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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 연중 제8주간 수요일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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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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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2-20 ㅣ No.1980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참된 가난’

 

 

예수님이 참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첫 번째로 든 덕목은 ‘가난’이었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이 가난의 의미를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예를 드시며 ‘현실을 단순히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것’(찬미받으소서 11항)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용하고 지배하기 위한 대상으로 삼는 것’이 극대화된 것을 교황께서는 ‘추출주의’(extractivism)라고 꼬집으십니다.

 

인류가 역사 안에서 얻게 된 모든 재화는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것입니다. 자연으로부터 추출된 자원이 인류의 생존과 번영의 재료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존과 번영의 바탕이 된 ‘추출’이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인가를 인류가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특별히 산업혁명 이후에 에너지를 얻기 위한 인류의 노력(화석연료의 사용)은 ‘기후위기’라는 재앙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기후위기’라는 재앙은 우리 인류의 생존과 번영의 방식을 새롭게 되돌아 보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해 2023년 11월 30일부터 12월 13일까지 UAE 두바이에서 2주간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의 제28차 당사국 총회(COP)가 개최되었습니다. 이 당사국 총회는 파리 협정(2015년) 목표 달성이 어려운 것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또한 화석연료로부터의 에너지 전환에 대해 더욱 활발히 논의할 것을 약속하는 자리였습니다.

 

파리협정을 통해 국제사회가 약속한 온실가스 배출 절감에 대한 인류의 노력이 미흡했다는 평가는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동시에 우리 인류는 온실가스 배출 절감 노력의 미흡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조용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대가를 치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하거나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인류는 우리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하여 응분의 대가를 자연현상을 통해 치를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상황입니다.

 

다가오고 있는 재앙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도 둔감합니다. ‘성장’과 ‘번영’이라는 논리에 젖어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는 재앙은 그저 새롭고 신기한 ‘뉴스거리’처럼 느껴지는 듯합니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 73장에서 ‘천망회회(天網恢恢), 소이불실(疏而不失)’-하늘의 법망은 넓고 커서 엉성한데도 놓치는 것이 없다- 이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은 악에 대한 경계의 말이라고 해석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기후위기 시대에 새롭게 해석해 보자면, 인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표현해 볼 수 있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0년 9월 16일 수요 일반알현에서 스페인 속담을 인용하시며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고, 우리는 가끔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영성의 결핍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기후 위기 시대 첫 번째로 요청되는 생태 영성은 ‘참된 가난’의 영성이라 하겠습니다. 교황님의 가르침처럼 ‘참된 가난’은 사람과 자연을 이용과 착취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는 일입니다. ‘참된 가난’이라는 영성이 ‘성장과 번영’이라는 굴레가 가져올 확실한 미래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줄 인류의 빛일 것입니다. [2024년 2월 25일(나해) 사순 제2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영운동 본당 주임 겸 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2) ‘동일한 관심을 통한 일치’

 

 

인간과 세상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늘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서 만들어지고 태어나서 자라고 나이 들어서 죽는 순간까지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변화될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치셨습니다(1코린 15,52-53).

 

세상도 늘 변화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이 세상에 나타난 시대를 거쳐서 자연에 순응해 살았던 원시적인 삶의 양식을 지나 이제는 도시를 만들고 문명을 만들어서 자유롭게 하늘을 날고 우주를 탐사하는 세월이 되었습니다.

 

자연에 순응하며 나름의 사회질서를 만들어 삶을 함께 영위했던 시대를 원시시대라고 한다면, 원시시대에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였습니다. 인간의 주변 환경인 자연이 너무나도 광대했기에 인간은 자연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인구와 더 많은 인간의 욕구를 해결해 가며 살아가고 있는 현대에 이르러서, 인간은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집단으로 성장했습니다.

 

2020년 12월 9일 국제학술지 ‘네이처’지의 발표에 따르면, 인간이 만들어 낸 인공물 총량이 자연물을 넘어섰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플라스틱, 콘크리트 건물, 금속, 도로 등 인공물 총량은 약 1조 1000억 톤으로, 총 질량이 1조 톤인 자연이 만들어 낸 모든 생물의 총질량을 넘어섰다고 평가되었습니다. 1900년대 초만 해도 인공물은 자연물의 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100년 사이 인류는 자연물을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인공물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2040년이 되면 인공물은 약 3조 톤이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학자들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지칭하자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인류는 지구 전체 생명체들 입장에서 보면 0.01%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0.01%의 인류가 지구 전체 생태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인류가 인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한다면 결국 인류도 존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최근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경험하고 있습니다. 생태적 회심은 들리지 않는 자연의 아우성이자 목소리이기도 하지만 우리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엄정한 현실입니다.

 

바르톨로메오 총대주교께서는 특히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지구를 해친 것을 회개할 필요를 언급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생태적 피해를 일으키면” 우리가 “크든 작든 피조물의 변형과 파괴를 야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요청받기 때문입니다. 총대주교님께서는 강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이를 되풀이하여 말씀하시며 우리가 피조물에게 저지른 죄를 인정할 것을 촉구하셨습니다. (「찬미받으소서」 8항)

 

총대주교님께서는 우리가 소비 대신 희생을, 탐욕 대신 관용을, 낭비 대신 나눔의 정신을 “단순한 포기가 아니라 주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의미하는” 금욕주의로 실천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이는 사랑의 방법, 점차로 내가 바라는 것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세상에 필요한 것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이는 공포와 욕망과 충동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찬미받으소서」 9항)

 

우리는 이 기후위기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동일한 관심”을 갖고 일치할 것을 자연현상을 통해 요구받고 있습니다. “동일한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일치를 이루는 토대이자 영성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멸종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공통으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인류의 성장이자 살아남을 길일 것입니다. 이 ‘동일한 관심’을 통한 일치가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위한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요청되는 기후 위기 시대의 영성일 것입니다. [2024년 3월 24일(나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영운동 본당 주임 겸 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3) ‘신앙의 확신’ - 빛, 지혜

 

 

2024년 현재, 전 세계적으로 기후위기 소송이 각 나라 별로 진행 중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 위기 소송이 제기된 것은 2000여 건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2024년 4월 23일에 헌법재판소에서 기후 위기 소송에 대한 공개 변론이 진행됩니다. 국내 기후소송은 4건입니다. 청소년 기후소송, 시민 기후소송, 아기 기후소송, 제1차 탄기본(탄소중립기본계획) 헌법소원 등 4가지 안건을 합하여 공개변론을 합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기후 위기에 관한 소송이기에 귀추가 주목됩니다. 또 심심치 않게 각 나라의 기후 위기 소송 결과에 대해서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문제에 대하여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기후문제는 곧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미래가 시간적으로 더 많고 소중한 아기들과 청소년들에게 기후문제는 자신들이 처할 미래이기에 더 절박한 사안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른들의 책임 있는 대책을 요구하는 소송들이라 여겨집니다. 판결을 맡으신 헌법재판관님의 현명하고 균형감각 있는 판결이 있기를 고대해 봅니다.

 

기후위기 문제는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듯이 곧 생태위기 문제와 직결됩니다. 생태 위기는 복합적이고 그 원인이 다양하기 때문에 해결책이 현실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한 가지 방법에서만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찬미받으소서」63항).

 

생태위기 문제는 복잡하고 다양하기에 어느 한 분야의 학문이나 지혜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특별히 이 문제를 우리 교회는 사회교리에서 담당할 문제입니다. 사회교리는 이 문제의 도전 앞에서 더 풍요롭게 발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신앙적 확신’입니다.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사람들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환경을 돌보도록 촉구한다고 볼 때, 그리스도인들도 “특히 피조물 안에서의 자기의 책임은 물론 자연과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의무가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199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15항) 그러므로 우리 믿는 이들이 우리의 확신에서 나오는 생태론적 의무를 더 잘 깨닫는 것은 인류와 세상 전체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찬미받으소서」 64항).

 

성경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시니......좋았다’(창세기 1장)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보시니 좋으신 조화의 파괴를 ‘불화(부조화)’, 곧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화는 피조물 중의 하나인 인류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은 데에서 기인합니다. 하지만 죄는 언제나 파괴적인 힘으로 드러납니다. 이 파괴적인 힘은 자신의 한계와 본분을 잊은 인류에게서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성경은 인류의 본분을 ‘돌보고’ ‘가꾸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본분은 세상의 피조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정교한 균형’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정교한 균형’을 헤아리며 존중하는 것이 아마도 지혜이자 빛일 것입니다.

