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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ㅣ세계 교회사

[한국] 왜관에서 발아한 덕원의 아홉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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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2-03 ㅣ No.1779

[앞서 걸어간 길] 왜관에서 발아한 덕원의 아홉 씨앗

 

 

- 김영근 베다 신부의 사제서품, 1953년 7월 19일. 왜관에서 거행된 첫 사제서품식이다.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가 김영근 베다 부제(가운데), 덕원면속구 소속 김성도 모이세 부제(오른쪽)와 함흥교구 소속 이 경우 가브리엘 부제(왼쪽)를 사제로 서품하였다. 

 

 

개별 수도자의 활동을 수도원 밖의 사람이 서술하기는 매우 어렵다. 수도원 안에 쉬 내놓지 않는 사료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수도원이 하는 일을 개개인의 이름으로 기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일로 간주하고 직접 행한 개인의 흔적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를 소개한 수비아코 동굴 벽화 어디에도 작가의 서명이 없는 것과 흡사하다. 하지만 개인의 삶이 모여 공동체의 삶을 구성한다.

 

 

성직지망수사들의 서울 연학과 해외유학

 

1949년 덕원 수도원 폐쇄 당시 성직지망수사는 9명이 있었다. 이들의 생애는 왜관 수도원 설립 초기의 고된 성취와 방향을 드러낸다. 가장 상급자는 수도원 폐쇄 직전 차부제품을 받은 김영근(1918-2003)과 노규채(1923-2017)다. 김영근은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서 태어나 1935년 서울 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프란치스교회에 잠시 있었다가 1942년 12월 덕원 수도원에 입회했다. 노규채는 함경북도 청진 출신으로 25세에 덕원 대신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1943년 김영근, 노규채, 김이식 동기 셋은 첫서원을 했다. 수도원이 폐쇄될 때 김영근은 동기들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한국인 수사들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수도자들이 추방된 후, 두 차부제를 중심으로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김영근과 3명은 북한에 일단 남고, 노규채와 4명은 서울로 월남했다. 월남한 이들은 1945년 서울교구에서 다시 개교한 성신대학에서 신학공부를 다시 했다. 김상진이 먼저 도착했고, 이어서 노규채, 최 바오로, 이 보니파시오, 송 크리소스토모가 합류했다.

 

 

 

한편, 연길교구의 양기옥은 만주로 떠났고, 김영근, 서상우, 황춘홍은 연락체계를 짠 뒤 흩어졌다. 김영근은 수사 두 명과 함께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와 신부들이 갇혀있는 평양으로 가서 장상과 신부들을 살피고 평양에서 일을 찾으려 했다.

 

호남에서 가족과 함께 1939년 북쪽으로 이주한 황춘홍(1926~2010)은 실업학교를 다니다가 덕원 수도원에 입회한 친구를 따라 수도원에 들어왔다. 1948년 첫서원을 했다. 수도원 폐쇄 후 모친이 있는 서호진으로 가서 인근의 제지공장에서 일했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에서 태어난 서상우(1928~1995)는 1940년 교구신학생으로 덕원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고 서울 성신대학에서 별과를 마쳤다. 1947년 덕원 수도원에 입회하여 덕원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수도원에서 강제로 쫓겨나자 평양으로 갔다가 순안에서 체포되었지만 탈출해서 진남포에 은거했다.

 

북한에 남았던 성직지망수사들은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가 평양인민교화소에서 순교한 것을 확인한 후 월남을 결정했다. 1950년 2월경 서상우가 먼저 출발했고, 이어 황춘홍과 김영근이 내려왔다. 이로써 성직지망수사는 전원 남한으로 내려왔다. 김영근이 서울에 도착하고 2개월이 지나서, 먼저 서울에 와 있던 수사들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다. 이들이 한국인 덕원 수사 중 외국에 유학한 첫 세대다. 노규채는 프리부르대학에서 신학 과정을 마치고 1951년 8월 12일 독일 상트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사제품을 받고 1952년 귀국했다. 사실, 이때 유학을 떠난 사람 가운데 노규채 신부만이 왜관수도원에서 생을 마쳤다.

 

 

덕원의 마지막 차부제, 왜관의 첫 사제가 되다

 

1.4후퇴 뒤 덕원의 수사 대부분은 부산 중앙성당에 모일 수 있었다. 수도 형제들은 사제관 방 하나에서 온갖 고생을 견뎌냈고, 이어 대구교구 교구청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드디어 1952년 1월 26일 피난 공동체의 새 책임자로 임명받은 이 티모테오 신부가 막 사제품을 받은 노규채 신부와 함께 대구에 도착하여 피난 공동체의 왜관 정착에 나섰다.

 

