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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분노(성냄)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프락티코스와 판토하의 칠극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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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5-12-16 ㅣ No.2223

[특별 기고] ‘분노(성냄)’에 대한 에바그리우스의 『프락티코스』와 판토하의 『칠극』의 가르침

 

 

악덕과 죄, 악마와의 싸움

 

4세기 이집트 북부 사막 지역에서 수행을 했던 그리스도인 수도승,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Evagrius Ponticus, 345년경~399)는 악덕(惡德)에 관한 이론적 틀을 제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1) 그에게 악덕은 악령이 ‘악한 생각’을 매개로 하여 수행하는 사람을 유혹하고 공격하는 것에 그 수행자가 순응하여 빚어진 마음과 행동이었다. 생각을 통하여 수행하는 사람을 유혹하는 악령, 혹은 악마와의 영적 전투는 수도승의 삶에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수도승은 이런 분투를 거쳐서 악한 생각과 악령을 물리침으로써 참된 덕에 이르게 된다.

 

에바그리우스는 우리가 거슬러 싸워야 하는 모든 악한 생각들의 모태가 되는 생각을 여덟 가지, 즉 ‘탐식 · 음욕 · 탐욕 · 슬픔 · 분노 · 아케디아(무기력) · 헛된 영광 · 교만으로 제시하였다. 한편 16~17세기에 살았던 예수회 선교사, 디에고 데 판토하(Diego de Pantoja, 龐迪我, 1571~1618)는 4세기의 에바그리우스와 유사하게 “여러 종류의 죄와 허물, 의롭지 아니한 염려와 언행”의 열매를 맺게 하는 “으뜸가는 죄”2)를 일곱 가지, 즉 ‘교만 · 질투 · 탐욕 · 분노 · 탐식 · 음욕 · 아케디아’로 제시하였다. 특별히 이 글에서는 두 저자가 비중 있게 다루었던 ‘분노’에 대한 가르침을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분노, 성냄의 본질

 

에바그리우스와 판토하는 모두 분노, 성냄의 본질을 나와 우리에게 부당한 행위를 가했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에게서 열을 받아 증오하고 복수하려는 마음의 작용으로 본다. 판토하는 매우 간결하게 분노의 개념을 정의한다. “분노란 무엇인가? 원수를 갚으려는 바람이다.”3) 에바그리우스는 분노함이라는 작용의 내면을 응시하며 그것을 규정한다. “분노는 가장 격한 욕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의를 행했거나 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 대한 흥분과 영혼의 동요다.”4) 분노에 동반되는 것들은 “나쁜 말과 욕설, 다툼과 싸움, 살상과 지나친 형벌 같은 여러 가지 일”5)이다. 수도승, 나아가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분노는 치명적 여파를 드리운다. “분노는 영혼을 온종일 성나게 하지만, 무엇보다 기도 중에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신을 빼앗는다. 이따금 오래 지속되고 격노로 바뀌면서 밤에 동요와 체력 소모, 창백함과 위험한 야수들의 습격[악마들의 공격]을 야기한다.”6)

 

 

의로운 분노

 

한편, 분노는 마땅히 없어야만 하는 것일까? 의로운 분노란 성립되지 않는 것일까? 우리의 두 저자는 모두 그렇지 않다고 가르친다. 에바그리우스에 의하면 인간 영혼은 세 부분, 즉 이성부(Reasonable part), 정념부(Irascible part), 욕망부(Concupiscible part)로 구성되어 있는데, 영성생활이란 우리가 영혼의 각 부분에 부합하는 적절한 덕을 쌓아 더욱더 성장하여 나아가도록 영적 투쟁을 하고 정화하는 과정이다.7) 특히 정념부는 분노와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으로, 정념부와 성을 내는 분노의 본질은 사람들과 다투는 것이 아니라 악령 혹은 악마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분노가 악령과 세속적인 욕망으로 점령되어 다른 사람들을 향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천사들의 인도에 순응하여 악마들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분노 가운데 있을 때 악령은 우리가 사람들과 다투도록 부추기는데, 이것은 “혼미해진 인식과 쇠퇴한 정신이 덕의 반역자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8)

 

