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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홍) 2025년 11월 24일 (월)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예수님께서는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넣는 것을 보셨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테오파네 베나르 (Theophane Venard)
    같은이름 떼오파네스 , 떼오파네스 , 테오파네스 , 테오파네스 , 테오파노 , 테오파노 , 테오판
    축일 11월 24일
    신분 신부 , 순교자
    활동지역 베트남(Vietnam)
    활동연도 1829-1861년

       베트남에 복음이 전해진 것은 1533년경 중국으로 가던 유럽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선교 사업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지다가 1615년에 예수회가 파견되어 정식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베트남의 사도’로도 불리는 예수회의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는 1623년 성탄절에 이곳에 도착하여 1645년까지 추방과 재추방을 거듭하면서도 수많은 베트남인에게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645년부터 1886년까지 그리스도교 신자를 탄압하는 칙령이 53건 반포되었는데, 거의 3세기에 걸쳐 혹독한 박해가 이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약 13만 명이 희생되었다. 박해가 계속될수록 더 잔혹해졌는데, 뜨득 황제(Tu Duc, 1847~1883년 재위) 통치 중에는 선교사들을 체포하기 위해 거액의 상금을 걸고 사제와 외국인 교리 교사들을 학살하였다. 베트남 출신 교리 교사들의 뺨에는 ‘거짓 종교’를 뜻하는 ‘타다오’(Ta dao)라는 글자로 낙인을 찍어 대중의 경멸을 받도록 했다. 신자들은 재판관 앞에서 십자가를 짓밟으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족과 떨어져 추방되거나 처형당했다.

       17세기에 시작된 박해가 계속 이어지고 19세기에도 더욱 잔인한 박해가 계속되자 프랑스는 이를 막기 위해 1862년 베트남을 침략했고, 1883년에 베트남을 식민지화함으로써 박해를 종식하였다. 이때까지 박해를 받고 순교한 이들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가 시작되어 1900년 5월 27일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64위가 복자품에 올랐다. 그리고 1906년 5월 20일에 교황 성 비오 10세(Pius X)는 베트남에서 순교한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8위를 시복하고, 1909년 5월 2일 20위의 순교자를 복자품에 올렸다. 1951년 4월 29일 네 번째로 25위의 순교자가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1988년 6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117위 베트남의 순교복자에 대한 시성식을 거행하였다. 안남(Annam) 또는 통킹(Tonkin)의 순교자들로도 불리는 117위의 베트남 순교자들은 출신별로 보면 96위의 베트남인과 에스파냐 출신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선교사 11위 그리고 프랑스 출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10위가 포함되어 있다. 신분별로 보면 8위의 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주교들, 50위의 사제들(에스파냐와 프랑스 출신 13위와 베트남 출신 37위), 59위의 베트남 평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성 테오파네 베나르는 1829년 11월 21일 프랑스 중서부 푸아티에(Poitiers) 교구의 생루쉬르투에(Saint-Loup-sur-Thouet, 오늘날의 생루라메르[Saint-Loup-Lamaire]) 마을에서 신심 깊은 교사의 네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나 장 테오파네(Jean-Theophan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했던 그는 9살 때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본당 신부에게 받아 읽으면서 자기도 통킹에 가서 순교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마을에서 50km 떨어진 두에라퐁텐(Doue-la-Fontaine) 대학에서 홀로 하숙하며 공부하고, 몽모릴롱(Montmorillon)과 푸아티에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1850년에 차부제품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서 1852년 사제품을 받고 중국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도록 파견되었다. 그는 7개월의 여행 끝에 1853년 3월 홍콩에 도착한 후 평소 간절히 소망했던 대로 통킹의 선교사로 가게 결정되어 1854년 7월 베트남의 통킹 서부지역으로 떠날 때까지 홍콩에 머물렀다. 그가 베트남에 도착했을 당시는 1847년 그리스도인들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받아 뜨득 황제의 극심한 박해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황제는 종교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리고 사제들이 통킹 영토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다.

       이런 상황에서 비밀리에 통킹에 들어온 성 테오파네 베나르는 그리스도인 마을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며 베트남 출신 교리 교사에게 언어를 배웠다. 그리고 주교를 도와 사목 방문에 따라나서기도 했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결핵에 걸리고 잇따른 질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한의학의 도움으로 어느 정도 치료된 후 그는 박해 중에도 멀리 떨어진 본당을 찾아 성사를 계속 집전하였다. 병으로 쇠약해진 그에게 신자들이 휴양을 권하자 그는 “아직 살아 있으니 일을 해야겠습니다. 죽으면 천국에서 편히 쉬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박해를 피해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1860년 11월 30일 체포되어 하노이(Hanoi)로 압송되었다. 그는 박해 중에도 베트남의 여러 방언을 배워 다양한 종교 서적을 번역하고 신약성경을 베트남어로 번역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그리고 선교 활동 중일 때뿐 아니라 감옥에서도 많은 편지를 썼는데, 나중에 그의 동생에 의해 출판되어 프랑스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영성과 선교 사상은 리지외(Lisieux)의 성녀 데레사(Teresia, 10월 1일)와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 1861년 2월 2일 그는 처형장으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865년 그의 유해는 파리의 외방전교회 지하 묘지로 옮겨져 안치되었고, 그의 머리는 하노이 인근 끼엔 케(Kien Khe)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성당에 모셔져 공경을 받고 있다.

       성 테오파노 베나르(Teofano Venard)로도 불리는 그는 1909년 5월 2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1988년 6월 19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116위의 동료 순교자들’의 일원으로 성인품에 올랐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시성식 강론을 통해 혹독한 박해를 이기고 영웅적인 모범을 보인 순교자들의 용기와 신앙심에 대해 아낌없는 칭찬을 보내며, 그들의 축일을 11월 24일에 기념하도록 보편교회 전례력에 포함하였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2월 2일 목록에서 오늘날 베트남에 속한 통킹의 하노이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사제인 성 요한 테오파네 베나르가 6년간 비밀리에 복음을 전하며 고난과 고통을 겪은 후 감옥에 갇혀 뜨득 황제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고요히 순교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리고 11월 24일 목록에서는 성 안드레아 둥락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로, 이날 베트남 여러 지역에서 순교한 117명의 순교자를 함께 기념하는데, 이들 중에는 8명의 주교와 많은 사제와 수많은 남녀노소 평신도가 포함되었으며, 그들 모두 십자가를 모독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부인하기보다는 추방 · 투옥 · 고문 · 극심한 처벌을 선택했다고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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