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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신 김대건 · 최양업 전36: 라파엘호 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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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2-03 ㅣ No.2057

[성 김대건 · 최양업 전] (36) 라파엘호 출항


페레올 주교 데려오기 위해 목선 라파엘호 타고 중국으로 향하다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맞아 2021년 10월 대전교구 강경성지성당이 강경포구에 재현한 라파엘호 모습. 가톨릭평화신문 DB.

 

 

김대건 등 라파엘호 승선자들

 

김대건 부제는 페레올 주교가 지시한 일들을 모두 마무리하고 1845년 4월 30일 조선대목구 재산인 배를 타고 마포나루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중국 강남이었다. 페레올 주교를 이곳에서 만나 이 배로 조선에 입국시키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다. 현석문(가롤로)과 이재의(토마스), 최형(베드로), 임성실, 임치화, 노언익, 김인원 등 11명이 배에 같이 탔다. 이들 중 임성룡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임성실과 노언익 등 4명만이 사공이고, 나머지는 바다를 본 적도 없는 이들이었다.

 

현석문은 당대 조선 교회 최고 평신도 지도자로 명도회를 이끌었다. 이재의와 최형은 앵베르 주교가 선발한 신학생이었다. 이재의는 이승훈(베드로)의 손자로 앵베르 주교의 복사로 활동했고,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해 현석문이 「기해일기」를 쓰는 데 도움을 줬다. 그는 또 김 부제의 조선 입국을 돕는 등 김대건을 위해 아낌없이 후원하며 교회 재건에 힘쓴 인물이다. 최형은 김대건의 신학생 동기인 최방제의 형으로 모방 신부의 복사로 교회 일에 헌신했다.

 

임성실은 아버지 임치백(요셉)이 김대건의 복사인 이의창(베난시오)과 친분이 있어 이번 여행에 합류했다. 그는 이 배를 사는 데 도움을 줬고 이번 항해 중에 김대건 부제로부터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임성룡과 노언익은 훗날 김대건 신부가 황해도 해로를 개척하러 갈 때도 동행한다. 중국 상해에서 이들을 만난 예수회 고틀랑 신부는 “거의 모두가 순교자들의 아버지요, 아들이요, 친척”(고틀랑 신부가 1845년 7월 8일 강남에서 예수회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이라고 소개한 것으로 보아 김 부제가 선발한 조선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이 이 배에 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배는 김대건 부제가 사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조선 선교사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할 때 신자들이 이름 짓고 주교가 명명식을 한 ‘라파엘호’이다.

 

조선 후기 어선은 바닥이 평편한 평저선이고 높은 돛대가 둘이 있고 갑판이 없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사진은 조선 후기 평저선을 복원 축소한 어선으로 ‘영공방’이 소장하고 있다.

 

 

길이 9.75m의 라파엘호 재원

 

라파엘호 크기와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페레올 주교가 1845년 10월 29일 강경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와 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3일 충청도 공동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이다.

 

라파엘호의 크기에 대해 페레올 주교는 길이 25피에(pied, 약 8m), 너비 9피에(약 2.8m), 깊이 7피에(약 2.2m)라고 했다. 반면, 다블뤼 신부는 길이 30피에(약 9.74m), 너비 12~13피에(약 4.2m), 깊이 8피에(약 2.6m)라고 했다. 문제는 둘 다 실측이 아니라 눈대중으로 어림잡은 것이다. 일본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0년대 「어선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황해도 옹진군 안강만 어선이 길이 9.74m, 너비 3.61m, 깊이 1.13m로 다블뤼 신부가 설명한 길이와 똑같고, 너비는 라파엘호가 약 1m 더 넓고, 깊이는 안강만 어선이 라파엘호보다 약 1.46m 낮다.

 

이를 토대로 최근 ‘라파엘호 규모에 관한 고찰’ 연구 논문을 발표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홍순재 학예연구사는 라파엘호 크기를 길이 9.75m, 너비 4.22m, 깊이 1.62~1.94m로 추정했다. 홍 연구원은 추정 근거로 “페레올 주교가 밝힌 규모대로라면 배의 복원성이 없어 전복되는 선형이다. 반면 다블뤼 신부가 밝힌 배의 규모에서 깊이를 8피에보다 5~6피에 적게 하면 복원성을 확보하고 어선으로서 특징을 갖출 수 있는 길이와 너비, 깊이가 된다”고 설명했다.