판토하는 ‘합당한 분노’에 관해 다음과 같은 요한 크리소스토무스(Ioannes Chrysostomus, 349년경~407년) 성인의 말을 인용한다. “마땅히 성내서는 안 될 때 성을 냈다면 스스로 죄를 범한 것이다. 마땅히 성내야 할 때 성내지 않았다면 남을 죄에서 구하려 하지 않은 것이니, 그 죄가 같다.” 즉, 잘못에 대해 성을 내는 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한편 불의한 일을 보고 겪으면서도 마음에 분노가 없고 그저 내버려 둔다면 그런 경우는 인내와 온유함이 아니라 무심하고 마음이 단단하지 않은 것이다. “이치로 따진 뒤에 분노가 따라온다면 의로움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9)

 

 

분노, 성냄, 미워함을 이기는 온유, 인내, 사랑

 

분노, 성냄, 미워함의 유혹이 있을 때 이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제시되는 덕은 온유와 인내이다. “분노와 미움은 증오심을 키운다. 동정과 온유는 있는 증오심조차 감소시킨다.”10) 판토하가 말하는 인내는 온유함과 통하는 평온함이 그 토대가 된다. 즉, 인내란 “평온한 마음으로 해로움을 받아들이고, 내게 해를 준 사람을 꺼리지 않는 것이다.”11) 선을 지향하는 사람에게 온유와 인내는 전쟁에 임하는 병사의 갑옷과 투구와도 같다. 온유와 인내의 장비를 갖추고 있을 때라야 “세상의 변고를 감당하고, 마귀를 이기며, 여러 삿됨을 공격하고, 여러 가지 덕을 지킨다. 분노를 막고, 혀를 묶으며, 마음을 다스려 편안함을 기른다.” 또한 “두려움을 누르고, 근심을 없애며, 다툼을 끊어낸다.” 성냄과 미움을 끊어내는 온유와 인내의 덕은 용서의 덕으로까지 확장된다. 온유와 인내는 “남이 내게 죄를 얻으면 내가 즉시 이를 용서해주게 하고, 내가 남에게 죄를 얻으면 또 나로 하여금 영원히 용서를 구하게 만든다.”12)

 

온유와 인내의 덕으로 가능하면 빨리 분노와 성냄, 미움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악령 혹은 악마의 계략에 넘어가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화를 가라앉히지 못할 때 악마들은 우리의 마음을 위협하여 우리의 영혼이 치르는 악마와의 영적 전투에서 영혼을 동요시켜 어지럽고 혼란스럽게 만든다.13) 나를 괴롭히고 슬프게 한 사람과 계속하여 마음으로 다투면서 분노하게 됨은 악한 영의 유혹임을 알아차려 그런 생각에 스스로를 굴복시키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유혹에 거슬러 온유와 인내를 발휘하며 행동해야 한다. 삿된 말과 행동으로 나의 화를 돋우는 사람은 먼저 악을 행하여 나로 하여금 그런 악을 따라 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하니 악인의 해로움을 받게 되더라도 인내하고 온유하게 용서할 것이다. 둘 다 악을 행하지 않고, 둘 다 해로움을 받지 않도록 함이 더 낫기 때문이다.14) 에바그리우스가 말하는, 우리는 “[악령]들에게 순종하지 말고 오히려 그 반대로 행해야 한다.”15)는 이치는 실로 잘 새겨봄 직하다. 타인에게서 오는 분노를 온유와 인내로써 다스리려고 마음먹다가도 사람들이 임계점에 이르게 되는 때는 자신이 모욕을 당하였다고 느낄 때이다. 이런 순간에도 성냄을 획책하는 악령을 알아차려 그 반대로 행하여 온유와 인내의 덕을 적용함이 필요하다. 판토하는 말한다. “나를 모욕하고 업신여기는 자를 누르려면 그 업신여김을 참음만한 것이 없다.”16) 상대방의 나에 대한 분노를 성냄으로 대응하면 상대방은 자기가 이겼다고 여긴다. 반대로 “인내의 빛으로 분노를 비추면 상대방은 자기의 분노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스스로 보게 된다.”17)

 

