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성인/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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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벤델리노 (Wendelin)
같은이름 벤델린 , 벤델리누스 , 웬델린 , 웬델리노 , 웬델리누스 축일 10월 21일 신분 은수자 활동지역 트리어(Trier) 활동연도 +7세기
성 벤델리누스(Wendelinus, 또는 벤델리노)는 독일 트리어 지방의 선교사이자 은수자로서, 농촌 사람들과 목동들 그리고 가축과 농업의 수호성인으로서 게르만족 지역에서 큰 공경을 받아왔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정확한 정보는 거의 없다. 전설적인 이야기에 근거해 라틴어와 독일로 된 최초의 전기도 1417년 이후에 등장했다. 게다가 ‘벤델린’(Wendelin)이란 이름이 고대 독일어로는 ‘방랑자’ 또는 ‘순례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스코틀랜드 또는 아일랜드 왕의 아들로 6세기 중반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20살 무렵에 모든 부귀영화를 포기하고 은수자로 살 결심을 한 후 비밀리에 집을 떠나 로마로 순례를 갔다. 전설에 따라서 로마에 도착해 교황의 축복을 받고 조용한 곳을 찾아 독일 트리어 근처에 정착해 은수자가 되었다고도 하고,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로마까지 가지는 못하고 트리어에 도착해 정착했다고 한다. 아무튼 그는 1000년경 기록된 트리어의 주교 성 마녜리코(Magnericus, +596년경, 7월 25일)의 전기에서 처음 언급되었는데, 그가 주교로 재임 중일 때 벤델리노라는 독실한 은수자가 보주(Vosges) 숲에 살았다고 했다.
트리어에 도착한 성 벤델리노는 어느 귀족의 집에 들어가 양과 소를 돌보는 목동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느 날 그의 주인은 성 벤델리노가 가축을 데리고 너무 멀리 가자 해지기 전에 영지로 돌아오지 못할까 봐 몹시 화를 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성 벤델리노는 가축을 데리고 주인보다 먼저 집에 도착해 있었다. 그러자 주인은 그가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임을 알고 영지 근처에 은둔소를 지어주었다. 그 뒤로 성 벤델리노는 은둔소에서 고요 속에 기도에 전념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축들의 질병으로 어려워하는 이들에게 조언과 도움을 주며 지냈다. 그의 은둔소 근처 톨리(Tholey)에는 베네딕토회 수도원이 있었는데, 그곳의 수도승들이 그의 성덕에 대해 듣고 그를 수도원장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베네딕토회 톨리 수도원의 원장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톨리 수도원은 617년경 성 벤델리노가 선종한 후인 630년경에 설립되었기 때문에, 톨리 인근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은수자들 공동체의 원장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성 벤델리노는 톨리 수도원의 초대 수도원장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 벤델리노가 선종한 후 수도승들은 웅장한 돌무덤을 만들어 그를 묻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그의 시신이 무덤 옆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일이 다음 날에도 반복되자 수도승들은 그의 시신을 수레에 태우고 소 두 마리에게 원하는 데로 끌고 가도록 했다. 소들은 수레를 끌고 평소 성 벤델리노가 기도하던 언덕 위의 작은 은둔소로 갔고, 그곳이 그의 무덤이 되었다. 나중에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작은 마을인 장크트 벤델(Sankt Wendel)이 형성되었다. 그에 대한 공경은 독일어권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14세기에 그의 전구로 전염병이 극복되자 그의 무덤 위에 자를란트(Saarland) 지역에서 가장 뛰어난 건축물인 성 벤달리노 대성당(Wendalinusbasilika)이 건립되어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종교개혁 시기에 순례의 물결이 다소 감소했으나 18/19세기 이후 그에 대한 공경이 활발해지면서 다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독일어권에서는 10월 20일에 그의 축일을 기념했는데, 옛 “로마 순교록”에 포함되지는 않았으나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0월 21일 목록에서 오늘날 독일에 해당하는 아우스트라시아(Austrasia)의 트리어 근처에 성 벤델리노 은수자가 있었다고 그에 대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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