 

이 기후위기의 시대에 인류는 ‘정교한 균형’을 이루는 길이 무엇인지 함께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유용성 앞에서 희생된 수많은 생명체들에게 인류가 진 빚이 무엇이며 인류가 이들을 보전하고 함께 하는 길이 무엇인지 깊이 되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신앙의 확신’은 돌보고 가꾸어야 할 우리의 본분을 상기시킵니다. 이 신앙의 확신이 ‘형제애’와 ‘정의’와 ‘다른 이에 대한 충실함’으로 꽃피워지고 드러날 것입니다. ‘신앙의 확신’은 모든 피조물에게도 기쁜 소식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2024년 4월 28일(나해) 부활 제5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영운동 본당 주임 겸 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4) “모든 피조물들이 전하는 메시지”

 

 

시편 8편은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 장엄하고도 소박하게 찬미하고 있습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시편 8,4-7).

 

하느님의 능력과 업적을 찬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위대함과 존엄성을 창조주 하느님 안에서 찾고 감사하는 찬양의 시편입니다.

 

시편 8편의 찬미의 정신을 이어가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 세상을 ‘하느님께서 쓰신 소중한 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바오로 2세, 「교리교육」 6항). 이 책의 “글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조물들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피조물들과 생명체들이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계시의 책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는 ‘경탄과 경외의 끊임없는 원천’임을 말씀하십니다(「찬미 받으소서」 85항).

 

‘경탄과 경외의 끊임 없는 원천’인 이 세상의 피조물들은 약 1500만 종 이상의 생물들로 가득합니다. 이 중에서 과학자들이 꼽은 ‘지구 상에 꼭 있어야 할 5가지 생물 종’이 있습니다. 영장류, 박쥐, 벌, 균류, 플랑크톤입니다. 영장류는 숲에서 과일 등을 따먹고 배설해 열대 및 아열대 우림의 존속을 가능케 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영장류가 없으면 지구의 허파인 숲을 보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학자들은 이 영장류를 ‘숲속의 정원사’라고 부릅니다. 지구상에 1100종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쥐는 생물들의 수분(受粉)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해충을 잡아먹어 ‘천연 살충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박쥐가 없다면 인류의 식량 중 30%가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현재 2만여 종이 있는 벌은 기후변화 등으로 개체 수가 80% 가량 줄었다고 합니다. 벌의 활동이 없다면 우리가 먹는 대부분의 야채도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벌은 인류 식량 생산의 ‘중요한 매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 150만 종에 달하는 균류(Fungi)는 거의 멸종의 염려가 없습니다. 이 균류들이 없다면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균류들은 이 세상에 살아 있던 모든 생명체를 분해해서 처음으로 되돌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균류들을 ‘자연의 청소부’라고 부릅니다. 마지막으로 바다에 있는 약 5만여 종의 플랑크톤들은 수십억 해양 생물들의 먹이가 되며, 바다 표면 근처에 서식하는 식물성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해 지구상의 산소 절반을 생산해 냈습니다. 바다 속의 이 플랑크톤 덕분에 우리는 생선을 먹을 수도, 숨을 쉬며 살아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1500만종 들의 삶의 향연 속에서 우리 인류도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이 수많은 생명들과 피조물들이 없다면 우리도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물질세계 천체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무한한 자애를 체험하고 경탄할 수 있는 것입니다(「찬미 받으소서」 84항).

 

모든 피조물들은 우리의 ‘경탄과 경외의 끊임 없는 원천’입니다. 이 피조물들이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로마 8,22). 이들의 탄식과 진통은 인류에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를 바라는 염원의 초대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쓰신 소중한 책들인 피조물들의 소리를 알아들으며 살아가는 인류는 하느님 사랑과 희망 안에서 기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24년 6월 2일(나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5) “보편적 친교-제헌의 힘”

 

 

「찬미 받으소서」 89항

 

이 세상의 피조물들에게 주인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지혜 11, 26). 그래서 우리는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보편 가정, 곧 숭고한 공동체를 이루어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며 겸손한 존중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긴밀하게 결합시켜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마치 우리 몸이 병든 것처럼 느끼고 동식물의 멸종을 우리 몸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낍니다.”(「복음의 기쁨」, 215항)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의 힘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늘의 별이며 산이며 강이며 나무며 짐승이며 둘레의 인간 세계며 할 것 없이 인식으로써 파악해서 자기의 내심의 세계로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사랑할 수도 있고 미워하거나 내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저항할 수도 있고 아니면 아쉬워 찾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의 환경을 마음대로 조성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기쁨과 그리움, 서러움과 사랑, 고요와 흥분이 서로 엇갈리면서 물결치듯 기나갑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간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힘’은 자신보다 더 높은 존재가 있음을 깨닫고 그 존재를 섬기며 헌신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위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고 받들며 “하느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하느님을 섬기며 헌신할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인간 영혼의 심오한 능력을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님은 “제헌의 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1)이 “제헌의 힘”은 보편적 친교를 향한 인간에게 부여된 하느님의 섭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제헌의 힘”은 바로 인간의 가장 깊은 데에 하느님께로 제헌이 올라가는 고요하고 맑은 샘터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이 “제헌의 힘”에 의지해서 살아갈 때 참행복에 이를 수 있고 보편적 친교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한반도 109년 기후변화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약 100년 전 여름은 6월 11일에 시작되어 9월 16일에 끝났지만, 최근 10년에는 5월 25일에 시작되어 9월 28일까지 여름이 지속되는 현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여름의 길이가 98일에서 127일로 약 한 달이 늘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2021년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은 약 13일 빨라졌고, 서울의 개화시기는 17일 빨라진 3월 24일이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기후변화는 자연적 원인과 인위적 원인이 있습니다. 자연적 원인으로는 기후시스템과의 상호작용, 태양의 흑점 수 변화 및 화산활동에 의한 태양에너지의 변화, 지구 공전궤도의 변화 등이 있습니다. 인위적 요인으로는 화석연료의 남용에 따른 화석연료 배출, 에어로졸의 효과, 토지피복의 변화, 산림파괴 등이 있습니다. 이 인위적 원인에 의한 기후변화는 인류의 편리와 번영을 위해 필요한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편리와 번영을 위한 노력이 거꾸로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면 우리는 삶의 방식에 대해서 새롭게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각자의 내면에 있는 “제헌의 힘”을 통해 살아갈 때 “보편적 친교”를 이루어 조화로운 세상을 만들 수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보편적 친교”는 이 기후위기 시대에 뉴노멀이 되어야 할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온유, 연민, 배려의 마음이 없다면 자연의 다른 피조물과도 깊은 친교를 올바로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내면의 “제헌의 힘”은 바로 이 보편적 친교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1) 「거룩한 표징」PP72-73, 로마노 과르디니, 분도출판사, 1976. [2024년 6월 30일(나해)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6) “예수님의 눈길”

 

 

예수님께서는 피조물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며 사셨기에 다른 이들이 놀라워하였습니다.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마태 8, 27) 그분께서는 세상과 떨어져 사는 금욕주의자의 모습을 하지도 않으시고 삶의 즐거운 면을 적대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다!’하고 말한다”(마태 11,19 참조). 예수님께서는 육신과 물질과 세상 현실을 경멸하는 사상들과는 매우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러한 불건전한 이원론은 역사를 통하여 일부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쳐 복음마저 왜곡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사용하는 일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물질들을 날마다 다루시며 장인의 기술을 발휘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일, 전혀 경탄할 것도 없는 단순한 일로 보내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마르 6, 3) 이렇게 하여 예수님께서는 노동을 신성한 것으로 만드시어 우리가 성숙하는 데에 노동이 특별한 가치가 있도록 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노동의 수고를 참아 냄으로써, 인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협력하고 있다”(「찬미받으소서」 98항).

 

예수님의 눈길은 언제나 하느님 뜻의 완성에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최근(2023년 3월 23일) 서울대교구는 조선천주교회 초대 대목구장이신 바르톨로메오 브뤼기에르 주교(1792-1835)님과 김수환 추기경님(1922-2009)과 한국 순교복자 가족 수도회 창립자이신 무아 방유룡 신부님(1900-1986)의 시복시성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습니다. 무아 방유룡 신부님은 ‘삶의 길’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렇게 묵상하셨습니다.

