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5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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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ㅣ기도ㅣ신앙

[영성] 현대 영성: 초연함의 영성2 - 영적 쾌락 역시 집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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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2-07-11 ㅣ No.1833

[현대 영성] 초연함의 영성 (2) 영적 쾌락 역시 집착이다

 

 

많은 신실하다는 신앙인 가운데 영적인 것에 집착하는 경우가 있다. 기도 때 느꼈던 평화로운 감정, 미사 때 맛보았던 뜨거운 느낌에 집착하다 보면 다시 그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 때는 마치 기도를 잘하지 못하고 있고, 하느님께서 멀어지신 것은 아닌가 걱정을 하게 된다. 토마스 머튼은 이러한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영적인 쾌락을 좇은 것이라고 말한다. “침잠과 내적 평화, 하느님 현존에 대한 느낌은 영성의 쾌락이고 다른 것들은 물질의 쾌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기쁨에 절대 깊이 빠져들지 못합니다. 관상의 초보자들에게나 주어지는 보잘것없는 위로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새 명상의 씨」)

 

왜 영적인 쾌락에서 오는 집착이 영성 생활에서 해로울까? 영적인 기쁨이나 평화를 맛보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닌가? 그 이유는 기도와 침잠을 통해 우리 영혼이 오직 하느님께만 집중해야 하는데, 은총의 선물에만 집착함으로써 결국 자기만족에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머튼은 “침잠(recollection)이라는 것도 결국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적 평화에 대한 느낌 역시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포도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적 ‘의식’은 맥주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또 하나의 피조물일 따름입니다”라고 영적 쾌락에 대해 경계를 한다(「새 명상의 씨」). 하느님과의 만남의 결과는 흔히 깊은 평화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내적 평화에 집착하는 것도 주의해야 한다. 기도 가운데 찾아오는 평화스러운 느낌은 항상 관상이 가져오는 뜻밖의 결과이다. 그런 ‘느낌’이 없다고 해서 하느님과의 만남이 끝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화를 ‘체험’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하느님과 우리 영혼의 참되고 본질적이며 생생한 일치를 위협하는 것이다. 머튼은 오히려 “우리가 평화나 하느님의 현존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에게 참으로 현존하신다”고 말한다.

 

이러한 영적인 쾌락은 특별히 수도자들이나 영적인 체험을 많이 한 이들에게 치명적인 유혹이다. 물질적 쾌락이나 세속적 욕망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위해 기도와 단식, 신심활동이나 봉사, 영적 서적이나 영성 체계에 몰입하여 다양한 영성 공부와 온갖 좋다는 피정과 세미나 등에 참여하여 영웅적인 덕행을 쌓고, 모르는 묵상 혹은 관상 기도 방법이 없을 정도로 대단해서 마치 성인처럼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이러한 것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과 집착으로 결국 교만의 영에 휩싸이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진정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통제할 수 없는 결과들에서 적당히 물러서야 하며 사랑의 나눔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이나 기대 없이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외적·내적 활동과 성취욕으로 결과에 연연하는 모습은 교회 내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성과 위주가 아니라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뜻을 실현해야 하는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에 만족하지 못해 자신을 비하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경우, 초연함의 영성에 대해 깊이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초연함은 세상의 불의에 대해 방조하는 것이 아니다. 초연함은 역경을 마주할 때 도인처럼 희미한 미소를 짓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과 진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진리, 곧 하느님에게 집중할수록 결과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 초연함을 유지하면 우리는 낙담하는 가운데에도 신실하게 행동을 이어갈 수 있다. 초연함은 자비에 비례한다. 하느님 사랑을 위해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충실함과 굳은 결의, 인내와 겸손을 통해 초연함에 도달하면 할수록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이중 계명을 더욱 완벽하게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초연함은 결국 어떤 결과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더 큰 선과 자비를 믿고 온전히 그분께 의탁하여 그분의 마음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머튼은 “너의 영혼이 지옥에 있을지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러시아 수도자, 스타레츠 실루안이 받은 계시를 인용하며 우리가 지옥이라는 결과에도 초연함으로써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려야 함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기도 가운데 초보자에게나 주어지는 평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하느님의 현존이 가져다주는 감미로움에 대한 집착도 포기하자. 결과에 대한 집착도 주님께 맡겨 드리고 초연한 마음으로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주님께 내어 드리자. 

 

[2022년 7월 10일(다해) 연중 제15주일 가톨릭마산 2면, 박재찬 안셀모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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