 

- 조선 후기 당두리 배 평면도. 출처=국립해양유물전시관.

 

 

라파엘호 모양은 조선 후기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저형’이었다. 쇠못은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나무못으로 널판을 이어 만들었다. 서양 배는 모두 방수를 위해 타마유(콜타르)를 발라 배의 틈새를 메우는데 라파엘호는 천이나 얇은 대나무 껍질로 틈을 막았다. 갑판도 없다. 배 중간에 나무판자를 대 공간을 세 구간으로 구분해 놓았을 뿐이다. 비가 오거나 파도가 들이닥치면 고스란히 맞고 차오르는 물을 열심히 퍼내야만 한다. 5m 정도 되는 돛대는 2개로 앞쪽은 바로 서 있고, 뒤쪽은 기울어져 있다. 돛 줄은 새끼줄과 칡넝쿨로 만들었다. 손가락 5개 두께의 나무판자 한 개가 키 역할을 했다.

 

라파엘호는 조선 후기 서해안에서 활동한 전형적인 어선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넓게 펼쳐진 갯벌, 파장이 짧고 가파르고 거센 파도에 적합한 구조이다. 그래서 선박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먼바다 항해가 불가능한 배”라고 했다. 다블뤼 신부도 앞의 편지에서 바랑 신부에게 “신부님께서는 조선 선원들이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아 상해까지 가게 된, 완전히 하느님의 섭리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라며 “망망대해 가운데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라고 썼다.

 


라파엘호 항로

 

김대건 부제는 25상팀(100centime=1프랑)짜리 나침반과 프랑스에서 보내온 ‘바다의 별 성모 마리아’ 상본 한 장에 의지해 중국 강남으로 가는 항해를 시작했다. 임성룡을 비롯한 네 명의 뱃사람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김대건 부제도 1842년 10월 초 산동대목구장이며 남경교구장 서리인 베시 주교가 마련해 준 돛이 5개 달린 150톤급 정크선을 타고 상해에서 요동반도 양관까지 여행해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럼 김대건 일행을 태운 라파엘호는 어떤 항로로 중국 강남을 향해 떠났을까?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한강을 빠져나와 서해안 연안을 따라 발해만 산동반도를 거쳐 중국 남해안 연안으로 가는 ‘남방연해로’이다. 다른 하나는 흑산도에서 중국 절강성의 관문인 주산열도 정해항과 영파로 바로 들어가는 ‘서해 남부 사단항로’이다. 이 두 항로는 삼국시대 때부터 이용해온 무역로였다.

 

라파엘호 항로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없다시피 하지만 암묵적으로 ‘사단항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인지해 왔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조선으로 귀국할 때 제주도에 표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는 ‘남방연해로’에 무게를 더 두고자 한다. 중국 출국길과 조선 귀국길 모두 ‘남방연해로’를 이용했고, 귀국길 폭풍우로 표류하면서 사단항로 해류를 타고 제주도에 닿았다고 본다.

 

기자가 ‘남방연해로’에 무게를 두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김대건 부제가 배로 상해에서 요동반도까지 여행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크선 역시 서양 배와 달리 연안을 따라 항해했기에 상세하게 그려진 해도가 없어도 서해를 가로지르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둘째, 임성룡이 조기 무역을 했기에 어느 정도 한강을 빠져나와 발해만으로 가는 뱃길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김대건 부제는 중국 배를 만나면 돈을 주고 강남까지 라파엘호를 예인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근거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7월 23일 상해에서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마침내 뜻밖에 산동 배 한 척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우리를 보더니 겁을 먹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기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그 배를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오려고 하지 않더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배로 올라가 선장에게 인사하고는 우리를 상해까지 끌고 가 달라고 청하였습니다.…마침내 그는 1000원을 주겠다는 약속에 제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편지에서 ‘산동’을 주목하자.

 

네번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를 때 라파엘호는 상해에서 산동까지 가는 중국 배에 밧줄을 묶고 항해를 했다는 점이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1월 30일, 리길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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