 

“천주는 만선만복이시니, 이것이 인생의 천생유산이로다. 인생은 낙관이요, 비관이 아니로다. 천지만물의 주인이니, 제 길을 가고 제구실을 한다면, 저 세상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낙천이로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내실 적에, 뜻하신 바 있었으니, 하느님의 뜻이 사람의 길이요, 천생사명(天生使命)이로다. 하느님의 뜻이 양심이요, 양심은 천명(天命)이로다. 하느님의 뜻이 십계요, 십계는 길을 조종하는도다. 하느님의 뜻이 정심수신(正心修身)이요, 이는 종교요, 수원(修院, 수도원)이로다. 하느님의 뜻이 신비요, 신비는 수도(修道)의 길이로다. 신비로 성인되어,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죽지 않고 살아, 만유에 군림하는도다. 이것을 이성이 외치나니, 하느님은 계시도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내신 하느님이 계시도다. 양심이 외치나니, 상선벌악이 천명이로다. 지성도 외치나니, 만선만복이 선자의 상속이로다. 자유도 외치나니, 선택이 천직이로다. 천직이 선택이면, 어이 선 대신에 악을 고르느뇨? 선에서 선으로 가서, 지선에 이름이 천직이 아니뇨! 불을 뿜는 지옥이 소리치기를, 악을 사르는 불이로다. 침묵하는 영혼이 경고하되, 하자없이 살지어다. 황금 순간을 뜻없이 지내고, 후일을 뉘우칠까 하노라. 천당에선 빛이 와서, 마음문을 흔들고, 천신들이 날개치며 외치되, 여기가 천당 가는 길이로다”(「영혼의 빛」 95쪽, 무아 방유룡 안드레아 신부님 영적어록집).

 

예수님의 눈길은 언제나 하느님을 향하고 계셨습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눈길은 언제나 성숙을 지향합니다. 성숙은 하느님의 뜻이자 인간행복의 길입니다. 성숙은 이 세상과 사람들을 사욕추구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충만으로 이끌어 주는 신비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시며 감탄하시던 들판의 바로 그 꽃들과 새들은 이제 그분의 빛나는 현존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2024년 7월 28일(나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7) “참된 인본주의와 기도”

 

 

「찬미 받으소서」 112항.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시야를 넓힐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기술을 제한하고 그 방향을 바꾸어 기술이 다른 형태의 발전, 곧 좀 더 건전하고 인간적이고 사회적이며 온전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습니다. 지배적인 기술 관료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일이 실제로 가끔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군소 생산자들이 오염을 줄이는 생산 방식을 채택하여 소비 지상주의를 지양하는 삶과 여유와 공동생활 방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기술이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 문제 해결을 우선 목표로 삼아, 그들이 더 존엄하게 덜 고통받으며 살아가도록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이를 바라보려는 의지가 모든 대상을 객관화하려는 힘을 극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아름다움과 그것을 바라보는 이에게는 일종의 구원이 됩니다. 새로운 종합을 요청하는 참된 인본주의는 마치 닫힌 문의 아래 틈 사이로 스며들어 오는 안개처럼 알게 모르게 기술 문화 한가운데 자리잡는 듯합니다. 모든 어려움에도 참된 인본주의가 올곧은 이들의 굳센 저항처럼 싹트는 영원한 약속이 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인본주의’는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을 통해서 가능할 것입니다.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공허함을 달래 줄 대체재가 점차 더 많이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길은 대체재를 생각 없이 사용하는 데서는 결코 찾지 못할 것입니다. 잠시 멈추어 ‘삶의 깊이를 되찾는 일’은 아마도 기후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요청되는 일일 것입니다.

 

20세기 가톨릭의 신학자 중 한 분인 독일의 칼 라너(1904년-1984년) 신부님은 1924년 월간지인 ‘등대’를 통하여 ‘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가?’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너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땅의 것들에 매달리게 된다. 땅의 것들처럼 작아지고 그것처럼 좁아지고, 그것에 짓눌려 결국 그것에게 팔려 버리고 말지니,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마음을 그것에게 마냥 내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를 작고 좁게 만드는 일상에서 거리를 둘 수 있다. 그래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고,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주님이신 그분께 가 닿을 수 있다. 하느님을 가까이 하는 자를 하느님은 가까이 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피조물에게 자기 자신을 전달하시고, 사랑으로 피조물을 감싸 안으셔서 영광을 받으실 때, 바로 그때 그분은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자기 현실을 깨닫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허무하고 허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하신다. 초라한 존재의 허무함으로 가득 찬, 십자가의 상처와 고통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찬, 알량한 자존심과 편협한 자기 중독으로 가득 찬 존재임을 알게 하신다. 그러나 그분이 기뻐하시는 때가 되면 그 영혼에 빛을 비춰 주신다. 그러면 영혼은 강력한 희망으로 가득 찬 마음, 결코 그치지 않는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 드넓고 헌신적이고 순결한 마음, 그렇게 신실한 마음을 원하게 된다”(칼 라너, 「기도」, 12-13쪽).

 

기후위기 시대 인류에게 요청되는 또 다른 영성은 ‘참된 인본주의’일 것입니다. 모든 것의 목적과 의미에 대한 질문을 멈추게 될 때 우리는 또 다른 파국을 맞이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도는 목적과 의미에 대한 되새김질을 하는 통로이자 도구일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 삶의 목적과 의미에 대해서 더욱 깊이를 더해주고 참된 인본주의를 가능하게 할 좋은 친구가 될 것입니다. [2024년 8월 25일(나해) 연중 제21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8) “상대주의와 사랑”

 

 

『찬미 받으소서』 123항

 

상대주의 문화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단순한 대상으로만 취급하여 강제노동을 시키거나 빚을 명분으로 노예로 부리는 것과 다름없는 질병입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아동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이익에 보탬이 안 되는 노인을 유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시장의 보이지 않는 힘이 경제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내적 논리이기도 합니다. 이들은 그러한 힘이 사회와 자연에 해로운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우리 저마다의 욕망과 즉각적인 욕구를 충족하는 것 외에 객관적 진리나 확고한 원칙이 없다면, 인신매매, 조직범죄, 마약 매매, 아프리카 분쟁 지역의 불법 다이아몬드 매매, 멸종 위기 동물 가죽의 매매를 어떻게 제한하겠습니까? 가난한 이들의 장기를 팔거나 실험에 이용하려고 구매하고, 부모의 바람에 어긋난다고 해서 아이를 ‘버리는’ 것도 이러한 상대적 논리와 같지 않겠습니까? 이는 ‘쓰고 버리는’ 논리와 같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실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소비하려는 무절제한 욕망 때문에 쓰레기가 양산됩니다. 그러므로 환경에 해로운 행위를 방지하는 데에 정치적인 조치나 법의 힘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문화가 부패하고 객관적 진리와 보편타당한 원칙들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을 때, 법은 자의적으로 부과되는 것이거나 피해야 할 장애물로만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여러 문헌들을 통해 누누이 그릇된 인간 중심주의에서 나오는 실천적 상대주의가 교리적 상대주의 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자신을 중심으로 삼으면 당장에 눈앞의 유익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되어 나머지 모든 것은 상대적인 것이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나에게 즉각적인 유익을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상대주의가 우리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것은 이상할 일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부패한 일들의 내면에는 언제나 이 실천적 상대주의의 논리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실천적 상대주의에는 언제나 ‘사랑’이라는 가치가 빠져있습니다. ‘사랑’이라는 인류보편의 가치가 사라진 곳에는 죽음의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워질 뿐입니다.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이신 연제식 신부님이 2024년 여름에 펴내신 ‘꿈’이라는 작품집이 있습니다. 연신부님은 ‘사랑법’이라는 편에서 올바른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묵상하셨습니다.

 

“사랑은 올바른 계산이다. 오늘 계산에는 맞는 것 같은데 내일 계산해 보니 틀렸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오늘 맞는 것 같은데 한 달 후에 계산해 보니 틀렸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지금은 맞는 것 같은데 10년 후에 틀릴 수 있다면 그것도 틀린 것이다. 지금 계산한 것이 죽을 때 계산해도 맞다면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니까 지금 계산해서 행동한 것이 죽을 때 생각해도 맞는 계산법이라면 그것이 바로 사랑하며 사는 올바른 방법이다. 사랑은 최소 에너지로 사는 것이다. 즉 힘들지 않게 사는게 사랑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달다’고 하셨다. 내가 최소 에너지로 살면 내 주변이 힘들지 않다. 그러니까 사랑으로 사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힘들지 않게 한다. 세상 사는 게 힘들지 않을 수야 없다. 인생 공부가 다 고통을 견디는 일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고통을 이긴다. 고통도 이기고 죽음도 이기는 것이 사랑이다. 예수님 말씀은 최소 에너지로 살아가는 방법을 가장 쉽고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과 자연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오직 인간만이 살면서 쓰레기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몸에 쌓인 쓰레기가 병이 된다면, 마음과 영혼에 쌓인 쓰레기는 죄가 됩니다. 사랑은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삶의 길입니다. 쓰레기가 없어야 가볍고 밝게 살아갈 수있습니다. 상대주의가 세상을 병들게 하고 쓰레기를 만드는 죽음의 길이라면, 복음이 가르쳐 주는 사랑의 길은 세상을 치유하고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생명의 가벼운 길일 것입니다. [2024년 10월 27일(나해) 연중 제30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영운동 본당 신부)]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9) “고용보호의 필요성”

 

 

『찬미 받으소서』 129항.

