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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31: 헌신적인 왕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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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09-18 ㅣ No.1740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31) 헌신적인 왕 요셉


포교성성 장관에게 “요동 땅 동쪽을 조선대목구에 편입시켜 달라” 요청

 

 

서만자 교우들은 박해 동안에도 성당 건립 공사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마침내 새 성당을 완공했다.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가 서만자에 머물고 있을 때 완공된 서만자 성당으로 지금은 헐리고 없다.

 

 

죽은 줄 알았던 왕 요셉, 서만자로 돌아와

 

1835년 9월 3일 선박 화재 사건으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왕 요셉이 살아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달됐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심하게 아프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미 알려드렸듯이 황제에게 바치는 쌀을 나르던 배 중 여러 척이 양자강에서 불에 탔습니다. 많은 뱃사공과 승객들이 화재로 죽거나 물에 빠져 사망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고가 고의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100척 이상의 배에서 선원들이 선장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선장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의 목을 잘랐습니다. 폭동 가담자 중 어떤 이들은 죽고 나머지는 도망쳤습니다. 왕 요셉은 그 소동 속에 있었습니다. 이 모든 비통한 사건의 증인이었지만, 선하신 하느님께서 그 난리로부터 그를 지켜주셨습니다. 거동이 불편했기에 기적처럼 폭동에서 벗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고 1주일 뒤 왕 요셉이 더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서만자에 왔습니다. 온몸에 상처와 종기가 뒤덮여 있었습니다. 그는 저와 함께 지낸 지난 3년 동안 단 하루도 편하게 쉬지 못했습니다. 특히 지난해 그는 조선 국경까지 다녀왔고, 올해 초에는 저를 대신해 조선 교우들과 면담하기 위해 북경을 오가면서 혹독한 추위로 동상에 걸려 심하게 고생했습니다. 또 남경에 둔 저의 짐을 챙겨오기 위해 탔던 배가 비위생적이어서 피부병이 옮았습니다.

 

그는 걷는 것은 고사하고 말이나 수레를 타는 것조차 힘들 만큼 쇠약했습니다. 저와 조선 교회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그의 정신력과 하느님께서 자신을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신앙심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무너져내린 자신을 버텨냈습니다. 그는 지금 그의 존재가 제게 무척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 국경까지 저와 동행하기를 원할 뿐 아니라 제게 출발을 서두르라고 재촉까지 합니다. 이 충성스러운 협력자를 제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선으로 떠나기에 앞서 저는 대목구장으로서 조선에 파견된 선교사들의 안전한 입국로를 확보하고 지속적인 조선인 사제 양성 기반을 마련하는 방안을 정리해 교황청 포교성성 장관 자코모 필리포 프란소니(Giacomo Filippo Fransoni) 추기경에게 보고서를 보냈습니다.

 

“연초에 교황님께서 조선 선교를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기셨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으로는 조선 입국을 위해서는 조선과 가까운 요동 지방 동쪽을 조선대목구장의 재치권에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 주요 근거는 이렇습니다.

 

- 브뤼기에르 주교는 포교성성 장관 자코모 필리포 프란소니 추기경에게 조선 선교사들의 안전한 입국로 확보와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요동 지방 동쪽 지역을 포르투갈 보호권에서 떼 조선대목구 관할로 편입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프란소니 추기경 초상화.

 

 

입국로 확보와 조선인 사제 양성 위해 필요

 

조선인들은 만주의 극도로 추운 겨울이 위력을 떨치는 동안에는 그믐 열하루가 아니면 어떤 선교사도 조선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확실히 말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마카오에서 조선으로 떠나는 선교사는 중국을 지나 길고 위험한 길을 여행해야 하며, 어느 곳에서도 안전하게 쉴 피난처를 찾을 수 없습니다. 중국에서 만주로는 1년 중 가장 험한 날씨에 가야만 합니다. 길은 척박하고 사나운 짐승들이 빈번히 출몰할 뿐 아니라 강도들이 여행자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디서나 안전한 숙소를 마련할 수 있고, 약속 시각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가정해도 조선인 안내자들이 병이나 박해, 다른 여러 이유로 늦어지거나 나타나지 않을 경우 선교사들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됩니다.