판토하는 외부에서 오는 도전적 상황에서 하늘을 향해 분노하고 싶은 상황에서도 인내를 실천하는 경지를 성경을 통해 가르친다. “네가 죄로써 형벌을 받거나 악으로 해로움을 입는다면 무슨 공이 있겠느냐? 만약 실제로 선을 행해서 기꺼이 해로움을 참는다면, 이것이 바로 천주의 큰 은혜요 너의 큰 공이다.”18)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을 사는 것은 인내와 온유함의 당위를 배우고 익혀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너희가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능히 참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행한 선이 도움이 안 된다. 무릇 노여움을 품었을 때는 그간 행한 착한 일이 비록 크고 받들어 천주를 섬기는 데 이바지한 것이 두텁다 하더라도 천주께서는 반드시 그를 미워하여 버릴 것이다. …… 너희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면 천주께서도 너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다. 너희가 남에게 모진 일을 행하면 천주께서도 너희에게 모진 일을 베푸실 것이다.”19)

 

우리가 행하는 이웃에 대한 인내와 온유는 사랑이라는 더욱더 적극적인 가치로 나아간다. “나를 원수로 여기는 이를 사랑하는 어짊과 나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어짊 중에 어떤 어짊이 더 성대하겠는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더 성대할 것이다. 큰불이 타오르면 던지는 물건마다 문득 변해 불이 된다. 큰 어짊은 만나는 일마다 문득 그 어짊을 더하게 만든다.”20)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떠올리고 내게 적용할 일이다. “너를 사랑하는 이를 사랑하는 것은 가장 쉬우니, 악한 사람도 이것을 잘한다. 네가 그저 이것만 잘한다면 하늘에서 어떤 보답을 받겠는가? 네가 저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너를 미워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어야 천주의 아들[자녀]이라 할 것이다.”21) 나와 불화하는 사람에게 나도 분노의 얼음장을 띄우는 대신 그를 인내와 온유함으로 대하고, 나아가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는 실천은 나와 너를 변화시키는 모멘트가 된다. 사랑으로 원수를 갚으면 원수가 변하여 벗이 됨이 하느님께 속하는 이치이다.

 

 

분노, 성냄에 대처하기 위한 보다 더 구체적인 가르침들

 

에바그리우스와 판토하는 우리가 타인을 향한 분노에 직면할 때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에 대한 보다 더 구체적인 가르침들도 제시한다. 에바그리우스는 분노하는 자신을 먼저 살펴서 자신의 성냄이 다른 사람을 자극하여 그것이 나에게 부메랑처럼 되돌아오지 않도록 할 필요를 언급한다. “그대 자신을 살펴라. 이는 그대가 형제들 중 누군가를 화나게 하여 떠나가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며, 그대가 기도할 때 늘 걸림돌이 되는 슬픔의 악령으로 인해 삶에서 도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22) 악령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던 에바그리우스는 위와 같은 경우, 성냄의 악령에 굴복할 때 슬픔의 악령에 의해 점령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 판토하의 권고도 분노가 일어날 때에는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보아야 함을 말한다. 분노의 불은 잠깐 동안 타오르는 것이기에 “성났을 때 행한 일은 분노가 풀리면 틀림없이 후회한다. 그래서 성났을 때는 마땅히 스스로를 금하여 잠깐 동안 생각하지도 말고, 말도 하지 말며, 또 성나게 만든 일을 행하지도 말고, 성나게 만든 사람을 나무라지도 말아야 한다. …… 분노했을 때는 다만 자기를 다스리기에 힘쓰고, 남을 다스리는 데 힘써서는 안 된다.”23)

 

원수로 여기는 사람에게 복수를 하려 할 때 사실 두 원수가 있음을 인식함도 도움이 된다. 원수로 여기는 사람뿐만 아니라 영의 세계에 존재하면서 사람 내면에서 사람을 부추기며 공격하는 원수인 악령 즉 악마(마귀)가 있다. 판토하는 복수를 하는 우리의 마음과 행위의 이면에서 활동하는 마귀의 작용 기제를 이렇게 보여준다. “네가 남에게 원수를 갚으려 한다면 마귀로 하여금 네게 복수하게 하는 것이다. 네가 남을 이기려 들면 마침내 마귀로 하여금 자기를 이기게 하는 것이다. 네가 남의 편안함을 빼앗았다고 즐거워할 때 마귀는 능히 너의 덕을 빼앗았다고 즐거워할 것이다. 오직 네가 원수를 사랑할 때만 두 원수를 모두 이길 것이다.”24)

 