계속 남아서 성신대학에서 수학하던 황춘홍과 서상우는 전쟁이 발발하자 서로 다른 길로 가게 되었다. 성신대학은 밀양, 제주도, 부산으로 피난했다. 황춘흥은 성신대학의 피난길에 동행하다가 속성 군사교육을 받고 육군병원 군종병으로 복무했다. 서상우는 혼자 피난길에 올랐다. 자전거로 호남을 거쳐 부산에 도착하여 중앙성당에서 형제들과 만났다. 그는 미군부대에서 일하며 살다가 피난 중인 성산대학에 들어가 1953년 봄에 졸업했다. 이후 1년 반 동안 군목으로 근무하다가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한편, 김영근은 수도 형제들의 뒷바라지 때문에 유학도 못가고 성신대학을 따라다니며 공부하지도 못했다. 피난 공동체의 책임자로서 형제들을 힘닿는 데까지 보살폈다 그러다가 이 티모테오 신부가 장상으로 온 이후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다. 그는 삼십대 중반으로 병역을 면했지만 공부가 문제였다. 여러 이유로 유학을 가지 못하다가 결국 성신대학 부산 임시 교정에서 몇몇 강좌를 들으며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1953년 7월 19일 피난 공동체가 왜관에 정착한 후 첫 사제서품식이 수도원 성당으로도 사용했던 왜관성당에서 열렸다. 이날 덕원 수도원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에게서 차부제품을 받았던 김영근 수사가 왜관에서 서품된 첫 번째 사제가 되었다. 김영근은 대구교구 최덕홍 주교의 집전으로 함흥교구 김성도 모세와 이경우 가브리엘과 함께 사제로 서품되었다. 수도원 폐쇄, 추방, 피난 등 뼈저린 고초를 딛고 사제가 된 이들을 월남한 신자들이 깊이 축하했다. 이 티모테오 원장신부는 이들 새 사제들을 ‘폐허가 된 덕원과 함흥교구에 피어오른 꽃’이라고 격려하였고 많은 사람은 고통의 땅에서 새로운 희망이 움트는 것을 보았다.

 

김영근 신부는 사제가 된 후에도 무엇을 더 배울 기회도 없이 매번 최악의 상황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김 신부는 성음악, 미술 등 다양한 재능을 바탕으로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고,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강론가로 유명했다. 가실성당에서는 성음악을 통한 전례쇄신운동을 펼쳤고, 농업용수개발과 가정주택 개선으로 농촌 발전에 앞장섰다. 왜관본당 주임 때에는 구미, 선산, 군위, 칠곡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켰고, 여러 공소에 강당을 신축했다. 또 대구교구에서 처음으로 왜관본당에 레지오 마리애를 설립했고, 왜관읍 삼청동에 한센인 정착촌 기초를 놓았다.

 

덕원의 마지막 차부제이며 왜관의 첫 사제인 김영근 신부는 덕원과 왜관을 잇는 들보가 되었다. 1949년 5월 14일 덕윈 수도원에서 추방될 때 신 보니파시오 주교아빠스의 성작과 수도원 인장, 아빠스의 편지봉투 열람용 칼을 챙겨나왔다. 성작을 덕원에서 평양, 서울, 부산, 대구를 거쳐 왜관까지 옮겼다. 우리는 이 유물을 왜관 수도원 ‘100주년역사기념전시관’에서 만날 수 있다. 또한 파리외방전교회 출신으로 왜관본당 주임이었던 6·25전쟁 순교자 리샤르 신부의 여동생을 맞이한 이도 그였다. 당시 그는 리샤르 신부가 머물던 바로 그 방에서 생활하며 왜관본당의 역사를 몸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더 나아가 그는 같은 사제관에서 새 세대 선교사인 진 토마스 보좌신부와 함께 생활하면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가르쳤다. 김영근 신부가 1960년대 말 서울 장충동 신학원 원장으로 있을 때, 현재 독일 선교사의 막내인 현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그곳에 머물며 한국어를 배웠다. 김영근 신부는 평소에 “자기 방을 잘 꾸미고 정돈하여 다른 곳으로 나돌고 싶지 않도록 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말년에 그는 하느님 찬양을 사진으로 드러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가톨릭 사진 공모전에서 ‘주님께 일생을 바치옵니다’로 특상을 받았다. 3년 뒤에는 개인전도 열었다.

 

 

9개의 씨앗, 셀 수 없는 열매

 

유학 갔던 덕원의 성직지망수사들도 학업을 마치고 하나씩 돌아왔다. 황춘홍은 1955년 로마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1955년 독일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서상우는 1955년 컨셉션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하고 1956년 사제품을 받았다. 한편, 노규채와 함께 떠났던 최창성 바오로는 로마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56년 귀국했다. 그는 한국인 수사들 가운데 가장 먼저 외국 학위를 받은 사람이었다.

 

덕원에서 추방당한 성직지망수사 9명 중 김영근, 노규채, 황춘홍, 서상우 네 사람이 수도 공동체의 왜관 정착을 위하여 생애 끝까지 헌신했다.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도원 성당이었던 왜관본당 주임을 하면서 같은 일들을 이어가기도 했다. 노규채 신부나 황춘홍 신부는 수도원 본원장을 맡기도 하고, 서상우 신부는 순심 중고등학교 교장과 마오로 기숙사 사감을 맡기도 했다. 이들 중 노규채 신부와 서상우 신부는 부산 오륜대 수도원 건립에 나섰다. 그들은 왜관 수도원으로서는 처음 개척하는 분야에 나선 용사들이었다.

 

월남한 성직지망수사들은 한정된 생애를 참으로 길게 살은 사람들이었다. “난세가 영웅을 낳는다”고 하는데, 그들이 그렇게 비참한 고난을 겪지 않았다면 그 자신도 엄두조차 내지 못할 ‘생의 활기’를 뿜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남한에 정착한 원산본당 출신 한 소년이 1954년 순심고등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 청년이 왜관 수도원 첫 지원자로 입회하였는데, 바로 이석진 신부다. 그는 1962년 왜관 수도원 첫 종신서원자가 되었다. 그는 이제 노년의 사제다. 이렇게 한정된 생애를 ‘길게’ 사는 삶이 그들을 통해 이어져 나갔다.

 

 

 

* 김정숙 소화 데레사 - 프랑스 파리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인류학으로 박사학위 취득하였다. 영남대 국사학과 명예교수로 현재 대구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 대구가톨릭학술원 회원, 대구대교구와 수원교구 시복시성위원, 안동교회사연구소 객원연구원, 「교회와역사」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계간지 분도, 2022년 가을(Vol. 59), 김정숙 소화 데레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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