 

지속적인 고용 보장을 위해서는 생산의 다각화와 기업의 창의력을 고무하는 경제의 증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이 세상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식량을 마련해 주는 다양한 소규모 식량 생산 체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땅과 물을 적게 사용하고 쓰레기도 적게 배출합니다. 이는 소규모 경작지, 과수원, 농원, 사냥, 야생 작물 채취, 지역적 어업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규모의 경제는, 특히 농업 분야에서 영세농들이 결국 자기 땅을 팔거나 전통적 생산 방식을 포기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영세농들이 다른 다양한 생산 방식을 개발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실을 얻지 못합니다. 지역 시장과 세계 시장의 접근이 어렵고 판매와 운송의 기반시설이 대기업에 유리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정 당국은 군소 생산업자들과 그들이 생산하는 품종의 다양성을 투명하고 확실하게 지원하는 조치를 취할 권리와 의무가 있습니다. 실제로 모든 이가 경제적 자유의 참다운 혜택을 누리게 하려면, 경우에 따라서는 더 많은 자원과 경제력을 가진 이들에게 제한이 가해져야 합니다. 현실은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으며 고용 기회가 계속 축소되고 있는데, 단지 경제적 자유만을 요구하는 것은 정치에 명예롭지 못한 모순된 주장입니다. 기업활동은 부를 창출하고 모든 이를 위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고귀한 소명입니다. 기업이 일자리 창출을 공동선에 이바지하는 필수 요소로 여긴다면 그 활동 지역의 풍요로운 번영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2022년 영국 가디언지 9월호에 실린 글1)을 보면, 현재 영국 젊은이들의 절반 이상이 “인류의 멸망”을 믿고 있다고 전합니다. 75%의 젊은이들은 “미래가 두렵다”라고 답하고 있고, 그래서 41%의 젊은이들은 자녀출산을 꺼린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에 화답하듯이 2022년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설문조사한 기사2)를 보면, 20대 젊은 여성들의 33.5%는 “기후위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않아야겠다”라고 대답했습니다. 32.4%는 ‘기후 우울증 혹은 분노를 느낀다’고 응답했습니다. 영국과 한국 젊은이들이 답한 내용들을 살펴보면, 젊은이들은 단지 기후위기만을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70% 이상의 젊은이들은 기후위기에 따른 주거와 부동산 문제, 일자리와 고용의 문제를 가장 큰 고민거리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젊은이들의 고민들은 기우일까요? 그리고 그들만의 문제일까요?

 

130여 년 전 교황 레오 13세께서는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 1891년)라는 회칙을 통해 산업화된 세계 안에서의 인권의 보호와 증진에 대해서 가르치고 외치셨습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통해 기후위기 시대에 인류의 생존과 안녕을 위한 가르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 두 회칙의 공통점은 모두 인류의 안전과 참된 번영과 지속가능한 세상을 고민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을 배제하거나 무시한 채, 어떠한 인간의 활동도 지속적일 수는 없습니다. 특별히 자연 안에 존재하는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성숙을 도모합니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을 통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공동선을 증진하는데 협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용 보호의 필요성’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윤추구라는 기업의 가치에 밀려 고용보호가 간과된다면 우리는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모든 사람의 노동을 보호하는 우선적 정책과 판단은 기후위기로 우울해질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위로의 난로가 될 것입니다.

 

1) Caroline Hickman, The Guardian, 2022/9/10

2) <대한민국 위기 보고서>, 2022년 1월, 시사IN.

 

[2024년 11월 24일(나해)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0) 통합생태론 - 1. 환경, 경제, 사회의 생태론

 

 

『찬미 받으소서』 138-142항.

 

생태론은 살아 있는 유기체들과 그 유기체가 성장하는 환경의 관계를 연구합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사회의 삶과 존속의 조건에 대한 성찰과 논의가 따르게 됩니다. 또한 발전, 생산, 소비의 모형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솔직함이 있어야 합니다......(중략). 지구의 물리학적, 화학적, 생물학적 구성 요소들이 서로 관련되듯이, 생물종들도 우리가 결코 그 전체를 알고 이해할 수 없을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유전 정보를 여러 생명체들과 공유합니다. 따라서 단편적이고 개별적인 지식은 현실에 대한 폭넓은 전망에 연결되지 않으면 일종의 무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환경’이라고 말할 때 이는 자연과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가 이루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며, 자연에 속하므로 자연과 끊임없는 상호 작용을 합니다. 어떤 지역이 오염된 이유를 알아내려면 사회의 기능, 경제, 형태, 유형, 현실 이해방식에 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중략) 반드시 자연계 자체의 상호 작용과 더불어 자연계와 사회체계의 상호 작용을 고려하며 포괄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환경위기와 사회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에 당면한 것입니다. 그 해결책을 위한 전략에는 빈곤퇴치와 소외된 이들의 존엄 회복과 동시에 자연 보호를 위한 통합적 접근이 요구됩니다......(중략) 한편으로, 경제 성장은 생산 과정의 단순화와 비용절감을 위한 자동화와 규격화를 추구합니다. 이 때문에 현실을 더 포괄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경제 생태론”이 필요합니다. 환경보호는 사실 “발전 과정의 핵심 요소 이어서 별도로 다룰 수 없습니다.”1) 그런데 이와 동시에 우리는 경제학을 포함한 다양한 학문 분야를 아우르는 인본주의가 절실히 필요합니다.....(중략) 생태계들의 상호 작용과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 간의 상호 작용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복음의 기쁨』, 237항)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입증됩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2016년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1)

 

“기후 변화는 현실이며 바로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종 전체가 맞고 있는 가장 시급한 위험이며,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하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습니다. 오염의 주범들이나 거대 기업을 옹호하지 말고, 인류 전체를 위해, 세계 각지의 토착민들을 위해, 기후변화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을 수많은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우리 아이들의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탐욕의 정치에 의해 발언조차 하지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세계 지도자들을 지지해야 합니다. 이 행성은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진게 아닙니다. 저는 오늘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탐욕의 정치에 의해 발언조차 하는 못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세계 지도자’들 중의 한 분이 아마도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이실 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교황께서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통해 말씀하고 계시듯이 환경파괴의 문제는 우리가 어디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문제입니다. 이 환경파괴의 문제는 동시에 지속 가능한 우리 생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환경파괴는 우리 인간 사회가 건전한 인본주의에 바탕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건전한 인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자연의 질서를 파악하고 존중하는 태도도 포함해야 합니다. 건전한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경제질서는 아마도 ‘생명중심’의 새로운 질서일 것입니다. 생명중심의 경제질서는 새로운 사회 생태론의 모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환경, 경제, 사회의 새로운 생태론은 ‘인간중심’(Anthropocentrism)의 생태론이 아닌 ‘생명중심’(Biocentrism)의 생태론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간중심의 세계에서 생명중심의 세계로 변화해 나가고 있는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시간일 것입니다.

 

1) 국제 연합, ‘환경과 개발에 관한 리우 선언’(Rio Declarat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 1992.6.14., 제4원칙.