결국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 것이 분노와 성냄을 다스리는 실제적 대전제가 됨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칠극』의 가르침은 이렇다. “네 원수가 굶주리면 그를 먹이고, 목마르면 마실 것을 주어라. 악을 이기려 들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겨라. 만약 곧음을 가지고 해를 갚으면 자기가 죄를 범함을 면하게 된다. 은혜로 해를 갚으면 또 남을 죄에서 건져주는 것이다. 곧음으로 원수를 갚으면 남의 원수가 됨을 면하고, 사랑으로 원수를 갚으면 또 원수가 변하여 벗이 되니, 어느 것이 더 좋겠는가?”25)

 

 

고통과 욕됨을 분노 대신 인내로 참아내는 공덕(功德)

 

분노를 다스리는 인내의 힘을 설파하던 판토하는 이 세상의 온갖 고통과 욕됨을 참아내는 사람의 가치와 공덕으로 주제를 확장한다. 홀로 참는 사람은 그 어떤 사람도 이길 수가 없다고 운을 떼면서 그는 “참는 사람에게 세상의 어려움을 입힐 수는 있어도,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일 수는 없다. 그 신체를 멸할 수는 있어도, 그 어짊과 의로움을 없앨 수는 없다. 그 몸을 아프게 할 수는 있지만, 그 마음을 노하게 할 수는 없다. 세상의 복을 빼앗을 수 있더라도, 마음의 즐거움마저 빼앗지는 못한다.”26)라고 말한다. 판토하에게 고통과 욕됨이 참된 공덕의 경우가 되는 때는 그저 고통과 욕됨을 겪음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을 참아내는 때이다.27)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모든 괴로움은 오직 내가 참아내면 이익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며, 내가 그것을 참지 못하면 손해가 되며 하느님의 분노를 불러들인다.28) 이 세상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욕됨을 천한 것으로, 저주와도 같이 피하고 싶은 것으로 여기지만, 선한 사람은 그러한 것을 참아낸 값이 천상에서 가장 비싼 줄을 안다.29)

 

분노, 성냄을 다스림은 오늘날과 같이 인간살이, 세상살이가 각박하고 온갖 이기주의와 스트레스가 증가하는 환경과 구조에서 무엇보다 더 요청되는 덕이 아닌가 한다.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개인의 삶과 사회적 환경 속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여러 종류의 화에 직면하여 자신을 먼저 살피면서 인내와 온유, 사랑의 덕을 발휘하는 성숙한 인간상이 절실하다. 개인적 분노가 미성숙하게 표출되어 사회적 이슈가 되고 공적으로 야기되는 폐해가 매우 커지기도 하는 이 시대에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이 제시하는 덕행의 삶을 그리스도인들이 진심으로 살아감으로써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발하는 일도 절실하다. 이런 길을 걸어가도록 에바그리우스와 판토하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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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에서 다루는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와 디에고 데 판토하, 그리고 그들의 작품 『프락티코스』와 『칠극』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조하라. 전경미 저, 「판토하의 칠극을 통해 보는, 18세기 조선과 4~5세기 이집트 사막에서의 그리스도교 수도(修道)적 삶의 연결성」, 『교회와 역사』, 2025년 9월호(604호), 한국교회사연구소, 4~9쪽.

 

2)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칠극 자서’, 김영사, 2021, 13·19쪽

3)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1, 281쪽.

4)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 11, 분도출판사, 2015, 67쪽.

5)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위와 같음.

6)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 11, 67쪽.

7)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 ‘해제’, 34~36쪽.

8)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 24, 74~75쪽.

9)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24, 297쪽.

10)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 20, 73쪽.

11)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42, 312쪽.

12)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43, 313쪽.

13)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 21, 73쪽.

14)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 22, 74쪽;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55, 324쪽.

15)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위의 책.

16)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59, 327쪽.

17)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60, 328쪽.

 

18)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64, 333쪽; 베드로의 첫째 편지 2장 20절(공동번역 성서)을 참조하라. “죄를 짓고 매를 맞으면서 참으면 영예스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선을 행하다가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으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습니다.”

 

19)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25, 298~299쪽.

20)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29, 303쪽.

 

21)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30, 304쪽; 루카 복음서 6장 32~35절(공동번역 성서)을 참조하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잘해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22)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 허성석 역주, 『프락티코스』 25, 75쪽.

23)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19, 292~293쪽.

24)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31, 305쪽.

25)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38, 310쪽.

26)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47, 316쪽.

27)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57, 325쪽.

28)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94, 370쪽.

29) 판토하 지음, 정민 옮김, 『칠극』 4.82, 359쪽

 

[교회와 역사, 2025년 11월호, 전경미 체칠리아(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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