서 고행한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수많은 사람이 그를 구경하러 몰려들었다. 기둥은 순례지가 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순례객들이 시메온에게 청하는 기도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질병, 고통, 불임, 죄악, 심지어는 자연재해까지 시메온이 나서서 해결해 주길 바랐다. 신기하게도 시메온의 기도는 바로 효과를 보여, 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소아시아 에페소의 고대 그리스 유적.

 

 

시메온의 유산

 

시메온의 일과는 사도직 수행으로 빡빡했다. 그는 새벽 세 시부터 기도했고 기둥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강론했다. 그러고 난 뒤 찾아온 이들의 고충을 듣고 상담했으며 병자를 치료했다. 이교도를 개종시켰으며 전염병과 기근, 각종 재해의 해결사가 되었다. 신학 논쟁이 벌어졌을 때는 주교가 직접 시메온을 찾아와 조언을 듣기도 했다. 그렇게 일흔을 조금 넘긴 459년에 눈을 감았는데, 그때서야 오랜 고행을 마치고 기둥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시메온이 선종한 뒤 기둥 위 수도자의 수는 급격히 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수도자였던 다니엘은 시메온과 면담한 뒤 곧바로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33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오늘날의 이스탄불) 변두리의 기둥 위에서 산 다니엘은 84세에 죽었다.

 

기둥 위에서 봉헌 생활을 하는 전통은 서방 교회에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동방 교회는 1800년대 말까지 간헐적으로나마 그 명맥을 유지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기둥 위 수도자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 시대의 맥락에서 이를 바라보아야 한다. 욕정과 세속의 유혹이 지금보다도 강했던 시절이었다. 사람들 대부분이 매우 방탕히 생활했다. 수도자들은 그처럼 죄악이 만연한 세상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을 때에야 하느님께 오롯이 봉헌하는 삶을 살고 더 나아가 그분과의 유대를 회복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봉헌 생활 전통은 오늘날의 이집트, 이란, 이라크, 터키, 시리아, 그리스 등 동방 교회 지역에서 생겨났고 그곳에서 성행하였다. 처음에는 사막이나 기둥 위에서 홀로 봉헌 생활을 하다가, 차츰 같은 생활을 원하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공동생활 형태가 생겨났다. 사람들이 사막으로 가서 생활한다는 소문은 곧 유럽 서방 교회에 퍼졌고 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동방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유행은 흐른다. 동쪽 발원지에서 넘쳐 난 봉헌 생활 전통의 거센 물결은 이제 새롭게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달마는 동쪽으로 갔고, 동쪽의 중국에서 불교의 화려한 꽃이 피어났다. 동방 교회 수도자는 서쪽으로 갔고, 서쪽의 유럽에서 이제 그리스도교 봉헌 생활의 화려한 꽃이 피어난다.

 

* 최의영 안드레아 - 교황청립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CFIC) 동아시아 준관구장이다. 1998년 입회하고, 교황청립 라테라노 대학교 수도자 신학대학원(클라렛티아눔)을 졸업했다. 로마 ‘이디 제약회사’(IDI Farmaceutici)의 이사, 알바니아 NSBC 가톨릭대학교 부설 병원장을 지냈다.

 

[경향잡지, 2020년 4월호, 글 · 사진 최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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