 

[2024년 12월 22일(다해) 대림 제4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1) 통합생태론 - 2. 문화 생태론

 

 

『찬미 받으소서』 144, 146항

 

오늘날 세계화된 경제로 조장된 소비주의적 관점은 문화의 획일화를 추구하고 모든 인류의 보화인 엄청난 문화적 다양성을 약화시킵니다. 이러한 이유로, 획일화된 규율이나 기술적인 개입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한 지역적 문제들의 복잡성을 간과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개발단계에 있는 새로운 절차들을 외부에서 수립한 틀에 언제나 맞출 수는 없고, 자체적인 지역 문화에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삶과 세상이 역동적이기에 우리도 세상을 유연하고 역동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순전히 기술적인 해결책만으로는 문제의 본질과 상관없는 증상만을 다루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민족들의 권리와 문화의 관점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한 사회집단의 발전은, 문화적 상황 안에서 전개되는 역사적 과정을 전제로 하며, 지역 사회 일꾼들이 자신의 고유한 문화에서 시작하는 지속적이고 적극적 참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삶의 질에 대한 개념은 강요될 수 없으며, 각 인간 집단에 고유한 상징과 관습의 세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중략)

 

그러나 세계 여러 지역에서 자연과 문화의 훼손을 도외시한 채 자행되는 광업, 농업, 축산업 개발 계획에 밀려 그들은 자신의 땅을 버리고 떠나라는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사회발전을 위한 환경파괴?’, 우리는 산업화 이후 2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풍요를 위해 발전해 왔습니다. 한때 환경문제는 기술의 발전과 부의 축적을 통해 사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며, 이와 같은 현상을 반영한 환경 쿠즈네츠 곡선(Environmental Kuznets Curve)1)이라는 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시간이 흘러 2025년 현재에서 생각해 보면, 쿠즈네츠의 주장이 옳은 부분도 있지만 틀린 부분도 있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산업화의 초기엔 자본가와 노동자의 소득 격차가 크지만 후반에는 불평등이 약화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불평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국가들은 이론대로 됐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들은 불평등이 심화되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중국 등은 경제 발전 이후에도 불평등이 심화되었습니다. 반면에 한국이나 대만이나 일본 등은 복지국가 정책으로 불평등이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이 쿠즈네츠의 예측을 벗어났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기후변화와 생물다양성의 감소 문제입니다. 무조건적인 경제성장은 환경오염을 감수한다는 전제를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환경오염은 경제성장만으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될 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사회발전은 경제개발과 부의 축적만을 기준으로 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2019년과 2022년에 있었던 ‘기후위기 비상행동’과 ‘기후정의 행진’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뜻있는 행동이었습니다. 근본적인 기후문제 해결책은 단순히 탄소배출량을 줄이거나 상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역민의 참여와 다양성을 고려한 정의로운 기후-에너지-사회전환을 추구하는 것이 기후정의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찬미받으소서』 에서는 ‘문화 생태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문화생태론의 바탕에는 ‘공감능력’과 ‘신뢰성 회복’이 중요한 덕목입니다. 자연과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신뢰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지속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 생태론’에 입각한 환경운동을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막연한 목표달성을 위한 탄소중립운동이 아닌 너와 나의 삶을 바탕으로 한 건전한 환경문화의 수립에서 진정한 탄소중립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가 1955년 제시한 이론. 경제성장과 소득분배의 관계를 설명함. 1971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함.

 

[2025년 2월 23일(다해) 연중 제7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2) 통합생태론 - 3. 일상생활의 생태론(인간 생태론)

 

 

『찬미 받으소서』 147항-155항

 

[147] 개발 결정에 있어 고려해야 할 또 다른 요인은 사람들이 그들의 일상을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그곳이 인파로 북적이고 시끄러워지고 오염되거나 위험해지면, 사람들이 고통 받습니다. [148] 최악의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난한 이들이, 종종 만족감과 행복을 찾는 데에 놀라울 만한 능력을 보이곤 합니다. 그들은 엄청난 역경의 한가운데서도 공동체와 서로를 보살피는 체계를 구축해 냅니다. 그러나 동일한 공간이 무참한 범죄 행위와 깊은 슬픔을 자아내는 곳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은 증오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151] 도시계획자들 역시 교통수단과 서비스 그리고 모두를 위한 공원 등을 계획할 때에 수준 높은 생태론을 실현해야 합니다. [152] 주택 문제가 이에 속합니다. 집을 소유하거나 마련하는 것은 인간 존엄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합니다. 오래된 지역의 공간을 개발할 때에 계획자는 기존의 지역을 가능한 한 많이 유지해야 합니다. [153] 마찬가지로 도시 교통 체계도 오염을 줄이고 이용 편의는 증대하는 방향으로 그 해법을 모색하여야 합니다. [154] 그리고 권리도 소유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농어촌 지역 주민들에게 신경을 써야 합니다.

 

[155] 인간 생태론의 마지막 요소는 우리들의 몸입니다. 우리의 몸은 매우 직접적으로 일상 생활에서 자연과 연결됩니다. 우리의 몸을 하느님의 선물로 인정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몸에 대한 절대적이며 최종적인 통제권이 없으며, 그 통제권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자연 전반을 우리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끔 합니다.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남성과 여성으로서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면 우리는 보다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2011년 9월 22일, 전임 교황이신 베네딕토 16세는 당신의 모국인 독일 연방의회에서 연설하셨습니다. 그분의 연설은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기조를 띠고 있었으며,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법, 사회 정의, 인권 등에 있어서 서구 사회와 문화의 진보에 토대가 되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나치 치하의 서구 역사의 흔적을 언급하시며, 정의가 없는 국가는 ‘고도로 조직된 강도떼’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오늘날 인간 존재를 조작할 위험성이 전례 없이 높다는 사실을 지적하시며, 인간 존재와 사회에 대한 위협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께서는 독일의 생태운동의 장점과 옳은 방향을 인정하면서도, 이제는 ‘인간의 생태학’이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 요청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께서는 회칙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 2009년)』을 통하여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그는 다른 생물도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생태 위기를 해결하려면 인간 사회 내의 도덕적 · 문화적 질서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생태위기는 단순히 환경의 위기만을 생각해서는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의 말씀처럼 인간사회의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질서를 바로 세울 때 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생태론은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도 더욱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인간 사회가 도덕적, 윤리적인 질서를 회복하지 않고 과학기술이나 제도에만 의지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 생태론은 인간의 존엄성에 바탕을 둔 도덕적, 윤리적, 인간적 성찰을 제안합니다. 이 질서를 회복하려는 마음들이 모여서 우리는 기후위기라는 커다란 담을 조금씩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2025년 3월 23일(다해) 사순 제3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3) 통합생태론 - 4. 공동선의 원리

 

 

『찬미 받으소서』 156-158항

 

[156] 인간 생태론을 모든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서, 이제 우리는 공동선에 대해, ‘집단이든 구성원 개인이든 자기완성을 더욱 충만하고 용이하게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의 조건’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157]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인간 개개인을 인권과 존엄성을 지닌 사람으로 존중하며, 특별히 가정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로, 사회 평화는 공동선을 위한 핵심 요소이며 이것은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데에 기초합니다. [158] 오늘날의 세계에서 공동선의 원칙은 전 세계의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를 요청합니다.

 

만일 인류역사를 인간조건을 향상시키기 위한 개인과 집단의 노력의 여정이라고 표현한다면, 그 노력의 목적과 목표를 우리는 공동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과 목표는 바로 예수님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 덕분에, 그분을 통하여, 그분께 비추어, 인간 사회를 포함한 모든 실재는 최고선이시자 그 완성이신 분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행복을 단순히 역사적이고 유물론적인 시각만으로 보게 되면, 공동선은 아무런 초월적 목적도 없는, 곧 가장 본질적인 존재이유도 없는 단순한 사회 경제적 행복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공동선’(The Common Good)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공동선을, 모든 사람이 존중받고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조건과 구조라고 한다면, 공동선은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약자들의 권리를 배려해야 함을 전제로 합니다. 약자들의 권리를 배려해야 하기에 분배의 정의를 거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됩니다.

 

비오 11세 교황께서는 회칙 『사십주년』 28항에서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창조된 재화의 분배는 공동선과 사회 정의의 요청에 합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실한 관찰자는 누구나 지나친 부를 소유한 소수와 궁핍하게 사는 다수 사이의 큰 차이가 현대 사회에서 심각한 해악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확실한 사실이자 진리 가운데 하나는,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에 공동선이란 ‘더욱 용이하게 자기완성을 추구하도록 하는 사회생활 조건의 총화’라고 『간추린 사회교리』는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완성’을 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자기 완성’은 구원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부활을 통해 ‘자기 완성’의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며 공동선의 의미를 새롭게 새겨봅니다. 통합생태론에서 공동선의 원리는 인간실존의 완성을 지향하는 지혜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동선의 원리를 기억하면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라는 선행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 선행은 자신도 이웃도 함께 구하는 지혜의 열쇠가 될 것입니다. [2025년 4월 27일(다해)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4) 통합생태론 - 5. 세대 간 정의

 

 

『찬미 받으소서』 159~162항.

 

[159]공동선에 대해 논할 때에는 미래 세대 또한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뒤에 남겨두게 될 세계에 대해 반드시 숙고해야 합니다. 세계는 선물이며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이들, 우리 후에 올 이들을 포함하는 많은 다른 이들과 나누어 받았습니다.

 

[160]우리의 아이들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상속받기를 원합니까? 이 질문은 우리 생활 방식을 규정하며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설정합니다.

