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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5년 11월 11일 (화)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가톨릭 성인/축일
    성 메나스 (Menas)
    같은이름 메나 , 멘나 , 멘나스 , 미나 , 미나스
    축일 11월 11일
    신분 군인 , 순교자 , 은수자
    활동지역 이집트(Egypt)
    활동연도 +4세기초

       성 메나스는 285년경 이집트의 멤피스(Memphis) 부근 니키우(Nikiou, 오늘날 이집트의 카이로 북서쪽에 있는 자위야트 라진[Zawyat Razin])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과 관련한 전설적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신심 깊은 그리스도인이었으나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어머니인 에우페미아(Euphemia)가 동정 마리아의 축일에 성모님 이콘 앞에서 자녀를 주시기를 청하며 눈물로 기도하던 중 이콘에서 ‘아멘’(Amen)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 후 아들을 낳자 그 이름을 ‘메나스’(Menas)라고 지었다고 한다. 성 메나스는 메나(Mena), 멘나(Menna), 멘나스(Mennas), 미나(Mina), 미나스(Minas) 등으로도 불린다.

       성 메나스에 대해서는 여러 언어로 다양한 전승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14살 때 지방 행정관이었던 아버지 에우독시오스(Eudoxios)를 여의고, 이듬해 로마군에 입대해 군인으로서 소아시아 중서부 프리기아(Phrygia) 지방의 코티에움(Cotyaeum, 오늘날 튀르키예 중서부의 퀴타히아[Kutahya])에서 복무하며 큰 명성과 지위를 얻었다. 그러다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재위)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군복을 벗고 사막으로 들어가 비밀리에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그러던 중 많은 그리스도인이 박해로 목숨을 잃자 그 또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수많은 관중이 모여 있는 경기장으로 가서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인임을 선언하고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며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옛 “로마 순교록”은 11월 11일 목록에서 이 같은 전승에 기초해 그에 대해 전해주었다. 그 뒤로 성 메나스의 시신은 고향에 묻히기를 원했던 그의 뜻대로 이집트로 옮겨졌고, 낙타에 싣고 옮기던 중 낙타가 더는 가지 않고 멈춘 곳에 그의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성 메나스는 대표적인 ‘군인 성인’으로 널리 알려졌고, 그의 무덤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가 사망한 후 15살의 나이에 로마군에 들어갔고, 아버지의 명성에 힘입어 높은 지위를 얻고 알제리로 파견되어 복무했다. 그러던 중 그리스도께 일생을 헌신하기 위해 입대 후 3년이 되는 해에 군대를 떠나 사막으로 들어가 은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5년을 은수자로 살던 중 천사의 음성을 들었다. 천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경건한 삶을 살도록 불림을 받아 복이 있다며 세 가지 불멸의 왕관을 받게 될 것인데, 그것은 순결과 금욕 생활과 순교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성 메나스는 즉시 그 지역의 통치자에게 달려가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참수형으로 순교해 불멸의 월계관을 얻었다. 그의 순교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많은 이교도들에게도 큰 감동을 주었다. 성 메나스가 순교한 후 군인들이 그의 시신을 3일 동안 불태웠으나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 성 메나스의 여동생과 신자들은 어렵게 그의 시신을 수습해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로 옮겨 안치하였다. 그리고 박해가 끝나고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 5월 2일)가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였을 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성 메나스의 시신을 낙타에 싣고 리비아 사막으로 가라 했고, 그렇게 이동하던 중 알렉산드리아 남서쪽 마리우트(Mariout) 호수 부근에서 낙타가 멈춰 선 후 더는 움직이지 않자 하느님의 뜻으로 생각해 그곳에 그의 시신을 안장하였다.

       그리고 펜타폴리스(Pentapolis, 리비아 동부 해안가의 있었던 5개의 고대 도시)의 베르베르족(Berbers)이 알렉산드리아에 반기를 들었을 때, 로마 총독은 비밀리에 성 메나스의 유해를 모셔와 보호자로 삼았다. 베르베르족을 물리치고 승리한 후 총독은 성 메나스의 유해를 원래 있던 자리에 모시지 않고 알렉산드리아로 가져가려 했다. 하지만 시신을 싣고 돌아오던 낙타가 마리우트 호수를 지나자 무릎을 꿇고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낙타에 옮겨 실었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총독은 하느님의 뜻임을 깨닫고 튼튼한 나무로 만든 관 안에 성인의 유해를 담은 은제 상자를 넣고 매장하였다. 그 후 성 메나스의 무덤이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한 양치기가 그곳을 지나던 중 병에 걸린 어린 양이 회복되는 것을 발견한 후 많은 병자가 찾아와 치유의 기적을 체험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제노 황제(474~491년 재위)에게 나병에 걸린 딸이 있었는데, 성 메나스가 그녀의 꿈에 나타나 자신의 시신이 그곳에 묻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그녀는 그곳을 찾아 완치되었고, 이 이야기를 들은 황제는 성 메나스의 시신을 발굴하고 그 위에 대성당을 짓도록 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남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그의 무덤을 중심으로 5~6세기에 아부 메나(Abu Mena)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즉시 중요한 순례지가 되었다. 성 메나스는 특별히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는 물론 동방정교회와 가톨릭교회에서도 위대한 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다. 그의 무덤이 있는 곳에는 90개가 넘는 치유의 샘이 생겼고, 많은 병자가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면서 초기 그리스도교의 ‘루르드’라고 불리기도 했다. 아부 메나는 7세기 중반 무슬림에게 정복되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신학자인 칼 마리아 카우프만(Carl Maria Kaufmann)은 1905년에 한 베두인 소년에게 낙타 두 마리 사이에 성 메나스가 그려진 유리병을 받고 본격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해 대성당, 세례당, 바실리카(공회당), 수도원, 목욕탕, 주택 등 고대 아부 메나 도시의 유적들을 찾아냈다. 아부 메나 그리스도교 유적지는 197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지역 개발 등 주변 환경의 변화로 보존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2001년 위험에 처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추가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은 11월 11일 목록에서 이집트의 마리우트 호수 너머에 순교자 성 메나스가 있다고 짧게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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