 

만일 요동 지방 동부가 조선대목구에 합해진다면, 이런 어려움은 더 없을 것입니다. 언제가 되든지 적당한 시기가 왔을 때 조선으로 들어갈 선교사는 먼저 요동에서 길이나 장소, 피신처를 아주 잘 알아 육로든 해로든 선교사들을 안전한 곳으로 인도할 수 있는 숙달된 안내자들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는 것이 확실해질 때까지 선교사들은 이곳에서 그들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그동안 그가 그곳에 세워져야 할 신학교에서 조선어 공부를 하거나 요동에 머물면서 교회 직무를 수행한다면 저희처럼 이토록 무익하게 시간을 보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요동에 집을 사거나 세를 얻는 것이 불편을 덜 것이라고 말하지만 좋지 않습니다. 법에 따르면 중국인은 만주에서 밭이나 다른 것을 사는 것이 금지돼 있습니다. 집을 빌릴 수는 있으나 사실상 그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가격도 엄청나게 비쌉니다. 또 그 집이 이교인들 사이에 있게 되거나, 교우들이라 하더라도 다른 재치권 하에 있을 것입니다.

 

신학교를 세우기 위해 믿을 만한 현지인 사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학교를 즉시 조선에 세울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제게는 모든 장소 가운데 요동이 더 적절하고 더 안전해 보입니다. 제가 옳다면 중국에서 빛났던 복음이 빛이 그곳에서 빛날 것입니다. 만주에서는 박해가 일어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동 전역이 포르투갈 보호권 아래 있는 동안에는 요동에 신학교를 건립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포르투갈인들이 전적으로 거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인 신학생들을 마카오나 페낭에 보낸다면 비용도 엄청날 뿐더러 큰 위험에 직면할 것입니다. 조선인들은 국경을 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돼 있으며 말을 전혀 모르는 중국으로 들어오면 밀고의 위험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밖에도 마카오와 페낭은 너무 뜨겁고 기후도 고르지 않아 견디기 어려워하다가 많은 중국인 신학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찍 생을 마감하거나 겨우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건강만을 유지한 채 학업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포르투갈 보호권 아래 신학교 건립 불가능

 

현재 중국에서 바닷길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조선으로 가는 길은 단 하나 요동뿐입니다. 만일 요동 지방이 포르투갈 보호권에서 벗어난다면 그 지방의 선교 성과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요동 지방은 활기찬 선교사들을 여러 명 얻게 될 것입니다. 교우들은 더 많은 보살핌을 받을 수 있고, 회개하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며, 만주인들에게 직접 복음이 선포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추기경님께서는 조선인들의 절박한 처지와 영적 필요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3년 이상 땅과 바다를 떠돌며 중국에서 방황하고 만주에서도 이리저리 헤매는 불쌍한 당신 종의 처지도 기억해 주십시오. 제가 발을 쉴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밀쳐지노라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쫓겨나고 어떤 사람들은 주저하면서도 받아들여 주지만 제가 쉴 곳이 어딘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동으로 세 사람을 보내 이교인들 한가운데 제가 머물 집을 구해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가진 돈 거의 전부를 맡겼습니다. 그곳에서 조선으로 들어가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직 그들 가운데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집을 얻지 못하고 돈을 다 써버린 채 돌아온다더라도 저는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의 노고를 칭찬할 것입니다.”

 

한편, 서만자 일대에 벌어졌던 박해는 약해지기 시작했지만,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닙니다. 체포된 교우 9명이 종신 유배형을 받았습니다. 그들이 살던 고장에서 유배지로 압송될 때 한 주막에 멈췄습니다.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던 한 중국인 사제가 이 틈을 이용해 교우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3명은 영성체까지 했습니다. 중국인 신부는 그들 모두에게 성체를 영해 주고 싶었지만, 포졸들이 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서만자 교우들은 박해 중에도 성당 건립 공사를 중단하지 않고 지속해 마침내 아름다운 성당을 완공했습니다. 북경과 마카오, 복건 다음으로 제대로 지어진 성당은 제가 알기엔 서만자밖에 없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15일, 리길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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