 

[161]우리는 이미 지구의 자원을 너무나 많이 소비하고 낭비해 왔습니다. 이 지구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부산물과 쓰레기 더미를 남겨 놓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는 세계를 남겨두기를 진정으로 원한다면, 지금 바로, 결정적인 행동을 취해야 합니다.

 

[162]현대인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즉각적 요구 충족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수 있습니다. 부모들은 새로운 ‘가치’를 그들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정의는 올바른 인간이 갖추어야 할 네 가지의 중추적인 덕(四樞德 : 현명, 정의, 용기, 절제)중 하나입니다. 과거를 생각할 때 정의는 올바름을 떠올리지만 미래를 생각할 때 정의는 ‘배려’(Providentia)를 생각게 합니다. 지금은 옳다고 생각해서 행동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볼 때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고, 지금은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미래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의 덕은 지금 당장은 나에게 이익이 되지만 미래의 세대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면 포기하거나 다른 결정을 내리게 만드는 현명한 배려가 정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955년 연방 원자력성을 발족시켜 핵의 평화적 이용을 시작한 독일은 2023년 4월 15일 마지막 세 개 원전(이자르2, 네카르 베스트하임2, 에임스란덴)이 최종 폐쇄 됨에 따라 탈원전 국가가 되었습니다. 이런 역사를 가지게 된 배경엔 중간 과정이 있었습니다. 1986년 4월 26일 현재의 우크라이나에 있는 체르노빌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이 사고로 국제기구의 추산에 따르면 수 십 만명의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체르노빌 사고 20주년을 맞이한 2006년에 독일 주교회는 환경문제에 관한 포괄적인 문서를 공포했습니다. 이 문서에서 원전의 본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원자력 에너지가 과연 유효한 해결 방법이며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우라늄은 수입해야만 하고 그 양에도 한계가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대한 위험을 포함해 가동에 동반되는 미해결의 문제를 안고 있다(중간 및 최종 처분장 문제 등). 세대 간의 공정을 생각할 때 이러한 문제를 안이하게 다음 세대에게 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예방의 원칙 및 수단의 타당성 원칙에 저촉되는 것이다.(『기후변화-지구규모, 세대간, 생태적 공정의 초점』)

 

6월 3일 대한민국도 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세대 간 정의’라는 다소 가볍지 않은 책임감은 우리에게 현명한 선택을 요구합니다. 미래 세대에게 짐을 지워주지 않은 선택! 미래 세대에게 희망을 안겨줄 수 있는 선택! 이런 선택이 간절히 필요한 시점입니다. ‘세대 간 정의’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어른들의 배려로 미래 세대에게 위로와 위안이 되는 선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5년 5월 25일(다해)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5) 접근법과 행동 방식 - 1. 환경에 관한 국제 정치적 대화

 

 

『찬미 받으소서』 [163-175항] 참고.

 

우리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교회는 언제나 인류의 구원을 위해 봉사해 왔습니다. 구원이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품위를 온전히 지켜주고 완성시켜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품위(Dignitas)는 죄로 인하여 손상됩니다. 손상된 품위는 성사로서 다시 회복시켜주고 지켜주고 온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인간적인 품위의 손상이라면 인간 안에서, 성사를 통하여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품위가 환경에 의해서 손상되고 파괴된다면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인류 모두의 공동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업화 이후의 인류는 경제적인 풍요도 누렸지만 그에 못지않게 환경적인 재앙도 맞이해야 했습니다. 자연을 무분별하게 이용하고 착취한 인류는 그 댓가도 자연을 통해서 치러야 했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의 품위를 저해하는 환경재앙에 따르는 환경문제에 관하여 처음으로 관심을 기울이신 분은 바오로 6세(Paul Ⅵ, 재위: 1963-1978) 교황이셨습니다. 회칙 『인류 발전의 진보를 위하여(Populorum Progressio, 1967)』는 인류가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있는 관리자로서 행동해야 함을 가르치는 최초의 문헌이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1971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통해 인류의 무분별한 자연착취에 대해서 일갈하셨습니다. 이 일갈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지 않고, 1972년 6월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열린 ‘유엔 인간 환경 회의(UN Conference on the Human Environment)’를 통해 최초의 세계적인 환경회의를 갖게 합니다. 이 스톡홀름 선언은 국제 환경법의 출발점이 됩니다. 이어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79년 11월 29일에 프란치스코 성인을 생태운동의 주보성인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통해 생태계의 위기는 인류 공동의 책임임을 다시금 천명하셨습니다. 이 담화문 발표 이후에 가톨릭 교회 내에서 환경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권고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1992년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유엔 환경 개발 회의(UNCED)’가 열립니다. 이 리우 회의(Rio Earth Summit)1)에서는 국제 환경 협정을 맺고, 지속가능한 21세기를 위한 환경에 관한 내용들에 대해 선언합니다. 이 회의는 1997년 교토 의정서와 2015년 파리협정의 기반이 됩니다.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인류의 이러한 노력의 결실인 국제적 합의들은 실제로 집행되기도 했지만 부족한 부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는 이제 지구 가열화나 기후붕괴라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고, 인류는 점점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2015년 5월 24일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반포하십니다. 이 회칙의 가르침은 우리 인류가 품위를 잃지 않고 존재하기 위하여 ‘공동의 계획을 가진 하나의 세상’을 만들 것을 제안하십니다. 인류 앞에 닥친 환경이나 기후위기는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국제적 지도력을 갖춘 ‘참된 세계적 정치 권위가 시급히 필요함’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이 교황님의 가르침이 순진한 외침이 아니라, 참되고 진실하고 진지한 조언으로 받아들여지길 소망합니다. 인류는 자기 품위를 피조물과 함께, 아울러 인류 전체와 연대해야만 지켜낼 수 있습니다. 인류는 자연 없이, 혹은 형제자매인 인류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역대 교황님들의 회칙과 가르침을 통한 국제적 호소에 우리도 진지하고 진실하게 응답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1) 리우 회의는 환경과 개발 문제를 통합적으로 다룬 첫 대형 국제 회의입니다. 기후변화협약(UNFCCC), 생물다양성협약(CBO), 산림원칙 선언(Non-Legally Binding Authoritative Statement of Forest Principles) 등 지속가능한 지구의 환경을 위한 첫 국제적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2025년 6월 22일(다해)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6) 접근법과 행동 방식 - 2. 새로운 국가적 지역적 정책을 위한 대화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

 

 

『찬미 받으소서』 [176-181항] 참고.

 

20세기 가톨릭 지성의 거장이라고 일컬어지는 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는 시대의 평가라는 주제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한 시대를 제대로 평가하는 유일한 방식은 그 시대가 그 고유한 특수성과 가능성에 따라서 어느 정도 발전했는지 그리고 인간 삶의 충만함이라는 진정한 대의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1)

 

각 시대는 모두 특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시대가 누리고 살아가는 문화적인 수준, 정치적인 상황 등이 특수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특수성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인간 삶의 충만함’이라는 보편적 가치에 얼마나 도달했는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 삶의 충만함은 단지 물질적 편의 수준이 제공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선의 실현에 얼마나 함께하고 있는가가 충만함을 제공해 주리라고 생각됩니다. 이 공동선의 실현은 국가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지역적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기후위기 시대에 함께 해결해야 될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에너지 생산과 공급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매일 에너지를 사용하여 생활의 편리와 품위 있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연일 TV 뉴스에서 보도되는 내용을 보면 ‘재생에너지로 할 것이냐?’ 아니면 ‘화석연료로 에너지를 할 것이냐?’는 두 가지 문제가 대립되는 듯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 충청북도의 에너지 자립률을 보면 10.8% 정도에 불과합니다. 에너지를 생산하는 것보다 소비하는 것이 훨씬 크다는 뜻입니다.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중 14위입니다. 이는 충북이 내륙지역으로 대규모 발전소를 짓기에 어려운 조건이기에 벌어지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지역적 한계성을 지니면서도 충청북도는 2050년까지 에너지 자립률 100%를 달성하기 위해 ‘분산 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에너지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형태)’을 제정하여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지역별로 전기요금이 차등화될 것입니다. 에너지 자립 100%를 이루는 것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낼 것인가? 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지역 주민들과 소통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재생에너지와 화석연료 에너지의 비율을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 다음 세대에 유익한 것인가는 함께 고민하고 동의해야 할 부분일 것입니다. 이익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공간 장악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 공간을 장악하여 이익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동선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시간과 방법이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우리만 살고 떠날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은 공간들이 제공합니다. 그래서 이 공간은 언제나 싸움의 장소가 되어왔습니다. 이 공간이 싸움의 장소가 아니라 상생의 장소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고려하는 현명함(Providentia: 배려)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에 회칙 『복음의 기쁨』 과 『찬미받으소서』에서 ‘시간이 공간보다 위대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

 

한 국가와 한 지역이 장기적 공동선에 대한 배려가 없다면 우리는 편리하게는 살 수 있지만 충만함에 도달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정치적 위대함은 언제나 ‘장기적 공동선을 배려하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이 공동선에 함께 할 때, 우리는 지역의 개인과 단체의 차원에서 더 큰 책임감, 더 강한 공동체 의식, 특별할 보호 능력, 더 많은 창의력, 자기 땅에 대한 깊은 사랑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1) 로마노 과르디니, Das Ende der Neuzeit, 뷔르츠브르크, 1965, 30-31. 『복음의 기쁨』 224항에서 재인용. [2025년 7월 27일(다해)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7) 생태 교육과 영성 - 1. 새로운 생활양식을 향하여

 

 

『찬미 받으소서』 202항-208항.

