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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가톨릭] 베드로 岐部와 187순교자 시복, 정식으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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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훈 [cmf005k] 쪽지 캡슐

2007-08-31 ㅣ No.243

원문의 출처는 일본 가톨릭중앙협의회입니다. 사이트에 가시면 더 구체적인 자료 얻으실 수 있습니다.

원문 : http://www.cbcj.or.jp/jpn/feature/kibe_187/index.htm

 교황청 시성성 신학심사부회는 2006년 5월 7일에 "베드로 岐部와 187 순교자"의 시복이 "가능"하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후에 시성성의 추기경회와 교황의 서명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어서, 시복의 수순이 최종단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가까운 장래, 이 시복이 "교령"으로 정식으로 발표되는 것을 예상하며, 2006년 6월의 주교총회에서 "시복준비위원회"(가칭)의 발족이 제안되어 이후 시복식의 가능성을 포함한 기획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미 시성성 장관 (호세 사라이바 마르틴스 추기경)으로부터도 매스 매디어를 통하여 일본에 있어서의 순교자들의 시복에 관하여 널리 드러내도록 요청되어 지고 있어, 이하와 같은 것을 염두해 두고 "188명의 순교자"를 다루기로 하였다. 일본 국내의 순교자들에 대하여 폭넓게 알리며, 순교자의 위대함에 대해서가 아니라,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가지 문제에 어떤 암시를 주고 있는지에 대해 중점을 두고자 한다. 또한 이것들의 자료는 순교자 시복조사 특별위원회로부터 제출되어진 것으로 내용은 재차 추가될 예정이다.

 

여기서 참고로...

일본가톨릭 약사

원문 : http://www.cbcj.or.jp/jpn/diocese/history.htm#fracisco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일본 도착과 선교의 시작
일본에 있어서의 가톨릭 선교는 1549년(天文18년) 8월 15일, 예수회원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카고시마에 발을 디딤으로서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교통상황은 극히 불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누스회 등의 회원이 인도, 필리핀등으로부터 끊이지 않고 일본으로 건너와, 각지에 교회, 수도원, 학교, 병원등을 설립하며 열심히 선교를 하고 있었다. 교회는 경이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1614년(慶長 19년)의 통계에 따르면, 성직자 150명, 신도수 65만명을 넘어, 신도 중에는 영주 55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교
1578년 (天正 15년)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대에 금교령이 내려져, 박해가 격렬해졌으며, 1507년 (慶長 원년) 2월 5일, 나가사키에서는 26명의 신도, 수도자, 사제가 순교당한 것을 시작으로, 많은 신자가 추방, 사형 등의 극형을 당했다. 그러나 히데요시에 의한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天正소년 사절의 파견, 세미나리오와 코레지오의 설립, 키리시탄판 인쇄등, 교회는 또다르게 발전을 하고 있었다. 

재선교개시와 숨은 키리스탄 발견
그후 약 3세기 동안, 1846년 (弘化 3년),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에 의해 포교 계획이 진행되어, 폴가드 주교가 초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지만, 금교령에 의해 입국조차 하지 못한 채, 홍콩에서 허무하게 세월만 보냈다. 그러나 1857년 (安政 4년) 쇄국령이 철폐되면서, 제3대 교구장 지라르 신부는 영사관 주재 사제로서 일본에 와서, 1862년 (文久 2년) 처음으로 요코하마에 교회를 설립되고, 프티쟌 신부는 나가사키에 상륙하여, 1865년 (慶應 원년)에 大浦천주당을 설립하였고, 뒤이어 浦上(우라가미??)에 있었던 구신자의 자손을 발견하여, 일본에 있어서의 가톨릭은 다시금 부흥되게 된다. 

* 키리시탄 : 우리나라의 교우촌이 박해로 숨은 신자들의 집합체를 나타낸다면 키리시탄은 한사람 한사람 혹은 신자들을 나타낸는 말이다. 하여간 박해로 인해 시골로 숨어든 신자들. 

신앙의 자유와 교회의 발전
그후 1889년 (明治 22년) 2월 1일 제국헌법령이 선포되면서 신앙의 자유가 확보되고 파리외방선교쇠는 선교의 영역을 확대하여 각지에 교회를 건설하고 또한 산 모르회, 작은 예수회(한국의 작은 예수회와 다름), 샤르트르 성바오로회, 마리아회등의 수도회를 초대하여 사립학교사업과 병원사업등을 시작하여 더욱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와 같은 부흥 사업의 초기의 선교는 파리외방선교회에 맡겨져 있었으나, 교회가 발전하면서 각 수도회가 일본으로 알아서 건너오면서, 로마교황청은 이것을 다른 수도회 및 선교회에 위임하는 것으로 결정하여, 먼저 1904년 (明治 37년)에는 시코쿠교구를 신설하고 도미니코회의 로사리오 관구에게 위임하였고, 뒤이어 1912년 (大正 원년)에는 니가타교구를 신언회에게, 1915년 (大正 4년)에는 삿뽀로를 프란치스코회의 후르다관구에게 위임했다. 

또한 1927년 (昭和 2년)에는 나가사키교구, 1937년 (昭和 12년)에는 동경교구를 방인교구로서 독립시키고, 이것을 방인사제단의 손에 위임하였다. 교구를 더욱 나눠서 예수회=히로시마교구1923년 (大正 12년), 도미니코회 몬트리올관구=센다이교구 1927년 (昭和 2년), 살레시오회=오이타교구 1929년 (昭和 4년), 메리놀회=쿄토교구 1937 (昭和 12년), 프란치스코회 카나다관구=우라와교구 1939년 (昭和 14년)에 각각 위임되어 선교에 충실하도록 기획하는 한편 교구장을 방인사제에게 임명하여 적절한 활동을 기대하였다. 그 사이 성심회, 마리아의 선교자 프란치스코회, 성령선교수녀회 등 많은 수도회가 일본으로 들어와서 교육사업을 개시하였고 또한 성모방문자회, 나가사키 순심회등의 방인 수도회가 창립되어, 선교사업을 지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로마교황청과의 관계 [건너뛰고] 

방인추기경 탄생 [또 건너뛰고] 

3개 관구와 16개 교구
현재 일본의 가톨릭 교회는 16개 교구로 나누어져 있으며, 교구장은 모두 일본인 주교가 임명되어 있다. 그 중에서 동경, 오사카, 나가사키는 교회관구로서 교구장은 대주교가 임명되어져 있다. [후략] 

2번의 복음선교추진 전국회의
1987년 11월 20일 ~ 23일, 쿄토에서 제1회 복음선교 추진전국회의(National Incentiv Convention for Evangelization=NICE)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가정의 현실로부터 복음선교의 모습을 찾자"라는 테마 아래, 전국으로부터 선발된 약 300명의 신도, 사제, 주교가 참가했다. 

일본가톨릭 통계로부터의 보고

2006년 현재 일본의 가톨릭 총인구는 452,571명, 가장 많은 신도수의 교구는 동경교구로 93,203명, 교구 총신도수가 1만명도 되지 않는 교구는 니가타, 타카마츠, 오이타, 카고시마 교구로 그중 제일 적은 신도수의 교구는 타카마츠교구로 4,937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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