 

[202] 많은 것의 나아갈 방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류 자신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203] 우리는 불필요한 지출과 구매에 쉽게 휩쓸립니다. 우리는 광고업자가 말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고 믿기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의 자유란 ‘소비할 자유’가 된 것입니다.

[204] 현대 세계의 상황은 불안을 느끼게 하며, 이러한 불안은 이기적 행동을 촉발하기 마련입니다. 마음이 공허할 때, 우리는 공허함을 소유와 쾌락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물론 우리도 기후 변화에 대해 염려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불안에 대해서도 우려합니다.

[205]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는 시간을 갖고, 우리의 불안을 인정합시다. 그런 다음 참된 자유를 향한 길에 나섭시다.

[206] 유해한 환경 발자국을 남기는 회사의 상품 불매로, 소비자의 권리를 행사합시다.

[207] 이 시대가 지구와 지구의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에 대한 존중을 새롭게 깨달은 시대로 기억되게 합시다.

 

2000년 6월 29일 네덜란드 헤이그 평화궁전(Peace Palace)에서 전세계 시민 사회와 국제기구들의 대표들이 발표한 『지구헌장』(Earth Charter)은, 우리가 함께 기억할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회칙 『찬미 받으소서』 207항에서도 이 지구헌장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지구헌장』은 우리 모든 인류가 현재 역사적 전환점에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지구 공동체로서, 자연 존중, 인권, 경제 정의, 평화의 문화를 기반으로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현재 세대뿐 아니라 미래 세대와 생명 공동체 전체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다시금 천명하고 있습니다.

 

20세기 가톨릭 신학자 중 한 분인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그리스도교 입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21세기의 그리스도인은 신비가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신비가’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대체로 특별한 환시나 계시를 받은 성인을 떠올리게 됩니다. 또는 극적인 관상체험을 하는 사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칼 라너가 말하는 신비가는 훨씬 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라너의 신비가는 단순한 교리지식이나 제도교회 안에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신비가는 자기가 믿는 것을 일상에서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또한 자기의 신원에 맞게 하느님의 은총을 살아내는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밥을 먹고, 일하고, 관계 맺고, 고통을 겪는 모든 순간이 ‘신비적 차원’을 품고 있음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신비가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면서 양심을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신비가는 기도와 침묵, 내적 성찰을 통해 하느님과 ‘인격적이고 살아 있는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아버지일 수도 어머니일 수도 우리의 형제 자매나 이웃일 수 있습니다. 이 신비가는 ‘사회정의와 사랑의 실천’이 곧 신비적 삶의 연장선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인생의 모든 순간이 ‘성사적’인 것임을 자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칼 라너가 말한 신비가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살아가는 많은 순박한 신자들이 21세기의 신비가들인 것입니다. 이 순박한 신비가들이 아마도 기후위기 시대의 희망의 등불이자 변화의 초석들이실 것입니다.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지구헌장』의 약속들을 이미 실천하고 계신 분들일 것입니다. 생태영성은 이 신비가로서의 삶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인간으로서의 삶 뿐만 아니라 신비가로서의 삶도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요청되는 것입니다. 이 신비가로서의 삶은 우리를 불안에서 해방시킬 것입니다. 또한 지속 가능한 삶에로의 전환도 가능하게 만들 든든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2025년 9월 28일(다해) 연중 제26주일(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8) 생태 교육과 영성 - 2. 인류와 환경이 맺은 약속에 대한 교육

 

 

『찬미 받으소서』 209항~215항.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1990년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 담화문을 통하여 환경교육과 미적인 가치에 대하여 간곡하게 언급하셨습니다. 여기에 그 일부를 소개합니다.

 

“생태계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는 교육, 즉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지구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는 교육이 절실합니다. 이러한 교육은 단순한 감정이나 공허한 소망에 뿌리를 박을 수는 없습니다. 그 교육의 목적은 이념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대 세계에 대한 배척이나 어떤 ‘실락원’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부질없는 소망을 그 바탕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책임에 대한 참된 교육은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의 진정한 회개를 수반하는 것입니다. 여러 교회와 종교 집단들, 민간단체와 정부기구들, 참으로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저마다 그러한 교육을 위하여 수행하여야 할 구체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으뜸가는 교육자는 가정입니다. 바로 가정에서 어린이는 자기 이웃을 존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끝으로, 창조의 미적 가치를 간과할 수는 없습니다. 자연과 우리의 만남 그 자체가 심오한 치유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위대한 자연에 대한 명상은 평화와 평온을 가져다줍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은 피조물과 선과 미를 거듭거듭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창세 1,4 이하; 시편 42; 104,1 이하; 지혜 13,3-5; 집회 39,16.33; 43,1.9 참조) 인간의 창조력이 낳은 위업에 대한 명상 또한 좀 더 난해하기는 하지만 똑같이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도시들마저 모두 그 나름대로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으며, 그 아름다움은 사람들에게 환경 보호의 동기를 부여할 것입니다. 훌륭한 도시계획은 환경 보호의 중요한 부분이며, 대지의 자연미에 대한 존중은 생태학적으로 건전한 개발을 위하여 없어서는 아니 될 필요조건입니다. 훌륭한 미적 교육과 건강한 환경 유지 사이의 관계는 결코 간과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이 세상은 어떤 질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주를 바라보면 무한하고, 내 앞의 작은 돌멩이를 바라보면 그 끝을 알 수 없고, 실타래처럼 얽힌 수많은 힘과 조화가 내재하고 있음을 자연스레 알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 자신도 질서 안에서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정신’은 이러한 질서의 철학적 표현일 것입니다. ‘정신’이 뚜렷한 사람은 자신의 삶도 뚜렷하게 살아갑니다. ‘정신’이 흐리멍덩하면 삶도 흐리멍덩하게 됩니다. ‘정신’은 이 땅 위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질서 있는 삶을 살도록 안내합니다. 이런 삶의 ‘정신’들을 처음 배우는 곳이 가정입니다. 자연을 존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정신을 배운 최초의 학교는 바로 우리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교육은 지금도 대를 이어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플라스틱이나 종이의 사용을 삼가고, 물 사용을 줄이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고, 적당히 먹을 만큼만 요리하고, 생명체를 사랑으로 돌보며,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승용차를 함께 타기를 실천하고, 나무를 심고, 불필요한 전등을 끄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인간 최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관대하고 품위 있는 창의력에 속하는 것입니다(211항). 뜻깊은 동기에서, 물건을 쉽게 내 버리지 않고 재활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존엄을 표현하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배운 작은 실천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 배운 작은 실천들이 세상에 선으로 더욱 확장되어서 제도와 질서를 변화시키게 된다면 우리가 기대하는 것보다 더 큰 결실로 우리에게 되돌아올 것입니다. 완벽해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옳은 방향으로만 간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더욱 커질 것입니다. [2025년 10월 26일(다해) 연중 제30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19) 생태 교육과 영성 - 3. 생태적 회개

 

 

『찬미 받으소서』 216항~221항.

 

1588년 교황 식스투스 4세에 의해서 시성되시고, 신비와 학문을 조화시키셔서 세라핌적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칭송으로 식스투스 5세에 의해 교회학자(Doctor of the Church)로 선포되신, 보나벤투라(Bonaventura:1217-1274)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되새김이 없는 (영적)독서, 헌신(열정) 없는 묵상, 경외감 없는 탐구, 기쁨을 느끼지 못하면서 계명을 지킴, 신심에서 멀어진 활동, 사랑에서 멀어진 지식, 겸손 없는 지성, 거룩한 은총의 도움을 받지 않는 연구, 하느님께 영감을 받은 지혜가 없는 사랑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보나벤투라, Itinerarium mentis in Deum, Prol., 4)

 

스콜라 시대의 성인이시지만 신비신학적인 표현을 즐겨 하셨던 보나벤투라 성인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싶은 것은 아마도 우리 인생에 ‘사랑’이 없으면 그 무엇도 열매 맺지 못함을 역설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영적독서를 하면서 되새김질하는 것도, 경외감을 가지고 탐구하는 것도, 내면에서 우러나온 기쁨에서 계명을 지키는 것도, 하느님을 깊이 흠숭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삶의 활동들도, 어찌 보면 모두 하느님을 ‘맛 본’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삶의 내용들일 것입니다.

 

생태적 회개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모두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은, 우리가 하느님을 함부로 할 수 없듯이 자연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연을 존중하고 필요에 맞게 이용하고 합당한 감사와 보상의 노력을 한다면, 자연도 우리 인류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후변화에 따른 자연의 광폭한 현상(가뭄, 홍수, 태풍, 허리케인, 산불, 사막화 등)은 어찌 보면 우리 인류가 자초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국제 사회와 깨어 있는 시민들은 다각적으로 응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금년은 UN이 정하고 발표한 ‘빙하 보존의 해’였습니다. 기후변화로 매년 빙하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남극, 히말라야, 알프스, 안데스 등 주요 산악지대의 빙하가 매년 수 미터씩 후퇴하고 있으며, 지난 50년간 평균 두께가 약 30m 감소했습니다. 세계 담수의 60-70%를 차지하고, 이 빙하를 식수원으로 하는 20억 명의 사람들에게는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빙하가 사라지면 식수 부족, 농업 생산 감소, 물 분쟁이 현실화될 것입니다. 빙하는 햇빛을 반사해 지구 온도를 낮추고, 물의 순환을 조절하는 ‘자연의 냉장고’ 역할을 합니다.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 상승과 기후 불균형이 가속화됩니다. 이러한 빙하의 생성과 사라짐은 자연현상이기도 하지만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크다는 사실은, 이제 논란이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탄소 배출량을 산업별로 정리해 보면, 전력 및 열 생산에서 29%, 제조 및 건설에서 21%농업분야 18%, 운송분야 15%, 기타(폐기물 등) 17% 순입니다. 이 모든 산업들은 인류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 행해진 것들입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 노력이 도리어 우리에게 생명의 위협이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아이러니하지만 현실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우리의 생존과 행복을 위한 삶의 방식을 재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대로의 삶의 방식으론 우리의 생존과 행복이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생태적 회개”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탁월함을 개인적 영광이나 무책임한 지배의 근거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서 비롯된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특별한 능력으로 이해합니다.’(220항) 자연을 에너지원으로 이용하는 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은 미룰 수도 미뤄서도 안 되는 ‘생태적 회심’의 구체적 실천일 것입니다. 생태적 회심은 개인뿐 아니라 가정도 사회도 모두 함께해야 할 시대적 과제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경외심에 찬 눈길은 이 세상과 우리 모두를 새롭게 대하는 아름다운 삶의 방식이 될 것입니다. [2025년 12월 28일(가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20) 생태 교육과 영성 - 4. 기쁨과 평화

 

 

『찬미 받으소서』 222항-227항.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을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라고 여겼습니다. 행복이 인간에게 있어 최고의 가치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행복’은 감정적 상태가 아닌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는 데서 약간 의견이 갈릴 것 같습니다. 희랍어 행복(εὐδαιμονία)을 직역해 보면 ‘영이 이끄는 좋은 상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고대 희랍인들은 인간의 생명을 어떤 ‘영’에 의해서 생겨나고 이끌려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그래서 ‘영’(δαιμονί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좋은’(εὐ)상태를 ‘행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성령께서 이끄시는 삶’이라고 생각해도 비슷할 듯 합니다. 성령께서 이끄셔서 생겨난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명이 언제나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아울러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육체적 삶은 언제나 피조물에게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태도가 ‘건전한 겸손’이 될 것이고, 피조물에게도 의지하고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는 사람의 삶의 태도가 ‘행복한 절제’ 일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의 내용은 이 두 기둥인 ‘건전한 겸손’과 ‘행복한 절제’를 통해서 실현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듯 합니다.

 

『찬미 받으소서』 222항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은 절제를 통하여 성숙해지고 적은 것으로도 행복해지는 능력을 제안합니다.”

 

만약에 우리의 ‘행복’이 깨지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영’이 이끄는 대로 바르게 사랑하지 않고 ‘지배’하려는 욕구가 커졌을 때일 것입니다. 지배하려는 능력을 과신하게 되면, 그곳엔 언제나 파멸과 분열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내적 평화을 잃고 성숙에서 멀어진 상태가 됩니다.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은 평화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전쟁이나 폭력이나 분열이 없는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의 상태고, 다른 또 하나는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상태”(positive peace)인 적극적 평화입니다. 『찬미 받으소서』가 가르치는 평화는 ‘적극적 평화’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내적 평화’를 가져다 주는 진정한 평화입니다. ‘적극적 평화’는 차분한 태도로 살아가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하지 않고 지금 누군가와 온전히 함께 할 수 있으며, 순간순간을 하느님의 선물로 여겨 충만하게 살아가려는 마음가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들에 핀 나리 꽃과 하늘의 새들을 바라보라고 권유하셨을 때나, 당신께 질문하는 부자 청년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마르 10, 21) 말씀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세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과 피조물과 온전히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피상적이고 공격적이며 충동적인 소비자로 만드는 병적인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226항)

 

‘기쁨’과 ‘평화’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늘 성찰해 보아야 할 두 가지 행복의 기둥입니다. 기쁨이 ‘성령’의 이끄심대로 사는 데서 온다면, 평화는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있는가에 대한 삶의 결과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이끄심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가장 궁핍한 이들과의 연대’를 기억하며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생명이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음을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육신적 생명이 모든 피조물에게 빚지고 있음을 상기시키십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적극적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 ‘적극적 평화’는 언제나 우리를 ‘가장 궁핍한 이들과의 연대’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 연대는 다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선물해 줄 것입니다. 『찬미 받으소서』의 생태영성은 이 진정한 평화의 길로 우리 모두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2026년 2월 22일(가해) 사순 제1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회칙 「찬미 받으소서」에 나타난 생태 영성 (21) 생태 교육과 영성 - 5. 돌봄의 문화

 

 

『찬미 받으소서』 228-232항.

 

『간추린 사회교리』 582항은 우리 인류 사회가 어떤 사회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야 하는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더욱 인간답고 더욱 인간에게 걸맞은 사회를 만들려면 사회생활-정치, 경제, 사회-에서 사랑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야 하며, 사랑이 지속적으로 모든 활동의 최고 규범이 되어야 한다. ……인간관계는 정의의 법칙으로만 지배될 수는 없다. ……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 삶의 모든 분야에 활력을 주고, 국제 질서에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사랑의 문명’이 다스릴 때에만 인류는 참되고 지속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코틀랜드의 아담 스미스(1723-1790)는 그의 저서 『도덕 감정론』(1759)에서 ‘공감’(sympathy)을 모든 도덕의 기초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것, 그래서 도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 그것은 아마도 사랑이라고 표현되는 배려의 상태를 의미할 것입니다.

 

이 공감의 철학을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미국 교육철학자였던 넬 노딩스(Nel Noddings: 1929-2022)였습니다. 그녀는 도덕이란 “관계 속에서의 응답”(responsiveness)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덕이 필요한데, 그 도덕은 규칙이 아니라 관계적 상황에서의 민감한 응답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려는 이의 태도를 ‘배려’라고 한다면 이 배려가 ‘도덕’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배려’가 교육의 바탕이자 목표가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우리 자신과 세상 모두는 서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이자 상태입니다. 우리 자신도 돌봄을 받아야 하지만, 세상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돌봄을 받아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 존재로 받아들일 때, 그 돌봄은 ‘배려’를 통해 ‘사랑의 문화’로 꽃 피워질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돌봄을 통하여 자신이 성숙해지고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집(지구)에서 우리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의식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공동체 활동은 자기 자신을 내주는 사랑으로 표현될 때에 강렬한 영적 체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영적 체험’이 ‘돌봄의 문화’를 통해 구체화되고 실현될 수 있다면, ‘사랑의 문화’는 이상적인 구호에만 그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의 문화’가 세상 전체의 도덕적 바탕이자 목표가 됨을 공감하고 실천할 때, 우리 인류는 더욱 영적인 존재로 세상 안에서 진보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2026년 3월 29일(가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청주주보 3면, 김태원 요셉 신부(청주교구 생태환경 위원장, 직장사목부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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